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서 / 복향옥
비가 그쳤다. 얼른 장화를 신고 호미와 부삽을 챙겨 든다. 어제, 우산을 든 채 한쪽 손으로 작은 화분들을 옮기고 부삽질 몇 번 했더니 손목이랑 어깨에 살짝 무리가 온 듯하다. 비 내릴 때 화단이나 화분을 정리하면 흙 푸기도 쉽고 먼지 날릴 일도 없어 좋은 것만 알았지, 늙어가는 몸 고달프다는 생각은 못 한 것이다. 허리가 먼저 시큰거리는 바람에 놀라 서둘러 들어갔더니 화단 주변이 마치 도둑맞은 자리 같다.
작든 크든 화분을 들고 들어오면 남편의 기색은 대번에 달라진다. 천지가 나무요, 꽃인데 또 뭘 사 들고 오냐는 것이다. 그의 말이 틀린 것 아니어서 그때마다 내 대답은 궁색하다. 시들었다고 싸게 주데요, 끝물이라 그냥 처분한대서요, 저거 샀더니 얘는 공짜래요, 그런 식이다. 한 번도 정가대로 샀다는 말을 못 한다. 게다가 여름이면 사다 나른 화초 반 이상이 말라 죽기 때문에 그의 핀잔이 무게를 갖는다. 손님 치르느라 바빠서 물 주는 걸 잊었다는 변명도 필요없다. “그러니까 사 오지 마.”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도 엊그제 또 들고 들어왔다.
내 단골 화원은 대형마트 입구에 있다. 장 보러 들어가다 구경하거나 나오다가 들른다. 두리번거리다 보면 절대로 빈손으로 그곳을 나올 수가 없다. 두 눈 질끈 감고 돌아서는 날에는 꽃집 주인이 부른다. “언니. 얘가 돌아가시려 하네. 가져다가 화단에 심으면 살 거예요.” 진심으로 그냥 주고 싶어 하는 걸 알면서도 꼭 생생한 화분을 하나 이상 사게 된다. 이번에도 어버이날을 앞두고 카네이션이랑 꽃들이 즐비한 풍경을 구경하다가,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에 이것저것 담아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화단 곁을 지나는 남편 뒷모습에 또 한 소리 듣겠구나 싶었는데 웬일인지 상자 주변을 힐끔 보고는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화초들을 못 봤나? 하면서 가보니, 밤새 비 맞은 분홍안개는 축 늘어져 있고 다른 꽃들 역시 꽃잎을 많이 떨궈버려 상태가 별로 좋아보이진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냥 얻어왔거나 저렴하게 가져왔겠거니 했으리라.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담겨있는 꽃들은 조금 더 큰 토기 화분으로 옮긴다. 거름흙을 섞어 화분을 채우고 주변에 있는 이끼를 떼다가 흙을 덮거나 자잘한 돌로 마무리한다. 전에 있던 화분들도 시원찮은 건 화단으로 옮겨 심는다. 그러면서 보니, 곁에 있는 이파리들은 어떤 꽃의 것인지를 또 잊었다. 해마다 그런다. 꽃이 피면 사진 찍어 휴대폰 앱에서 찾으리라, 그래서 이름표를 만들어 세우리라 다짐하지만, 돌아서면서 그 생각조차 까먹는다. 꽃은 물론 이파리만 봐도 척척 이름을 대는 이들이 부럽지만 따라 하지는 못한다. 그럴 새가 없다. 가게를 운영하느라 바쁜 이 생활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으니 그냥 누리는 수밖에.
이름을 몰라도 상관없다.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으니 그것으로 됐다.
첫댓글 김 선생님, 복 선생님 두 분의 처지가 너무 잘 이해가 됩니다.
이 맘때쯤의 하조나라는 참 이쁠 터인데요.
꽃 구경 가야겠어요.
말만 저리 했지, 정리가 안 돼 풀이 무성합니다. 실은 뭐가 풀이고 뭐가 꽃잎인지 몰라 뽑아내질 못해서 그래요. 하하
선생님 오신다면 남편도 반가워하니, 언제든지 오십시오.
저도 한번 놀러 가고 싶은데 시간이 나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선생님 글이 재밌습니다.하하.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꽃을 멋드러지게 가꾸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존경 스럽습니다. 저도 무척 꽃을 좋아하는데, 겨울이 무서워서 책임질 자신이 없어 보는 것으로 만족할 때가 많습니다. 하조나라를 보고 감동 했습니다.
안 그래도 예쁘던데요.
꽃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저와 닮았네요.
늘어가는 화분에 집이 점점 좁아집니다.
며칠 전에는 까페 사장이 꽃 손질하고 남은 입을 다문 꽃봉오리를 버린다기에 집에 가져다가 환하게 꽃 피우게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