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1.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목판으로 찍은 수선전도 부분(1981 탐구신서 65 한경지략 첨부도면).
사진 2.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목판으로 찍은 수선전도 전체(2002 “서울, 하늘 땅 사람” 전시도록).
사진 3.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수선전도 피나무 재질 목판(2002 “서울, 하늘 땅 사람” 전시도록).

首善全圖(수선전도)’라는 제목이 윗머리에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서울의 주요도로와 시설,
궁전·종묘·사직·문묘·학교·교량·산천·성곽·누정·봉수·역원·명승 등에서
부(部)·방(坊)·동(洞)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도성 밖의 동리와 산
또는 불사(佛寺)까지도 자세히 그려 넣어 460여 개의 지명이 나타나 있다.
이 지도는 근세지도에 가까운 실측 세밀지도이다.
수선(首善)이란 서울을 뜻한다.
이 지도의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경우궁(景祐宮)이 나타나 있음을 들어
1824년을 간년(刊年)으로 잡기도 하나,
제생동(濟生洞)이 계생동(桂生洞)으로 이름이 바뀐
1834년을 간년의 하한으로 보고 있으므로 간년을 1824∼1834년으로 잡은 것이다.
이 수선전도는
그 정확성이나 정밀함, 그리고 크기에서 서울 도성의 지도 중에서 가장 훌륭하며,
지도 제작뿐 아니라 목판으로서의 제작 솜씨도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
판목의 가치는 더욱 귀중하다
조선시대에는
『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八道總圖)」, 각 도 지도를 비롯하여 「천하총도(天下總圖)」가 들어 있는 지도첩과 팔도 각 도의 큰 판목들, 「여지전도(輿地全圖)」·「해좌전도(海左全圖)」·「대여지도(大輿地圖)」 등 훌륭한 목판지도들이 많다.
그 중에서 한 도시의 지도, 특히 목판지도로서의 수선전도는 가장 크고 정확, 정밀하다
이 판목의 가치가 높이 인정된다

고산자 김정호가 정말로 전국을 다녀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최남선의 <고산자를 회함>에서 최초로 언급되며 오해를 불러일으킨 속설입니다.
악의적인 의도가 없이 김정호의 노력을 높이 사기 위해 언급된 말이지만,
그 후 한동안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이 정말로 믿게 되는 문제를 낳았습니다.
조선 말기는 낡고 무식했다는 의식이 강하다 보니
김정호가 혼자의 힘으로 거대한 일을 해냈다는 얘기가 먹힐만한 소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면
고산자 김정호가 이전의 다른 지도들을 참고한 흔적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관인으로써 지도제작을 맡은 기간 안에 당시의 교통 수준을 이용해서 이렇게 정밀한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렇듯 대동여지도의 진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의 뜻은 큰 조선의 땅을 그린 지도라는 뜻이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정확도 또한 높다.
고산자 김정호의 놀라운 대동여지도와 독도
전국을 일일이 다닌 것이 아니라 일부만 답사된 것이고,
그 외에는
기존에 만들어졌던 다른 지도들을 종합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인 대동여지도.
그러나
현대인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정확하고 거대한 규모로 놀라움을 주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3층 높이 정도의 공간이 있어야만 전체를 펼칠 수 있을 만큼 거대합니다.
축척은 실물의 16만 분의 1 크기입니다.
그래서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200여 개의 조각으로 나눠서 제작한 후
다시 연결하여 접었다가 펼칠 수 있도록 고안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김정호의 목판이 부서졌다는 낭설이 있는데
지도를 찍기 위한 인쇄용 목판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으며,
목판만 해도 60여 개가 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도가 너무 크다 보니 전도를 발간하기가 힘들어서,
간행된 대동여지도들은 대부분 축소된 영인본들이라고 합니다.

검색엔진에서 대동여지도를 검색한 캡처모습.
가운데 사진을 보면 대동여지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규모인가를 알 수 있다.
실제 조선은 지도가 더욱 필요했던 국가입니다.
중앙에서 지방 곳곳에 관리를 보내 다스리는 중앙집권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고산자 김정호가
어떤 경로를 밟아서 지도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심지어 대동여지도의 제작자가 김정호인가의 진실도 의문을 가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제작은
1800년대 역사에서 실학과 지리정보학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김정호가 교류했던 신헌, 김정희 등이
흥선대원군의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창안한 기호체계로 기록되어,
과거에 일일이 한자로 써넣었던 지도에 비해
편리하고 직관적인 지도입니다.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훨씬 정확해졌으며,
대량 인쇄 보급도 가능했고,
인구와 면적 등이 조사된 통계자료까지 담고 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중 서울 부분 지도.
산은 산맥을 위주로 그렸으며 굵으면 높은 산이다.
강과 각 지명까지 그려져 있다.
대동여지도의 김정호가 스스로 호를 고산자(古山子)라고 붙인 뜻은
그만큼 지도에 대한 애착을 알 수 있는 단면입니다.
어릴 때부터 지도 그리기를 좋아하던 김정호의 3대 지도는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입니다.
그중에
청구도가 첫 지도인데 대동여지도와는 다르게 책처럼 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학생들의 역사지리부도와 같은 형식입니다.
청구도도 뛰어난 점이 많지만,
인쇄본이 아니라서 직접 베껴 쓰는 필사본으로 간행되다 보니 점점 오류가 많아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에 동여도를 먼저 만들어보고
(그러나 지리정보는 동여도가 훨씬 많다),
최종적으로 대동여지도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직접 발로 뛰어 만들었다는 속설과 달리,
고산자 김정호는
삼국사기, 고려사부터 신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 동국팔역도, 해동여지도 등
수많은 지도를 연구한 후 대동여지도에 흡수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전후도 같은 세계지도 제작에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3대 지도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청구도의 모습.
이 지도는 지도책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항간에는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없어서 곤란하다느니,
대마도가 나와 있다느니 하는 오해도 많습니다.
1500년대에 만들어진 조선방역지도에는 대마도가 표기되어 있었지만,
대동여지도에는 대마도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대동여지도를 축소하여 새로 만든 대동여지전도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어 있는데,
대동여지도와 혼동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최초 목판본에는 독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무인도일 뿐인 섬을 위해 목판본을 더 추가하는 것이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대동여지도의 목판본과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 필사본에 독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제작 기간만 해도 10년이지만 이후에도 추가 작업은 계속되었는데,
이 대동여지도 필사본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진실인 듯 보입니다.

대동여지도의 필사본에 나와 있는
울릉도와 독도의 모습.
출처: YTN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뜻과 진실
고산자 김정호는
딱히 기록이 남겨지지 않아서 출생과 행적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조선은 기록문화가 발달했고 족보 제도가 있었으므로 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가 중인이 아니었겠냐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친구 최한기가 양반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양반 신분들과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면 몰락한 양반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김정호는
1800년대에 황해도에서 태어났고, 지리학자이며 실학자입니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의 과학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그 영향이 조선에 와서 실학으로 연구되고 있었습니다.
지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스무 살 때부터 지도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의 뜻은 옛 고, 메 산, 아들 자로 되어 있습니다(古山子).
다른 기록에 의하면 김정호 스스로 고산자를 지었다고도 합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초상화. 고산자의 뜻은 옛고, 메 산, 아들 자자를 사용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등 조선말 실학에 큰 공헌을 하였다.
동시대를 살았던 김정호의 인맥으로는 최한기, 신헌, 김정희 등이 있습니다.
최한기는
김정호와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서
중국의 수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최한기도 지리, 천문 등에 다양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김정호를 여러 방면에서 지원해 주었으며
수집한 자료들을 김정호와 함께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에게 최한기 같은 친구가 있었기에
중앙에 있는 인맥을 통해 고급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생겼을 것입니다.
최한기는 실학자 김정희의 제자였기에
김정호도 추사 김정희와 교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서예가로 유명하지만 김정희는
고증학자이며 실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흥선대원군 시절 병조판서를 지낸 신헌의 도움도 컸습니다.
덕분에
김정호는 희귀한 규장각 도서를 볼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