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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한잡록] 심수경/찬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 정인지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 남계영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 이석형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 김수온은 발영시와 등준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 김흔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 신종호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 배맹후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 김천령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 김극성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 김구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 양응정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 김홍도는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 이이는 한 해에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고, 생원시의 초시와 급제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 정윤희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 강신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어려운 일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석형ㆍ신종호ㆍ이이 같은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을 하였다. 한 집안이 거듭 장원 급제한 일도 있으니,
∙ 김흔ㆍ김전 형제와 김흔의 아들 김안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 김천령ㆍ김만균ㆍ김경원은 연이어 3대가 장원을 하였고,
∙ 채수와 그 사위 김안로ㆍ이자가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 이예장ㆍ이지장ㆍ이함장ㆍ이효장ㆍ이서장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 안중후ㆍ안근후ㆍ안돈후는 문과에, 안관후ㆍ안인후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 이기ㆍ이행ㆍ이미는 문과에, 이권ㆍ이영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 윤호ㆍ윤탁ㆍ윤철ㆍ윤순ㆍ윤서는 4년 동안에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그 부모가 더욱 기이하다. 또
∙ 심연원ㆍ심달원ㆍ심봉원ㆍ심통원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연원은 중시에, 심봉원은 탁영시에 각각 합격하였고, 심달원은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심전이 또 중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 박형린ㆍ박홍린ㆍ박종린ㆍ박붕린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 황위ㆍ황성ㆍ황진ㆍ황찬은 모두 문과에, 황수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 윤방ㆍ윤양ㆍ윤휘ㆍ윤훤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부친인 전의정 윤두수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니, 비록 5형제는 아니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 무자년 이후에는 사마방 안에 장원 급제한 자가 많아서 때로는 5, 6명이나 되고, 적어도 2,3명 이하는 없었는데 계묘년 사마방에는 오직 심수경 한 사람뿐이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계묘년 후 갑진년부터 계축년까지 10년 동안의 식년시와 별시와 알성 정시에 매번 급제하였고 계묘년 사마시에 연이어 2등을 하고, 그 후 여러 방에서도 2등을 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것은 우연한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니다.
◉ 고려 때 매번 방을 내 걸 때에 장원 급제한 이는 용두회를 열어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김양경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 시험에 2등을 하여 벼슬이 재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더니, 그 이웃에 용두회를 여는 이가 있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그대 집 귀빈들의 잔치는
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용두회를 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나처럼 재주 없는 자도 어쩌다 요행히 장원을 하였는지라, 장원의 명예를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유근ㆍ황혁ㆍ황치성이 모두 장원을 하여 네 명의 장원이 이웃하고 있으니, 역시 성대한 일이다. 내가 장난삼아 김양경의 시에 차운하기를,
옛날 용두회의 주빈이 성대하더니
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 뜨려고 하나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하였다. 김양경은 김인경으로 이름을 고쳤다.
◉ 무자년 이후 사마방 안에서 의정부에 참여한 자는
∙ 무자년의 윤원형ㆍ권철ㆍ홍섬이고,
∙ 신묘년의 민기ㆍ이탁ㆍ정유길이고,
∙ 갑오년의 노수신이고,
∙ 정유년에는 없었으며,
∙ 경자년의 박순ㆍ김귀영이고,
∙ 계묘년의 강사상ㆍ나ㆍ심수경이며,
∙ 병오년 춘시와 추시에는 모두 없었고,
∙ 기유년의 정지연ㆍ유홍이다.
∙ 임자년에는 유전ㆍ정탁이고,
∙ 을묘년에는 이양원ㆍ최흥원ㆍ윤두수이며,
∙ 무오년에는 이산해,
∙ 신유년에는 정철이며, 갑자년에는 유성룡ㆍ이원익이고,
∙ 정묘년에는 김응남이고,
∙ 경오년 이후는 때를 아직 알지 못한다.
◉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이로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거의 없으나,
∙ 정인지ㆍ최항ㆍ권남ㆍ홍응ㆍ신승선ㆍ유순정ㆍ김안로ㆍ심통원ㆍ정유길ㆍ박순ㆍ노수신ㆍ정철ㆍ심수경이다. 나는 재주도 없고 덕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 3공(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담담한 정승청에 장원들만 모였으니
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하니, 찬성이 화답하기를,
5학사에 5장원이 있고 보니
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하였다. 정철이 3공에게 화답의 시를 구하고, 이어서 조중에도 여러 화답의 시를 구해서 성대한 일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정철이 산직(산직 이름만 있는 벼슬로 녹만 먹는 직)이 되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 병술년 가을에 내가 우찬성이 되니, 그때 영의정 노수신과 좌의정 정유길은 을해생(71세)이고, 나는 병자생(70세)이고, 좌참찬 황임과 우참찬 안자유는 정축생(69세)으로, 모두 기로소 당상에 참여하였으니, 한때 동료로서 또한 성사라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정승들의 높은 연세 을ㆍ병ㆍ정이라
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하였다.
◉ 재상 중에 연령이 80세 이상 된 이를 내 눈으로 본 바 있으니, 송순은 지중추로 92세이고, 오겸은 찬성으로 89세이고, 홍섬은 영의정으로 82세이고, 원혼은 판중추로 93세이며, 임열은 지중추로 82세이고, 송찬은 우참찬으로 88세이고, 나는 영중추로 82살인데, 모두 아직 병이 없이 건강하니 다행이다.
◉ 기로회는 당ㆍ송 시대로부터 있었고, 전조(고려) 때에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로소를 두어 연령이 70세이고 관작이 2품 이상이면 참여시켰다. 조종조에서는 의레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에서 기로소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에는 기로소 안에 간직된 물건으로써 춘추에 잔치를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을유년에 좌참찬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의정 노수신과 의정 정유길, 판부사 원혼, 팔계군 정종영과 지사 임열과 지사 강섬이 동료가 되었고, 그 후 판서 황임, 판서 안자유, 판서 이인, 영부사 김귀영이 또 동료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제공들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고, 오직 김귀영ㆍ강섬과 나만이 생존하여 인원수가 매우 적은 관계로 기로회를 하기 어려웠다. 조종조에서는 종2품도 참여시킨 예가 있으므로 송찬ㆍ목첨ㆍ신담ㆍ기도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송찬이 지중추로 88세이고, 나는 영부사로 82세이며, 이기는 이조 판서로 76세인데 아직 병 없이 건강하다.
임진난 후에는 폐지되어 기로회를 열지 못하다가, 의정 유홍, 판서 이헌국ㆍ이증, 참판 유희림ㆍ이희득ㆍ이관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또한 기로회는 열지 못하였다. 이헌국은 73세이며, 이증은 72세이고, 유희림은 78세이며, 이희득은 76세로 모두 병 없이 건강하다. 정유년이었다.
◉ 독서당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 되고 오래 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ㆍ정유길ㆍ김귀영과 나는 의정, 이황은 찬성이 되었으며, 김주는 판윤, 박충원ㆍ윤현ㆍ윤춘년ㆍ윤의중은 판서, 박민헌은 참판, 허엽은 감사, 남응룡은 참의, 유순선은 승지, 김홍도는 정언, 김인후와 한지원은 교리, 윤결은 수찬, 김질충은 좌랑, 안수는 박사가 되었다. 그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 나의 동년(동년 _과거에서의 동기를 말함)인 계묘년 사마방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자가 61명이며, 음직(음직 _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받는 관직)으로 벼슬한 자가 31명인데, 강사상과 나는 의정, 심강은 영돈녕, 박계현ㆍ황임ㆍ이임ㆍ윤의중은 판서, 이감ㆍ이중경ㆍ김덕룡ㆍ심전ㆍ손식ㆍ황응규는 가선대부, 윤주ㆍ정척ㆍ홍천민ㆍ조징ㆍ유승선ㆍ김언침ㆍ신희남ㆍ권벽ㆍ유종선ㆍ장사중ㆍ조부ㆍ김백균ㆍ이억상ㆍ권순ㆍ임여ㆍ이집은 통정대부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이를 말하면, 지방에 있는 자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서울에 있는 이는 이봉수ㆍ이집이 83세, 엄서가 82세, 정척이 80세, 유성남과 이권충이 77세, 황린과 신희남이 75세, 권벽이 74세, 조부ㆍ허현ㆍ박홍이 73세, 심호ㆍ권순이 73세, 김언침ㆍ이감ㆍ이인이 71세, 심전ㆍ김진이 70세였는데, 모두 작고하였고, 나는 82세, 황응규는 80세, 장사중은 74세인데, 모두 아직도 무병하다. 2백 명이 같은 방(방)으로 급제한 지도 55년이나 되어 세 명만이 생존해 있으니, 아, 서글프다. 장사중은 정유년 여름에, 황응규는 무술년 가을에 작고했다.
◉ 나와 동갑인 병자생으로 계를 한 이가 35명이다. 그 중 70이 넘은 이는 소흡ㆍ박인수ㆍ성세평ㆍ윤위ㆍ유성남ㆍ홍섬인데, 모두 작고하고, 정걸과 나는 82세로 아직 무병하니, 35명 중에 2명이라도 생존한 것은 다행이다. 정걸도 정유년 여름에 작고했다.
◉ 을묘년 여름에 왜구가 호남에 침범하니, 호조 판서 이준경이 도순찰사, 홍문관 전한인 나와 이조 좌랑 김귀영이 종사관이 되어 토벌하였다. 그 후 이준경은 벼슬이 영의정이 되어 70세가 넘었고, 김귀영은 좌의정으로 74세이며, 나는 우의정으로 지금 82세이니, 3명이 모두 의정에 참여하고 70세가 넘었으니,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대제학을 지낸 이는 변계량ㆍ윤회ㆍ권제ㆍ정인지ㆍ신숙주ㆍ최항ㆍ서거정ㆍ어세겸ㆍ홍귀달ㆍ성현ㆍ김감ㆍ신용개ㆍ남곤ㆍ이행ㆍ김안로ㆍ소세양ㆍ김안국ㆍ성세창ㆍ신광한ㆍ정사룡ㆍ홍섬ㆍ정유길ㆍ박충원ㆍ박순ㆍ노수신ㆍ김귀영ㆍ이이ㆍ이산해ㆍ유성룡ㆍ이양원ㆍ이덕형ㆍ윤근수로, 중임을 서로 전할 때 자연 우열은 있으나 모두 인심에 흡족하였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조종조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은 겨우 50세에, 유전은 55세에, 이산해는 50세에, 정철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과 이원익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김귀영이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금항아리를 백두의 경이 차지하니
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하니, 내가 화답하기를,
욕되게 여러 조에 다섯 경을 지냈고
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하루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하였다.
◉ 조정의 의정으로 70이 지나서 기로소에 참여한 이는 권희ㆍ권중화ㆍ이서ㆍ성석린ㆍ조준ㆍ하륜ㆍ황희ㆍ허주ㆍ하연ㆍ최윤덕ㆍ최항ㆍ노사신ㆍ어세겸ㆍ유순ㆍ정광필ㆍ이유청ㆍ윤은보ㆍ유부ㆍ홍언필ㆍ윤인경ㆍ이기ㆍ상진ㆍ윤개ㆍ이명ㆍ이준경ㆍ권철ㆍ홍섬ㆍ노수신ㆍ정유길ㆍ김귀영과 나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공통적으로 높이는 두 자리에 참여하고 명상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어찌 그 외람됨을 말하랴. 최항 이상은 기로소의 《선생안》에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최항의 나이는 70이 못 되었다 하고, 그 나머지도 자세하지 않다. 정승이 되면 비록 70이 못 되어도 으레 모두 연회에 참여하게 되니, 그가 연회에 참여한 까닭으로 《선생안》에 기록한 것인가.
◉ 중종조에 명기 상림춘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탔다. 참판 삼괴당 신종호가 돌보아주어 그 집이 종루 곁에 있었는데, 하루는 삼괴당이 들러서 부른 즉흥시에
제오교 머리에 푸른 버들 늘어지니
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하였는데, 호사자가 그림을 그리고, 그 시를 그림 끝에 썼다. 그 후 판부사 정사룡이 7언 율시를 지어 주고, 우의정 정순붕, 영의정 홍언필, 우의정 성세창, 찬성 김안국ㆍ신광한 등 여러 공이 연이어 화답하니, 드디어 시첩이 되었다. 나도 소시적에 상림춘을 보고서 책 끝에 시를 쓴 일이 있으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군 송인의 비 석개는 가무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 영의정 노수신, 좌의정 김귀영,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이양원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둘 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
◉ 중이 시를 고관과 유생들에게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시축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들의 고풍이다. 명공거경들까지도 모두 써 주었는데, 여성군 이암(송인의 호)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 이는 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