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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가 머물던 서울 종로의 경교장에 한 손님이 찾아온다.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다는 그는 김구가 이끌던 한국 독립당의 당원이자 육군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였다. (탕~탕~탕~), 그날 김구는 안두희가 쏜 4발의 총탄을 맞고 향년 74세 나이로 눈을 감는다.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수십만 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다. 민족의 슬픔은 깊고 한스러웠다. 열흘간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온 국민이 상복을 입고 모두가 스스로 상주가 됐다. 태극기와 국화로 덮힌 백범의 유해는 경교장을 떠나 효창공원에 안치됐다. 광복 이후 정적이 된 김구와 이승만, 그 치열한 정쟁의 무대가 효창공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오죽하면 김구의 암살 배후가 이승만 이라는 소문까지 돌았겠어요. 근데 아까 영상을 보니까 이승만의 심정이 조금 이해는 돼요. 내가 대통령인데 어떻게 나보다 인기도 많고 존경도 많이 받는 라이벌이 있을 수 있지?
허준/방송인: 옛말에 死孔明走生仲達 죽은 제갈량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도망치게 한다. (죽은 뒤에도 적이 두려워할 정도로 뛰어난 장수를 뜻하는 말) 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상주이기를 자처하고 모여들고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더 압박감을 느꼈을 것 같애요.
최원정: 저 추모 분위기를 보면 역풍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암살시도는 하지 못했을 것 같지 않아요. 오늘 오랜만에 함께 해주신 신주백 교수님, 시청자들이 궁금해 하실 것 같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여쭐께요? 김구 암살 배후에는 이승만이 있다 없다?
신주백/前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인생을 걸어야 될 답변일 것 같애요. 어려운 점은 여러 말이 있고 소문이 있다가 최근 20여 년 전에(2001년 공개) 미군정 방첩대(CIC)의 문서가 하나 공개가 돼요. 그 문서에 보면 안두희는 미방첩대의 정보원이자 요원이다 라는 내용이 있어요. 그러면 미국이 관계되는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어 왔고 또 한 측면에서는 안두희가 그 이후에 이승만 정부의 비호를 받은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승만 정부와 관계된 게 아니냐 라는 이야기는 있지만 특정해서 문서가 발견된 게 없고 증언도 나온 적이 없죠. 그런데 관계된 당사자들이 모두 돌아가셨다.
최태성/한국사 강사: 다양한 추측은 가능하지만 확실한 물증은 아직 없다.
이시원/배우: 근데 저는 효창공원에 김구 선생의 묘지가 있는 거 처음 알았어요.
최태성: 사실 효창공원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시는 분들이 아마 많이 계실걸요.
허준: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효창운동장이 어디 있는지는 아시는 분이 많으신데 (서울 용산구 효창원로 177-18) 거기 효창운동장 옆에 효창공원이 있고 효창운동장은 아마추어 축구선수들이 많이 이용하고요. 축구 동호회들도 많이 이용을 하고 프로그램 촬영도 축구경기를 효창운동장에서 많이 합니다.
최원정: 너무 당연히 김구 선생님의 묘는 우리가 현충원에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효창공원에 있군요. 이승만 대통령의 묘는 어디에?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현충원에 있지 않습니까?
최원정: 현충원에 모셔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은데요?
김문식: 오늘 설날 명절이 되면 성묘를 하죠. 가서 조상을 기리면서 인사하는 뜻으로 참배를 하는데 그런 뜻으로 보면 현충원으로 가서 참배하는 게 같은 의미가 있죠. 근데 효창공원은 사실은 현충원 보다 더 먼저 국립묘지가 될 뻔한 곳이에요. 여기에 김구 선생의 묘소가 있지만 김구 선생 이전에 여러 사람들의 묘소가 만들어지거든요. 그 이야기가 길고 슬픈 이야기예요. 오늘 설날을 맞이해서 효창공원의 슬픈 역사에 대해서 검토를 해보겠습니다.
최원정: 김구와 이승만의 치열한 대립, 우리의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인데 두 사람의 귀국 모습부터 극명한 차이를 보이잖아요?
최태성: 1945년 광복되고 나서 남측에는 미국이, 북측에는 소련이 들어오잖아요. 이렇게 들어올 때 미군정은 어떤 행정부도 인정을 하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인정이 안 돼요. 임시정부 미주 위원장이었던 이승만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이 사람들이 그 자격으로 들어와야 해요. 결국은 개인 자격으로 10월달에 이승만이 들어오고, 그 다음달 11월에 김구가 들어오죠. 근데 들어올 때 여기서 차이가 나요. 미군정이 둘을 대하는 모습이 달라지는데, 이승만은 사전에 맥아더한테 편지를 보내 서 어필을 해요. 특히 반소-반공을 강력하게 어필을 하거든요. 맥아더가 여기에 열광하죠. 그래 가지고 이승만이 귀국할 때 자기 전용기를 보내줍니다. 그리고 미군정 하지 중장한테 뭐라고 얘기 하냐면 이승만을 조선의 영웅으로 대접을 해라. 하지 중장은 자기 부관을 이승만의 임시부관으로 임명을 합니다.
이시원: 제대로 밀어 주네요.
최태성: 제대로 밀어주고요. 숙소는 스위트룸으로요. 차는 순종이 쓰던 리무진을 제공까지 해요.
최원정: 왕족대우를 하네요.
최태성: 이 정도면 VIP급 아닌가요.
이시원: 제대로 힘을 실어주네요. 그 사진도 분명하잖아요. 이승만이 환영회에서 연설할 때(1945년 10월 20일) 하지 중장이 떡 뒤에 서 있으니까 뒷배를 봐주는 사람처럼 인상이 깊었거든요.
최태성: 이런 상태에서 정국 주도권을 누가 쥐었을까요?
허준: 이승만
최태성: 당연히 이승만이 쥐고 있지요. 그리고 나서 김구가 들어온다고 했는데 김구는 미군정하고 껄끄러웠어요.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해라. 근데 미군정은 인정할 수 없다. 당연히 마찰이 있었죠. 당시 하지 중장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김구는 스튜에 간을 맞추는 소금 정도라고 표현해요.
허준: 그런데 저희가 정치에 대해서 여지껏 많이 배웠잖아요. 김구 선생님의 정치 스타일이 강단이 있잖아요. 미군 스타일로서는 이거 핸들링이 안 될 것 같은데 했을 것 같애요.
최원정: 김구 선생은 사실 중국에서 독립투쟁만을 해오신 분이잖아요. 그것 밖에 모르시는 분이고 이승만 前대통령은 미국에서 근대정치를 보면서 권력의 본질을 알고 외교의 세련된 것을 익혔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 수 위였다.
신주백: 김구 선생은 강골의 이미지가 컸어요.
이시원: 근데 어떻게 보면 둘이 성격이 다르잖아요. 둘의 사이는 어땠나요?
신주백: 1945년 귀국하고 났을 때 이승만 70세, 김구는 69세였어요. 그래서 김구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면 형님~ 형님~ 했어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우남(이승만의 호) 께서는~ 이승만을 항상 우대했어요. 그런데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된다 라는 발언을 해요. 그러면서 김구와 정치적 입장이 다르구나. 해방 이후에 이 상황을 헤쳐나갈려고 하는 대안이 다르구나 하는 걸 공식적으로 확인을 해요.
최태성: 백범 김구라는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굵은 획을 그었던 장면이 몇 장면 있어요. 그 중에 한 장면을 꼽아보면 1948년 5월 10일 5.10총선이죠.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선거, 그때 김구가 모든 정치적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남북협상에 뛰어들어요. (동영상-1948년 4월 22일/남북연석회의/평양모란봉극장),
김구/평양: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하기 위하야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한 곳에) 회집하여 민주 자주의 통일 독립을 전취할 대계에 참석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위대한 발전이며~
최태성: 저는 이 장면인 것 같애요. 명문이 선언이 되죠. 그게 바로 김구의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서울신문, 1948년 2월 13일)
최원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는 자~
허준: 근데 그 단어 앞에 하나가 빠졌어요. To: 이승만 이거는 구차하게 대놓고 얘기한 거잖아요.
이시원: 이승만이 듣고 발끈했을 것 같애요.
신주백: 김구의 그 선택은 당시 48년 5월, 6월 시점에 남한의 정치 지형에서는 정치가로서 고립되는 선택을 스스로 한 거죠. 그런데 개인 김구 개인으로서는 김구가 갖고 있는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고 이게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에게는 매우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최태성: 이게 재미 있는게 대통령 뽑을 때도 그렇고 부통령 뽑을 때도 그렇고 백범 김구는 불참했는데 표가 나와요. 그래 가지고 이런 얘기도 있었어요. 백범 김구가 단독 정부에 참여한대 라는 소문까지 돌게 됩니다. 그러니까 백범 김구가 딱 선을 그어요. 뭐라고 하느냐면 이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과 무관하다 딱 강조하면서 선을 긋죠.
허준: 대한민국에 지금 1948년 수립된 정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1919년 임시정부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얘기예요. 이건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제 진짜 대한민국 정부라고 선언하는 순간 지지자들이 김구 쪽으로 몰려가게 되면 이건 자칫 국가가 2개, 3개로 분열의 위기로 이어질 상황이잖아요? 여기서 바로 암살의 배후가?
신주백: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김구가 명분의 입장에서나 현실정치의 입장에서나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놓고 부하직원들이나 비밀요원들에게 가서 김구 죽여라고 직접 지시할 만큼~, 그건 하수죠.
이시원: 목에 걸린 가시가 빠지지 않는군~ 그 다음은 알아서~
신주백: 역사의 마지막 증거는 팩트입니다.
최원정: 지금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잖아요. (김구 장례동영상), 모든 사람들이 김구 선생을 애도하고 있고 지금 이승만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김문식: 실제로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국민장으로 거행이 되거든요. 그런데 이게 10일장을 치르는데 열흘 동안 조문객이 한200만 명, 그리고 효창공원에 묘소가 만들어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참배행렬이 끊이질 않는 거죠. 당연히 이승만 대통령 측에서 볼 때는 굉장히 불편한 장면이 됐고 그러다 보니까 경찰들이 묘소 참배객을 막는 거예요. 시민들 불심검문도 하고 그래서 그걸 피하기 위해 새벽에 몰래 김구 묘소를 갔다 온 참배객이 있다는 정도로 도둑참배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온 분위기였어요.
이시원: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효창공원을 막고 싶지 않았을까요?
최태성: 뭐 효창공원이겠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이 남긴 자전적인 독립운동 기록이 보물 제1245호로 지정 되었잖아요. 바로 白凡逸志, 그 백범일지가 사실 출간되자마자 바로 베스트셀러가 돼요. 다들 읽고 싶어할 것 아녜요. 그런데 딱 돌아가시고 나서는 이게 거의 금서취급을 당하죠. 이런 모습들이 보여요.
허준: 생각해 보면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하셨고 가까스로 살아남으셨잖아요. 근데 대한민국에 돌아왔더니 함께 형님 형님하던 동지라는 사람은 나와는 길이 완전히 다르고 김구 선생은 고난을 사후에 까지도 사셨네요.
김문식: 사실 효창공원에 김구 선생만 안치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김구 선생보다 먼저 묻힌 사람들이 있거든요. (동영상), 항일무장 투쟁단체 한인애국단 소속의 서른세살의 청년 이봉창, 그는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다. 비록 실패했지만 일본의 수도 한 복판에서 천황에게 폭탄이 투척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이봉창은 대역죄로 사형당한다. 이 사건은 침체된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고 또 다른 의병 항쟁으로 이어진다.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처단하는 등 일제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의거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윤봉길은 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으로 옮겨진 뒤 총살당했다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뜨겁고 아름다운 청년, 항일무장투쟁단체 흑색공포단의 백정기, 중국주재 일본공사를 암살하려다가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일본 감옥에서 옥고로 세상을 떠난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일본 땅에 묻힌 세 명의 영웅, 1946년 김구는 일본의 박열 등에게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유해봉환을 부탁한다.
최원정: 새 정부를 구성하고 새 질서를 확립하고 이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처절하게 독립운동한 분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것은 누군가는 해야 되는데 그걸 김구 선생이 나서신 거네요.
이시원: 솔직히 김구 선생에 대해서 젊은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비판도 있긴 하잖아요. 실제 김구 선생 마음이 어땠을까? 내가 젊은 청년들을 어떻게 보면 희생해서 독립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죄책감에 마음 속에 응어리가 항상 있었을 것 같애요.
최태성: 실제로 김구는 1946년 6월 18일 3의사 추도식에서 이런 말을 해요. “그 세 사람을 죽으라고 내보낸 것은 바로 나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을 보낸 나만이 살아 있으면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한량없다” 당연히 독립 이후에 그들의 유해를 다시 가져오는 것 이거야 말로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라고 백범 김구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허준: 그래야 우리가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건 인정을 받는 다는 죽어서도 대우를 받는다는 걸 보여주어야 되거든요. 더 중요한 건 이때 당시에 많은 정치지도자들은 앞으로 내 세력 나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야 되는 상황인데 김구 선생은 그것보다는 일단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먼저 데리고 와야 한다. 앞장 선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신주백: 다행히 어디에 묻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우선은 백정기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묘는 빨리 찾았는데 문제는 윤봉길 의사의 묘였죠. 윤봉길 의사의 묘를 찾지 못해서 고민 고민 하다가 그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관리인을 찾아가서 박열이 갖고 있는 강렬한 의사표현으로, 너 만약에 윤봉길 의사 묘지 위치를 알려주지 않으면 공동묘지를 폭파해 버리겠다 라고 했기 때문에 그걸 통해서 알아냈죠. 가서 보니까 쓰레기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묻혀있었는데 그게 평토였어요. 봉분도 없이 해놔서 사람믈이 막 밟고 지나다녔던 거예요. 일본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한국인들이 윤봉길 의사 묘를 몰랐으면 한 게 일본의 바람이었을 테고 또 알아도 모욕감을 느끼게 할려고 한 의도였던 거죠.
이시원: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장 가는 길목에 정말 지금 들어도 화나는데 그 당시 유해를 수습하러 갔던 사람들은 그걸 보고 털석 주저 앉았을 것 같애요.
신주백: 맞아요, 일본이 노린 게 그 점이죠. 일본의 의도는 모욕감 능멸감을 느끼게 만드는 게 첫번째였고, 두번째는 그로 인해서 조선인들의 분노가 일어나면 윤봉길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모이는 기폭제가 되지 않도록 그걸 없애버려야 될 것 아네요.
최원정: 지금 일반인도 인권회복 차원에서 유해수습을 위한 것은 꼭 이루어지는 거로써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건데 하물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쳤던 분들의 유해수습은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인 거예요.
최태성: 정의를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준: (동영상), 국군 유해발굴단이 6.25 참전용사들의 유해를 계속 찾아내고 가족들에게도 전달해 주고 있잖아요.
최원정: 그래서 어렵게 모셔온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가 효창공원에 묻힌 건데 김구 선생도 여기 묻히셨고 이분들도 다 여기 묻히고 여기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김문식: 또 더 올라가야 해요. 효창공원의 이전 역사를 봐야 되는데 효창공원이 처음에는 효창묘(孝昌墓)예요. 그러다가 고종때 효창공원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원(園)은 왕의 私親들 그러니까 왕이 낳은 사람으로 왕이나 왕비가 아닌 사람들이 원이 된다고 했죠. 그러니까 세자나 세손이나 후궁이나 이런 사람들이 되는데 효창원은 바로 정조하고 의빈성씨의 사이에서 내어난 장자인 문효세자, 문효세자가 일찍 죽어요. 그래서 문효세자의 묘가 효창묘죠.
최원정: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덕임이 바로 의빈성씨
김문식: 예전에 (그날 351회) 최원정씨랑 저랑 서삼릉에 갔었죠. 그게 효창원에 있다가 1944년에 사삼릉으로 문효세자의 묘를 옮긴 거죠. 문효세자는 정조가 31살 때 늦게 낳은 아들인데 안타깝게도 5살에 요절을 하죠 (1786년 5월). 그리고 어머니였던 의빈성씨는 아들이 죽고 넉달 뒤에 9월에 만삭의 몸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그래서 정조는 궁궐에서 가까운 창덕궁에 살고 있으니까 십리쯤 떨어진 지금의 효창공원에다 효창묘를 만들었고 그의 어머니였던 의빈성씨의 유언이 아들 곁에 묻히겠다 해서 그래서 옆에다 묻어준 상황인 거죠.
이시원: 근데 저희가 지금 조선의 왕릉 시리즈를 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왕세자묘와 의빈성씨의 묘였던 거고 그건 또 이사도 갔잖아요. 그러면 우리 지금 주제 잘 잡은 거 맞아요?
최원정: 심지어 의빈성씨는 후궁이라서 왕릉도 아니고 원(園)인데
최태성: 아니 그때 드라마 잘 보셨다면서요.
허준: 정조가 덕임! 덕임!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최태성: 정조에게 의빈성씨는 첫사랑이자 끝사랑이니까 서열상 후궁이었지만 사랑으로 본다면 1등이죠. 그러니까 효창원도 역시 왕비는 아니지만
이시원: 가장 사랑했던 후궁이니까 능(陵)급이다?
김문식: 근데 정조한테 효창원은 굉장히 중요하죠. 왜냐면 첫째 아들이면서 세자로 책봉된 왕위 계승자였던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전례없이 특별하게 묘 이름을 효창이라고 붙여주었어요. 그 전에는 세자가 죽었을 때는 묘 이름을 따로 지어주지 않았어요. 이렇게 하는 게 정상인데 효창묘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사당 이름도 문희묘(文禧廟) 라고 지어주었어요. 그 다음에 제사를 지낼 때 의빈성씨의 신도비를 지을 때 전부 정조가 직접 지었어요. 가장 인간적인 정조의 모습이 나타난 글이고요. 자주 방문을 합니다. 왕이 행차할 마다 여기에 들르죠.
최태성: 그러면 우리가 한번 정조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효창원 230여 년 전의 모습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문효세자의 묘 옆에 의빈성씨의 묘가 있고요. 묘 사이가 백보 정도, 이후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의 묘가 있었구요. 숙의 박씨 묘 옆에 딸 영온 옹주의 묘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원래 효창원의 모습입니다.
김문식: 왕실가족 묘가 되는 거죠.
최태성: 효창원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냐면 지금의 효창공원 뿐만 아니라 현재의 효창동, 공덕동, 청파동 일대를 아우를 정도로 큰 규모였습니다.
일동: 엄청나게 크다.
최원정: 저 정도 크기면 도심의 허파를 가르킨데요
김문식: 정조를 우리가 흔히 조선 최고의 정치군주라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왕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우리가 잘 아는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수원의 현릉원에 조성하고 행차하셨는데 표면적으로는 효로 부친의 묘소를 참배하니까 그걸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는 이벤트를 계속 벌이거든요. 그랬던 정조가 유일하게 군주가 아니라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만든 묘소가 바로 효창원이죠.
신주백: 이런 정으로 아까 정조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김문식: 실제로 정조의 제문을 읽어보면 절절해요.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진짜라 하는 것이 반드시 진짜가 아니요 꿈이라 하는 것이 반드시 꿈은 아니구나-정조어제 효창묘신도비명,
최원정: 근데 효창원은 우리가 효창공원이라고 하잖아요. 이번엔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바꿨던 의도랑 비슷한가요?
최태성: 그렇죠
이시원: 정말요?
김문식: 실제예요. 효창원이 효창공원으로 바뀔 때가 일제 때 1920년 이거든요. 대체로 1920년대 부터는 효창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보다 조금 더 올라가면 1894년에 청일전쟁이 있죠.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바로 이곳을 군 주둔지로 활용을 해요. 일본군이 이리로 들어오거든요. 왕실 묘소 일대가 그린벨트 처럼 조성이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숲도 있고 언덕도 적당히 있고 이러니까 군대가 주둔하기가 좋은 장소가 된 거예요. 그래서 당시 효창원은 일본군 숙영지 또 병참기지로 활용되기 시작합니다.
이시원: 우선 왕실 묘역이고 그만큼 소중한 곳인데 이걸 일본 군사들이 막 밟고 다녔다는 거잖아요.
최원정: 예의가 없는 거죠.
허준: 임진왜란 당시 선릉과 정릉을 파헤치고 여기 와서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아이구~
최태성: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효창원 묘 촬영을 해봤는데요 (묘4개).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인들이 효창원을 뭐라고 생각하냐면 전승지의 성지로 생각을 하죠. 다음에 말도 안 되는데 효창원 인근에 유곽(성매매 업소)도 들어와요
일동: 유곽이요?
최원정: 묘 옆에다요?
최태성: 맞습니다. 그리고 효창원 배후지역에는 일본인 거주지역이 조성됩니다. 이 지역을 자신들의 유흥지로 활용하는 모습들이~
최원정: 유곽은 왕실 묘역에다 뭣하는 짓입니까?
허준: 그런데 그전부터 그런 말이 있잖아요. 용산을 지배하면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다.
신주백: 군사적으로 그런 역사가 있어요. 왜 그러냐면 고려 때 몽골의 침입 때 몽골군이 주둔한 지역이 용산이었고, 임진왜란 때도 북상하던 왜군이 주둔했던 지역이 용산이었고 러일전쟁 때는 아예 일본이 용산에다 일본군 상설주둔지를 만들자. 임시로 해서 전쟁 끝나면 철수하는 게 아니라 계속 주둔지로 만들어 조선을 지배하자 해서 만든 게 역사가 지나다 보니까 오늘날 용산이 주한미군 기지가 되었죠.
이시원: 계속 뭔가 쌓여가는 느낌, 용산이 군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뭔가 이점이 있나요?
신주백: 있어요. 서울에 사시는 분들은 생각할 수 있는 게 뭐냐면 한강 이남 쪽에서 강을 건너 남대문 안쪽으로 들어온다고 상상해 보세요. 다리로 얘기해 본다면 성산대교 양화대교 원효대교 한강대교 동호대교 올림픽대교 다리가 죽 있잖아요. 다니다 보면 유일한 평지가 용산입니다. 한강 건너 유일한 평지가 용산, 어느날 일본군 장교가 답사를 (1883년 3월 7일/고종 20년) 했어요. 자기가 볼 때는 용산이 최고예요. 왜 그러냐 일단 평탄해요. 그리고 4대문 중에 남대문 까지 어디서든지 평지를 통해서 바로 갈 수 있어요. 더구나 한강에 있는 여러 나루터 중에 용산 나루터가 수심이 깊었어요. 큰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최원정: 사통팔달의?
신주백: 그렇죠, 대규모 부대가 주둔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는 안성맞춤인 거죠.
이시원: 정조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여자와 아들이 묻혀있던 곳에 가까이 있고 싶어서 정한 건데 여기에 유곽까지 있으니 정조가 보았으면 땅을 치고 울었을 것 같애요.
최원정: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효창원을 이런 용도로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상록수 노래)-------이광용 아나가 무대에 골프채를 갖고 등장/양말을 벗고----------박세리 선수처럼 IMF때 맨발로 골프치다------------
일동: 이광용 아나가 친 공이 홀에 들어가자 박수
이광용/아나운서: 기억하세요? 25년 됐네요. 1998년에 당시 LPGA US 여자 오픈에서 18홀 연장 승부 끝에 친 티샷이 물 가득한 해저드로~ 치기가 힘들었는데 세컨드 샷을 양말을 벗고 연못에 맨 발로 들어가 쳐낸 공이, 결국 연장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한 박세리 선수의 감격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당시 IMF로 힘든 우리 국민 모두에게 희망을 안겨준 승부이기도 하죠. 그 이후 박세리 프로 뿐만이 아니라 김미현 선수, 박지은 선수, 수많은 선수들이 LPGA에서 활약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세리 키즈가 대한민국에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수많은 선수들이 활약을 하고 있는데요. 오늘 세리 키즈 중에 한 분을 모셨습니다. 최예지 프로님 어서 오세요.
최예지/골퍼: 안녕하세요
최원정: 프로님을 모셨는데, 멋진 스윙 한번 보여주세요. 최예지 골퍼가 무대에서 직접 명품 스윙을 선 보이다.
최예지: 안녕하세요 최예지입니다. 박세리 키즈라고 하면 보통 1986~88년생을 지칭하는데 저는 95년생이지만 아버지가 골프를 너무 좋아 하셔서 US 오픈 맨발투혼 장면을 많이 봤어요. 어린 마음에도 박세리 선배님이 너무 멋있어서 골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광용: 박수 한 번 주세요.
일동: (격려의) 박수!
이시원: 저희가 지금 효창원 얘기하고 있거든요. 감동적인 얘기인줄은 알겠지만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거예요?
이광용: 다 얘기할 거예요. 여러분, 우리나라가 골프 강국인 건 아시죠? 그런데 우리의 골프의 시작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 대한민국 최초의 골프장이 있던 자리가 바로 용산 효창원입니다.
최원정: 그래서 골프 얘기를 시작했구나.
허준: 효창원에다 골프장을 지었다고?
최태성: 1921년 효창원에 세워진 최초의 골프장입니다.
최원정: 우리 왕가의 묘들이 골프장의 헤저드처럼~
이시원: 너무 충격적인 거예요.
이광용: 사진 보시죠, 이게 100년 전에 있었던 용산 효창원에 있었던 골프장의 사진입니다.
이시원: 사진에 저기 말뚝 박아 놓은 게 뭐죠?
이광용: 지금 하얀 말뚝, 노랗게 원으로 표시된 말뚝 안에 있는 것이 의빈성씨의 묘로 추정됩니다.
허준: 묘 주변에 말뚝 박아 좋고 오비타 라고 하면서 치고 있는 거예요?
이광용: 골프장 한 가운데에 왕실의 묘가 있는 거죠?
이시원: 잘못 치면 무덤이 공에 맞겠는데요?
최예지: 경기 중에 공이 묘지나 밖으로 많이 날라갔을 거예요. 이 골프 코스의 이름이 낙원 파라다이스였다고 합니다.
이시원: 불순한 의도가 느껴지는 이름, 너무 한다.
최태성: 일본이 뭔 하는 짓이야, 정조의 입장에서는 너무 화날 것 같애.
신주백: 침략자와 피침략자는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완전히 상반된 관점을 그대로 드러내세요.
이광용: 골프공이 날라와서 근처 주민들이 지금 뭐하는 거냐 항의를 하면 왜 우리 놀이터에 와서 방해하느냐고 적반하장격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최태성: 정말 기본적인 예의도 없잖아요. 왕릉에다 골프장을 지어놓고 희희낙낙하는 모습이 너무 한다.
허준: 애들은 캐리로 데리고 다니고 몹쓸 짓은 다 했네.
이시원: 캐디로 일하는 어린 애들이 자기 몸집만한 골프채를 들고 있잖아요. 이게 어떻게 보면 우아한 척 하면서 우리나라를 착취하고 있는 모습을 사진 한 장으로 보여주고 있네요.
이광용: 그런데 효창원에 골프장이 들어선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철도국에서 철도호텔을 운영했는데 호텔에다 사람을 계속 머물게 하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허준: 레저
이광용: 볼거리 즐길거리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근처인 용산 효창원에 골프장을 떡 하니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유치했다고 합니다.
김문식: 일본에서 효창원을 어떻게 이용했느냐를 보셔야 되는데 철도호텔이 만들어진 자리가 대한제국이 탄생한 환구단 자리예요. 환구단 위에 호텔을 지어놓고 일본인 손님을 위한 놀이시설을 조성을 한 거예요.
이시원: 일본 제국은 진짜 너무 야비하다.
김문식: 이게 서울 효창원에 만들어진 1호 골프장이에요. 2호는 청량리에 3호는 군자리에 만들어지는 데 다 왕릉자리예요.
이광용: 여기서 제가 퀴즈 하나 드릴게요. 한반도 조선 땅에 세워진 1호 골프장에서 조선 사람으로 최초로 라운딩을 한 사람은 누굴까요?
허준: 총독
이광용: (6명 가족사진 등장), 이 안에 답이 있습니다.
최원정: 왕실 사람은 아닐테고~
이시원: 친일파로 제일 유명한 이완용!
이광용: 이완용 비슷했어요, (이완용 가족사진), 바로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1924년 종묘에 보관된 어보 두 개가 도난 당하는 일이 있었어요. (어보-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던 임금의 도장, 2017년 조선왕실 어보와 서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그 어보 실무책임자가 바로 이항구였습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때 이항구는 뭘하고 있었냐? 바로 효창원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습니다.
이시원: 이항구는 석고대죄해야 되겠다.
이광용: 사람들이 비난하니까 이항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종묘의 어보라는 것은 당장 나라에서 쓰시는 것도 아니요 승하하신 후에 만들어 노은 돈으로처도 몇푼어치 안되는 것인데 그만 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골프놀이도 못한단 말이요? 그러면 집에서 술이나 먹거나 계집을 다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구려”
이시원: 양아치 아닌가요?
허준; 아니, 저 사람 묘 어디예요? 저 사람 묘를 파헤쳐야 되는 거 아녜요?
김문식: 덕종(성종의 아버지/추존왕)과 성종의 어보가 없어진 걸로 알려져 있구요. 그래서 사라진 어보를 찾지 못하고 새로 만들었는데 그게 6.25때 미국으로 반출되었어요. 그래 가지고 2015년에 어보가 환수가 됩니다.
이광용: 여러분께서 보신 것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이 일제 강점기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골프 100년사가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여러가지로 복잡한 마음이 든다.
최예지: 맞아요, 그렇게 시작한 골프라는 스포츠가 태생적으로 아픈 역사를 딛고 앞으로 더 많은 분들에게 힘이 되고 사랑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광용: 최예지 골퍼를 어렵게 모셨으니까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저 오비란 친하거든요. (OB(out of bounds)-코스의 경계를 넘어선 장소), 오비 안되는 방법 좀~ 자꾸 나가요. 이리로 저리로
최예지: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오비를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이런 말이 있잖아요. “초보는 걱정하는 대로 공이 가고 고수는 생각하는 대로 공이 간다” 고 오비를 생각하게 되면 정말 오비로 가게 되고요 내가 보낼 곳만 생각한다면 긍정적인 마인드로 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광용: 폐부가 찔리는 느낌! 오늘 최예지 프로 고맙습니다. 효창원을 골프장으로 만들었던 일제는 이후 스키장으로 가족공원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계속합니다. 심지어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태평양 전쟁에 참여한 일본군 전사자를 위한 충령탑을 여기에다 짓겠다는 시도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복을 일년 앞둔 1944년 10월 결국 효창원 묘역군을 고양시 서삼릉으로 천장합니다. 이제 껍데기만 남은 효창원, 백범 김구는 이곳이야 말로 삼의사의 유해를 모실 최고의 장소라고 판단합니다.
내레이션: 1946년 6월 15일, 부산을 떠난 특급열차 조선 해방자호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김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삼의사의 유해였다. 궂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추도식,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흑색 공포단의 백정기, 일본군 대장을 처단한 윤봉길 의사까지 한 줌의 유해로 돌아온 삼의사의 영정 앞에서 김구는 목 놓아 울었다.
최원정: 김구 선생의 오랜 바람이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비어 있는 효창원 자리에 삼의사의 유해가 묻힌 거네요.
최태성: 맞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효창원(1924)이 효창공원으로 바뀌게 돼죠. 이러면서 왕가의 묘들이 빠지게 됩니다. 문효세자의 묘 자리에 드디어 삼의사의 묘를 환치를 합니다. 그리고 2년 뒤에 그 옆에다 의빈성씨의 자리에 바로 임시정부의 요원이었던 조성환, 이동녕, 차리석 선생의 유해가 안치가 되었죠.
신주백: 일골분의 묘와 더불어서 하나의 묘비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묘입니다. 여순 감옥에서 돌아가셨잖아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그분의 유해가 돌아오면 이곳 삼의사 옆에 안장하기 위해서 假墓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가묘상태로 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최원정: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왜 못찾고 있는 거예요?
신주백: 공동묘지 내에서 안중근 의사의 시신이 묻힌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일본측이 수백기 묘가 있는 공동묘지 전체 중에서 어디다 라고 특정을 안해주고 자료가 없는 건지 공개를 안해주고 있고 더구나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에 도시가 많이 개발되면서 공동묘지 자체도 많이 훼손되었지요.
허준: 박열 식으로 해결을 못했나요? 안 가르쳐주면 다 폭파시킨다 이런 식으로
최원정: 이승만 대통령에게 효창공원은 내노라 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다 안치되어 있고 기념하는 묘면 이승만 입장에서는 약간 거리를 두어야 하는 상황이네요.
김문식: 지금 그러니까 완전히 임시정부의 묘역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이승만 정부로서는 이의 의미를 희석시킬려고 노력을 하게 돼죠. 그래서 바로 효창 운동장을 만드는 계획을 해요. 1954년 한국전쟁 직후부터 여기다가 축구장 배구장 실외 스케이트장 다 있는 종합운동장 건설계획을 했어요. 서삼릉으로 옮길려고 시도하죠. 설계를 끝내고 공사를 시작한 게 1956년 5월 쯤에 육군공병대대가 운동장 건설공사를 착수해요. 그런데 만약에 종합운동장 설계대로 되면 삼의사 묘소와 김구 선생 묘소 앞에 까지 관중석이 오는 거예요.
허준: 일본하고 무슨 차이에요?
김문식: 당연히 사회 각계 각층에서 이걸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래서 건설공사가 중단이 됩니다. 그렇지만 계획 자체가 완전히 철회된 것은 아니었어요.
최태성; 그래서 결국 종합운동장 보다는 규모가 작은 효창운동장으로 건설이 됩니다.
신주백: 이승만 정부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거죠. 어떤 관료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효창공원의 백범 묘지에 해마다 참배자가 늘어가고 있어 민심을 모으는데 지장이 많다” 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이 있는 헌법을 개정하고 출마하는 경우죠. 여론이 좋을 수가 없죠. 이런 상황에서 효창공원이 그런 안좋은 여론에 중심지 역할을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비서관에게 이거에 대해서 어떻게 해봐라. 그래서 아마 정권 내부에서 또 다른 정치적 의도로 1956년에 이 공간을 재구성할려고 했다.
이시원: 자기 정권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애국 선열의 묘를 바꿔볼려고 다시 자기가 원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계속 시도를 했다.
최태성: 그런데 여기서 참 아이러니한 일이 있어요, 1960년에 제2회 아시아 축구선수권 대회가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광복 직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최초의 국제행사예요. 근데 정말 대박인게 우리나라가 전승 무패 우승을 차지해요. 재미 있겠어요? 없겠어요?
일동: 당연히 재미 있죠.
최태성: 무려 10만 명 이상이 여기에 몰려 들어요. 흥행이 대성공인 거에요. 가뜩이나 우리나라가 가난한 나라인데 우승을 한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이러니까 사람들이 여기서 열광을 하면서 이들의 인식 속에서 효창운동장은 우리가 우승했던 곳, 스포츠의 경기장으로 각인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애국선열의 묘보다는 우리가 우승한 것으로 이미지가 옮겨져 버리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거죠. 여기에 얼마나 많은 입장으로 난장판이 되었겠어요. 여기서 술 먹고 심지어는 소변까지 보고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허준: 사실 우리나라에서 스포츠가 정치적으로 이용된 경우가 많치 않은가요? 프로 야구의 개막도 그렇고, 그래서 더 배워야 되고 더 공부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기서 열광한 국민들이 무슨 잘못입니까? 저걸 희석시키기 위해서 정치적 의도를 가진 분이 문제인 거죠.
최원정; 지금도 정권에 따라서 어디에 참배 하느냐가 중요한 정치 행위이잖아요. 이 독립지사 묘소는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된다. 효창공원에는 겹겹이 슬픈 역사들이 많이 쌓여있다는 사실이 비통하고 안타깝네요.
김문식; 효창원-효창공원의 역사변화는 끝난 게 아니에요. 뒤에도 계속 여기가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이 되는데 박정희 정부 때 여기에 1960년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이 세워집니다. 원효로라는 이름이 있어서 원효대사 동상이 공원 안에 있어요.
이시원: 여기에 별의별 것이 다 있네요. 독립투사의 얼굴, 반공투사, 원효대사도 있고 여기에 몇 가지의 이야기가 한 번에 같이 묻혀져 있는 느낌,
신주백: 역사적 의미가 한국의 근대사로부터 현대사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중첩되어서 나타나는 공간이죠. 매우 압축된 이미지가 이 공간 안에 다 들어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우여곡절들이 완전히 뒤엉켜 가지고 하나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겹겹이 층층이 되어 있는 걸 나누어서 보게 되면 다른 역사적인 맥락이 있는 거고 우리가 이걸 기억해야 되는 이유는 겹겹이 쌓여 있는 하나 하나의 맥락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
최원정: 진짜 수백 년에 걸쳐서 쌓인 역사 효창공원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 봤는데 한 번 가게 되면 많은 생각이 들 것 같애요.
허준: 최고의 명당이라고 불리는 자리, 그런 자리들은 전쟁이 일어나거나 침략의 역사 수탈의 역사가 존재하게 되어 있다. 용산이 서울 중심에서 가장 전략적인 중요 요충지 라고 한다면 그곳에서 많은 역사가 일어났다는 애기이다. 힘이 없는 민족에게 명당은 수탈지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이제는 힘을 더 길러서 이곳을 우리 민족의 명당자리로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최태성: 지금 임시정부 요원들이 계시잖아요. 사실은 예전부터 계셔왔어요. 그런데 과연 우리들이 그분들을 얼마나 기억했을까 라는 반성이 듭니다. 사실 이 공간을 잘 바꾸고 미화한다고 해도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이 공간은 죽어 있는 공간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다.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 자신의 삶과 목숨을 내어 놓으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산자들의 기본적 예의가 아닐까.
김문식: 헌법 전문에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분명히 명시가 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임시정부의 상징이 효창공원에 있는 거지요. 이 상징을 잘 살리면서 나머지 요소들을 어떻게 융합을 시킬 것인가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
최원정: 산자들의 정치, 오늘 조선 왕릉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94회 김구 암살, 효창공원에 묻히다 에서 정리).
①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가 머물던 서울 종로의 경교장에 한 손님이 찾아온다.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다는 그는 김구가 이끌던 한국 독립당의 당원이자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였다. 그날 김구는 안두희가 쏜 4발의 총탄을 맞고 향년 74세 나이로 눈을 감는다.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수십만 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다. 민족의 슬픔은 깊고 한스러웠다. 열흘간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온 국민이 상복을 입고 모두가 스스로 상주가 됐다. 태극기와 국화로 덮힌 백범의 유해는 경교장을 떠나 효창공원에 안치됐다. 광복 이후 정적이 된 김구와 이승만, 그 치열한 정쟁의 무대가 효창공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죽하면 김구의 암살 배후가 이승만이라는 소문까지 돌았겠다. 근데 이승만의 심정이 이해는 간다. 내가 대통령인데 어떻게 김구가 나보다 인기도 많고 존경도 많이 받지, 옛말에 死孔明走生仲達 죽은 제갈량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도망치게 한다. 사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상주이기를 자처하고 모여들어서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더 압박감을 느꼈다. 저 추모 분위기를 보면 역풍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암살시도는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어려운 점은 여러 말이 있고 소문이 있다가 최근 20여 년 전에(2001년 공개) 미군정 방첩대(CIC)의 문서가 하나 공개된다. 그 문서에 보면 안두희는 미방첩대의 정보원이자 요원이다 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면 미국이 관계되는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어 왔고 한 측면에서는 안두희가 그 이후에 이승만 정부의 비호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와 관계된 게 아니냐 라는 이야기는 있지만 특정해서 문서나 증언이 나온 적이 없다. 그런데 관계된 당사자들이 모두 돌아가셨다.
② 김구 선생의 묘소는, 효창공원에 있다 (서울 용산구 효창원로 177-18), 효창운동장 옆에 효창공원이 있다. 이승만 前대통령의 묘는 서울 현충원에 있다. 김구의 묘도 현충원에 모셔야 참배에 의미가 있다. 근데 효창공원은 현충원 보다 더 먼저 국립묘지가 될 뻔한 곳이다. 김구 선생의 묘소가 효창공원에 있지만 김구 선생 이전에 여러 독립지사들의 묘소가 만들어졌다. 그 이야기가 길고 슬프다. 오늘 효창공원의 슬픈 역사에 대해서 얘기해본다. 김구와 이승만의 치열한 대립, 두 사람은 귀국부터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남측에는 미국이, 북측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은 어떤 한국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임시정부 미주 위원장이었던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 한다. 결국 10월에 이승만이 들어오고, 그 다음달 11월에 김구가 들어온다. 근데 들어올 때 차이가 난다. 미군정이 둘을 대하는 모습이 달랐다, 이승만은 사전에 맥아더한테 편지를 보내서 반소-반공을 강력하게 어필을 하였다. 맥아더가 여기에 열광한다. 이승만이 귀국할 때 자기 전용기를 보내준다. 미군정 하지 중장한테 이승만을 조선의 영웅으로 대접해라. 하지 중장은 자기 부관을 이승만의 임시부관으로 임명한다. 숙소는 스위트룸으로 차는 순종이 쓰던 리무진을 제공한다.
③ 1945년 10월 20일, 이승만이 환영회에서 연설할 때 하지 중장이 뒤에 서 있었다. 정국 주도권은 이승만이 쥐게 되었다. 김구는 미군정하고 껄끄러웠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해라. 근데 미군정은 인정할 수 없다. 당연히 마찰이 있었다. 당시 하지 중장은 김구는 스튜에 간을 맞추는 소금 정도라고, 김구 선생님의 정치 스타일은 미군 스타일로서는 핸들링이 안 될 것 같다. 김구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투쟁만 해오신 분이다. 그것 밖에 모르시는 분이고 이승만 前대통령은 미국에서 근대정치를 보면서 권력의 본질을 알고 외교의 세련된 것을 익혔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 수 위였다. 1945년 귀국했을 때 이승만 70세, 김구는 69세였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면 형님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우남(이승만의 호)을 항상 우대했다. 그런데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된다 라는 발언으로 이승만과 김구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걸 서로 확인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 상황을 헤쳐나가는 대안이 둘은 서로 달랐다.
④ 1948년 4월 22일 백범 김구는 정치인으로서 굵은 획을 그었다. 1948년 5월 10일 5.10총선이다.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실시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선거, 그때 김구는 모든 정치적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남북협상에 뛰어든다. 김구는 북한으로 가서 남북연석회의에서 연설을 한다,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하기 위하야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한 곳에) 회집하여 민주 자주의 통일 독립을 전취할 대계에 참석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위대한 발전이며~ 이 장면이 명문선언이 된다. 김구의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서울신문, 1948년 2월 13일), 김구의 그 선택은 당시 48년 5월, 6월 시점에 남한의 정치 지형에서는 정치가로서 고립되는 선택을 스스로 하였다. 개인 김구로서는 김구가 갖고 있는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지만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에게는 매우 큰 부담이었다. 이게 재미 있는게 대통령, 부통령 뽑을 때도 그렇고 백범 김구는 불참했는데 표가 나온다. 그래서 백범 김구가 단독 정부에 참여한대 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니까 백범 김구가 선을 그었다. 나와 이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과 무관하다. 지금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가 있다. 그런데 1919년 김구의 임시정부가 하나 더 있다.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제 대한민국 정부라고 선언하는 순간 지지자들이 김구 쪽으로 몰려가게 되면 이건 자칫 국가가 2개, 3개로 분열의 위기로 이어질 상황이다. 이승만은 김구가 명분의 입장에서나 현실정치의 입장에서나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⑤ 모든 사람들이 김구 선생을 애도하고 있고 이승만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국민장으로 10일장을 치르는데 열흘 동안 조문객이 한200만 명, 그리고 효창공원에 묘소가 만들어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참배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당연히 이승만 대통령이 볼 때는 불편한 장면이 됐고 그러다 보니까 경찰들이 묘소 참배객을 막았다. 시민들 불심검문도 하고 그래서 그걸 피하기 위해 새벽에 몰래 김구 묘소를 갔다 온 참배객이 있었다.
⑤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효창공원을 막고 싶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긴 자전적인 독립운동 기록이 보물 제1245호로 지정 되었다. 바로 白凡逸志, 그 백범일지가 사실 출간되자마자 바로 베스트셀러다. 다들 읽고 싶어하였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서는 이게 거의 금서취급을 당하였다. 생각해 보면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하셨고 가까스로 살아남으셨다. 근데 고국에 돌아왔더니 함께 형님 형님하던 동지라는 사람은 나와는 길이 완전히 달랐다. 효창공원에는 김구 선생보다 먼저 묻힌 독립지사들이 있다. 항일무장 투쟁단체 한인애국단 소속의 서른세살의 청년 이봉창, 그는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다. 비록 실패했지만 일본의 수도 한 복판에서 천황에게 폭탄이 투척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이봉창은 대역죄로 사형당한다. 이 사건은 침체된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고 또 다른 의병 항쟁으로 이어진다.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처단하는 등 일제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의거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윤봉길은 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으로 옮겨진 뒤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또 한 명의 뜨겁고 아름다운 청년, 항일무장투쟁단체 흑색공포단의 백정기, 중국주재 일본공사를 암살하려다가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일본 감옥에서 옥고로 세상을 떠난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일본 땅에 묻힌 세 명의 영웅, 1946년 김구는 일본의 박열 등에게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유해봉환을 부탁한다. 새 정부를 구성하고 새 질서를 확립하고 이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처절하게 독립운동한 분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것은 누군가는 해야 되는데 그걸 김구 선생이 하셨다. 솔직히 김구 선생에 대해서 젊은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 김구 선생 마음은 내가 젊은 청년들을 희생해서 독립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에 마음 속에 응어리가 항상 있었을 것이다.
⑥ 김구는 1946년 6월 18일 3의사 추도식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 세 사람을 죽으라고 내보낸 것은 바로 나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을 보낸 나만이 살아 있으면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한량없다” 당연히 독립 이후에 그들의 유해를 다시 가져오는 것이야 말로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라고 백범 김구는 생각을 했다. 김구 선생은 일단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먼저 데리고 와야 한다. 다행히 어디에 묻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우선은 백정기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묘는 빨리 찾았는데 문제는 윤봉길 의사의 묘였다. 윤봉길 의사의 묘를 찾지 못해서 고민 고민 하다가 그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관리인을 찾아가서 박열이 갖고 있는 강렬한 의사표현으로, 너 만약에 윤봉길 의사 묘지 위치를 알려주지 않으면 공동묘지를 폭파해 버리겠다. 그렇게 알아냈다. 가서 보니까 윤봉길 의사는 쓰레기장 들어가는 길목에 묻혀있었다. 봉분도 없이 해놔서 사람들이 막 밟고 지나다녔다. 일본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이 윤봉길 의사 묘를 몰랐으면 한 게 바람이었고 알아도 모욕감 능멸감을 느끼게 하였다. 윤봉길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모이는 걸 차단하는 것이었다. 어렵게 모셔온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가 효창공원에 묻히었는데 김구 선생도 여기 묻히셨다.
⑦ 효창공원은 처음에는 효창묘(孝昌墓)였다. 그러다가 고종때 효창원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원(園)은 왕의 私親들 그러니까 왕이 낳은 사람으로 왕이나 왕비가 아닌 사람들이 원이 된다. 세자나 세손이나 후궁이나 이런 사람들이 되는데 효창원은 바로 정조하고 의빈성씨의 사이에서 내어난 장자인 문효세자가 일찍 죽는다. 문효세자의 묘가 효창묘다. 문효세자의 묘는 효창원에 있다가 1944년에 사삼릉으로 옮겼다. 문효세자는 정조가 31살 때 늦게 낳은 아들인데 안타깝게도 5살에 요절을 한다 (1786년 5월). 그리고 어머니였던 의빈성씨는 아들이 죽고 넉달 뒤에 9월에 만삭의 몸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정조는 창덕궁에서 살고 있으니까 궁궐에서 십리쯤 떨어진 지금의 효창공원에다 효창묘를 만들었고 그의 어머니였던 의빈성씨의 유언이 아들 곁에 묻히겠다 해서 옆에다 묻어주었다. 정조한테 효창원은 중요하다. 왜냐면 첫째 아들이면서 세자로 책봉된 왕위 계승자였던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전례없이 묘 이름을 효창이라고 붙여주었다. 그 전에는 세자가 죽었을 때는 묘 이름을 따로 지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게 정상인데 효창묘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사당 이름도 문희묘(文禧廟) 라고 지어주었다. 제사를 지낼 때 의빈성씨의 신도비도 정조가 직접 지었다. 가장 인간적인 정조의 모습이 나타난 글이고 자주 방문한다. 정조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230여 년 전의 효창원으로 가본다. 문효세자의 묘 옆에 의빈성씨의 묘가 있고 묘 사이가 백보 정도, 이후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의 묘가 있었고 숙의 박씨 묘 옆에 딸 영온 옹주의 묘도 있었다. 이것이 원래 효창원의 모습이다. 당시 효창원의 규모는 지금의 효창공원 뿐만 아니라 현재의 효창동, 공덕동, 청파동 일대를 아우를 정도로 큰 규모였다. 정조가 유일하게 군주가 아니라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만든 묘소가 바로 효창원이다. 여기서 정조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정조의 제문을 읽어보면 절절하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진짜라 하는 것이 반드시 진짜가 아니요 꿈이라 하는 것이 반드시 꿈은 아니구나”정조어제 효창묘신도비명,
⑧ 효창원이 효창공원으로 바뀔 때가 일제 때 1920년 이다. 1920년대 부터 효창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보다 조금 더 올라가면 1894년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바로 이곳을 군 주둔지로 이용한다. 왕실 묘소 일대가 그린벨트 처럼 조성이 되어 있다. 숲도 있고 언덕도 적당히 있고 군대가 주둔하기가 좋은 장소다. 당시 효창원은 일본군 숙영지 또 병참기지로 활용되었다.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인들이 효창원을 전승지의 성지로 생각을 한다. 다음에 효창원 인근에 유곽(성매매 업소)도 들어온다. 그리고 효창원 배후지역에는 일본인 거주지역이 조성된다. 이 지역을 자신들의 유흥지로 활용한다. 그전부터 용산을 지배하면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 그런 역사가 있었다. 고려 때 몽골의 침입 때 몽골군이 주둔한 지역이 용산이었고, 임진왜란 때도 북상하던 왜군이 주둔했던 지역이 용산이었고 러일전쟁 때는 아예 일본이 용산에다 일본군 상설주둔지를 만들었다. 계속 주둔지로 만들어 조선을 지배하자 해서 만든 게 역사가 지나다 보니까 오늘날 용산이 주한미군 기지가 되었다. 용산이 군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이점이 있다. 한강 이남 쪽에서 강을 건너 남대문 안쪽으로 들어온다. 다리로 얘기해 본다면 성산대교 양화대교 원효대교 한강대교 동호대교 올림픽대교 다리가 죽 있다. 다니다 보면 유일한 평지가 용산이다. 한강 건너 유일한 평지가 용산, 어느날 일본군 장교가 답사를 (1883년 3월 7일/고종 20년) 했다. 자기가 볼 때는 용산이 최고였다. 일단 평탄하다. 그리고 4대문 중에 남대문 까지 어디서든지 평지를 통해서 바로 갈 수 있다. 더구나 한강에 있는 여러 나루터 중에 용산 나루터가 수심이 깊어서 큰 배가 정박할 수 있었다. 대규모 부대가 주둔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효창원을 골프장으로 사용했다.
⑨ 대한민국 최초의 골프장은 1921년 세워진 용산 효창원이다. 100년 전 효창원에 골프장이 들어선 이유가 있다. 당시 조선 철도국에서 철도호텔을 운영했는데 호텔에다 사람을 계속 머물게 하려면 볼거리 즐길거리가 용산 효창원 근처에 있어야 했다. 효창원 철도호텔이 만들어진 자리가 대한제국이 탄생한 환구단이다. 환구단 위에 호텔을 지어놓고 일본인 손님을 위한 놀이시설을 조성하였다. 일본의 의도가 빤히 보인다. 서울 효창원에 1호 골프장이 2호는 청량리에 3호는 군자리에 만들어지는 데 다 왕릉자리다. 조선 땅에 세워진 1호 골프장에서 조선 사람으로 최초로 라운딩을 한 사람은 바로 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이었다. 당시 이런 사건이 있었다. 1924년 종묘에 보관된 어보 두 개가 도난 당하는 일이 있었다. 어보는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던 임금의 도장, 2017년 조선왕실 어보와 서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그 어보 실무책임자가 바로 이항구였다. 그런데 그때 이항구는 바로 효창원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비난하니까 이항구는 “종묘의 어보라는 것은 당장 나라에서 쓰시는 것도 아니요 승하하신 후에 만들어 노은 돈으로처도 몇푼어치 안되는 것인데 그만 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골프놀이도 못한단 말이요? 그러면 집에서 술이나 먹거나 계집을 다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구려” 덕종(성종의 아버지/추존왕)과 성종의 어보가 없어졌다. 사라진 어보를 찾지 못하고 새로 만들었는데 그게 6.25때 미국으로 반출되었다. 2015년에야 어보가 환수되었다.
⑩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이 일제 강점기의 산물이라는 것,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대한민국 골프 100년사가 효창원에서 시작되었다. 효창원을 골프장으로 만들었던 일제는 이후 스키장으로 가족공원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심지어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태평양 전쟁에 참여한 일본군 전사자를 위한 충령탑을 여기에 짓겠다고 시도한다. 그리고 광복을 일년 앞둔 1944년 10월 결국 효창원 묘역군을 고양시 서삼릉으로 천장하였다. 이제 효창원은 껍데기만 남았다, 백범 김구는 이곳이야 말로 삼의사의 유해를 모실 최고의 장소라고 판단했다. 1946년 6월 15일, 부산을 떠난 특급열차 조선 해방자호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김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삼의사의 유해였다. 궂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추도식,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흑색 공포단의 백정기, 일본군 대장을 처단한 윤봉길 의사까지 한 줌의 유해로 돌아온 삼의사의 영정 앞에서 김구는 목 놓아 울었다. 김구 선생의 오랜 바람이 결국 이루어졌다. 비어 있는 효창원 자리에 삼의사의 유해가 묻혔다.
⑪ 1924년 일제 강점기 효창원이 효창공원으로 바뀌었다. 이러면서 왕가의 묘들이 빠지게 된다. 문효세자의 묘 자리에 드디어 삼의사의 묘를 환치된다. 2년 뒤에 그 옆에다 의빈성씨의 자리에 바로 임시정부의 요원이었던 조성환, 이동녕, 차리석 선생의 유해가 안치되었다. 일골분의 묘와 더불어서 하나의 묘비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묘다. 여순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를 못했다. 그분의 유해가 돌아오면 이곳 삼의사 옆에 안장하기 위해서 假墓를 만들었다. 일본은 공동묘지 내 안중근 의사의 시신이 묻힌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해주지 않고 있다. 더구나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도시가 많이 개발되면서 공동묘지가 많이 훼손되었다.
⑫ 이승만 대통령에게 효창공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다 안치되어 있고 기념하는 묘면 거리를 두어야 하는 상황이다. 효창공원은 임시정부의 묘역이 되었다. 이승만 정부로서는 이의 의미를 희석시킬려고 노력을 하였다. 바로 효창 운동장을 만드는 계획을 해서 1954년 한국전쟁 직후부터 여기다가 축구장 배구장 실외 스케이트장 다 있는 종합운동장 건설계획 했다. 설계를 끝내고 1956년 5월 쯤에 육군공병대대가 운동장 건설공사를 착수했다. 당연히 사회 각계 각층에서 이걸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건설공사가 중단된다. 그러나 계획 자체가 완전히 철회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종합운동장 보다는 규모가 작은 효창운동장으로 건설이 된다. 이승만 정부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어떤 관료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효창공원의 백범 묘지에 해마다 참배자가 늘어가고 있어 민심을 모으는데 지장이 많다” 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이 있는 헌법을 개정하고 출마하는 경우다. 여론이 좋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효창공원이 안좋은 여론에 중심지 역할을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다. 그래서 정권 내부에서 다른 정치적 의도로 1956년에 이 공간을 재구성했다.
⑬ 자기 정권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애국 선열의 묘를 바꿔볼려고 자기가 원하는 공간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1960년에 제2회 아시아 축구선수권 대회가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광복 직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최초의 국제행사다. 근데 정말 대박인게 우리나라가 전승 무패 우승을 차지했다. 당연히 재미 있었다. 무려 10만 명 이상이 여기에 몰려 들었다. 흥행이 대성공이다. 가뜩이나 우리나라가 가난한 나라인데 우승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러니까 사람들이 여기서 열광을 하면서 이들의 인식 속에서 효창운동장은 우리가 우승했던 곳, 스포츠의 경기장으로 각인이 되어 버렸다. 애국선열의 묘보다는 우리가 우승한 것으로 이미지가 옮겨져 버리게 되었다. 여기에 많은 관중입장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여기서 술 먹고 심지어는 소변까지 보고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스포츠가 정치적으로 이용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 때 프로 야구의 개막도 그렇다. 그래서 더 배워야 되고 더 공부해야 된다. 거기서 열광한 국민들이 무슨 잘못인가. 저걸 희석시키기 위해서 정치적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문제였다.
⑭ 독립지사 묘소는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된다. 효창공원에는 겹겹이 쌓인 슬픈 역사들이 있다. 비통하고 안타깝다. 효창원-효창공원의 역사변화는 끝난 게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 때 여기에 1960년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이 세워진다. 원효로라는 이름이 있어서 원효대사 동상도 세워졌다. 별의별 것이 다 있다. 독립투사, 반공투사, 원효대사도 있고 여기에 몇 가지의 이야기가 한 번에 같이 묻혀 있다, 효창공원은 한국 근대사에서 현대사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중첩되어서 나타나는 공간이다. 압축된 이미지가 이 공간 안에 들어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우여곡절들이 뒤엉켜서 하나처럼 보인다. 사실은 겹겹이 되어 있는 걸 나누어서 보게 되면 다른 역사적인 맥락이 있는 걸 기억해서 거기서 하나 하나의 맥락을 찾아내야 한다.
⑮ 용산이 서울 중심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라서 많은 역사가 일어났다. 주권이 없는 국가와 민족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이제 그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니 모두가 힘을 더 길러서 언제 어디서나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가 되어야 하겠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분명히 명시가 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임시정부의 상징이 효창공원에 있다. 이 상징을 잘 살리면서 나머지 요소들을 어떻게 융합을 시킬 것인가에 국가 지도자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