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는 왜 그리도 달맞이꽃을 좋아했을까?
'사운드오브뮤직'이 1965년 제작되어 세계를 돌아 4년 지나 1969년 한국 개봉되기 전까지만 해도,
에벨바이스는 '아무도 모르라고' 신세였다.
사실 에델바이스는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그리 예쁜 꽃이라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우리가 설악에서 호명한 꽃은 무엇이었을까?
한여름방 설악의 계곡을 황홀케 한 것은 '달맞이꽃'이었다(으로 보인다.)
달맞이꽃이라.....
물론 펀드멘탈이 아름다운 꽃이긴 허나,
언제 어떤 계기로 우리를 그렇게 로맨틱하게 설레이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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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에 대한 감성적 경도는 일제때까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바로 리샹란의 '야래향'을 언급해본다.
리샹란(李香蘭)은 지금 우리에게 잊혀진 인물이지만, 일제 때는 우리를 뒤흔들었다.
우리는 최승희, 최승희 하지만,
현대무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극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런가.
삼천만 조선 대중에게는 대중가요 그리고 대중영화의 화신인 리샹란이 자리잡고 있었다.
1973년 동아일보 기사에 보듯, 그녀는 만주조선 일본에 소위 '리꼬량'시대를 열었고,
은막계의 여왕이며 공전의 히트를 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식민지 조선에도 몇번 공연을 와서 선풍을 끌었다.
이향란에 대해서는 -> 여기, 여기 <- 야래향의 노래 ->리상랸, 등려군<-
1944년 일본이 끝을 향하던 무렵 그녀가 상해에서 발표한 유명한 노래가 바로 '야래향'이었다.
달맞이꽃의 한자명이 바로 야래향이고,
이 노래는 아마도 조선인들에게 식민지 시절의 잔향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남풍이 부니 시원한데, 저 소쩍새 울음소리 처량코나.
달빛아래 꽃들도 이미 꿈속에 들었는데
저 야래향만이 남아 꽃향기를 뿜고있네.
이 아득한 밤의 세계도 좋고,
소쩍새들의 노래소리도 좋지만, 저 꽃같은 꿈속에서
야래향을 껴안고 또 야래향을 키스하고 있는게 더 좋다.
가사는 이렇게 로맨틱하니, 어찌 '야래향'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야래향은 특히나 일제 때 조선에 유입된 외래종으로 이름도 이국적이다.
광막한 만주벌판을 말달리던 김일성도 이노래를 좋아했다니, 과연 그도 그시절 청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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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1953년 4월, 전쟁 중에 만들어진 뮤지컬 드라마로도 등장했다.
청춘을 흐느껴 울어볼까
야래향 꽃냄새에 몸부림치는 젊은 비련이여.
야래향이라는 달콤한 이름만 들어도 그만 몸부림쳤을 것이다.
1956년 9월 5일 동아일보 기사이다.
여기를 보면 서울근교, 강원도 정선, 속리산 깊은 계곡까지 달맞이꽃이 피어났다니...
비록 일제 때 이샹란의 야래향을 알았던 이들은 알아서,
몰랐던 이들은 몰라도 '달맞이꽃'이라는 역시 아름다운 이름으로 곱게 여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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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건 일본어교재 때문이다.
이번에는 소설을 읽으며 독학을 해볼까 싶어 '리스타트 일본어 '달려라 메로스'를 선택했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어떤 인물인지 검색했더니,
그 중에 '후지산 백경' 이라는 소설이 등산과 관련있을 것 같아 눈여겨 보았다.
그 중에
"후지산에는 달맞이꽃이 잘 어울린다(富士にほ月見草がよく似合う)."
후지산에는 달맞이꽃이 잘 어울린다는 구절이 유명하다.
이 작품 속에서 찻집 뒷문에 달맞이꽃 씨를 뿌리며, 특히 달맞이꽃을 고른 이유를 이 유명한 구절에서 찾고 있다.
라는 문구가 있음을 발견했다.
어랏...
달맞이꽃도 분명히 일본에서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나,
후지산에 심어졌고, 다자이 오사무에 의해 후지산과 대비되는 꽃으로까지 이미지매김되었으니....
분명 일제하 일본인들에게는 달맞이꽃이 의미가 남다른 꽃이었으리라...
그리고 우리나 산과 들판 계곡의 달맞이 꽃에서도 일본과의 이런 연결고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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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때 밤늦도록 친구들이랑 놀다 3,4Km를 혼자 걸어 돌아오곤 했다.
감수성을 벼리는 시간이었고,색깔이나 향기에서 요기(妖氣)까지도 느꼈다.
요즘 오토캠핑을 가는 이들도 밤에는 불빛이 미치는 곳에서 놀지,
어둠속으로 나아기지 않는다니 달맞이꽃이 뿌려대는 밤의 서정을 온전히 느끼긴 어렵겠다.
달맞이꽃의 추억을 모든 세대가 함께 할 수 있도록 다시 우리 문화로 되살려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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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향란은 말년에
이효석의 '메밀꽃필무렵'에서는 달밤에 소금을 뿌린 듯 숨막히게 눈부시다고 했지만,
그건 소설에서만 그리고 그에게만 가능한 문학적 수사에 가깝다.
커피를 갈아마시는 등 서구적 취향의 이효석이나 다른 문인들이
3,40년대 달맞이꽃에 대한 글이 있는지도 앞으로 관심갖고 찾아보아야겠다.
첫댓글 검색하다 일본문학을 원문으로 제공하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그 중에 고두인병위(高頭 仁兵衛 타카토 진베)라고 일본산악회를 만든 이의
그 유명한 글, 平ヶ岳登攀記(히라가타케 토한키)의 원문을 발견했다.
http://www.aozora.gr.jp/cards/001371/card49578.html
이참에 이 글을 번역해서 올려볼까 한다..
네이버 구글 번역기에 돌려 초역을 해서 다듬으면 원문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산서에 관해 내몫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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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일본어 오십음도를 잘 몰라 더많은 등산가들의 글을 발견하지 못해 아쉽고 다음을 기약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