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6
Name:조기조 (kijojo@korea.com)
홈페이지:http://tong.or.kr/kijohome.htm
2001/1/26(금) 15:35
Hit: 13 회
황병목의 [달에게 길을 묻다] 발문
누구나 시인으로 살 수 있다
조기조
1
며칠 전 황병목 시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을 알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잠시 당황하며 우물거리자 대구노동자문학회를 거명하며 한번 만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재차 물어왔다. 그래서야 나는 그의 이름과 얼굴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지난여름 지리산에서 있은 전국 노동자문학회 대동제에서 조선남 시인 등과 함께 만나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나는 우리가 대동제에서 만나지 않았느냐고 짐짓 자신 있게 아는 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가는테안경을 낀 곱상한 외모에 말수도 많지 않아 점잖게만 보였던 그였고 나 또한 누구와도 처음 만나서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퍼스낼리티 때문에 수인사 외에 별다른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러고 있는데 황병목은 자신이 두 번째 시집을 묶으려고 한다는 얘기와 함께 내게 발문을 써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시집을 낸다는 얘기는 반갑고 축하해야할 일이겠으나 내게 발문을 청탁해오는 일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집의 발문이라는 것은 시집의 시뿐만 아니라 그 시인의 됨됨이까지를 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써야 제격일 것이라는 생각을 전하고, 그가 살고 있는 주위에서 그런 사람을 찾아보라고 이르며 고사를 했다. 그래도 그는 당기고 나는 밀고를 몇 번째 반복하고 있자니 내가 시집을 묶을 무렵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지금은 그 발문이라는 것이 꼭 시집 속에 편집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고 의문도 해보지만 그때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줄로 알고 발문을 부탁할만한 사람을 찾을 때의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반듯하게 대학이라도 나와서 그럴듯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를 직접 가르쳐준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닌 기름밥 신세이다 보니 어디 가서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할지 갑갑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세상물정 모르고 공돌이 주제에 가당찮은 시집을 내겠다고 이러고 있는가 싶어 자괴감까지 들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런 기억이 떠올라 나는 황병목에게 좋다, 그러마고 했다. 오죽했으면 나에게 그 발문 부탁을 했을까. 과부 신세 홀아비가 안다고 일면식 밖에 없는 내가 그의 시집에 발을 다는 악연은 그와 내가 모두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아이덴티티에서 기인했을 터다. 그렇다면 황병목의 시집에 발문을 붙이는 일은 마치 나의 일처럼 피해갈 도리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2
며칠 후 우편으로 황병목의 새로 낼 시집 원고와 함께 보내온 그의 첫 시집 {임시 공휴일}을 먼저 읽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그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소
눈만 뜨면 쫓아가는 공장
발목 잡고 늘어지는 어두운 골목을
가족이 그리워 찾아드는 모습이
천상 나를 보는 것 같소
- [불온한 생각] 부분, {임시 공휴일}
그것은 황병목의 시가 아니라 바로 나의 얘기였다. 내가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은밀한 고백이 그 시집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서늘하게 다가오는 그 얘기는 이렇게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당신도 가슴에 나처럼 칼을 품은 거요/ 모두 잠든 밤에 그 칼을 가는 거요"라고. 솔직히 나는 그 얘기를 내 거울인 나 자신에게 털어놓은 일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 이야기를 만국의 노동자에게 털어놓고 있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많은 노동자의 시들이 귀기울이기 힘든 요란한 고음이나 자기 연민에 휩싸여 측은지심을 일으키기 일쑤인데 이렇게 지긋이 폐부로 다가드는 시를 나는 좀체 보지를 못했다. 그것은 시인의 진중한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려 아득한 공명으로 나에게 울려왔다.
이어 나는 새 시집 원고를 읽어나갔다. {달에게 길을 묻다}라고 제목을 뭍인 그의 두 번째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IMF 통치체제 아래서 실업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피폐해진 삶의 세세한 골목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제2부는 꽃이라는 제재 위에 시들거나 져서 짓밟히는 꽃들을 바라보며 꽃피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지난 시절에 비해 무기력해진,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노동자의 삶을 은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제3부는 시적 주체의 정치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시편들로 시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제4부는 시인의 인간미를 바로 드러내며 자신과 주변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으로 씌어진 시들로 채워 놓았다. 황병목은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방식을 통해서 오늘날 노동자의 삶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는데 이는 "모두 잠든 밤에 그 칼을 가는" 만만치 않은 시적 탐구의 노력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는 그 가운데 특히 1부와 4부의 시들에서 황병목이라는 노동자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점을 발견하며 깊이 긍정한다.
황병목은, 지난 3년여 동안 IMF 통치체제가 진행되어 오면서 드러난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의 비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공장에 남아 있는 노동자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동생에게]) "가위에 눌려 신음"하며 일을 해야만 하고([꿈]), 공장 밖으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공원 주변 무료 급식소에 "새까만 비둘기떼"처럼 모여들어야 하기도 했다([길 찾기 1]). 그러나 그런 삶의 반대편에서는, "노동자, 서민들, 빈자들 기(氣) 팍팍 죽이는" 수천 만원짜리 옷 로비 사건이 이루어지는가 하면([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 공권력들은 고용 불안과 맞서는 노동자들의 저항에 양주를 마시고 "술에 취한 미친개들"처럼 탄압을 가하는 모습([너희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위기 속에 놓인 노동자의 삶을 방송이나 신문의 뉴스를 통해 누구나 알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한낱 피상에 머물기 십상이다. 실업에 맞닥트린 자의, 노점상, 노가다, 공공근로와 "누가 알아볼까 싶어/ 늦은 밤에 쓰레기더미를 뒤적이며/ 파지와 고물을 주"워본 아픔 속에서([그곳에서 죽으리라]) 그 위기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감나게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그런 뒤에 시적 주체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당당한 노동자로 살겠네])라고 하는 말의 진정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이대로 무너질 수 없는 이유는 삶의 존엄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겨울을 오롯이 감당하고 마침내 "아, 터지는 새 순"과도 같이 순결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황병목은 인간에 대한 깊고 순한 이해라는 토대에 새롭게 시작할 삶의 주추를 놓는다.
나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산다
마음과 달리 행해지는 행동
가볍고 경박한 언행
내 마음에 비춰보는 저 달 보기가 부끄럽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가까운 사람일수록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달에게서 배운다
- [달에게 길을 묻다] 부분
황병목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노동자의 권익 보호받는 나라/ 우리의 아이들이 꿈과 희망과 이상 펼칠 수 있는 나라"([동생에게])는 무슨 거창한 기획에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손때 묻은 살림살이"처럼 작은 것들로, "어려울 때 내 가슴 쓸어주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빚어내는 섬세한 사랑의 구축을 통해서 가 닿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시는 우리 마음을 얼마나 따뜻하게 만드는가.
밤새 몰아친 한파에
배관이 체한 음식물
왈칵 쏟아놓던 날
보일러실 라면박스
세든 고양이 처음 보았지만
나 모르게 이 놈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도둑잠 자고 가곤 했나보다
주인 할매는 창을 막으라지만
그냥 둘란다
지난 계절 아무 곳에서나
한뎃잠을 잤을 텐데
추운 겨울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만 세 놓을란다
- [세] 전문
노동자의 삶의 중요한 한 공간인 노동 현장이 자본과 노동자가 공존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림으로써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유리(遊離)의 길 위에서 살아간다. 황병목의 시에 드러난 삶도 마찬가지다. 공장에서 쫓겨나 길거리에서 넝마주이가 되기도 하고([그곳에서 죽으리라]), 일찍이 자신을 쫓아낸 고향을 다시 찾아보지만 또다시 등 떠밀려 나오고 만다([당당한 노동자로 살겠네]). 이러한 유리적 삶의 도정에서 공존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일 이외에 우리가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시집의 2, 3부의 시들에서는 1980년대적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황병목에게 1980년대는 노동 현장에서의 투쟁이라는 벽에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부조해 놓은 시간일 것이다. 그는 그 과거의 시간 속으로 그리움이라는 엽신을 띄워보내고 있다. 그러나 가파른 언덕에 발을 디딘 듯 위태로운 삶 속에서도 공존의 가치를 알며 얘기하고 있는 지금이 아닌가. 지난 시절은 노동자가 자본에 대한 적대적 투쟁을 통해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노동자 자신의 가치 있는 삶을 통해서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할 것이다.
3
노동자가 시를 쓰고 한 권의 시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오랜 숙제였던 이 질문의 답을 나는 황병목의 시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것과 다르고, 시장에 내놓을 책 한 권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자동차나 상품으로서의 책 한 권이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이라고 한다면 노동자의 시쓰기는 그 타율적 관계에서 벗어난 자발적 삶의 경영이기 때문이다. 즉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생산한다는 커뮤니티인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의 굴레에 갇혀 노동만 하는 것이 아닌 시인의 삶을 함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노동자가 더 이상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삶을 부정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얼마든지 자신의 삶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복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바뀐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네
앞선 마음 섣부른 생각
채우지 못할 그릇만 또 만들었네
달리 방법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네
어떻게 뛰어들 것인가 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뛰어들 것인가
생각할 일이었네
내 마음 열지 못하고
여태 애 태웠네
세상 사람들 사는 것이 다 시인인 것을
- [나의 시는] 전문
황병목의 시쓰기는, 그가 단순히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일이 아닌, 세상 사람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자신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함 자체이다. "세상 사람들 사는 것이 다 시인"이라고 하는 말은 누구나가 시적인, 예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살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언인데 그는 또 그러한 생각을 노동자문학회 활동이라는 부단한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하려고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이 두 번째 시집 {달에게 길을 묻다}를 상자함으로써 자신의 삶, 노동자의 삶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켜놓고 있다.
황병목은 시가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눈물이 무엇인지, 아는 노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