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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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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욥기19,21-27)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복음<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루카10,1-12)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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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5822 2026.09.30 20:59 2026년 10월 1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0,1-12 오늘 교회는 선교의 수호자인 성녀를 기리며 일흔두 제자를 보내시는 복음을 읽습니다. 그런데 이 조합이 처음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복음은 길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오늘의 성녀는 수녀원 담장 밖으로 나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숫자를 눈여겨볼 만합니다. ‘일흔두 명’은 창세기 10장의 민족 목록을 떠올리게 합니다. 곧 온 세상의 민족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수입니다. 열두 제자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향한다면, 일흔두 제자는 온 인류를 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둘씩’ 보내집니다. 혼자 가지 않습니다. 증언은 언제나 함께하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지니지 말라 하신 목록이 놀랍습니다. 돈주머니, 여행 보따리, 신발.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입니다. 곧 선교는 준비를 갖추어 떠나는 일이 아니라 맨몸으로 맡겨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는 말씀도 무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길 인사는 오래 걸리는 예식이었습니다. 곁길로 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첫마디가 정해져 있습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히브리 인사 ‘샬롬’입니다. 선교사가 건네는 첫 물건이 교리도, 요구도 아니라 평화입니다. 여기서 오늘의 성녀와 만나게 됩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는 열다섯에 수녀원에 들어가 스물넷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생애는 좁았습니다. 같은 복도, 같은 성당, 같은 얼굴들. 그런데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교회라는 몸 안에서 자기가 될 자리를 찾다가 마침내 깨달았다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자기는 사랑이 되겠다고. 심장은 몸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멈추면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가 선교의 수호자가 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께서 그녀를 사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나란히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바다를 건너 아시아의 문 앞에서 죽었고, 한 사람은 담장 안에서 죽었습니다.
교회는 두 사람을 같은 자리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한마디가 오늘 복음과 이어집니다. 그는 큰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복도에서 마주친 수녀에게 미소 짓는 일, 자기를 싫어하는 이 곁에 일부러 앉는 일, 빨래터에서 튀는 물을 말없이 견디는 일.
이것이 그의 선교였습니다. 영성 주간의 눈으로 보면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고요와 단순함은 세상에서 물러나는 일이 아닙니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맡겨진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빈손이 되어야 평화를 건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갖추어지면 시작하겠다고 미루고 있지 않은가? 내가 내려놓아야 할 돈주머니와 보따리는 무엇인가? 나는 만나는 이에게 무엇을 먼저 건네는가?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나의 선교지임을 아는가?
주님,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다 미루지 않게 하소서. 빈손으로 길을 나서게 하시고, 제가 선 자리에서 먼저 평화를 건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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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62?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30. 17:38
어린아이와 같은 영적인 본질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덕목들은 영적 성숙의 본질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리지외의 데레사: 사랑의 길 어린아이와 같은 영적인 본질 2026년 9월 30일 수요일
제임스 핀리는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가 우리를 ‘작은 아이들’처럼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풀어 설명합니다: 데레사는 열다섯 살에 수도원에 들어가 몇 달 뒤 수련기를 시작했는데, 이는 곧 가르멜회 관상 수도자의 수도복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와 거룩한 얼굴의 데레사'라는 신심 깊은 이름을 받았습니다. 데레사 성녀가 자신의 가르침에서 강조한 "어린이다움"과 "아기 예수"에 대한 영성은 우리가 성인으로 성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성숙의 본질이 되는 어린아이와 같은 덕목들을 바라보라는 초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어린아이 같은 덕목들을 길러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고 응답할 수 있을까요? 데레사 성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로이 저에게 이 하느님의 용광로 인도하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아버지의 품에 두려움 없이 잠든 작은 아이의 온전한 내맡김입니다." [1] 그녀는 여기서 "하느님의 용광로"라는 표현을 쓰는데, 다른 신비주의자들도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마치 달아오른 용광로 위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곧 사라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만큼 깊은 사랑과 완전한 신뢰 속에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한히 사랑받고, 그 무한한 사랑 안에 붙들려 있어 어떤 두려움이나 슬픔도 완전히 초월됩니다. 어린아이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온전히 신뢰하며 안전하게 잠든 아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슬픔 한가운데서도 쉬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입니다. 곧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사랑받는 자로서 그 사랑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에게 있어 이 신비에 실제로 들어가는 길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가 받아들이듯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려 애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애쓰는 동안은 아직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 자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애써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녀는 사랑받고 있으며, 어린이는 우리 곁에서 곧 '받아들임의 행위'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힘이며, 동시에 아동 학대가 그렇게 깊고 고통스러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데레사 성녀의 가르침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 "우리는 어떻게 '애써 받아들이려는' 단계를 넘어, 순수하고 참된 '받아들임의 행위'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마 이것이 데레사의 영적인 길이 "작은 길"이라 불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것은 거창하거나 압도적인 체험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섬세하게 조율하여 그 사랑의 주권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도록 하는 길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 할머니의 아들이자 제 삼촌인 톰은 1945년 독일에서 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미사에 가셔서 대개 장미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성녀 데레사에게 기도하셨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11월의 어느 날, 그날도 할머니는 미사 후에 성녀 데레사에게 기도를 바치셨는데, 할머니가 기도를 마치자 어떤 신자가 제대 장식을 위해 쓰고 남은 장미꽃을 할머니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 할머니는 삼촌 톰이 그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되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할머니는 그 장미꽃을 성녀 데레사가 보내주신 표징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곧 톰이 성녀 데레사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Martha B. Reference [1] Story of a Soul: The Autobiography of St. Thérèse of Lisieux, trans. John Clarke, 2nd ed. (ICS Publications, 1996), 188. Adapted from James Finley, “Thérèse of Lisieux: Session 2,” Turning to the Mystics, season 13, ep. 4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6), podcast.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작은 꽃들은 우리에게 작은 사랑의 행위가 지닌 아름다움을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곧 성녀 데레사가 가르쳐 준 ‘작은 길’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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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01 05:48
- 욥처럼 기도합시다.
재산을 다 잃고 종들도 잃고 가족을 잃을 때까지의 욥은 고통으로 불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몸에 종기가 생기자 그 고통으로 인해 불행해하는 것 같은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친구들에게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랍니다.
옛날의 저는 인정치 않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손톱의 가시가 다른 사람의 뇌종양보다 고통스럽고, 재물이나 가족을 다 잃은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 내 몸의 고통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합니다.
사실 이것이 인간이고 욥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행 중에 있는 욥에게 친구들은 충고합니다. 위로의 말을 듣고 싶었는데 충고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욥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하고 서운함을 토로합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덜 얄밉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어쨌거나 인간에게서 위로받을 수 없게 되자 자기를 치셨다고 생각하는 하느님께 욥은 오히려 달려듭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왜 자기를 치셨냐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치셨냐고 직접 따지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제는 위로받아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입니다. 인간에게 위로받으려고 하다 받지 못할 때 계속 그 인간을 붙잡고 서운해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시선을 하느님께로 돌리고 욥처럼 하느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욥은 두려운 형을 만나기 전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했고, 복을 빌어주기 전에는 하느님을 놓아줄 수 없다며 씨름을 계속했습니다.
오늘 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도 바로 야곱의 이 결기이고, 이 갈망이며, 이 의지입니다.
사람에게 위로받으려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원망하는 것도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원망하면 그것도 기도이고 하느님께 위로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도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기도하고, 위로가 필요할 때 더 기도하며, 모두가 서운하고 원망스러울 때 욥처럼 더더욱 기도하십시다.
오늘 마침내, 드디오 뮤지컬 <프란치스코, 맨발의 찬가>가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막을 엽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고, 계속되는 기도와 후원 또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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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1.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63?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01. 06:01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이유, 즉 하느님 육화의 이유를 프란치스칸 신학자요 철학자인 요한 둔스 스코투스는 하느님 사랑의 본질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고자 하시는 계획을 이미 영원성으로부터, 즉 당신 존재의 본질 안에 이미 갖고 계셨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둔스 스코투스는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셔서 그 죄의 대속 제물로 바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우리 인간과의 사랑의 통교를 온전하게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실 계획을 영원성 그 자체에 두고 계셨다고 믿었고, 이를 자신의 신학 안에서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전하라고 분부하신 것도 이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기에 이를 믿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라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들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선포한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이미 실현되고 있으니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회개(회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 자체가 이미 기쁜 소식(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신뢰하고 그분과의 깊은 관계성 안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약 376–444)는 오늘 복음 말씀을 주석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사도들)이 실제 삶 속에서 오직 그분의 사랑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기를 바라셨습니다." 물론 후대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강조하신 이 가난의 의미가 '세상 경멸'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했지만, 제자들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세상에 파견되었던 것은 세상에 대한 증오의 표지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신뢰의 표지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사명은 이미 이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창조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히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와 사랑의 관계성 안에 있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은 사랑의 관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와 그 사랑을 나누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고, 그 진리를 우리가 깊이 깨닫고 당신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하느님의 이 간절한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과의 이 관계성으로 들어서는 것이 바로 구원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먼저 무언가를 애써 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 사랑의 대상에게 '내' 것을 주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내' 것은 단순히 그에게 세상적인 유익을 주기 위한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의 진심어린 표지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내'가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내' 사랑에는 별 관심이 없다면 참 실망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는 별 관심이 없고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때 실망하실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래도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고 당신과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지침 없이 계속해서 당신 사랑의 표지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십니다. 속아 주시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랑을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단순한 꽃길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면 나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우리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나'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은 가장 깊은 지혜가 자기 방어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랑의 고통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고통 자체를 사랑하거나 찬양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나의 힘은 약한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는 진리를 이해하고 삶 속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하지만 이 역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가 주는 사랑이 배가되어 우리를 충만하게 하는 사랑을 더 풍성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 머튼의 짧은 묵상글 하나를 나누며 복음 묵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세상은 틀림없이 불타버릴 것이다 –
조만간 세상은 분명히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도 – 모든 책들도, 매춘가와 더불어 수도원도, 횡재한다는 신문광고와 더불어 안젤리코 형제도… – 불타 없어질 것이다. 조만간 불이 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이고 아무도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만은 세상의 마지막에 미소를 지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으로 들어서는 문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으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놀이를 하며 즐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사랑은 그 사람을 문지방 안으로 끌어들이고 나서 문을 닫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불타는 세상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번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상 마지막 날에 이 세상 역사에서 내가 가장 비굴하게 굴욕을 당하게 될 10명의 죄인들 중 하나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기쁨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사랑으로 채워질 것이며, 꼴찌가 첫째가 되는 그곳에서 맨 끝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화살처럼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만일이라도 성 프란치스코와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고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면 나는 나의 거만한 태도를 빠져나가 모든 것 안에서 꼴찌가 되고 가장 보잘것없는 자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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