1.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내가 프란체스카였다면? 프란체스카가 떠남으로 해서 남겨진 이들에게 아픔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떠나면 안된다. 책임을 져야한다 라는 의견에 대해 프란체스카 자신이 아픔을 그냥 감내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행복할 줄 알면서도 안떠나는 것은 바보같은 행동이라는 반론이 나왔고 이에 대해서는 로버트를 따라가면 꼭 행복할 수 있는가? 라는 재반론이 제기되었다.
가족들의 행동이 잘못된 점이 많았지만, 어찌됐든 프란체스카는 한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끝내 지켜내었다고 본다. 프란체스카가 떠났다면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불행했을 것이다. 물론 가족들에게 큰 행복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남편을 사랑했고 자식들 역시 아끼며 사랑하며 일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프란체스카가 자신의 삶에 후회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의 사이는 로맨스인가 불륜인가? 위 발제에서 책임을 져야한다라는 의견을 낸 학우들은 불륜으로, 떠나야 한다는 의견의 학우들은 로맨스로 많이 보는 시각이었다. 결국엔 프란체스카가 함께 떠나지 않고 차에서 결국 내리지 않음으로써 프란체스카가 둘 사이를 불륜으로 보고있다 라는 의견이 나왔다.
2. 가족의 탄생
봉태규와 정유미의 관계? 봉태규와 정유미는 서로 다른 애정관을 가지고 있다. 봉태규는 여자 친구가 자신에게 집중해 주었으면 하고, 정유미는 다른사람에게 그냥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일뿐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학우들이 봉태규의 입장을 지지하였는데, 둘은 애인이기 때문에 봉태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둘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정유미가 공효진과의 약속시간에 연락도 없이 안 오고 당연하게 생각한 장면에 대한 토론에선 정유미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연락이라도 한 통 해야 했었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증언 같은 의견들도 많이 나왔는데, 이러한 경우처럼 여자든 남자든 자신의 애인과의 관계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고 관심을 쏟을 때에는 상대방이 너무 힘들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전체적으로 정유미는 어렸을 적 사람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있어 정을 나누고 사람을 붙잡는 성격이라는 의견과 봉태규는 해픈여자, 즉 엄마의 이미지에 반감이 많아 자신에게 집중해 주었으면 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발제에 대해서는 정유미가 조금만 더 봉태규에게 신경을 써줬다면 둘의 관계가 훨씬 좋아졌을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공효진과 아저씨 사이?
아저씨가 공효진의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한 장면에 대한 토론이었다. 아저씨가 사랑한다고 말함으로 해서 자신의 가족, 그러니까 영화의 제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족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보편적인 가족을 벗어나 자신의 사랑이 중요하다고 외친 것이다. 이는 결국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따라 떠난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되는 듯하다. 영화의 제목에서의 가족은 결국에 사랑과 정으로 이어진 가족을 의미한다. 결혼제도나 혈연을 떠나 사람과 사람이 사랑과 정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가족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그렇게 말함으로 해서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배신을 한 것이며, 일방적으로 그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고 있다.
결국엔 아저씨가 사랑한다고 말함으로 해서 엄마와 아저씨의 관계를 단지 불륜으로 보고있던 공효진은 충격을 받게되며, 이것이 공효진이 엄마를 용서하고 봉태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엄마의 가방과 함께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3. 밀양
남편, 아들, 하느님, 송강호
이 4명은 전도연이 의존하는 인물들로 '밀양'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남편의 외도를 부정하고 남편의 교향으로 돌아오며, 아들은 남편의 코골이를 따라함으로 해서 남편의 대리임을 드러내었고, 아들의 죽음이후에 신에게 의존해서 그 고통을 이겨내려 했으며, 결국 송강호가 마지막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신애의 태도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었는데, 교수님께서는 인간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커다란 흐름을 제시하셨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학우들이 있었는데, 신애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신의 가르침을 받아 용서하러 갔음에도 신이 먼저 용서해줬다는 이야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종교에 대해 불신을 품었다는 점에서 이는 제대로 종교에 귀의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 실수나 상황으로 인한 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의 용서가 있으면 인간은 용서할 수 필요가 없다, 신의 가르침을 받고 갔는데 신의 가르침에 반항했다는 기독교적 시각을 가지고 토론에 응하는 학우들이 있엇는데, 이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문제가 아니고 제 3자의 용서, 주체성은 어디있는가? 라는 주제에 대한 토론에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전도연은 살인자와의 대화로 종속적인 면에서 탈피하고 신으로부터 주체성을 확립하였다. 목사님 집에 돌을 던지고 '거짓말이야~' 하는 노래를 틀음으로서 주권, 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투쟁을 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결국 인간의 주체성 확립과 그 한계(지렁이)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4. 용서받지 못한자.
군대내 부조리에 대해 왜 그러한 것들이 부조리인지, 하지만 이러한 부조리들이 어떠한 필요성을 갖고 있는가?
이는 꼭 군대 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사회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 이러한 것들이 정당한 것인가하는 것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이러한 부조리들은조직내 계급의 문제일 것이다.
존댓말에 관해서, 이러한 존댓말이 경험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이에 대해 나이에 따라 경험이 쌓이지는 않음으로 서로 존댓말을 해야 정당하다 라는 의견들이 있었는데, 존댓말에 깔린 계급의식과 이로 인한 무의식 중의 불합리, 즉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무의식중에 명령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으며 누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인가에 대한 발제에 대해서는 승영이 지훈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가에 대한 토론으로 발전하였는데, 지훈의 죽음은 자신의 여자친구와의 이별에 기인한 것이지, 승영의 태도변화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한 사람도 없고 용서받을 사람도 없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5.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은 나의 생각은 나라는 권력과 힘을, 노인은 약자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쉬거가 가지고 있는 힘, 즉 살인에 대해 다른 사람들, 노인, 여자, 히스페닉 등등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말씀에서는 노인, 즉 과거와 현재와의 변화,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노인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수님의 입장에선 수긍하기 힘들다고 하셨다.
모스와 쉬거의 입장은 둘다 비도덕적인 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고, 둘의 차이점은 모스는 도덕성을 상실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시민적인 태도를 보였고, 쉬거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과 아이에게 옷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모습에서 힘이 있고 자주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의견이었다/.
모스의 아내와 동전은 권력에 관한 내용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남의 권리를 침해할 수 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유소 주인과 비교를 해보았는데, 주유소 주인은 노인으로 힘이 없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한채 수동적으로 쉬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모스의 아내는 비록 죽기는 했지만 능동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게 나의 의견이었다.
전체적으로 쉬거가 자신의 힘으로 남의 권리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라는 의미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