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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이 잠시 구름 뒤에 숨어 시원한 바람을 느끼기에 알맞은 9월 19일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제98차 정기답사가 단종의 애환이 서린 영월지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올해 2월 4일 개봉해 방화사상 두번째 관객 기록이라는 16,928,963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장항준 감독 의 왕과사는 남자에서 엄홍도역을 연기한 유해진 배우와 단종을 모시는 궁녀 매화역을 연기한 전미도 배우가 전해준 단종과 엄홍도 매화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영월찾게하는 마법의 피리였죠.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만 16살에 생을 마감한 조선의 제6대왕 단종(본명 이홍위)에 대한 아련함이 답사 참여에 영향을 주었겠지요? 역문연 회원들과 많은 시민분들이 답사 참여를 희망하셨습니다.
40명 모집에 43명이 신청을 하였고, 사정상 참여를 포기하신분들을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38분의 회원과 시민들께서 답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의병문화제를 참여하고 뒤정리를 하느라 미루었던 답사기를 쓰려니 사진정리가 보통일이 아닙니다.
어느덧 춘천역사문화연구회 공식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남은 님과 기존에 답사 사진을 책임졌던 이창연 이사님, 우은희 대표님과 몇분의 답사회원들이 올려준 사진을 정리하니 433장입니다.
사진을 정리하며 가장 많은 답사사진을 올려주신 우은희 대표님과 이창연 이사님, 김남은 답사회원님의 사진의 특성에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우은희 대표님은 참여자들의 인물에 촛점을 맞추어 답사의 표정을 담아냈고, 이창연 이사님은 답사 전체의 풍경과 답사지의 풍경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김남은님은 답사 대상지의 모든 유적과 안내판까지 세세하게 사진을 담아내어 혹시 답사에서 빠진 부분들을 충실하게 보완해 줍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인해 가장 많은 혜택을 본 것은 영화관이나 감독이 아니라 영월군일거라는 생각입니다.
올해 영월군의 관광객이 1천만명이라는 기사가 있더군요. 관광객들 대부분이 단종이 유배되어 살았던 청령포를 가려하니 단 두대의 배로 운행하는 청령포 도선은 늘 전쟁터라고 하더군요.
이런 연유로 인해 답사를 준비하며 가장 많은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은 답사순서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조금 일찍 청령포 도선을 이용하면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거라는 이야기가 있어 첫 답사지를 청령포로 잡았다가 영월군청 관광과에 전화를 해서 답사설명을 하고 도선을 협의하니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짧은 시간이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답사지를 영월가는 길에 위치하는 한반도면에 위치한 한반도 지형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 산 180-2번지에위치한 한반도 지형은 지금은 한반도로 로 바뀐 옛 88번지방도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457년 6월 22일 경복궁을 떠난 16살의 단종은 현재의 청계천에 있던 영도교에서 왕비 송씨(후일 정순왕후)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여주 이포나루에서 배를 내려 현재의 여주시 대신면과 원주시 문막면에 이르는 여러개의 고개로 이어지는 행치를 넘고, 흥원창에서 하루를 묵기도 하며 부론면~귀래면을 지나고 귀래면과 제천 백운면을 잇는 배재를 넘고 박달재를 넘어 원주시 신림면을 지나영월땅 입구에 위치한 솔치재를 넘어 10일이 되던날인 7월 초 영월에 도착하며 산마루턱을 오를때마다 한양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고개길을 지나가던 주변에 위치합니다.
※ 알아두면 좋은 정보 : 단종유배길(지도의 흰선)은 직선이 아니라 빙빙돌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여주에서 원주로 왔다가 다시 제천으로 내려간 후 다시 원주시 신림면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유배길이 돌아간 이유는 당시 관행로 (官行路) 때문이라고 합니다.
석회암지대의 특성에 우측의 주천강과 좌측의 평창강이 만나 서강이 되는 부근에 위치하며 제주의 오름과 비슷한 성격인 돌리네라는 암석 지형이 주변에 많이 산재하는 곳입니다.
답사자료에 밝힌 것처럼 설명이 필요없는 완벽한 한반도 지형입니다.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담는 것 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한반도 지형에서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려 예정된 시간인 11시 30분보다 20여분 늦게 청령포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도선을 하려는 이들은 줄을 서야 했습니다. 한번에 36명씩 타는 배에는 우리 답사팀이 한거번에 탈 수도 없어 잠시 기다려 두대의 배에 나누어 서강을 건너 청령포로 건너갔습니다.(참고로 청령포 앞의 서강은 약 3km를 더 흘러 영월읍 앞에서 동강과 만나 남한강이 됩니다)
청령포를 간너서 처음 마주한 유적은 단종어가로 표시되어 있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웅장한 기와집입니다. 여기서 역문연 답사팀은 역사가 잘못 기독되고 잘못 전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단종의 어가는 기와집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거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단종은 6월 21일에 유배교서를 받았고 다음날 영월로 떠났고 그해 10월 24알 사약이 내려졌으니 청령포에 기와집을 만들 시간이 있을 수 없는 것이죠.
두번째는 이곳을 시굴조사한 조사책임자의 문제제기라고 합니다. 시굴조사 책임자는 도내 국립대의 원로 교수였고 시굴조사 결과 주춧돌의 크기가 기와집을 짓기 어려운 크기였고 주춧돌 하부를 받치는 적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발표는 문헌사학자들의 반론에 따라 무시되었다고 합니다.
이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죠...
답사 자료에 잠깐 언급을 했던 내용인데 답사 때는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현재의 청령포 지명 유래를 알려주는 비석입니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地)라고 쓰여진 비석은 1689년 단종이 완전 복위되고 묘역의 정비 등 위상이 정립되던 이후인 1763년 영조가 내린 글씨입니다. 뒷면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는 내용과 지명이 청령포라고 기록되어 있어 청령포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자료입니다.
단종어가 앞에 나란히 앉은 네 분은 누구실까요? 좌측 첫 번째와 두 번째 앉으신 분들은 춘천역사문화연구회 답사 초기부터 자주 참여하시던 분들로 이은순 님과 박정순 님이신데 두분은 잘 생각이 안나네요.
왕권을 찬탈당하고 오갈수도 없는 청령포에 유배된 16살의 단종이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사이에 앉아 시름을 달래던 나무라고 하는 관음송입니다. 600년이 넘었다고 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입니다.
1시간 30분의 여유시간을 두었는데 배 타는 시간이 절약되다 보니 자유롭게 청령포를 둘러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망향탑까지 다녀오신 분들도 있고, 노산대까지 다녀오신분들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금표를 둘러보고 식당으로 가기 위해 청령포를 뒤로 하고 서강을 건넜습니다.
답사의 또 다른 재미는 그 지역의 맛집을 찾는 것이죠.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많은 분들이 함께하시기에 각자의 호불호까지 염두에 두어야 해서 식당을 잡는게 여간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가장 쉬운 선택은 한식백반이나 두부 전골집입니다. 한국사 람이라면 한식 백반이나 두부전골에 대한 호불호가 거의 없으니까요.
하물며 한식부페라니 크게 맛이 없지만 않다면 90%는 성공한 것이겠죠? 인구가 많지 않은 영월에서 40명이 들어 갈만한 식당을 찾으려니 쉽지 않았는데 미자네 한식부페가 눈에 들었습니다. 여러 후기들까지 꼼꼼히 검색을 하였습니다. 대부분 맘에 들어 하셨는데 특히 늦게까지 남아서 드신 분들은 더욱 그렇겠죠? 그래도 맘에 차지 않는 분들도 계셨을 겁니다. 다양한 식성을 가진 분들이 모인 것이라는 핑계로 양해를 구합니다.
이 식당이 선택된 데는 난감했던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예약한 식당은 중앙시장 옆에 있는 000 한식백반이었는데 답사일을 3일 앞두고 식당이 금요일까지만 영업을 하고 토요일부터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미자네 한식부페가...
역문연 답사 15년 만에 사무국장이 처음으로 식당에서 2만원의 팁을 받았습니다.
밥도 맛있게 먹었는데.팁까지...2만원의 팁으로 영월중앙시장의 전병 10개를 사서....
아! 해설해준다고 참여자분께서 배추전도 5장을 사주셨는데 처음 답사에 참여하신 석향님이셨지요?
늦은 점심이라 다들 시장하셨을텐데 청령포에서도 만났던 대구에서 왔다는 초등학생들이 예약된 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늦게 식당에 오는 바람에 북적거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식당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예약을 하니 초등학생 입맛에 맞는 음식을 준비했다가 역문연 식구들이 합세하니 반찬을 바꿔 놓느라 부산스럽기도 했지요.
식사를 마치고 장구경을 위해 방문했던 영월중앙시장의 전병 상점들 모습입니다. 작은 규모의 영월 중앙시장은 전병과 배추전을 빼면 시장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곳이었는데 워낙 영월에 관광객이 많이 몰리다보니 전병가게는 성업중이었습니다.
식사와 장구경을 마치고 들린 유적은 서강의 범람으로 인해 청령포에서 두달 만에 옮겨와 두달여를 살다가 16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단종이 마지막으로 머물었던 관풍헌입니다.
관풍헌은 춘천과 관련해서도 의미가 있는 곳으로 의암 유인석 의병장이 호좌의진을 거병한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건물에서 의암선생이 거병을 선포했고 그 이전에는 단종이 이곳에 올라 한스러움에 몸부림치며 자규시를 지었다고 하여 자규루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죠. 원래의 명칭은 매죽루였는데 단종이 익소에 유배되며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죠. 단종이 지었다는 자규시는 답사자료에도 수록하였었습니다.
자규시(1457 단종)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와
孤身隻影碧山中 외로운 그림자로 푸른 숲에 깃들었다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억지로 잠들려 하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한스러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원한은 끝나지 않네
聲斷曉岑殘月白 자규 울음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조각달만 밝은데
血流春谷落花紅 피를 뿌린 것 같은 골짜기에는 붉은 꽃이 지네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아직도 애끓는 나의 호소 듣지 못하고
何奈愁人耳獨聰 어이하여 수시 많은 이 사람 귀만 붉게 했는가
※ 자규시 번역문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8, 80~81쪽의 번역문을 인용하였으며 책에는 2편의 자규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명칭이었던 매죽루 현판입니다.
답사 중에 역문연 한희민 전문위원이 설명을 하였지요? 매죽루의 현판을 쓴 사람이 춘천과 깊은 연관이 있는 윤사국이라고요.
윤사국은 칠원 윤씨로 영조35년인 1759년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여로 요직을 거친 인물로 정조대인 1780년대 후반에는 강원도 감찰사와 공조·현조판서, 한성판윤, 판돈녕부사를 역임한 인물입니다.
원주의 감영을 가기 위해 춘천을 지나면서 동내면 고은리 주변의 백성들이 글을 배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비용을 내어 서숙을 열게 하였는데 동천서숙입니다. 역문연에 의해 동천서숙의 현판이 알려졌고 고은리 칠원윤시 사당에 배향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원래 묘는 남산면 강촌2리 말골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온 이력이 있습니다.
매죽루가 자규루로 바뀐 것이죠.
바로 왼쪽의 장면이 관풍헌의 유래와 매죽루와 윤사국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유서 깊고 가슴 시린 애환이 깃든 관풍헌에서 단체 사진도...사진에 빠진 분들이 반은 되는 듯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제98차 답사의 마지막 유적은 장릉(莊陵)입니다.
엄홍도에 의해 장시 지내진 무덤으로 수양대군(후일 세조)에 의해 16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시신도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영월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몰래 이곳에 장사를 지내고 자신은 가족들이 분산하여 군위와 울산등지로 피신을 한 사연이 시작된 곳이죠.
비운의 단종이 210여년이 지나서 복위된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재단장된 묘역입니다. 처음의 묘역은 길에서 보이지도 않는 곳이었으니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겠죠?
단종과 관련하여 너무나 충성스럽지만 집안이 풍비박산 난 채 평생을 살았던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죠. "왕과 살았었던 남자" 엄홍도를 기리는 정려비각입니다.
※ 엄홍도 돞아보기
엄홍도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사료는 단종 사사 후 59년 후인 중종 11년 병자년의 내용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연려실기술의 모체로 보입니다. 연려실기술의 저자인 이긍익(1736~1806)이 42세 이전인 1778년 무렵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지니 중종실록에 쓰인 내용에 살을 붙인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겠죠.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미 수호군(守護軍)을 정했고 또 내신(內臣)을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서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後嗣)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士林)들의 애통이 심했는데, 간사한 의논이 김응기(金應箕)에게서 발단되고 이맥에게서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논한다. 신상(申鏛)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하였다."(중종실록 제27권, 중종 11년 병자(1516) 12월 10일 병진)기사
영화 왕과사는 남자에서 언급된 근거는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중 「영남야언」, 《병자록》에 기록된 것으로 처음에는 실록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뒤에 내용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이지요.
"호장 엄홍도가 옥거리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을 갖추고는 이튼날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되는 동을지(冬乙指)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시지냈다 한다. 이때 엄홍도의 친척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자, 엄홍도가 말하기를, “옳은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이다” 하였다"
엄홍도는 영월의 호장으로 단종이 승하하자 몰래 장사를 지내고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명확한 기록이 없다 보니 영월 엄씨 족보를 통해서 가족들이 흩어진 지역을 유추하는데 세명의 아들을 두었던 엄홍도가 단종을 장사 지낸 후 첫째 아들은 문경에 피신시켰고, 둘째는 군위, 셋째는 울산에 피신하여 세 곳에 집성촌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숙종대 이후 단종이 복위되면서 엄홍도가 공조좌랑에 추증되고, 정조 때 장릉 배식록에 포함되고, 순조 33년(1833년) 공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고종 14년(1877)에는 충의공 이란 시호가 내려지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란 정승급 벼슬이 내려지는 등 사후 추승이 활발해지면서 발생합니다. 충신으로 장릉 주변에 있는 창절사에 배향되고 후손들에게 벼슬을 주는 혜택에 내려지게 되니 문경과 군위 울산에 있던 엄홍도의 세아들 후손들이 자신들이 엄홍도의 진짜 후손임을 내세우게 되는 소위 염불보다 잿밥에 눈먼 현상들이 생겨난 것이죠.
현재도 엄홍도의 묘는 영월과 군위 두 곳에 있다고 알려지며 영월 엄씨와 군위의 영월 엄씨집안에서 우리쪽 묘가 진짜라는 주장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문경의 엄홍도 후손들까지 가세해 우리가 첫째 아들의 후손이니 우리가 진짜 후손이다는 것이고 군위에서는 우리 쪽에 묘가 있으니 우리가 진짜 후손이다. 울산은 우리가 지금까지 제사를 따로 모시니 우리가...식이죠.
엄홍도의 묘역에 대한 문제는 군위에서 국가에 우리쪽의 묘가 진짜 엄홍도의 묘라는 확인을 해달라는 진정을 한 상태라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현재까지도 후손들은 세 곳에서 따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니 하루에 세곳을 바삐 다녀야 하는 엄홍도의 혼령이 어떤 마음일지...
엄홍도로 인해 호장이란 말이 많이 등장하며 많은 이들이 도대체 호장(戶長)이란 벼슬이 어떤 벼술인지 궁금해 하실 것입니다.
호장이란 벼슬은 지방관제에 속한 벼슬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않은 지방관리의 우두머리를 말합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벼슬은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되는데 모든 벼슬아치들이 과거시험을 보는 것은 아니죠. 아전이라고 부르는 지방 관리인 향리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은 지역의 인물들이 향리직(부·군·현 등의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지방관리) 맡게 되고 그중 우두머리를 호장으로 임명하는데 지역의 어른이라는 뜻이 될 수 있죠. 호장은 한명이 아니라 인구가 많은 지역은 8명가지도 있으니 영월 호장이 영월 지방관의 최고 우두머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나 해방 이후 70년대까지 면장이 호장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 향리는 이장정도로 보면 될 것이고요)
먼길을 돌아서 다시 단종으로 돌아갑니다.
역문연 답사팀이 단종의 묘인 장릉을 참배하며 간단한 설명을 더합니다. 무덤이 여기에 있는 이유 배식단이 차이를 두어 조성된 이유 등...
장릉의 원찰 성격을 지닌 사찰 보덕사입니다. 일설에는 지덕사, 노릉사라고도 불리며 월정사의 말사입니다. 668년 의상대사가 창건해 지덕사라 명명된 천년 고찰이라지만 현재의 위치는 아닐 것이라는 견해가 있고, 현재 보덕사의 부속 암자인 금몽암이 보덕사의 원래 터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당해 유배되자 사찰 이름을 노릉사로 개칭했고, 후에 장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보덕사라는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사찰 건물은 6·25전쟁 때 소실된 후 다시 조성된 건물로 알려집니다.
보덕사 입구에는 수령이 600년에 이르는 느티나무 한 그루와 수령이 450년 이상 되는 여러 느티나무가 서 있으며, 극락보전이 지방 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다포식 팔작지붕이라고 하는데 청평사 극락보전과 아주 유사한 형태입니다.
답사에서도 생각해보았던 유적인데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해우소(지방 문화재 제132호)가 있는데, 1882년 건립된 것으로 현재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해우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라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보덕사 해우소의 양식을 보시면 지난해 10월 답사를 갔던 백담사 영시암 해우소 생각이 나실 듯 합니다. 영시암 해우소가 보덕사 해우소와 같은 형태이죠.
9월 답사는 많은 분들의 참여속에 질 마무리 되었습니다. 답사에서도 말씀드렷지만 자세히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하는 답사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궁금증을 해소하는 일이지요.. 문제는 인터넷 검색에 워낙 잘못된 내용들이 많아서(한민족대백과사전조차 잘못된 내용이 많습니다)비교 분석하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이일 저일로 분주한 시기이고 개인사로 여유가 없어 답사기가 늦은 점 양해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날 답사 신청하셨다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여 못하신 신주연님이 답사비 반환을 안 받으시고 후원하시며 커피 사드시라고 하셔서 여러 명이 커피를 마셨고 남은 잔액을 후원금으로 처리하였습니다. 감사함을 전합니다. 커피 못 드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참여자분들이 내어주신 답사경비 결산서 같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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