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빛과 그림자 / 정남숙
고종황제와 흥선대원군을 알현하기 위해 추석 연휴를 맞아, 건장한 두 아들을 대동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운현궁(雲峴宮) 출입문을 들어섰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전에 서울살이 때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곳이다.
시내 중심에 있는 우리나라 궁궐들은, 우리 생활 주변에 가까이 있어, 언제나 광화문 옆을 지날 때마다 그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면 나도 조선 시대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과거와 함께 현재도 보이는 우리의 일상 같은 시대의 간극을 잊은 곳이기도 하다. 조선 5백 년 왕실의 터전을 고스란히 보존해 놓은 우리의 산 역사의 현장이다.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은 명절 때마다 연례행사로 드나드는 곳이며, 경운궁이었던 덕수궁은 지금도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들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돌아볼 수 있는 곳이기에 항상 가깝게 느끼고 있었으나, 운현궁은 제외되어 있었다.
안국역을 나와 채근도 하지 않고 내 발걸음을 따라주는 두 아들에게 이끌리듯 걷다 보니 목적지에 다다랐다. 잔뜩 기대감을 안고 바깥마당을 밟은 순간 황량함이 몰려온다. 고종의 생가이고 흥선대원군의 세도가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안고 찾아갔기에 실망이 더욱 크게 느껴졌나 보다. ‘맥수지탄(麥秀之嘆)’이 이런 감정이구나 싶다. ‘맥수지탄’은 고국의 멸망을 한탄함을 이르는 말이다. 고대 중국의 삼국(하(夏), 상(商), 주(周)) 중, 상나라(商, 또는 은(殷))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은 숙부 비간과 미자, 기자 같은 충신들을 멀리하고, 달기와 주지육림에 빠져 백성과 제후들의 마음을 잃어. 결국 주왕(紂王)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패배하여, 도성에 불을 지른 뒤 자살하였고, 상(商)은 멸망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하며 떠돌던 충신 기자(箕子)가 나라가 망한 뒤 도성으로 돌아와, 옛 도읍 터의 황량함을 보고 한탄하던 말이다. 그 심정을 알 수 있는 세월의 무상을 느끼게 한다.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고종이 탄생하여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기도 하다. 운현궁의 이름은 서운관(관상감의 별칭)이 있는 앞의 고개(현, 峴)라 하여 운현궁(雲峴宮)이라 불렀다.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정치를 했고, 창덕궁과 직통으로 왕래할 수 있는 경근문과 대원군전용 공근문이 있다 하였으나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했다고 한다. 정원 등은 잘 보존되어 소년 시절에 고종이 자주 올랐다는 노송이 남아 있었다. 운현궁에 속한 모든 건물과 1910년대 바로크 형식으로 새로 지은 ‘양관(洋館)’은 사적 제2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운현궁 담 밖에 있는 서양식 건물, 정문과 ‘양관(洋館)’은 덕성여대 본관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양관 정문은 마차 출입이 가능하도록 곡선과 타원형으로 되어있고, 양관은 학교 문양 덕성여대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바깥마당을 지나 솟을대문으로 들어섰다. 높은 댓돌이 위압감을 준다. 아이들의 부축을 받아 힘들이지 않고 댓돌에 올라 넓은 마루 한 귀퉁이에 앉았다. 대여섯 칸쯤 되어 보이는 정면과 깊은 대청, 앞마루를 건너 방안과 마루 처마가 눈에 들어왔다. 노안당(老安堂)이란 현판 위 처마 끝에 각목을 덧대어 차양이 설치되어 있었다. 방안에는 평상복 차림에 정자관을 쓴 대원군이 경상(經床)을 마주하고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운현궁의 사랑채다. 노안당(老安堂) 현판은 <논어> [공야장] 편의 ‘노인을 편하게 하다’인 ‘노자안지(老者安之)’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이라 한다.
영화 ‘명당(明堂)’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명당’은 땅의 기운을 점쳐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곳이라 믿었다. 명당을 이용해 나라를 지배하려는 안동김씨 가문의 계획을 막다가 가족을 잃게 된 뒤, 복수를 꿈꾸는 천재 지관 박재상(조승우) 앞에, 세상을 뒤집고 싶은 몰락한 왕족 흥선(지성)이 나타난다. 함께 안동김씨 세력을 몰아낼 것을 제안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영화였다. 두 명의 왕이 나올 천하명당의 존재를 알게 되고, 뜻을 함께하여 김좌근 부자에게 접근한 박재상과 흥선은, 서로 다른 뜻을 품게 된다. 가야산 동쪽 능선에 해당되는 옥양봉 남쪽 산록에 가야사라는 고찰이 있었는데, 그 절터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종실의 보존을 위해 가야사를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무덤을 썼는데, 마침내 그 소원이 이루어져,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미해 만든 영화였다.
‘노안당’과 연결되어있는 대문을 지나니 노락당(老樂堂)이다.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흥선이 주로 거처한 곳이라 한다. 고종(3년)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거행한 곳이며, 가족들의 회갑 잔치나 각종 중요 행사를 거행하던 장소다. 명성황후가 삼간택(三揀擇)을 마치고 왕비수업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고종의 가례가 있은 뒤,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할 수 없자, 운현궁의 안채로 사용하기 위해 고종 6년에 새로 지었다는 이로당(二老堂)은, 여성들의 공간으로 남성들의 출입을 삼가기 위한 미음(ㅁ) 형태였다. 특이한 것은 이로당(二老堂) 현판이다. 두이(二)가 묘하게 보통 이(二)자보다 위로 치우쳐 쓰여 있다. 왕의 부모이기 때문이라 한다. 운현궁 전각에는 ‘노(老)’ 자가 많았다. 대원군이 ‘노’ 자에 애착이 많았나 보다. 실제로 대원군은 자신의 호(號)인 ‘석파(石破)’를 ‘노석(老石)’이라 바꿔 썼다고 한다.
운현궁은 노안당과 노락당, 이로당이 동서남북의 행각(行閣)으로 연이어져 있다. 이로당 정문을 나오니 운현궁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작은 전시관이 보인다.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생활용품과 당시 복식을 입은 마네킹들이 서 있었다. 뒤돌아서려는데 무언가 서운했다. 이곳 어딘가에 ‘진채선’이 머물렀던 곳이 있었을 텐데. 찾아볼 수도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진채선은 전북 고창 출신의 최초 여자 소리꾼이다. 판소리 대가인 동리(桐里) 신재효의 제자 겸 연인으로 고종 당시, 흥선대원군이 경회루(慶會樓)에서 열린 경복궁(景福宮) 낙성연에 신재효는, 진채선을 남복(男服)으로 분장시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부르게 했다. 진채선은 흥선의 총애를 받아 흥선의 첩실로 운현궁에서 살았다고 했다. 신재효의 진채선에 대한 그리움으로 ‘도리화가(桃李花歌)’를 지어 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고, 이 소식을 들은 진채선은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을 불러 스승에 대한 마음을 달랬다는 전설 같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생각났기 때문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들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권력의 무상함을 생각하게 한다. 천하를 호령하던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들 며느리와 힘겨루기를 하던 흥선대원군,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한 부질없는 욕심도 영원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한 시대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운현궁(雲峴宮)의 빛과 그림자.’를 보니, 기자(箕子)의 ‘맥수지탄(麥秀之嘆)’이 실감 난다.
[정남숙] 수필가. 2015년 대한문학 등단.
전북문협 전북수필 신아문예작가회, 행촌수필 이사.
한자. 한문 1급 전문지도사. 국립전주박물관 문화해설사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완판본문화관 해설사. 전주 기독교문화해설사
* 대한문학 작가상 (2022)
* 수필집 《노을을 닮고 싶다》 《난 아직도 꿈을 꾼다》 《역사의 마당에서 전통이랑 놀아 보자》
수필가께선 여든 연세가 무색하게 왕성한 글쓰기와 문화재 해설사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한문, 한자 1급 전문지도사로 한국사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하시죠.
현 정부의 불안정한 정국과 독불장군식 운용을 보면서, 위의 구절이 적격인 듯해 인용하고 싶습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달도 차면 기운다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권력의 무상함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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