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에는 봄에 피는 꽃에도 순서가 있었지요. 눈(雪)이 미처 녹기도 전에 매화가 먼저 피고 이어서 개나리 진달래가 물가와 산자락을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봄이 제법 무르익었다 싶으면 복사꽃, 오얏꽃 그리고 살구꽃(桃李杏花)이 다투어 피어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됩니다. 옛 시인은 눈속에 피는 매화(雪中梅)의 고고함을 ‘어찌 뭇꽃들과 봄을 다투랴(爭春)’라고 읊었지요.
지구온난화 탓인가? 길가에 매화가 피는듯싶더니 노안으로는 구별하기도 힘든 복사꽃, 살구꽃, 오얏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네요. 매화도 홍매화가 있어 붉은 기운이 도는 복사꽃과 헷갈립니다. 벚꽃(櫻)까지 가세하니 성긴 매화는 피었었는지 기억조차 없습니다. 매화의 매력은 이른 봄이 홀로 피어 그윽한 향기를 발함에 있는데, 물량공세로 나오는 뭇 봄꽃(桃李杏櫻)에 당할 수가 있을까요. 길을 가다 지인에게 ‘저게 매화요 살구꽃이요’ 물으니 ‘작년에 개살구가 열렸던데요’ 하네요.
매화를 남달리 사랑했던 퇴계 선생은 漢詩 짓는 것을 저급한 취미로 여겼지만 매화를 읊은 시는 몇 수 남깁니다. 사실인지는 몰라도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매화에 물을 주라’ 고 했다지요. 여기 퇴계 선생의 매화시 한 수 붙여 봅니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기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떠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 불어오니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하네
첫댓글 10여년전, 순천 조계사 동쪽, 신라시대 고찰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간 선암사.
그곳에 600년(?)이 넘은 고목 매화나무의 너무 나이들어 이미 죽은 기둥 가운데에서
다시 피어난 한줄기 가지에 몇 송이 작게핀 홍매가 문득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