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시비리스크에서 출발한 기차는 이틀밤을 자고 33시간만에 이르츠쿠츠에 도착했다.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는 바이칼을 끼고 있는 도시이다.
역에서 내리니 아담한 도시적 스케일이 딱 내 맘에 든다.
이틀밤을 기차에서 보내도 전혀 변하지 않는 타이가나 자작나무 숲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나도 밖의 풍경도 그대로인것 같은데 시계바늘만 돌아가고 있었다.
모든것이 정지해있는 이곳에서 그래도 움직이는것이 있어 다행이었고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만큼 고맙게도 시간은 흘러 주었다.
기차에 보면 역 도착시간과 모스크바부터의 거리가 적혀있는데
이 지점이 5,193키로이니 전체 여정의 반을 겨우 넘긴셈이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톡
중간지점을 지나서 처음 만나는 역이다.
언제나 이별은 서러운것.
사람들은 도착전 두어시간전부터 짐을 꾸리기 시작하는데 그 시간이면 서울역에서 우리 고항땅 동대구역에 도착할 시간이다.
아무리 젊다지만 여름과 겨울을 구분 못하다니
여기는 모스크바와 5시간 시차가 나고 우리나라와는 한시간 늦은 셈이니
이제 우리나라의 시간대와 같은 라이프 싸이클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무료한 시간에는 그림을 그린다.
여기는 날씨가 추워 현장에서는 2-3분 내외의 스케치 작업만 하게되니
사진으로 기록해두었다가 그것을 보고 그리게 되는것이다.
어른들은 내 작업에 관심은 있어도 체면때문에 쉽게 다가서지 않지만 아이들은 빨라 금방 팬클럽이 만들어 진다.
사진을 보면 뒤의 남자도 슬쩍 그림을 훔쳐보고 있다.
여기 사람들은 기차에서도 남과 같이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각기 나름대로 시간을 죽이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쉽게 자기자신을 들어내지 않는것은 나서면 찍히는 사회주의의 습성이 남아있는것 같다.
무뚝뚝하지만 일단 알고나면 마음을 열고 뭔가를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처음에는 무뚝뚝하게 보이는 저 남자
나한테 말을 걸고 여러가지 애기를 해 주었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톡 9,288키로의 중간지점을 지나는곳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중간을 지난 역이름도 써주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인간은 표정만 있으면 통하게 되어있다.
여기서 무슨 거창하게 톨스토이를 논하는것은 아니니
그저께부터 내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다.
저 넓은 황량한 시베리아 허허벌판에서 나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유일한 연결망이 끊겼으니 난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내가 쓰고있는 MTC란 통신회사에서
메세지를 보냈다.
내가 회사에서 유심을 사서 끼웠으니
데이터를 산것이지 전화 통화를
할 수있는것은 아니다.
그런데 며칠전 시내전화를 두 통을 한적이 있는데 그 요금 10루불, 우리나라돈으로 치면 200원을 내라고
내 데이터를 차단시킨것 같았다.
물론 이것은 내가 그 메세지를 해석한것이 아니고 감으로 잡은것이다.
데이터를 쓴다고 해서 시베리아 전역에서 인터넷을 쓸 수 있는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아담하니까 어디에서고 데이터를 쓸 수있지만 여기는 원체 넓으니 시베리아 광야에서 95%는 데이터가 터지지 않고 인가가 있는 기차역 부근에 와서야 인터넷을
쓸 수가 있다.
아해야,
아빠, 엄마랑 어디가니?
그러니 역에 머무는 한 4-5분안에 글을 써서 올려야 하니 오, 탈자가 나오고
거친 글이 올려지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사진올리는데도 시간이 걸려 몇장 올리고 나면 다시 시도하라는 메세지가 뜨면 또 다시 할 수밖에
잠을 자고 나니
옆에 웬 묘령의 여자가..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가진것은 시간이고
있는것은 여유뿐이다.
그렇게 해서 여행일기가 이 유배지의 땅 드넓은 시베리아에서 여러분에게
전해지는것이다.
점점 "나는 자연인이다." 모드로 넘어가는것 같다.
그래서 어제는 내 데이터가 미납요금때문에 강제정지를 당해
여행일기를 보낼 수가 없었다.
부르기만 하면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서 달려간다는데
나는 뜀박질이라도 해서 전해 드릴까?
그건 그렇고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미납금 200원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은행에 가서 계좌이체를 할 수있나?
텔레뱅킹이 되나?
카드결제가 되나?
물론 카드결제하라고 양식이 뜨지만
인터넷이 통해야 되지.
그래서 그 200원 미납해서 난 지난 이틀동안 시베리아의 로빈슨 크루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0원의 대가치고는 너무 혹독했다.
후불로 해주면
설마 내가 그 돈 떼어먹고 도망이나 가겠수?
누가 불우이웃돕기 차원에서
대납 좀 해서 이 동토의 왕국에서
끈 떨어진 연처럼 여기저기를 방황하고 있는
나 좀 구출해줘요.
네?
구글지도 없다고
예약한 호텔 못찾을까봐?
아서라!
나에겐 30년 여행경력의 촉이 있다.
"아가씨,
나 대한민국에서온 박아무개인데
예약한 방 주세요."
첫댓글 동토의 땅에서도 반바지를 입은 사람은 사람일까요?
즐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33시간의 기차여행 상상이 안 가네요)
이제 러시아 중간 기착지이군요.
별수없이 오랜 시간을 열차에서 보내시려면 지겹기도 하시겠어요.
통화는 수신자부담으로 하시지..
어렵게 보내주시는 글과 사진, 스케치 등 여행의 노하우 감사합니다.
열차는 끝없는 하얀 대평원에 펼쳐진 침엽수림숲을 질주해서 드디어 도착하셨네요.
교수님의 그림에서 느낀점이 있습니다^^
따뜻한 나라의 인물 그림에서보다 다리를 길게 그린 그림,
모두가 추위에 움츠린 듯한 모습들입니다. 러시아모습이지요^^
그도시의 새로움을 즐기시면서 좋은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식사 잘하시고 추위에 건강 조심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