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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먹는 시늉을 한다. 반복한다.
피식 자신의 행동에 웃음이 나오는 원주.
한결 무서움이 덜 해졌는지 다시 채점을 하는 원주. 부지런히 빨간 동그라미를 그린다.
62. 태란의 가게 (밤)
비. 봉수, 우산을 접고 들어온다.
태란,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있고 웬 중년의 사내가 옆에 서 있다.
중년: 갈게 이 사장. 약속 지키는 걸로 알고 있겠어요. (아이 고추 모양을 보고) 근데 난 언제 이런 거 하나 안 떠주나? 하하 (능글맞게 웃으며 간다.)
태란, 눈을 질끈 감고 한참을 있다가 잠시 후-
태란: 봉수야, 귀 막어. 개 썅!!
태란, 카운터 데스크 밑에서 옛날 육각 성냥통을 꺼낸다.
성냥 한 개비를 꺼내 긋더니 통 안에 집어넣는다.
훅-하고 맹렬히 타오르는 성냥통.
태란, 성냥통을 뒤집는다. 다시 성냥통을 뒤집는다.
새까맣게 타버린 성냥통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태란: 내가 참아야지……. 우리 엄마는 왜 나를 이따우로 낳았을까?
봉수:…….
태란: 나 욕 한번 더해도 돼?
봉수: (끄덕)
태란: 개샹……. 너도 해.
봉수:……. 개샹…….
화난 태란을 어떻게 위로할까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봉수.
슬며시 손수건을 꺼내 다 타버린 성냥통을 덮는다.
태란:……. ?
봉수: (기합처럼) 썅-썅- 개썅!!
봉수, 우아하게 손수건을 펼치면 성냥통은 오간 데 없고 화사한 장미가 피어오른다.
봉수, 장미를 건낸다.
태란: 어머! 어머! (신기해하기도 하고 좋아한다.) 너 요런 재주가 있었구나.
봉수: 별거 아냐. 너도 할 수 있어.
태란: 다른 것도 해봐.
봉수: 천천히……. 천천히 보여줄게. 앞으로 맨 날 볼 거잖아.
태란: (웃으며) 나랑 밤새도록 놀래? 참! 넌 출근해야지…….
봉수: 아니야 괜찮아. 괜찮구말구. (자기의 재롱을 태란이 좋아하자 마음이 기뻐진다.)
63. 자동차 영화관 (심야)
영화가 시작되기 전.
봉수,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
태란: 힘들어.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봉수: 세상일이 쉬운 게 없어. 그치?
태란: 그래. 그래도 나는 너무 힘들어. 사람도 일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좋은 거 보다 싫은 게 많고 사랑하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어.
봉수: 너만 그런 거 아냐.
태란: 봉수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봉수: 아내?
태란: 음……. 날 기다려주고 내 옷을 다려주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고……. 날 따뜻하게 안아주고……. 내 얘기를 웃으며 들어주는 아내.
봉수: 그런 남편이 있으면 되잖아?
태란: 남편……. 남편은 그렇게 되기 어려운 거 같아……. 그렇게 안되더라구……. 결혼하면……. 더 외롭고 쓸쓸해.
태란, 팔이 아픈지 손으로 어깨를 주무른다.
봉수, 자동으로 태란의 어깨를 주물러 준다.
태란: 누군지 모르지만 행복할거야. 너한테 시집오는 여잔……. 착한 봉수!
봉수: 그 말하지마…….
태란: 무슨 말?
봉수: 착하다. 진국이다. 그런 말수도 없이 들었어. (진지하게) 하지만 난 그런 말 정말 듣기 싫.
태란: (푸하하 웃는다.) 알았어. 그럼……. 봉수야! 넌……. 쌔끈해.
봉수: ???
태란: 섹시하고 화끈하다구. 맘에 드니?
봉수: 앱서루트리 굿.
시간경과
공포영화가 상영중이다.
봉수와 태란, 키스에 열중하고 있다.
64. 365일 창구 기계실 (낮)
자기만의 공간인 기계실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봉수.
봉수 앞에 있는 폐쇄회로 모니터로 원주가 나타난다.
원주, 화면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65. 어느 옥탑 건물 (밤)
원주의 친구가 개 한 마리를 조련시키고 있다.
일어서!!! 앉어!!! 굴러!!! 손!!! 개, 가끔씩 틀린다.
원주: 요즈음도 그 애 만나?
친구: 누구?
원주: 왜 그 눈웃음 살살 치는 애 있잖아 ?
친구: 김백철!
원주: 그래, 걔!
친구: 그 새끼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나쁜 새끼.
양다리나 걸치고 아주아주 나쁜 새끼야. (개에게) 굴러!!!
개, 앉는다. 친구 괜히 개를 쥐어박고 신경질을 낸다.
원주: 그럼 찢어진거야 ?
친구: 아니. 내가 차 버렸어.
원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친구: 근데 너 왜 웃어?
원주: 안 웃었어.
친구: 내가 봤는데.
원주: 정말 안 웃었어.
친구: 나쁜 기지배.
원주: (위로한다.) 남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또 생길거야. 아주 괜찮은 남자로…….
친구: 어! 너 혹시? (개를 끌어안고 원주에게 온다.)
원주: 으응……. 그래
친구: 또 짝사랑이니?
원주: 아니! 이번엔 잘될 거 같애. 그 남자가 먼저 시작했거든. 먼저……. (얼굴 가득 퍼지는 미소)
66. 은행 (오후)
원주 들어온다,
봉수의 번호판을 확인하고 한꺼번에 여러 장의 번호표를 뽑는다.
웬일인지 잡지를 보지 않고 입금전표 쓰는 테이블로 가는 원주.
입금전표를 쓰다가 두 장 정도를 구겨서 버리고 다시 쓴다.
자리로 돌아간 원주. 봉수의 번호판을 보며 차례를 기다린다.
봉수의 번호가 아닌 번호표를 찢는다.
딩동! 봉수의 번호판이 바뀐다.
원주, 봉수에게 간다. 입금전표를 접시에 담아 봉수에게 건네준다.
봉수, 입금전표를 받아들고 황당한 얼굴이 된다.
입금하실 때
예금주: 정원주
금: 저녁 함께 하실래요? 맛있게 하는 곳을 알고 있어요. 원정
봉수, 원주를 보면 모른 채 어색하게 웃고 있다.
봉수, 입금의뢰 확인증을 찍어서 원주에게 건네준다.
입금확인표
받으시는 분: 정원주 담당자명: 김봉수
입금내역: 저녁약속 있는데요. 그리고 이런 장난하지 마세요.
원주에게 건네준다.
원주는 전표를 받아들고 웃음이 가신 얼굴로 은행을 빠져나간다.
봉수, 신경 쓰지 않고 일한다.
67. 보습학원 강의실 (해질 무렵)
원주, 칠판에 메모를 하고 있다.
소년: 봉투! 봉투! 열렸네. 무슨 봉투 열렸나.
원주: 뭐하는거니?
소년: 월급날이잖아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원주: 알았어. 이따가.
소년: 봉투! 봉투! 열렸네. 무슨 봉투 열렸나.
원주: 규대! 그만해.
남자아이들이 킬킬거리며 따라하기 시작한다.
봉투 봉투 열렸네----
원주: (화낸다.) 그만 하라니까. 이런 장난하지 말란 말이야. 이런 장난하지마! (나간다.)
68. 옥상 (해질 무렵)
난간 아래 테라스에 앉아있는 원주.
장난하지 마세요가 쓰여진 전표로 비행기를 만들어 옥상 아래로 날린다.
원주 시선의 끝은 비행기의 궤적과는 상관없이 멀리 어느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소년이 뛰어 내려온다. 주춤 주춤.
원주: 나 지금 투명 인간이야. 말시키지마.
소년: (옆에 와서 앉는다.)
원주:…….
소년: 좋을까요?
원주: 뭐가?
소년: 누굴 좋아하면 말이예요?
원주: 그 사람도 날 좋아한다면……. 그러면 좋겠지.
소년: 좋아요……. (후우하고 한숨을 내쉰다.)
원주: (화답하듯 후우하고 역시 한숨을 내쉰다.)
나란히 쪼그리고 앉은 원주와 소년의 얼굴 위로 붉은 노을빛이 떨어지고 있다.
69. 은행 안 (밤)
폐쇄회로 녹화기 테잎을 갈아 끼워 주는 봉수.
문득 카메라를 쳐다보더니 그 앞에 가서 선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폐쇄회로를 바라보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태란아! 내 아내가 되줄 수 있겠니?
많이 부족하지만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거야.
장보러 갈 때도……. 무거운걸 들 때도……. 그리고 퓨즈가 나가면 내가 고쳐 줄수도 있고
사랑해.
봉수, 그 자세 그대로 스스로에 도취되어 가만히 서 있는다.
70. 은행 밖, 365일 창구 (같은 시간)
원주, 들어온다.
셔터로 한쪽이 막힌 은행.
원주, 나가려다가 구석에 설치된 폐쇄회로 카메라를 본다.
원주, 한참동안 바라본다. 이윽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나요? 봉수씨……. 난 봉수씨랑 얘기하는 게 참 좋아요. (사이) 아니, 참 좋았어요. 봉수씨……. 그거 알아요? 봉수씨 웃을 때……. 왼쪽 뺨에 살짝 보조개 잡히는 거? (쓸쓸하게 웃는다.) 잘 안보면 모를걸요?
(사이)……. 잘 안보면……. 안 보이는 게 세상엔 참 많죠……. 봉수씨!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다.)……. 건강하세요…….
원주, 안경을 벗는다. 안경자욱. 원주의 시야로 화면이 뿌옇게 흐려진다.
71. 태란의 가게 (다음날)
꽃다발을 들고 들어서는 봉수. 인부들이 소파를 나르고 있고 내부 인테리어도 바꾸고 있다.
봉수, 어리둥절하다.
봉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남자: 누구시오?
봉수: 여기 주인 친군데요.
남자: 난 댁 같은 친구 둔 적 없는데…….
72. 은행 (낮)
멍한 봉수. 한 아줌마가 공과금용지와 돈 5만원을 접시에 담아서 준다.
봉수, 도장을 쾅쾅 찍어서 영수증에 잔돈 2000원까지 얹어서 5만 2000원을 건네준다.
아줌마, 돈을 챙겨서 바람처럼 사라진다.
73. 1층 로비 (며칠 후 저녁)
비가 내린다.
봉수, 로비에서 비를 바라보며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날리고 있다.
휴대폰으로 태란에게 전화를 걸지만 착신거부를 알리는 안내음이 나온다.
답답해하는 봉수.
일주일전 자신의 음성사서함에 저장해 놓은 태란의 음성을 듣는다.
태란 소리: 봉수니? 거기도 밖에 비오니 ? 이거 잠깐 들어볼래?
음악이 흘러나온다. 한참을 듣던 봉수, 휴대폰을 끈다.
원주, 우산을 들고 로비로 들어선다.
봉수를 보고 멈칫한다. 어색한 목례. 어색한 침묵.
원주, 실내로 들어와서도 우산을 쓴 채 계단을 오른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원주: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돌이 된다. 돌이 된다.
원주, 망설이다가 뒤돌아보면 봉수, 보이지 않는다.
74. 태란의 가게 앞 ( 다시 며칠 후, 저녁)
굵어진 빗줄기. 태란의 가게 간판이 오락실로 바뀌어 있다.
디디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만 요란하다.
75. 고속도로, 차안 (밤)
운전하는 봉수. 와이퍼가 쏟아지는 비를 계속 닦아내고 있다.
76. 도로변 (밤)
폭우가 쏟아지는 도로변. 봉수, 흠뻑 젖은 채로 고장난 차를 뒤에서 밀고 있다.
77. 도로 (밤)
폭우 속에서 우산을 쓰고 걸어오고 있는 원주.
건너야할 신호등의 파란불이 깜빡이고 있다.
원주, 뛴다. 차가 맹렬히 달려오지만 원주, 뛰어서 신호등을 건넌다.
78. 원주의 방 (심야)
FM에서 나오는 음악소리.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는 원주.
강아지처럼 머리를 흔들어 남아 있는 물기를 털어낸다.
멘트: 주초에 한번 정도 비가 더 내린 후에는 당분간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맑고 쾌 청한 날씨가 계속 되겠습니다.
원주: (되뇌인다.) 맑고 쾌청한 날씨가 계속 되겠습니다.
79. 봉수의 아파트 단지 (심야)
비를 맞으며 걸어오고 있는 봉수.
화단에 핀 들장미 한 송이를 꺾는다.
꽃잎을 하나하나 떼어낸다.
돌아온다……. 안 돌아온다……. 돌아온다……. 안 돌아온다…….
바닥에 떨어져 빗물이 젖고 있는 장미꽃잎들.
카메라 꽃잎들을 훑으며 봉수를 따라 올라가면 봉수, 마지막 꽃잎을 떼어낸다.
봉수, 잎이 다 떨어진 가지만 들고 비를 맞으며 걷는다.
화면 길-게 페이드 아웃된다.
80. 가로수
가을이 내려서고 있다.
81. 경복궁 (낮)
경회루 근처 연못.
봉수, 쪼그리고 앉아 연못에 잉어먹이를 던져주고 있다.
휴대폰이 울린다. 안 받는다. 끈질기게 울린다. 봉수, 아예 꺼버린다.
우울한 봉수의 표정.
저쪽에서 가슴에 목걸이 볼펜을 하고 모자를 쓴 남자 하나가 급히 봉수를 향해 뛰어온다.
남자: 시간 좀 내 주시겠습니까. 잠깐만…….
82. 근정전 어디쯤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창을 들고 와!!!하며 함성을 지르며 뛰어온다.
포졸 복장을 한 봉수, 창을 들고 무리에 끼여 뛰어온다.
표정이 없다.
시간경과
와!와!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르는 포졸무리들.
봉수도 창을 높이 들고 와! 와!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닌다.
83. 어느 까페 (오후)
홍탁: (시계를 보며) 안 들어가냐?
봉수: (건성으로) 괜찮아.
홍탁: 어쭈! 땡땡이 아냐? 웬일이래 범생이가.
봉수: 놀자.
헝탁: (주저, 머뭇) 오늘은 안돼.
봉수: 단란주점 갈까?
홍탁: 생일이야. 와이프.
봉수: (어쩔수 없다는 표정) 자식! 철 들었구나.
홍탁: 마술 하나만 가르쳐주라. 간단한 걸로.
봉수: 인제 안해. 다 잊어버렸어.
홍탁: 좀 가르쳐 줘. 생일 선물 주면서 해주게.
봉수: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안한다니까. 나 이제 그런 바보같은 짓 안 해.
84. 교무실 (오후)
선생 한 명과 마주 앉은 원주. 심각하게 무언가를 궁리 중.
선생1: 5판이면 되겠지?
원주: 모자라지 않을까요?
선생1: 그런가…….
원주: 한판에 8 조각……. 5판이면 40 조각밖에 안나오잖아요. 애들이 몇 명인데요?
선생: 한 조각씩만 먹으면 되잖아?
원주: 피자 귀신들인데.
선생1: 2 곱하기 32는 64. 우리도 조금 먹어야 하고……. 10판은 시켜야겠네?
원주: 그 정도면……. 근데 음료수는……. 그냥 물 먹으라 그럴까요.
선생1: 에이! 화끈하게 한번 쏘지 뭐. 피자 먹는데 콜라는 있어야지.
선생1, 원주에게 5만원을 주며-
선생1: 장난이 아니네…….
원주: 진짜 장난이 아니네…….
웃는 두 사람.
85. 분식점 (저녁)
원주,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고 있다.
원주, 뒤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 봉수가 들어온다.
아줌마: 오랜만에 오셨네.
원주, 얘기에 열중해 있다.
아줌마: 뭐 드길까?
봉수 목소리: 라면 하나만 주세요.
원주, 봉수의 소리가 들리자 하던 얘기를 멈춘다.
아이들: 그래서요?
아이들, 그래서요 그래서요? 하며 보채는데 원주,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있는다.
86. 은행 (늦은 저녁)
업무가 끝난 후 봉수, CCTV 녹화 테잎을 지우기 전에 모니터로 확인한다.
동기: 할 일 되게 없네. (가방을 챙기고) 나 먼저 들어간다.
봉수를 한 대 툭 치고 퇴근한다.
혼자 남은 봉수, 계속 건성으로 테잎을 돌려본다.
87. CCTV 장면들
- 분주한 은행 안의 모습. 봉수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이고 봉수가 마술하는 장면도 보인다.
- 한 꼬마 아이가 카메라를 쳐다보고 신기한 듯 손짓을 한다.
아이의 아빠가 아이가 가르키는 걸 보다가 무등을 태워준다.
아이의 얼굴이 화면 가까이 다가와 웃는다.
- 싸이코 소년 규대가 이어폰을 끼고 힙합춤을 추고 있다. 카메라에 대고 책잇아웃하며 랩도 하고
- 봉수, 그 모습을 보며 웃는다.
- 한 여자가 은행에 들어오더니 비닐 봉투가 터져 동전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사방으로 동전이 구르고, 사람들이 모두 동전을 줍는다.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는 여자, 가만히 보니, 원주다.
화면을 보면서 봉수가 웃는다.
- 365일 창구. 밤. 행려가 창구를 어슬렁거리면서 들어온다. 바닥에 천천히 신문지를 깔고 눕는다. 다시 일어나 휴지통에서 신문지 하나를 더 꺼내 덮고 잔다.
- 연인 한 쌍이 창구에 들어온다. 돈을 찾는가 싶더니, 두 사람 키스를 한다.
처음엔 머뭇거리다가 나중에는 열정적으로.
- 봉수 웃으면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한 손으로 화면을 계속 돌리는데, 어떤 여자가 CCTV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봉수 다시 앞으로 리와인드 하면.
- 빈 365일 창구. 여자가 들어온다. 원주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원주.
CCTV를 쳐다본다. 입으로 뭔가를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원주. 봉수, 들을수는 없지만 내용이 궁금하다. 다시 앞으로 돌린다. 본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다시 본다.
다시 앞으로 뒤로, 돌려보기를 반복한다. 원주의 입 모양이 반복된다.
- 그걸 진지하게 보고 있는 봉수, 한가지만은 분명히 확인이 된다. 김봉수씨!
뒤에 말은 모르겠고 김봉수씨! 김봉수씨! 하는 입모양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상기되는 봉수의 표정
88. 은행안 (저녁)
텅 빈 은행 안. 멍하니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봉수.
봉수, 창 쪽으로 간다. 비가 들기 시작한다. 텅 빈 광장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맞은편 학원건물의 불빛이 보인다.
89. 1층 로비에서 은행 앞 광장으로 (밤)
은행에서 나오는 봉수. 우산을 펴려다가 그냥 나간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봉수의 콧등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산을 펴고 걷는 봉수. 멈춘다. 우산을 치워본다.
머리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다시 써 본다. 다시 치워본다.
봉수, 우산을 접고 비를 맞는다. 가만히 서 있는다.
90. 은행과 학원 앞 광장 (밤)
계단에서 내려오는 원주. 멈칫. 봉수가 로비에 서있다. 머리칼과 양복 어깨가 비에 젖어있다.
원주, 천천히 내려온다. 봉수 앞을 지나친다. 우산을 펴고 나가려는 원주 뒤로-
봉수: 저기요……. 그 우산……. 같이 쓸 수 있을까요?
원주, 봉수를 본다, 원주의 시야로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는 봉수의 우산이 보인다.
91. 은행 앞 길 (밤)
함께 우산을 쓰고 봉수와 원주. 원주의 작은 우산 때문에 두 사람 어깨에 비를 맞고 있다.
원주, 우선 멈춰 선다. 우산을 접는다. 봉수가 들고 있는 큰 우산을 편다.
봉수에게 우산을 건네준다. 훨씬 큰 우산 아래로 비에 젖은 두 사람의 양어깨도 가려진다.
우산을 쓰고 함께 걷는 봉수와 원주.
화면 직부감으로 바뀌면서 우산 하나가 비를 가로지르며 움직여 가고 있다.
92. 은행 근처 정류장 (밤)
서있는 봉수와 원주. 서먹하다. 내리는 빗줄기만 바라보고 있다.
봉수: 저기……. 일요일날 시간 있어요?
원주:……. 아직 몰라요.
봉수: 아……. 네…….
원주:…….
봉수: 저기……. 칼국수 잘하는데 알고 있거든요. 같이 가지 않을래요 ?
원주:…….
봉수: 원래 말을 잘 못해서……. 저기……. 꼭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버스가 도착한다. 너무 빨리 버스가 와 버렸다. 봉수, 타려는데 원주, 움직이지 않는다.
봉수:……. 안 타세요 ?
원주: 먼저 가세요.
봉수, 망설이는데 버스 출발해버린다.
주춤주춤 다시 원주에게로 오는 봉수.
다시 말이 없이 서 있고 어색하게 침묵이 흐르고.
원주, 발로 바닥에 고인 물을 찰랑찰랑 흔들면 고인 물에 비추는 원주의 모습도 흔들린다.
시간경과.
두 번째 버스가 온다.
봉수와 원주 두 사람 모두 그냥 서 있는다.
봉수, 원주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간다.
시간경과
세 번째 버스가 온다.
버스 섰다가 그냥 가버리면 아직도 안가고 서 있는 봉수와 원주.
잠시 후 비가 그친다.
원주: (손바닥을 내밀어 확인하며) 어머! 비가 그쳤어요.
봉수: 이제 비 좀 안 왔으면 좋겠다.
원주: (봉수를 보며) 이번에 버스 오면 한번 타 볼까?( 처음으로 웃는다.)
원주의 미소에 따라서 미소짓는 봉수.
두 사람의 웃는 모습이 고인 물에 비친다.
93. 파란 하늘
구름이 달려가고 있다.
94. 지하철 역 구내 (낮)
출입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 다니는 봉수와 원주.
어느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간다.
봉수: (밖을 보고 ) 여기가 아니잖아.
원주와 봉수, 다시 내려간다.
화면 바뀌면-
다시 출입구를 찾아 헤매는 두 사람.
어느 출구로 나간다.
원주: (확인하고) 아까 거기잖아.
원주와 봉수, 다시 지하도로 내려간다.
95. 식당 (해질 무렵)
칼국수를 거의 다 먹어가고 있다. 원주 바닥까지 긁어서 봉수에게 주고 자기도 먹는다.
강아지 한 마리가 왔다 갔다 한다. 원주, 반색을 하며 강아지를 만지려하지만 짖어댄다.
주인이 와서 데려간다.
원주: 강아지 좋아해요 ?
봉수: 어렸을 때는…….
원주: 지금은 ?
봉수: 별로.
원주: 왜요 ?
봉수: 10살인가 11살 때 개를 한 마리 길렀어요. 이름이 해피였어요. 쥐약 묻은 음식을 잘못 먹어서 죽었어요. 근데 개가 죽기 전에 날 보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그 이후로 개는 안 키워요.
원주: (글썽해진다.) 슬픈 얘기네. 우리집 개 이름은 쫑이였어요.
봉수: 쫑 ?
원주: 네. 쫑.
봉수: 왜 옛날 개 이름은 메리 아니면 해피 아니면 쫑인지 몰라…….
원주: 나랑 엄청 친했어요. 근데 어느 날인가 집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쫑하고 막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쫑이 형! 형! 하고 짖는 거예요.
봉수: 뭐라고요 ?
원주: 형! 형! 하고 짖었어요.
봉수: 에이! 그럴 리가. 컹컹하고 짖었겠지.
원주: 두 귀로 분명히 들었다니까요. 분명히 형이라고 했어요.
봉수: 강아지가 뒤가 마려워서 끙한거예요. 끙! 형! 비슷하잖아요?
원주: 형이라고 했어요. 분명히.
봉수: 개가 말을 한다고 쳐요. 그래도 누나나 언니가 아니고 왜 형이예요 ? 원주씨는 여잔데…….
원주: 형이라고 했어요.
봉수: 에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지요.
원주: 왜 사람 말을 믿질 않아요? (삐진 얼굴로 나간다.)
96. 지하철 역사 (밤)
밤하늘이 보이는 외부역사.
봉수, 자판기에서 커피와 우유를 뽑아 의자로 간다.
원주, 봉수에게 우유를 달래서 자신의 커피와 반씩 섞는다. 몇 번을 거듭한다.
인상을 찌푸리는 봉수. 원주, 그 모습을 보고-
원주: 싫어요?
봉수: 누가 싫다고 했어요?
원주: 지금 봉수씨 얼굴이 그렇잖아요? (표정이 굳어지며 갑자기) 왜 사람이 그래요? 싫으면 싫다고 얘기해요. 섞기 전에 말했으면 안 섞잖아요.
봉수: (말하기 싫은 표정)
원주:…….
원주, 자리에서 일어난다.
들고 있던 커피를 휴지통에 통째로 던져 버리고 계단으로 내려가 버린다.
정말로 화난 표정의 원주.
봉수, 쫓아가지 않는다. 그냥 앉아있다.
잠시 후 바람을 물고 열차가 진입한다.
97. 지하철 안 (밤)
봉수, 굳어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다.
지하철 외부에서 지하터널로 진입한다.
멈춰서는 열차. 잠시 후 불이 나간다. 안내방송이 나온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하나 둘씩 휴대폰 불빛이 켜진다.
어디론가 다들 연락하는 사람들.
봉수도 휴대폰을 꺼낸다. 집어넣는다. 다시 꺼낸다.
폴더를 열면 봉수의 휴대폰 불빛이 켜진다. 번호를 누르는 봉수. 발신음-
98. 택시 안 (밤)
달리는 택시 안. 원주의 휴대폰이 울린다. 원주, 받는다.
소리: 저……. 김봉순데요.
원주, 전화를 끊어 버린다.
다시 신호음이 울린다. 계속 울린다. 원주 받는다.
봉수: 미안해요.
원주:…….
봉수: 원래 섞어 먹는 거 싫어해요.
원주:…….
봉수: 사과할께요.
원주: 사과할 필요 없어요. 나도 잘 못했으니까……. 끊을께요. 미안해요 (끊는다.)
원주 차 창문을 연다. 바람에 원주의 머리칼이 나부낀다.
굳어있던 원주의 표정 조금씩 밝아진다.
99. 한적한 어느 교외 (두 번째 데이트. 일요일)
차를 타고 빙글빙글 동네를 도는 봉수. 원주,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두리번거린다.
100. 어느 동네 (낮)
멀리 패러그라이딩이 날고 있는 언덕근처의 작은 마을.
봉수, 어느 나무 아래를 파고 있다. 원주도 깨작거리며 돕고 있다.
팔 한쪽이 없는 마론 인형이 나온다. 원주, 마론 인형을 주워서 잔뜩 묻은 흙을 털어낸다.
101. 구멍가게 앞 (해질 녘)
음료수 마시는 봉수와 원주. 원주,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준다.
중년 남자가 어린 소녀를 목마 태우고 있는 사진.
봉수: 아버지?
원주: (끄덕 끄덕)
봉수: 얜 누구예요?
원주: (흘겨본다.)
봉수: 옛날 우리집 마루에 있던 인형이랑 닮은 거 같애.
원주: (좋아한다.) 나도 유치원때까진 이뻤는데.
봉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인형 3개가 나란히 있었거든요. 3자매나 3형제 같았어요.
원주: (아직도 모른다.) 어머! 예쁘겠다. 나도 하나 사고 싶다.
봉수: 지금은 그런 인형 없을걸요.
원주, 사진을 뺏어다가 다시 지갑에 소중히 넣는다.
원주: 마당에 온실도 직접 지으셨어요.
봉수: 우리도 그거 있었는데…….
원주: 6개월 동안 매일 설계도를 그렸어요. 나는 옆에서 4B 연필 깎고 있고…….
봉수: 건축사예요 아버님이?
원주: 그냥 아마추어로……. 그게 짓구나니까 문짝이 제대로 맞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문 열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더라구요 (웃으며) 삐이걱 삐이걱--
봉수: 무너지지만 않으면 돼죠?
원주: 그 다음해 무너져 내렸어요. 저녁때가 되면 저기서 기차를 타고 오셨어요.
봉수: 멋있는 분이시구나.
원주: 그럼요.
봉수: 음! 아버지와 딸은 좀 특별한 거 같애.
원주, 봉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자기 마음을 이해해준 것이 고맙다.
원주, 가게 앞에 있는 과일 진열대에서 배 한덩이를 집어온다.
원주: 이거 하나만 사 줄래요?
102. 공터, 차 밖에서 차 안으로 (해질녘)
차가 있는 곳에 도착한 두 사람.
원주: 내가 운전할께요.
봉수: 면허 있어요?
원주, 손지갑에서 면허증을 꺼낸다. 그린 면허를 봉수의 눈앞에 갖다 댄다.
봉수, 뜻밖이라는 표정
원주: 면허 종류가 뭐예요?
봉수: 2종 보통…….
원주: (차로 가며) 2종 보통이 1종한테……. 까불고 있어 (명령하듯) 열쇠 줘요.
봉수:……. ( 조용히 열쇠를 건네준다.)
차에 타는 두 사람. 원주, 시동을 건다.
원주: (의자를 보고) 이거 앞으로 조금만 당길 수 있어요?
봉수: 당겨요
원주: 어떻게요?
봉수: 의자 옆에 레바 있죠? 그걸 당겨요.
원주, 레바를 찾아서 당긴다. 잘못 골랐다.
운전석이 뒤로 확 제껴지며 원주도 의자와 함께 자빠진다.
당황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원주의 모습.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다.
봉수, 웃음이 나온다. 일으켜 세워주려고 원주의 손을 잡는데 원주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어색하다. 원주를 일으켜 주고 나면 두 사람 어색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원주, 시동이 걸려있는데 또 시동을 걸어서 키릭키릭 소리가 나고…….
봉수, 괜히 안전벨트를 채웠다 풀었다…….
그렇게 그렇게 해가 저문다.
103. 아파트 문 앞 (저녁)
봉수, 벨을 누른다. 한번 두 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는데 문이 열린다.
어! 하는 봉수.
앞치마를 두른 태란의 모습이 나타난다.
너무나 뜻밖이어서 멍한 봉수.
104. 아파트 안 (저녁)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들. 봉수와 태란, 저녁을 먹고 있다. 아무말 없다.
천천히 밥만 먹는다. 숟가락 젓가락 소리만 들린다.
태란: 미안해 봉수야!
봉수, 그 소리에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친다. 꾸역꾸역 밥을 더 많이 퍼먹는다.
태란: 내 원망 많이 했지. 연락하려고 했는데 면목이 없더라, 특히 너한테는…….
봉수:…….
태란: 너 알기 전에 해결해 보려구……. 전 남편도 만나보고 막 돌아 다녔는데……. 찌개두 먹어.
태란, 봉수의 하얀 밥 위로 찌개국물을 퍼준다.
하얀 밥 위로 빨간 찌개국물이 흐른다.
봉수: 나는……. 니가 보고 싶었어.
105. 아파트 문 앞 (저녁)
태란, 문을 나서고 있다. 봉수에게 열쇠를 돌려준다.
태란: 이거 없었으면 저녁 못 차려 줄 뻔했어. 솜씨는 없지만 꼭 차려 주고 싶었다.
봉수: 맛있었어, (열쇠를 받는다.)
태란: 대출금은 꼭 갚을게.
봉수: (눈물이 터질 거 같다.) 그래. 꼭 갚아.
태란: (태란도 눈물이 터질 거 같다.) 천천히 갚아도 돼지?
봉수: (끄덕 끄덕)
태란: 빨리 좋은 여자 만났으면 좋겠다. 너 만큼 착한 여자로……. 갈게.
봉수: 바래다줄게.
태란: 아니 혼자 갈게.
태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봉수, 태란의 손을 잡는다. 태란, 나간다.
문이 닫힌다. 봉수, 태란과 악수했던 손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미련이 남는다. 손을 핥는다.
106. 아파트 안 (밤)
봉수, 옛날 육각 성냥통에서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다.
통 속에 던진다. 훅 하고 타오르는 성냥통. 잠시동안 맹렬히 타오르다가 이내 꺼진다.
연기만 풀풀 피어오른다. 봉수, 멍하니 보고 있다.
107. 원주의 집 (밤)
부엌. 원주, 커다란 배 한덩이를 과도로 위만 동그랗게 오려낸다.
원주모: 배가 아주 좋구나. 아빠가 좋아하시겠다.
원주: 선물 받은거야.
원주모: 누구한테 ?
원주: 좋은 사람.
접시에 담아 마루로 가져간다. 젯상에 올려놓는다.
양복을 입은 남동생, 혼자서 절한다. 원주도 한 구석에서 곱게 절한다.
108. 은행 앞길 (낮)
보습학원 간판이 철거되고 있다.
109. 학원 교무실 (저녁)
원주, 라면박스 같은 것에 짐을 정리하고 있다.
노크소리.
소년이 들어온다. 뒤에 감추고 있는 뭔가를 원주 앞에 놓고 간다.
원주: 뭐니?
소년: 그냥 앞으로 못 볼 거 같아서……. 그래서…….
원주: 나 잘린 거 아냐. 이사가도 나올거야.
소년: 저 이사가요.
원주: 어머!
소년: 갈께요.(나가려고 한다.)
원주: 규대야! 잠깐만.
원주, 소년에게로 가서 소년을 꼭 안아준다.
원주: 너 나 안아보고 싶었지.
소년, 얼굴이 빨개져서 몸을 빼고 급히 나가려다가
소년: 선생님! 저 담배 끊었어요. (뛰어간다.)
원주: 놀러와라!
원주, 소년이 남기고 간 선물을 풀어보면 상자 속에서 머그컵이 나온다.
머그컵의 표면에는 원주와 소년이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110. 은행 안 (저녁)
봉수, 야근을 하고 있다.
원주, 은행 안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원주, 봉수의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이리저리 보다가 안테나를 잡더니 슬슬 돌려서 안테나를 꺼낸다. 원주, 안테나를 귀에 집어넣는다.
봉수: 뭐하는 거예요 ?
원주: 귀파요!!!
봉수 웃어버리고 만다.
원주, 귀를 파다가 일하고 있는 봉수 뒤에 가서 선다. 가만히 뒷모습을 본다.
다시 봉수의 책상 앞으로 와선 가만히 앞모습을 본다.
봉수: 왜요 ?
원주: 음! 뒤가 훨씬 낫군.
심심한 원주. 돌아다니다가 폐쇄회로를 발견한다. 그 앞에 가서 선다.
원주, 장난기가 발동한다. 봉수를 슬쩍 보더니 무언가 확인하고 싶다.
원주: (카메라를 보며) 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봉수: (놀란다, 태란이가 한 말인데) 왜요 ?
원주: 좋잖아요, 귀찮은 일 전부 시키고. 청소도 시키고 밥도 하라 그러고 귓밥도 파게 하고.
봉수: (실망 후 빈정) 파출부를 두지 그래요?
원주: 귓밥은 안 파주잖아요. 또 자고 싶을 때 같이 자지도 못하고.
봉수: 몸종에 가깝네.
원주: 그런가? (힐끗 봉수를 보고 더 약올리듯) 그럼 나도 몸종이 있었으면 차암- 좋겠다.
봉수: 여자끼리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
원주: 우리나란 그렇잖아요.
봉수: 요즈음엔 안 그래요. 그리고 아낸…….
원주: 특별한 사람인가요 ?
봉수: 특별하죠. 아주 특별해요.
원주, 봉수가 열내고 화내는 것이 기분이 좋다.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봉수의 입에서 나온 것이 즐거운지 웃으며 은행 안을 휘휘 휘젓고 돌아다닌다.
111. 3년 전 봉수의 비디오 화면 (97년 1월 1일)
당신에게 전부 말하고 싶어. 당신은 이해해 줄 테니까.
사실은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어.
살면서 사랑이 꼭 헌 번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 여잔……. (말한 것을 후회하는 표정)
봉수, 화면으로 다가온다.
화면이 리와인드 되며 방금 전에 한 말을 지운다. 다시 녹화한다.
당신은 정말로 특별한 여잘거야.
재미있고 현명하고 아름다운.
쫀쫀하고 한심한 이 김봉수를 닦고 조이고 기름쳐서 훌륭한 남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래 어떻든……. 만나서 정말 반가와. 그리고 고마워.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 여보, 사랑해! (빨개진 얼굴로 활짝 웃는다.)
112. 봉수 동네 꽃가게 앞 (세 번째 데이트. 낮)
자잘한 화분으로 그득한 꽃가게. 봉수와 원주, 화초를 고르고 있다.
봉수, 이것저것 만져보고 살펴보고 한다.
원주: 이건 어때요?
봉수: 화분 색깔이 이상해요.
원주: 그럼 이건?
봉수: 잎사귀가 맘에 안 들어요
원주: 음! 결혼 못한 이유가 있었군.
봉수,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원주에게 보여준다. 주인에게 묻는다.
원주: 얼마예요?
주인: 만 오 천원입니다.
원주: 다시 골라야겠네.
봉수: 왜요?
원주: 만원이 넘잖아요.
봉수, 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서 원주에게 준다. 화분을 가지고 간다.
원주, 만원을 더해서 주인에게 주고 쫓아간다.
113. 아파트 문 앞 (오후)
열쇠로 문을 따는 봉수. 문이 열린다.
봉수: 이 아파트에 오는 여잔 원주씨가 처음이예요.
원주: 웃기지 말아요. (일축하며 안으로 들어간다.)
114. 아파트 안 (오후)
여기저기 집안을 둘러보는 원주.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찬장도 열어보고 마치 자기 집처럼 돌아다닌다.
봉수는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다가 과도로 깎기 시작한다.
원주: 잘 깎네. 안 끊어지고. 이리 줘 볼래요.
원주, 사과를 깎기 시작한다. 선수다. 속도도 빠르고 예쁘게 깎고 능숙하다.
봉수, 원주가 사과 깎는 모습을 본다. 원주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온다.
봉수,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동전 2개를 꺼낸다.
봉수: 이거 좀 볼래요.
봉수, 오른손에 100원 동전을 보여 주고 왼손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보여준다.
주먹을 쥐고 원주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기합을 넣듯 절도 있는 동작과 함께-
오른 주먹을 서서히 편다. 비어있다. 왼주먹을 서서히 편다. 100원 동전이 나타난다.
원주: 어! (봉수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뒤집어 뒤집어 본다. 한참을 바라본다.) 다시 해봐요.
봉수: 두 번은 안해요.
원주: 어떻게 속인 거예요?
봉수: 속이다니? 봐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손을 휘휘 둘러서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준다.)
원주: 분명히 속임수야.
봉수: 맘대로 생각해요.
시간경과.
접시 위의 사과조각. 시간이 지나선 지 붉게 변색되어 있다.
봉수, 사과를 먹고 있고 원주는 한쪽에서 동전 두 개를 가지고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열심히 궁리 중이다.
봉수: 그만하고 이거나 들어요. (포크로 사과 한쪽을 찍어준다.)
원주: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동전에만 관심이 있다.)
봉수: 잘 안될걸요?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네요.
원주: 한번만 더 해봐요. (전투적인 눈초리로 쳐다본다.)
봉수: (사과를 먹으며) 싫어요.
원주: 동전 어디에 감췄어요?
봉수: 감춘 게 아니라 없어졌다니까. 왜 사람 말을 믿질 않아요?
원주, 집요하게 동전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힐끗 힐끗 원주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봉수의 모습.
115. 소나기 (해질 무렵)
봉수의 아파트 근처 도로. 해질 무렵. 봉수와 원주, 걸어오고 있다.
비가 듯기 시작한다. 소나기로 변한다. 봉수와 원주 급히 나무 아래로 피한다.
원주: 여우가 시집가나……. 해가 있는데 비가 오네.
봉수: 호랑이가 장가가나……. 지나가는 빈가보네.
말이 없다. 봉수, 원주를 본다.
문득 생각난 듯 나무에서 나뭇잎을 하나 딴다. 잎을 하나하나 떼어내기 시작한다.
봉수: (마음) 이 여자다. 아니다. 이 여자다. 아니다…….
이 여자다가 나온다. 원주를 바라보는 봉수. 새 나뭇잎을 따서 다시 해보려는데-
원주: (봉수의 나뭇잎을 빼앗으며) 같이 해요.
원주도 앞을 떼어내기 시작한다.
원주: (마음) 이 남자다. 이 사람이다. 이 남자다. 이 사람이다…….
원주 마지막 잎을 떼어내고 봉수를 바라본다. 웃는다.
비오는 나무아래 나란히 나뭇잎을 들고 서 있는 봉수와 원주.
봉수, 헝겊을 꺼내 안경을 닦는다. 원주의 얼굴을 본다. 안경에 빗방울이 묻어 있다.
봉수: 안경 줘 볼래요 ?
원주: (준다.)
봉수, 원주의 안경을 정성 들여 닦는다. 그걸 보며 웃는 원주.
봉수, 다 닦은 안경을 안경점의 안경사가 하듯 양손으로 테를 잡고 원주에게 씌워준다.
원주 눈을 감는다. 씌워지는 안경.
봉수: 잘 보이죠 ?
원주: 네 잘 보여요. 아주 잘보여요.
시간경과. 비가 그친다. 원주와 봉수 나무 밖으로 나온다. 걷기 시작한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서쪽으로 노을이 지고 있다.
걸어가는 봉수와 원주의 뒷모습. 원주 슬쩍 봉수의 손을 잡는다.
손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길게 멀어져가며-
그 위로 봉수와 원주의 대화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일본에는 비가와도 비를 안 맞는 사람이 있대요? 누군데요? 비사이로 막가 제발 그런 유치한 소리 좀 하지 말아요. 누가 들으면 한심하다고 비웃어요. 재밌잖아요. 내가 어디가 예뻐요?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전에 내 주민등록증 사진보고 예쁘다고 했잖아요? 그거야 사진이 잘 나왔다는 소리지……. 아니 분명히 예쁘다고 했어요.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어요.
사진은…….
엔드크레딧이 뜬다.
proof 데이빗 어번(DAVID AUBURN)
번역: 이 항
제작: 루트원/악어컴퍼니
연출: 김광보
무대, 소품: 오윤균
분장: 최은주
조명: 조인곤
음악: 김태근
조연출, 무대감독: 홍준석
등장인물
로버트: 50대
캐서린: 25세
핼: 28세
클레어: 29세
배경: 시카고에 있는 어느 집 뒤쪽 베란다 porch
1막
장면 1
밤. 캐서린이 의자에 앉아 있다. 그녀는 지쳐보이고,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있다. 눈을 감고 있다. 로버트가 그녀 뒤에 서 있다. 그는 캐서린의 아버지다. 약간 헝클어진 모습이지만 학구적인 인상이다. 캐서린은 그가 서 있는 줄 모른다. 잠시 후.
로버트: 잠이 안 오냐?
캐서린: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
로버트: 미안하다.
캐서린: 여기서 뭐하는 거야?
로버트: 네가 뭐하나 좀 보려구. 왜 아직 안 자니?
캐서린: 아빠 학생이 아직 안 가고 있어. 아빠 서재에 있어.
로버트: 혼자 나갈 수 있을테니까 걱정하지 마. 갈 때 되면 가겠지.
캐서린: 갈때까지 기다리지 뭐.
로버트: 어- 그리구 걘 더 이상 내 학생이 아니다. 강의를 맡고 있어. 아주 똑똑한 놈이야.
(사이)
캐서린: 지금 몇 시야?
로버트: 한시가 다 됐다.
캐서린: 어 이런~
로버트: 자정이 넘었으니까 이제…….
캐서린: 음?
로버트: 그러니까, 이제(그는 자기 뒤쪽 테이블의 삼페인을 가리킨다.) 생일 축하한다.
캐서린: 아빠.
로버트: 내가 언제 잊은 적 있니?
캐서린: 고마워
로버트: 스물다섯이라. 믿을 수가 없구나.
캐서린: 나도 그래. 우리 지금 마실까?
로버트: 너 좋을 대로.
캐서린: 마시자.
로버트: 내가 따 줄게
캐서린: 내가 할래. 지난번 생일처럼 또 창문 깨려구.
로버트: 아주 오래 전 일이다. 김새게 그 얘긴 왜 꺼내냐.
캐서린: 그 때 눈 안 다친 걸 다행인 줄 알아.
(뚜껑이 열리고 거품이 쏟아진다.)
로버트: 스물다섯이라.
캐서린: 벌써 늙어 버린 것 같애.
로버트: 무슨 소리야. 넌 아직 어린애야.
캐서린: 잔은?
로버트: 아 이거, 또 잊어버렸구나. 내 가서 가지고 올게-
캐서린: 됐어. (그녀는 병째로 마신다. 긴 한 모금. 로버트는 그녀를 본다.)
로버트: 어떠냐? 내 뭘 사야 할지 몰라서…….
캐서린: 여태 먹어본 것 중 제일 형편없네.
로버트: 그래. 난 와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수학만 해서, 연구만 해서 모른다, 그래. 몇 년산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나불대는 놈들 정말이지 눈꼴 시려 못 봐 주겠더라.
캐서린: 이건 샴페인도 아니야.
로버트: 병은 그럴 듯 하게 생겼잖아.
캐서린: “오대호표 와인”위스콘신에서 와인을 만드는 줄은 몰랐는데.
로버트: 병 채로 들이키는 애가 불평은 무슨. 와인은 우아하게 마시는 거야.
캐서린: (병을 건네며) 아빠도…….?
로버트: 아니, 너나 마셔.
캐서린: 정말로 안마실거야.
로버트: 그래. 네 생일이잖아.
캐서린: Happy birthday to me. (사이)
로버트: 너 생일인데 뭐 할 거니?
캐서린: 이거 마시고 있잖아.
로버트: 이런 날 너 혼자 있는 게 좀 그래.
캐서린: 혼자가 아니잖아.
로버트: 나 빼고.
캐서린: 왜?
로버트: 애비는 말고. 나가서 친구들 만나.
캐서린: 그럼 좋게?
로버트: 왜, 친구들이 만나자고 안 그래?
캐서린: 응.
로버트: 왜?
캐서린: 왜냐구? 친구가 있어야 만나든지 말든지 하지.
로버트: (실망하며)아-
캐서린: 웃기지.
로버트: 너 친구 있잖아. 금발머리 고 녀석 걔 이름이 뭐더라?
캐서린: 누구?
로버트: 엘리스 스트리트에 사는- 그 애랑 매날 붙어 다녔잖아.
캐서린: 신디 제이콥슨?
로버트: 그래. 신디 제이콥슨!
캐서린: 아빠, 그건 초등학교 3학년 때야. 걔네는 1989년에 플로리다로 이사 갔어요.
로버트: 클레어는?
캐서린: 클레어가 언니지 내 친구야? 게다가 언닌 뉴욕에 있어. 그리고 난 언니가 싫어.
로버트: 오기로 했잖아.
캐서린: 내일이나 돼야 얼굴 들이밀 걸. (사이)
로버트: 내 충고 하나 할까? 잠이 안 올땐, 수학 문제를 풀어보는 게 어때?
캐서린: 오! 제발
로버트: 같이 하자.
캐서린: 싫어.
로버트: 왜?
캐서린: 할게 없어서 그런 걸 해. 술이나 마셔.
로버트: 됐어. 너 예전엔 좋아했잖아.
캐서린: 이젠 아니야.
로버트: 넌 글도 깨우치기 전에 소수(素數)가 뭔지 알았잖아.
캐서린: 글쎄, 이젠 다 잊어버렸다니까.
로버트: (엄한 목소리로)캐서린, 네 재능을 썩히면 안돼. (사이)
캐서린: 그런 말 할 줄 알았어.
로버트: 너 힘들었다는 거 알아.
캐서린: 고맙네요.
로버트: 그렇지만 그건 핑계가 안돼. 게으름 피우지 마라.
캐서린: 내가 언제. 아빠를 돌봐줬잖아.
로버트: 난 눈이 없냐.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이나 자고, 인스턴트식품이나 먹고, 일도 안하고, 설거지 거리는 잔뜩 쌓이고, 그나마 잡지 사러 갈 때나 겨우 코빼기를 내밀잖아. 그것도 쓸데없는 잡지만 이만큼 사와서-네가 왜 그런 싸구려를 읽는 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래도 그런 날은 차라리 낫지. 어떤 날은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안잖아.
캐서린: 그게 얼마나 재밌는데.
로버트: 말도 안돼. 그런 날은 아예 망쳐 버린 거야. 네 스스로 내팽개친 거라구. 넌 지금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어. 네가 버린 게 시간만이 아니라는 걸. 놓쳐버린 아이디어들, 발견들…….(사이)내 말이 틀렸어?(사이)
캐서린: 며칠만 그랬어.
로버트: 그 며칠이 모두 얼마냐.
캐서린: 글쎄. 몰라.
로버트: 넌 분명히 알고 있어.
캐서린: 뭘?
로버트: 네가 셀 수 있다는 걸.
캐서린: 그만 좀 해, 아빠.
로버트: 말해봐. 너 정말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캐서린: 모르겠다니까.
로버트: 너, 분명히 알고 있어. 네가 허비한 날짜가 며칠이야?
캐서린: 한 달, 한 달 정도.
로버트: 정확한 숫자로.
캐서린: 아, 지겨워. 모른다니까-
로버트: 며칠이냐구?
캐서린: 33일.
로버트: 정확하지?
캐서린: 몰라…….
로버트: 이런 제기랄, 정확하게 대라니까.
캐서린: 오늘도, 정오까지 잤어.
로버트: (사이)그렇다면 33과 4분의 1일이라고 놓자.
캐서린: 그래. 맘대로 해.
로버트: 정말 대단한 숫자다!
캐서린: 좆나게 우울한 숫자지.
로버트: 캐서린, 네가 허비해버린 날들을 햇수로 바꾼다면 이건 좆나게 흥미로운 숫자가 될 거야.
캐서린: 33과 4분의 1년이 뭐가 그리 흥미로워.
로버트: 딴소리 그만해. 넌 분명히 알잖아.내가 무슨 말 하는지.
캐서린: (인정하며)1729주.
로버트: 그렇지. 1년을 52주로 계산하면 33과 4분의 1년은 1729주. 대단한 숫자지. 가장 최소의 숫자.
캐서린: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두 수의 세제곱의 합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소의 숫자.
로버트: 12의 세제곱 더하기 1의 세제곱은 1729.
캐서린: 10의 세제곱 더하기 9의 세제곱도 1729. 우린 해냈어. 잘났어, 정말. 고마워.
로버트: 거봐. 하다못해 네 우울증까지도 수학적이잖아. 그러니까 빈둥대지 말고 연구 좀 해라. 니 잠재력은-
캐서린: 내가 해 논 게 뭐 있나.
로버트: 넌 젊어. 아직 시간이 많다.
캐서린: 내가?
로버트: 그럼.
캐서린: 아빠는 내 나이였을 때 벌써 유명했잖아.(사이)
로버트: 그래.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어.
(사이)
캐서린: 그 후엔?
로버트: 그 후에?
캐서린: 아빠가 아프기 시작한 다음 말이야.
로버트: 그게 어쨌다는 거냐?
캐서린: 더 이상 일을 못 했잖아.
로버트: 아니, 오히려 나는 더 예민해졌어.
캐서린: 아빠.(웃음…….)
로버트: 난 그랬다. 사실이야. 틀림없어, 정말 굉장했지. 의심의 여지가 없어-
캐서린: 행복했었어?
로버트: 그래. 난 바빴지.
캐서린: 그건 같은게 아니야.
로버트: 난 차이를 몰겠다. 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고 그걸 했다. 하루종일 문제를 풀고 싶으면 난 하루종일 문제를 풀었어. 내가 어떤 정보를 얻고 싶으면, 그게 무슨 커다란 비밀이건 복잡하고 날 애타게 만드는 메시지가 됐건 내 주위에서 다 찾을 수 있었다. 공기 속에서, 굴러다니는 낙엽 속에서, 신문 박스기사에서.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과 향기 속에서도, 온 세상이 나한테 말을 걸어왔지. 내가 단지 눈을 감고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 메시지들이 그냥 들려왔다. 난 그렇게 했지. 그건 대단한 일이었다. (사이)
캐서린: 몇 살 때였어? 그게 시작된 게.
로버트: 20대 중반. 스물세, 스무 넷. (사이) 그게 네가 걱정하는 거니?
캐서린: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로버트: 캐서린,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대냐.
캐서린: 나이 더 먹는 얘기가 아니라니까.
로버트: 나 때문이구나. (사이)
캐서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로버트: 정말?
캐서린: 왜 안 그렇겠어?
로버트: 그게 네가 걱정하는 일이라면 의학서적을 보며 밤을 셀 필요는 없다. 발병의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냐. 그냥 단순히 유전되는 게 아냐. 내가 정신병자라고 해서 단지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캐서린: 아빠…….
로버트: 내 말 들어봐. 20대 초반엔 삶이 빠르게 변하고, 혼돈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도 있어. 네가 우울했다는 건 알아. 이번 주는 더 힘들었을 거야. 지난 2, 3년이 네게 지독한 기간이었다는 거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지. 하지만 넌 괜찮을 거다.
캐서린: 정말?
로버트: 그럼. 내가 약속할게. 노력해봐. 잡지 나부랭이나 읽지 말고, 침착하게 책상 앞에 앉아서 기계에 시동을 걸어봐. 네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하느님께 맹세한다.
캐서린: 좋은 징조?
로버트: 그래!
캐서린: 어떻게 이게 좋은 징조가 될 수 있어?
로버트: 왜냐구? 미친놈들은 자기가 정말 미쳤나 하고 우리 같이 EJ들지도 않아.
캐서린: 그래?
로버트: 물론이지. 미친놈들은 딴 생각에 더 바빠. 날 보면 알잖아? “내가 미쳤나?”하고 의문을 갖는 자체가 네가 미치지 않았다는 좋은 징조야.
캐서린: 미쳤다는 게 정답이래두?
로버트: 미친놈들은 그런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니까, 알아?
캐서린: 음.
로버트: 그런데 넌 지금 묻고 있잖아.
캐서린: 그러니까 난 안 미쳤다.
로버트: 그래서 네가 묻고 있다면, 그건 좋은 징조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