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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경상도(慶尙道)
진보(眞寶)
봉람서원(鳳覽書院) 만력(萬曆)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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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 진보현(眞寶縣)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하리(下里) 사방으로 끝이 5리이다. 상리(上里)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5리이다. 서면(西面) 처음은 7리이고 끝은 25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 천숙부곡(泉宿部曲)은 동쪽으로 10리이고, 춘감부곡(春甘部曲)은 북쪽으로 10리이다. 파질부곡(巴叱部曲)은 남쪽으로 15리이고, 고을마부곡(古乙亇部曲)은 동쪽으로 30리이며, 성부부곡(省夫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이다.
【창고】
봉각서원(鳳覺書院) 선조(宣祖) 임인년에 건립하고 숙종(肅宗)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文廟)에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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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각서원(鳳覺書院) ->봉람서원(鳳覽書院) 만력(萬曆)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경상도(慶尙道)
진보(眞寶)
봉람서원(鳳覽書院) 만력(萬曆)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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嶠南誌卷之二十九 眞寶郡 校院
校院
鄕校 在郡北三里應德洞(小設位)道伯金安國印小學以奬之有詩曰夫子祠宮肅且嚴諸生揖讓儼觀 瞻遐方最喜文風振小學工夫願更添
鳳覽書院 在郡北十五里宣祖壬寅建肅宗庚牛賜額享文純公李 滉
(壇廟)社稷壇 在郡西三里 城隍壇 在郡南四里舊在郡北 厲壇 在郡北四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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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圃先生文集卷之三 / 記 / 玉洞書院記
眞城縣。我退溪老先生之貫鄕也。歲庚子。鄕人李君。於縣北十餘里面陽之地得異處。名玉洞。山水秀麗。洞壑幽曠。李君於是。謀於鄕父老子弟。爲先生營建廟宇。仍設書院。蓋模畫出自李君。而縣監崔君。實力焉。越三年壬寅。工旣訖功。廟三間,堂四間,夾室二間,齋三間,神廚一間,有司廳二間,庫二間,廚舍直房幷四間。是年九月丁巳。奉安位版于廟。屬琢記事。嗚呼。書院之昉於中朝尙矣。而創於東方亦有年。無非所以尊尙先儒。矜式後學之事也。是以。凡爲先賢立廟建院者。或就講道之所。或以臨民之地。或於鄕貫。或尋游跡。隨處致敬。以敦尊德象賢之風。亦古者社祭鄕先生之義。而其作成人才。藏修士子之方。莫大於此。竊唯。我退溪先生。道德文章。集成東方。其於平日講道之所。游詠之處。莫不立廟建院。以爲尊奉矜式之地。而唯於貫鄕臨民之邦。顧有闕焉。多士惜之。今一朝以先生貫籍之鄕。而又得名勝之區。廟貌新開。時薦蘋蘩。聸慕儀刑。追傃遺風。父老之尊奉者在斯。小子之矜式者以此。則眞城雖十室之邑。固有忠信自好之人。自今菁莪之育。弦誦之美。不亦大佑斯文。而其導民興俗之功。有補於國家風化。夫豈淺淺哉。李君之用心。可謂至矣。而崔太守之賜。亦不少也。李君名庭檜。字某。於先生爲族孫。時寓居眞城。爲人忠榦。嘗宰橫城,義興。皆有治績。太守名某。字某。某貫人。萬曆壬寅十二月初吉。淸城後人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鄭琢。記。
坊名玉洞。古也。而或曰鳳覽。故院額初稱鳳覽。厥後書生安姓者夢。有二老指示之異。故因玉洞之舊號。
약포집 제3권 / 기(記) / 옥동서원기〔玉洞書院記〕
진성현(眞城縣)은 우리 퇴계 노선생의 관향(貫鄕)이다. 경자년(1600)에 고을 사람 이군(李君 이정회)이 진성현 북쪽 10여 리 남향 땅에 기이한 곳을 얻어 ‘옥동(玉洞)’이라 불렀으니, 산수가 수려하고 골짝이 깊고 아늑하였다. 이군(李君)이 이에 고을의 부로(父老) 및 자제들과 모의하여 선생을 위하여 묘우(廟宇)를 세우고는 다시 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대개 계획은 이군에게서 나왔으나, 현감(縣監) 최군(崔君)이 실질적 힘을 보태었다.
3년 뒤인 임인년(1602)에 공사가 완료되니, 묘우 3칸, 당(堂) 4칸, 협실(夾室) 2칸, 재(齋) 3칸, 신주(神廚) 1칸, 유사청(有司廳) 2칸, 창고 2칸 주사(廚舍)와 주사의 직방(直房)이 모두 4칸이었다. 이해 9월 정사일(17일)에 위판을 사당에 봉안하고 나에게 일을 적어주기를 부탁하였다.
아, 서원은 중국에서 시작된 지 이미 오래고, 우리나라에 창건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는데, 선유(先儒)를 높이고 후학을 본받게〔矜式〕 하는 일 아닌 것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선현을 위해 묘우를 세우고 서원을 건립하는 것은, 도학을 강학하던 곳에 짓거나 백성들을 다스렸던 임지에 지으며, 관향에 짓거나 노닐던 곳에 짓기도 한다. 장소에 따라 공경을 지극히 하여 덕을 존숭하고 현인을 본받는 풍속을 돈독히 하였으니, 또한 옛날 이사(里社)에서 향선생을 제사 지내던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재를 양성하고 선비가 수양하는 곳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퇴계 선생은 도덕과 문장을 우리나라에서 집대성한 분이다. 그분이 평소 도학을 강학하던 곳과 노닐며 읊조리던 곳에는 묘우를 세우고 서원을 건립하여 선생을 존봉(尊奉)하고 후학들이 본받는 곳으로 삼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오직 관향과 백성을 다스렸던 고을에는 도리어 서원이 없어 많은 선비들이 이를 애석해하였다. 이제 하루아침에 선생의 관향인 곳에 또 이름난 곳을 얻어 묘우를 새롭게 건립하고 계절마다 빈번(蘋蘩)을 올리며 선생의 의형(儀刑)을 존모하면서 유풍(遺風)을 추숭하게 되었으니, 고을의 어른들이 여기에서 존봉(尊奉)하고 젊은이들이 이것으로써 본받는다면, 진성(眞城)이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진실로 충신(忠信)하여 제 몸을 아끼고 수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인재의 육성과 강학의 아름다운 풍습이 또한 사문(斯文)에 큰 보탬이 되지 않겠으며, 또 백성들을 이끌어주고 풍속을 흥기시키는 공이 국가의 교화에 보탬을 주는 것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이군의 마음 씀은 지극하다 할 만하고, 최 태수의 지원도 또한 적지 않다. 이군은 이름이 정회(庭檜)이고 자(字)가 모(某)이니, 선생에게 족손이 되며 진성에 우거하였다. 사람됨이 충직하고 올곧아 일찍이 횡성ㆍ의흥 현감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다. 태수는 이름이 모(某), 자가 모(某), 모(某) 관향인이다.
만력 임인(1602) 12월 초길(初吉)에 청성(淸城) 후인(後人) 대광보국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정탁이 기록하다.
마을을 ‘옥동(玉洞)’이라 명명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혹은 ‘봉람(鳳覽)’이라 하였기 때문에 서원의 편액을 초기에는 ‘봉람서원(鳳覽書院)’이라 일컬었다. 그 뒤에 안씨(安氏) 성을 가진 서생이 꿈에 두 노인이 옥동이라 지시해주는 기이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옥동의 옛 명칭을 따랐다.
[주-D001] 옥동(玉洞) :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봉감(鳳甘)이다. ‘봉람(鳳覽)’이라 하였기 때문에 서원이 사액된 초기에는 ‘봉람서원(鳳覽書院)’이라 칭하였다. 예전에는 진보현에 속했던 지역이다.[주-D002] 최군(崔君) : 최산립(崔山立, 1550~1615)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입지(立之), 호는 우암(愚庵)이다. 선산(善山) 해평(海平)에 거주했다. 1591년(선조24)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9년 진보 현감에 재직하여 청덕(淸德)으로 추앙을 받았으며, 1609년에는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어 3년간 재직하였다.[주-D003] 본받게 : 긍식(矜式)이라고 하는데, 공경하여 본받는다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내가 서울에 맹자의 집을 지어 주고 만종의 녹으로 제자를 양성하게 함으로써 여러 대부와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공경하고 본받도록 하고 싶다.〔我欲中國而授孟子室 養弟子以萬鍾 使諸大夫國人 皆有所矜式〕”라고 하였다.[주-D004] 이사(里社) : 옛날 각 동리(洞里)마다 토지신(土地神)을 모시던 사당(祠堂)이다. 주(周)나라 때에는 1백 가(家) 이상이면 사(社)를 세웠고, 진(秦)ㆍ한(漢) 이래에는 25가(家) 이상이면 사(社)를 세워 제사 지냈다.[주-D005] 빈번(蘋蘩) : 개구리밥과 흰 쑥이다. 전하여 변변치 못한 제수(祭需)의 뜻으로 쓰인다. 《춘추좌전》 은공(隱公) 3년에 “성의만 있다면 빈번 온조(蘋蘩薀藻)의 채소도 귀신에게 드릴 수 있다.” 하였다. 《시경》 〈채빈(采蘋)〉에 “개구리밥을 뜯으러 남쪽 시냇가로 가세. 마름 풀을 뜯으러 저 길가 도랑으로 가세.〔于以采蘋 南澗之濱 于以采藻 于彼行潦〕” 하였다. 이는 부인이 사당에 제사 지내면서 제수를 장만하기 위해 나물을 캐는 것을 읊은 시이다.[주-D006] 제 …… 사람〔自好〕 :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제 몸을 팔아 그 임금을 이루는 것은, 제 몸을 아끼는 향당에서도 하지 않거늘 하물며 현자(賢者)가 그런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自鬻以成其君, 鄕黨自好者不爲, 而謂賢者爲之乎〕”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자호(自好)란 스스로 그 몸을 아끼는 사람이다.〔自好 自愛其身之人也〕’라고 주를 달았다.[주-D007] 인재 : 청아(菁莪)라고 하는데,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에서 나온 말로 원래는 무성한 다북쑥이란 뜻이었으나, 모시서(毛詩序)에 따르면 인재(人才)를 교육함을 노래한 것이라 하였다. 전하여 많은 인재라는 뜻으로 쓰인다.[주-D008] 이정회(李庭檜) : 1542~1612.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직(景直), 호는 송간(松澗)이다. 소년 시절부터 재종증조인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훈도(薰陶)를 받고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에도 학문에 정진하였다. 1602년(선조35)에는 퇴계의 손자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와 함께 선향(先鄕)인 진성(眞城)에 우거하면서 봉람서원(鳳覽書院)을 창건하여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올렸다.[주-D009] 횡성 …… 지냈는데 : 이정회는 그의 나이 50세인 1591년 5월에 횡성 현감에 제수되었고, 56세인 1597년 12월에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의흥 가수(義興假守)에 제수되었다.[주-D010] 태수는 …… 관향인이다 : 이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옥동서원 창설을 주동한 이정회의 《송간집》에도 정탁의 옥동서원기가 실려져 있는데 태수의 이름을 ‘산립(山立)’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인재(訒齋) 최현(崔晛, 1563~1640)의 〈제종질진보산립문(祭從侄眞寶山立文)〉을 근거해 볼 때 당시 진보 현감은 최산립이었다.[주-D011] 봉람서원(鳳覽書院) : 황희(黃喜) 정승을 봉안하는 상주 옥동서원 유생들의 원병도용(院名盜用) 상소로 1807년(순조7) 경상 감사 윤광안(尹光顔)의 탄핵을 받고 봉람서원이라 환원 개칭하였으나,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그 후 복원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다. 봉람서원 소유재산인 입암면 산해리 391번지 등은 진보향교 소유를 거쳐, 1909년 현 진보초등학교설립에 기증되었다가 그 후 민간인에 불하되고, 병옥동에 있던 옛 봉람서원 건물은 영남사림의 공의로 1916년 입암면 문해(文海) 마을 앞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의 남경대(攬景臺) 정자 중건 건축자재로 기증, 활용되었다. 《英陽郡誌》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이기훈 (공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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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집 연보 연보〔年譜〕
30년 임인년(1602, 선조35) - 선생 77세 -
○ 2월 갑자일(1일)에 매당(梅堂) 권욱(權旭)과 함께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 8월 계묘일(14일)에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였다.
○ 9월에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사당에 가서 배알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 배삼외(裴三畏)를 보내어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의 묘소에 치제를 올리게 하였다. - 제문이 있다. -
○ 가을에 외조부모님의 주사(主祀)를 위해 입의(立議)하였다. - 선생의 외조부모는 봉사손(奉祀孫) 한덕유(韓德輶)가 후사 없이 죽었다. 그의 아내 조씨가 임진왜란 때에 신주를 짊어지고 그의 형 집에 숨어 살았는데, 오래지 않아 조씨도 죽었다.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그 유적을 찾아보고서 비로소 그의 신주가 여전히 조씨의 집에 남아 있음을 알고 여러 외손과 함께 합의하여 재물을 내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봉환하여 종모제(從母弟 이종) 남응주(南應周)로 하여금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외가의 토지를 그에게 모두 귀속시켰다. -
○ 11월 신미일(14일)에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공의 부음을 들었다.
○ 12월에 〈옥동서원기(玉洞書院記)〉를 지었다. - 옥동서원(玉洞書院)은 진성현(眞城縣) 북쪽에 있는데 산수가 매우 수려(秀麗)하다. 고을 사람들이 서원을 세워 퇴계 선생을 봉향하는데 선생에게 기문을 청했다. 옥동서원은 지금의 봉람서원(鳳覽書院)이다. -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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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13권 / 묘갈명(墓碣銘) / 의금부 도사 선암 이공 묘갈명 병서 〔義禁府都事仙巖李公墓碣銘 幷序〕
공의 휘는 엄(儼), 자는 사각(士恪), 호는 선암(仙巖)이다. 이씨(李氏)는 영천(永川)을 관향으로 하는데, 고려 때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진 대영(大榮)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말 소윤(少尹) 휘 헌(軒)이 영천에서 선성(宣城)으로 이주하였다. 이분이 아들 둘을 낳았다. 휘 파(坡)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고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의 증조이며, 휘 오(塢)는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니 공의 5대조이다. 고조 휘 희량(煕良)은 부사정(副司正)이다. 증조 휘 은동(銀仝)은 전력부위(展力副尉)이다. 조부 휘 인필(仁弼)은 침랑(寢郞)이다. 부친 휘 지번(之蕃)은 뛰어난 재주와 훌륭한 품행이 있었다. 모친은 흥해 배씨(興海裵氏)이니,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 안동 가야리(佳野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이를 갈 때쯤부터 유일재(惟一齋) 김 선생(金先生)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과거 공부에 매달리지 않고 낙민(洛閩) 등 여러 학자들의 글에 마음을 쏟았다. 천거를 통해 처음으로 훈도(訓導)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 의금부 도사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진안(眞安 진보(眞寶))의 후평리(後坪里)로 이주하였다. 후평리에는 초선대(招仙臺)가 있었는데, 공은 수려한 강산과 기괴한 바위산을 좋아하여 좌윤(左尹) 박호(朴𤐶),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과 늘 그 사이에서 휘파람 불고 시를 읊조렸다. 그 시에 이르기를,
초선대 아래로 물길 휘감아 도는데 / 仙臺臺下水縈回
반쯤 핀 부용화가 물속에 비쳤네 / 半面芙蓉倒影開
시는 언지이니 한가롭게 붓을 들지만 / 詩因言志閒拈筆
술은 환심이 되니 억지로 잔을 올리네 / 酒爲歡心强進盃
하니, 당시의 명현(名賢)들 중에 화답시를 지은 사람이 많았다. 공은 궁벽한 시골이라 문풍(文風)이 거의 없음을 항상 걱정하였는데, 봉람서원(鳳覽書院)이 완공되자 전후 15년간 동주(洞主)가 되어 문풍을 많이 진작시켰다.
모년 모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고, 묘소는 초선대 남쪽 5리의 남산(南山) 계좌(癸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 춘천 박씨(春川朴氏)는 선교랑(宣敎郞) 세필(世弼)의 따님이며, 묘는 합장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다. 정욱(廷郁)과 방욱(邦郁)이다. 딸 하나는 변종로(卞宗魯)에게 출가하였다.
정욱은 후백(後白)을 낳았다. 방욱은 우백(友白)을 낳았는데 후사가 없고, 딸은 진사 권균(權均)에게 출가하였다. 권균의 아들 만두(晩斗)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냈다.
후백은 석기(碩基)를 낳았다. 석기의 아들 동구(東耉)는 동지중추부사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유적(遺蹟)은 모두 필방(畢方)의 재난을 당했는데, 9대손 부현(傅鉉)이 읍지(邑誌)와 서원안(書院案) 및 사우들의 집에서 살피고 얻은 기록들을 나에게 찾아와 보여 주면서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내가 삼가 그것에 의거하여 서문을 짓고 명을 덧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바위 초선대가 / 縹緲巖臺
물길 한가운데 오롯이 있도다 / 宛在中沚
그 위에 계신 신선 한 분 / 仙人其上
아름다운 하의를 입었네 / 燁如荷衣
작록을 거절할 수 있었기에 / 爵祿可辭
고향도 버릴 수 있었어라 / 土壤可棄
봉우리마다 붓이 늘어섰고 / 峯峯筆陣
강물마다 문장의 물결 일었네 / 水水文瀾
산림에서 학문을 전수하니 / 講授山林
그 연원이 더욱 돈독해졌네 / 淵源益篤
바람 속에 울리는 철적 속에서 / 風轟銕笛
술잔 주고받으며 바둑판을 벌이니 / 酒爛橘棊
덕의와 풍류는 / 德義風流
백 년 전이 어제 일 같네 / 百年如昨
웅대하고도 높디높은 / 泱泱矗矗
법도가 이곳에 남아 있으니 / 典型斯存
다른 산에도 한 조각 비석이 / 一片他山
이미 많다고 말하지 말고 / 莫已多了
세상 모든 군자들아 / 凡百君子
바라건대 이곳에서 찾아보시라 / 尙庶求焉
[주-D001] 김 선생(金先生) : 김언기(金彦璣, 1520~1588)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온(仲溫), 호는 유일재(惟一齋)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많은 후학을 배출하여 당시 안동 학문 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이황이 죽은 뒤에는 여강(廬江)에 서원을 세우고, 백련사(白蓮寺)를 철거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데 노력하였다. 문집에 《유일재집》이 있다.[주-D002] 낙민(洛閩) …… 학자들 : 낙민은 낙양(洛陽)과 민중(閩中)으로 정호ㆍ정이와 주희의 출생지이며, 정호ㆍ정이와 주희의 학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주-D003] 시(詩)는 …… 올리네 : 시는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言志〕이므로 마음 내킬 때 느긋하게 짓지만, 술은 마음을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歡心〕이니 억지로라도 권하며 마신다는 의미이다.[주-D004]
봉람서원(鳳覽書院)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眞寶面) 이촌리(理村里)에 있던 서원이다. 1602년(선조35)에 창건되었으며 이황의 위패를 모셨다. 1630년(인조8)에 사액을 받았으나 1868년(고종5)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주-D005] 필방(畢方)의 재난 : 화재를 말하는데, 필방은 전설상의 괴이한 새로 세상에 나타나면 항상 화재가 난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 〈서산경(西山經)〉에 “어떤 새가 있는데 그 모양은 학과 같고 발은 하나이며 붉은 무늬에 푸른 바탕을 띠었으며 부리는 희다. 이름은 필방이다. 울음은 절규하는 듯하며, 나타나면 그 고을에 반드시 화재가 생긴다.〔有鳥焉 其狀如鶴 一足 赤文靑質 而白喙 名曰畢方 其鳴自叫也 見則其邑有譌火〕” 한 데서 나왔다.[주-D006] 하의(荷衣) : 연잎으로 만든 옷인데 숨어 지내는 은자의 옷을 상징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연꽃을 잘라 윗도리를 해 입고, 부용 잎을 모아 치마를 만들었네.〔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 한 데서 나왔다.[주-D007] 철적(銕笛) : 은자나 고사(高士)가 불던 피리이다. 중국 무이산(武夷山)에 은자 유겸도(劉兼道)가 노닐었던 유적이 있는데, 그가 철적을 불면 구름을 뚫고 바위를 깨뜨릴 듯한 소리가 났다고 한다. 주희가 여기에 철적정(鐵笛亭)이라는 정자를 새로 짓고 시를 지은 바 있다. 《晦庵集 卷9 武夷精舍雜詠》[주-D008] 바둑판을 벌이니 : 원문의 ‘귤기(橘棊)’는 바둑 두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 중국의 파공(巴邛)에 사는 사람 집에 귤나무가 있었는데, 서리가 내린 뒤 서 말들이 항아리만 한 귤이 자라 그 속을 갈라 보니 두 노인이 마주 앉아 내기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귤중지락(橘中之樂) 또는 귤중희(橘中戲)라고 한다. 《幽怪錄 卷3 巴邛人》
ⓒ 한국고전번역원 | 이성민 (역)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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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진보면(眞寶面) 이촌리(理村里)에 있던 서원이다.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봉감(鳳甘)이다.오류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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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11권 / 축문(祝文) / 종선조 송간 선생의 묘에 비갈을 바꾸고 올리는 축문 본손을 대신하여 짓다.〔從先祖松澗先生墓改碣祝文 代本孫作〕
즐거워라 마명동이여 / 樂哉馬鳴
우리 집안의 선영일세 / 我家牛岡
대조 송안군께서 / 大祖松安
처음으로 안장된 곳이요 / 其始克襄
한갓진 서쪽 구역은 / 西區寥廓
부군께서 묻히신 곳일세 / 府君衣舃
대대로 덕을 이어 / 世德作逑
삼백 년을 내려왔네 / 歷世三百
자손들이 묘갈을 세웠으나 / 令孫表碣
오래되어 퇴락했네 / 久而頹零
다시 세울 것을 도모하여 / 爰謀更斲
옛 서문을 새로 새겼네 / 舊序新銘
타고나신 자질은 / 曰惟天姿
금옥처럼 순수하고 온화하였네 / 粹金溫璧
일찍이 가학을 계승하여 / 早聞家學
암서헌의 강석에서 배웠네 / 巖栖講席
부조의 예로 정해지자 / 禮定不祧
학업은 높은 자취 추종했네 / 業追逸迹
삼 년간 피눈물을 흘리니 / 血淚三年
앙상하게 잣나무 말랐네 / 摵摵枯柏
향리의 지기들이 / 知己鄕邦
입을 모아 천거하였네 / 交口薦白
부디 말하지 마오 홍려경이 / 母曰鴻臚
작질 낮고 품계 협애하다고 / 秩卑階窄
종계를 밝게 변무하여 / 璿潢昭誣
대려의 공훈을 역사에 남겼도다 / 帶礪垂策
가산을 기울여 장례하고 / 銀盃羽化
사흘 동안 빈소에 곡하니 / 三日哭宮
눈물이 강하가 터진 듯하고 / 江河如決
동풍에 비가 내리는 듯했네 / 解雨東風
못된 오랑캐 도발하여 / 天驕跳踉
북성에서 드세게 날뛰었네 / 北城頟頟
이에 부림으로 달려가니 / 乃畀缶林
명나라 군사들 탄복했네 / 皇師嘖嘖
이때에 어진 아우가 / 是時賢弟
당당하게 의병 일으키자 / 堂堂義㦸
방략을 일러 주어 / 指授方略
적을 이기고 사로잡았네 / 曰有克獲
화살 비가 걷히고 / 箭雨旣收
푸른 달이 밝게 떴네 / 蘿月凝碧
천인과 성명의 이치를 / 天人性命
깊이깊이 궁구했네 / 仰思俯覈
부지런히 등촉 밝혀 / 孜孜炳燭
날이 가는 줄을 몰랐네 / 罔知日索
옥동은 깨끗하고 수려하며 / 玉洞明麗
지남은 그윽하고 쾌적했네 / 芝南幽適
위로는 부형을 공경하고 / 上爲揭虔
아래로는 자제들 교육하여 / 下爲誘掖
대체는 도산을 본받고 / 譜管陶山
요약됨은 온동을 본받았네 / 約倣溫洞
잠시 잠깐도 반걸음 한 걸음이라도 / 造次跬步
분명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네 / 印摑惟中
험고한 축융봉이 / 祝融天險
우리의 요새이니 / 是我金湯
미리 대비하는 것을 / 桑土陰雨
잊을 수 있을 것인가 / 俾也可忘
재야에서 곧은 충정으로 / 畎畝危忠
육조의 봉사 올리셨네 / 六條封章
신료들이 모두 인정하였으니 / 具僚咸許
몸은 늙었으나 마음만은 변함없다네 / 髮短心長
고을 이름 누가 회복하고 / 府號誰復
고을의 제방 누가 쌓았던가 / 府堰誰築
이에 풍속과 법도 세워 / 乃立風憲
문족들 친애하고 사람들 사랑했네 / 乃辨類族
백성들은 그 교화를 입었고 / 民沐其化
선비들은 그 은택을 입었네 / 士利其澤
그 때문에 바로 오늘 / 所以今日
모두 와서 일을 돕는 것일세 / 咸胥來役
공교하게 빗돌에 비문 새겨 / 巧而劖墨
힘겹게 옮기느라 인부들 등줄기 붉어졌네 / 強而赬脊
이제 역사를 마치고 / 於焉訖事
이에 제수를 진설하네 / 載陳燔炙
복주의 두솔원에 / 福天兜率
영령께서 밝게 내려오셨네 / 肸蠁昭假
산이 다 닳도록 / 山可夷兮
골짝이 바뀌도록 / 谷可易兮
우뚝한 오 척의 비여 / 峩峩五尺
천지와 함께 영원하리 / 配闔闢兮
[주-D001] 송간(松澗) 선생 : 이정회(李庭檜, 1542~1613)이다. 본관은 진성, 자는 경직(景直), 송간은 호이다. 주촌(周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에게 수학하였고, 15세 되던 1556년(명종11) 8월 퇴계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 이황에게 질정받아 《가례(家禮)》의 예를 행하였다. 저서로 《송간집》이 있다.[주-D002] 마명동(馬鳴洞) : 두루마을이라 불리는 두솔원 마명을 가리킨다. 지금의 안동시 서후면 명동이다.[주-D003] 선영(先塋)일세 : 원문의 ‘우강(牛岡)’은 소가 잠자던 산기슭으로, 여기서는 선영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도간(陶侃)이 아직 벼슬에 오르지 못했을 때 상을 당하여 장례를 지내려 하는데 집안에 있던 소가 홀연 사라졌다. 소를 찾다가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앞산에 소 한 마리가 움푹한 곳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에 장사 지내면 인신(人臣)으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또 한 산을 가리키며 “이곳은 그다음이니, 응당 대대로 이천석(二千石)의 벼슬이 나올 것이다.” 하였다. 《晉書 卷58 周訪列傳》[주-D004] 송안군(松安君) : 이황의 5대조 이자수(李子脩)이다. 고려 말에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에 봉해졌다.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마래[麻崖]로 낙남(落南)하였다. 묘소는 마명동에 있다.[주-D005] 향리의 …… 천거하였네 :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과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추천하여 수의부위(修義副尉), 의서 습독(醫書習讀), 통덕랑 등에 제수되었다.[주-D006] 홍려경(鴻臚卿)이 …… 협애하다고 : 홍려경은 통례원 관원을 가리키는데, 이정회는 1586년(선조19)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가 되었다.[주-D007] 종계(宗系)를 …… 남겼도다 : 대려(帶礪)는 국가와 성쇠를 영원히 같이할 공훈을 세웠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에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을 책봉하면서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礪]처럼 될 때까지 나라가 길이 존재하여 자손에게 이어지리라.”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정회는 1587년(선조20) 진사 정사(陳謝正使) 배삼익(裵三益)의 보좌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을 세웠다. 이전에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실린 조선의 종계에 대한 오류를 명나라에서 인정하였으나 고치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바로잡았다. 이 공으로 1590년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주-D008] 가산을 기울여 장례하고 : 원문의 ‘은배우화(銀杯羽化)’는 돈이 고갈되었다는 의미이다. 당나라 때의 명필 유공권(柳公權)이 여러 공경(公卿)에게 글씨를 써 주고 받은 돈이 수만금이었는데 종들이 몰래 탕진하였고, 선물로 들어온 은배가 한 상자가량 있었는데 이 역시 종들이 다 써 버렸다. 어느 날 종들이 “상자 속의 은배가 모두 없어졌습니다.” 하니, 유공권이 웃으면서 “은배가 날개가 생겨 다 날아갔다는 것이냐?” 하고는 더 꾸짖지 않았다고 한다. 《舊唐書 卷165 柳公權列傳》 이정회의 벗 송소(松巢) 권우(權宇)가 마마에 걸려 죽자 재물을 털어 예법에 맞게 장사 지낸 일을 읊은 것이다.[주-D009] 아우가 …… 주어 : 아우는 이정백(李庭栢, 1553~1600)으로 자는 여직(汝直), 호는 낙금헌(樂琴軒)이다. 이정회는 이정백에게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권하고, 매복하는 전술이나 높은 산에 군사가 많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등의 방략을 일러 주었다.[주-D010] 옥동(玉洞)은 …… 쾌적했네 : 청송(靑松) 진보(珍寶)에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세워 이황을 제사하는 한편 안동 주촌(周村), 즉 두루마을에 지남서당(芝南書堂)을 세워 배움의 터전을 닦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강회를 열었다.[주-D011] 온동(溫洞) : 이황의 백씨인 온계(溫溪) 이해(李瀣)를 가리킨다.[주-D012] 분명한 …… 새겼네 :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깨달아 명심하는 것이다. 주희는 정이(程頤)가 지은 〈사물잠(四勿箴)〉을 읽고 그 정밀한 뜻을 깨달아 가슴에 새기면서 “한 번 몽둥이로 치면 한 줄기의 멍자국이 생기고, 한 번 손바닥으로 치면 핏빛 손자국이 남는다.[一棒一條痕 一摑一掌血]”라고 비유한 바 있다. 《晦庵集 卷45 答楊子直》[주-D013] 험고한 …… 요새이니 : 축융봉(祝融峯)은 청량산 맞은편에 있는 해발 845미터의 봉우리이다. 그 아래 고려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이 있다. 이정회가 현감(縣監)으로 있을 때 체찰사 이원익의 명을 받아 승장 행정(行靖)에게 명하여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永嘉誌》[주-D014] 미리 대비하는 것 : 《시경》 〈치효(鴟鴞)〉에 “하늘에 구름이 끼어 비가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주워다가 문을 칭칭 감는다면, 이제 너희 땅에 사는 인간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기랴.[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고 하였다. 앞의 청량산성 정비 및 개축을 가리킨다.[주-D015] 육조의 봉사(封事) 올리셨네 : 1609년(광해군1)에 올린 응지소(應旨疏)에서 6조의 시무를 진달한 것을 가리킨다.[주-D016] 고을 …… 쌓았던가 : 1576년(선조9) 안동 임하의 상숙촌에서 모친 살해 사건이 일어나 안동이 부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1581년 이정회는 유운룡(柳雲龍), 안몽열(安夢說)과 함께 〈청복안동대호부호소(請復安東大護府號疏)〉를 올려 복호(復號)되게 하였다. 또 1605년 7월 안동의 반변천(半邊川) 둑이 터져 안동부가 물에 잠겼을 때 김륵(金玏)의 감독 아래 안몽열, 우인경 등과 함께 제방 축조 공사를 하였다.[주-D017] 문족들 …… 사랑했네 : 《주역》 〈동인괘(同人卦) 상(象)〉에 “하늘과 불은 동인이니, 군자는 이로써 족속을 유별하고 사물을 구별한다.[天與火同人 君子以類族辨物]”라고 하였다.[주-D018] 복주(福州)의 두솔원(兜率院) : 복주는 안동의 고호이다. 두솔원은 이정회가 세운 재사이다. 안동시 서후면 마명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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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당속집 제3권 / 묘갈(墓碣) / 징사 풍호정 신공 묘갈 유사의 후서를 붙이다 〔徵士風乎亭申公墓碣 附遺事後敍〕
고(故) 징사(徵士) 풍호정(風乎亭) 신공(申公)의 묘소는 진성현(眞城縣) 서쪽 모전(茅田) 곤향(坤向)의 언덕에 있고, 의인(宜人) 함양 오씨(咸陽吳氏)의 묘소는 공의 묘 뒤에 부장되어 있다. 공의 9대손 응현(應鉉)이 그의 선친 익(翼)의 뜻을 추념하여 족자(族子) 정태(正兌)와 함께 공의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기를 도모하고 나에게 와서 묘갈명을 청하니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지(祉)이고 자는 독경(篤慶)이며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고려시대 문정공(文貞公) 현(賢)의 후손이다. 증조부의 휘는 득청(得淸)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판사(判事)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조부의 휘는 예(藝)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영석(永錫)으로 교도관(敎導官)을 지냈다. 어머니는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감무(監務)를 지낸 조(稠)의 따님이다. 공은 조선조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 모년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조금 성장해서는 공경히 아버지 교도공의 가르침을 받아서 향학에 뜻을 돈독히 두었다. 조부 중랑장이 진성(眞城)으로 이사한 뒤로, 교도공에 이르러 또 원주(原州)에 우거하였는데 교도공이 부인 이씨와 함께 하루 사이에 모두 죽었다. 공이 이 때 관례를 올리지 않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히 상사를 치르는데, 염(斂)으로부터 장례에 이르기까지 힘을 다하여 예의 절차를 빠뜨림이 없었고,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지나치게 애통해하여 몸이 손상될 정도였다.
천순(天順) 연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얼마 후 벼슬의 진출에 뜻을 끊고 물러나 거처하며 자신의 뜻을 구하였다. 혜장왕(惠莊王 세조(世祖)) 계미년(1463, 세조9)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에 임명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녹봉으로 봉양할 어버이가 계시지 않고 학업도 성취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진성으로 돌아와 합강(合江)의 상류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풍호정(風乎亭)이라 하였다. 매양 늦봄에 관자와 동자를 데리고 흐르는 물에 임하여 목욕하고 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쐬면서 날마다 증점(曾點)의 뜻을 상상하며 그의 광(狂)을 경계하였다.
이른 나이에 어버이를 잃어 봉양을 마치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하게 생각하여 매일 새벽과 저녁에 눈물을 흘리며 사당을 배알하였다. 나이 80세가 되어도 오히려 친히 제수를 올렸고 제전(祭田)을 넉넉하게 두었다. 또 가시(歌詩)를 지어 어버이를 애틋하게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당시 사대부들이 3대의 조상만을 제사 지냈는데, 공은 유독 정주설(程朱說)에 의거하여 네 개의 감실을 만들고 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냈다. 두 남동생과 세 여동생이 있었는데 우애로 대함이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상사공(上舍公) 희(禧)와는 늙을 때까지 손잡고 끌어주며 즐겁게 지냈다. 자손들을 가르침에는 부지런하게 문학(文學)과 충효로 면려하여 유계(遺戒)가 집에 전해오고 있다.
공은 홍치(弘治) 연간에 죽었으니, 지금 거의 300년이 되어가기에 그의 업적과 행실은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동시대에 살았던 명현(名賢) 과당(瓜堂) 김종유(金宗裕)는 공을 눈 내린 가운데의 소나무와 계수나무에 비유하였고, 공의 외현손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은 행실이 당세에 우뚝한 것으로 칭찬하였으니, 후대에 공을 알려는 자는 이것으로 충분히 징험할 수 있다.
부인 함양 오씨는 감사(監司) 엄(儼)의 따님이니, 착하고 올바른 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낳은 아들 명창(命昌)은 군수를 지냈다. 군수의 아들은 권(眷)으로 부사과(副司果)을 지냈으며 딸은 김예범(金禮範)에게 시집갔는데, 김예범은 승지(承旨)에 증직되었으니 곧 문충공의 조부이다. 부사과의 아들은 종위(從渭)로 축산군 지사(丑山郡知事)를 지냈는데, 효행으로 조정에 알려졌다. 또 사용(司勇)을 지낸 광위(光渭),경위(景渭),응위(應渭),습독관(習讀官)을 지낸 수위(守渭)가 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그중에 드러난 자로는 현손자의 항렬에 언(漹)은 문학과 행실로서 임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된 적이 있고, 연(演)은 효행으로 조정에 알려져 좌윤(左尹)에 증직되었고, 척(滌)은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때 쌍령(雙嶺)에서 전사하였다.
공의 5세손 항렬에 예남(禮男)은 풍모가 매우 훌륭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적이 만나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데리고 가려하니, 즉시 분노하며 꾸짖고 자결하였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내 민씨(閔氏)도 정렬(貞烈)로 정려가 내려지니, 사람들이 부부를 두고 쌍절(雙節)이라 말하였다. 또 지남(智男)은 교관을 지냈으며 훌륭한 문장과 행실이 있었다. 충남(忠男)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다. 경남(慶男)은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공의 6세손 항렬에 건(楗)은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을 지냈으며, 집(楫)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 때 조정에서 물러나 벼슬하지 않다가 뒤에 관직이 제용감 정(正)에 이르렀다. 익(榏)은 참의(參議)에 증직되었고, 요(橈)는 효도로 일컬어졌다. 전(𣝕)은 병자호란 이후 과거시험을 그만두고 은거하였다.
공의 7세손 주한(周翰)은 참판(參判)에 증직되었으며, 광두(光斗)와 주백(周伯)은 모두 생원이 되었다. 공의 8세손 후(垕)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이 되었다. 공의 10세손 달제(達濟)는 진사가 되었다. 아! 자손들의 성대한 절의의 행실을 보면 유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랴.
명은 다음과 같다.
오직 뜻은 높고 / 維志之高
오직 덕은 두터웠네 / 維德之厚
충과 효는 선대부터 행하여 / 忠孝作先
그 후손에게 물려주었네 / 以錫厥後
시대가 멀다고 말하지 마라 / 無謂遠矣
그것을 증거할 자료는 있다네 / 其徵則有
지난해 신응현(申應鉉) 대첨(大瞻) 군이 그의 선조 풍호공(風乎公)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면서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나의 8대 조모 신씨(申氏)는 풍호공의 손녀이니, 그렇게 따지면 나는 곧 공의 외손이 된다. 의리상 마땅히 그 일을 도와야 하겠기에 드디어 감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비석을 세우면서 대체로 재력이 부족하여 비문을 반드시 간략하게 지으니, 비록 참으로 붓을 잡는 군자라 할지라도 또한 이런 사정을 피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중에 중대한 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진실로 감히 서술하지 않을 수 없지만, 또한 절제하여 간략하게 함으로 인하여 그 일의 본말을 다 드러낼 수 없었다. 또 그중에 작은 일은 언급할 여유가 없었지만, 일이 비록 작다고 하더라도 숨어있는 덕에 관계되는 것으로 중대한 경우는 어찌 끝내 매몰시킬 수 있겠는가.
공의 증조부 판사공(判事公)은 문과에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공민왕에게 벼슬하다가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집으로 물러나 늙으면서 일생을 마쳤다. 공의 아버지 교도공(敎導公)은 일찍 아버지를 잃고 배움의 기회를 놓쳤다. 이미 관례를 치르고 어머니의 경계를 받아들여 감격하고 분발하여 교관(敎官)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뜻을 돈독히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뒤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강계 교도관(江界敎導官)에 임명되었다. 집안의 세덕(世德)과 가학(家學)이 진실로 이미 근원과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특출한 자질을 가졌고 어려서는 양순하고 전아하였다. 교도공이 매우 사랑하였기에 글을 지어 주었는데 내용이 모두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실행하는 뜻이었다. 그 집안에서 기약하고 바라며 전수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의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었다. 원주(原州)에서 두 분 부모님의 상을 당하였을 때, 타향이기 때문에 종족이 없었으며 두 동생도 어렸다. 이에 공이 홀로 스스로 장례의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였다. 이미 합장하여 묘소를 만들고는 곧바로 비석을 세워서 표창하였으며,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어 야화(野火)를 예방하였다.
이미 늙어서도 오히려 제사에 스스로 힘을 써서 추급하여 봉양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제전(祭田)을 두었고 노비들에게 특별히 후하게 대하였다. 유명(遺命)으로 영원히 교도공의 신주를 조매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어릴 때 이모인 원 사직(元司直) 부인과 외조부의 형제인 동정(同正) 이공(李公) 모씨에게 길러주고 어루만져주며 사랑해주는 은혜를 받았는데, 양가에 모두 후손이 끊어져 제사를 지내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종족이 아닌 사람에게 지내는 제사는 비록 예가 아니라고 말하나 내가 차마 저분들의 영혼을 굶주리게 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매양 그들이 돌아가신 날에 제사를 드리기를 매우 근엄하게 하였다.
대저 마음에 근본하는 것은 질(質)이니 질은 근본이고, 밖으로 수식하는 것은 문(文)이니 문은 말단이다. 문이 성대하며 말단을 일삼기보다는 차라리 질이 성대하며 근본을 도탑게 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군자의 실수는 항상 두텁게 하는 데 있다. 가령 공의 유명(遺命), 원 사직 부인과 외조부 이공에게 제사를 지내는 몇 가지 일은 예법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나 이것은 군자의 실수이다. 인효(仁孝)의 두터운 덕이 마음에 근본하지 않았다면 능할 수 있겠는가. 무릇 세상에서 일찍 부모님을 잃어 봉양을 하지 못하였거나 궁핍하게 홀로 살면서 후손이 없는 사람은 공의 유사(遺事)를 읽으면 모두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산수를 좋아하였다. 이미 진성(眞城)에 돌아와서는 합강(合江) 상류의 수석(水石) 승경을 좋아하여 드디어 풍호정(風乎亭)을 지었다. 그리고는 날마다 그 가운데 고요하게 거처하며 세속의 일을 사절하고, 시를 읊조리고 노래하며 스스로 즐겼는데, 그 회포의 취향이 진실로 초연하게 세속에서 벗어났다. 또 공의 행실과 업적으로 고찰해보면, 언어로 표현한 글들이 또한 한결같이 질박하고 성실한 것에 근본하였고 문식으로 헛된 가식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증점(曾點)의 뜻으로 스스로 허여하여 이것으로 그 정자를 이름하였으니, 아마도 정자(程子)가 말한 바 ‘이미 큰 뜻을 보았다’는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내가 공이 지은 〈가전서서(家傳書序)〉,〈사위시(祀位詩)〉,〈풍호정시서(風乎亭詩序)〉 등 여러 편을 읽어보니, 시문의 재화(才華)가 비록 후대 사람들이 말을 모아 엮은 공교로움에는 손색이 있는 것 같으나 또한 모든 작품이 성대하게 가슴에서 우러나왔고 성병(聲病)과 분택(粉澤)의 말단에 자질구레하게 얽매이지 않았으니, 이 점 또한 공경할 만하다. 내가 이로 인하여 지금 사람이 고인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옛날 군자는 언사는 혹 부족할지라도 다하지 않는 뜻이 언어 구절의 밖에 있기에, 세상에서 명성을 취하는 것을 성대하게 여기지 않고 마음에 덕을 축적하는 것을 매우 넉넉하게 하였다. 요즘 사람 중에 문필가로 일컬어지는 자들은 대체로 화려하게 표현하고 무늬를 주워 모아 빛나게 볼 만한 글을 짓지만, 그 실상을 구해보면 그 말과 같지 않는 자가 많다. 그러나 세상에서 또한 아름다운 명성으로 부여해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양하지 않으니, 이것은 또한 말세의 풍속에서 문(文)이 성대한 폐단이다. 세도(世道)를 주관하는 자는 마땅히 질(質)로 돌이켜야 할 것 같다.
공이 지은 〈가전서서(家傳書序)〉에 말하기를 “옛날에 선친이 편지를 써서 경계하였는데, 순수함이 깊고 간절함이 지극하였다. 제가 삼가 가르침을 받아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경전을 암송하여 익힘에 정밀한 뜻에 투철하지 못하였고 사우들과 강마(講磨)함에 뜻을 터득하지 못하여, 학문에 깊이 나아가지 못한 채 선친의 가르침을 저버렸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교도공이 공을 가르친 바와 공이 스스로 힘쓴 바는 세속의 사장(詞章)과 명리(名利)의 학업이 아니었다. 이미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곧바로 물러나 고요한 가운데 마음을 기른 것은 대개 이 학문〔유학〕에 뜻을 오로지 하여 선친의 교훈을 체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벼슬의 부름을 받아도 또한 학문이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사양하였다. 그러나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그 시를 외우며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당세를 논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공의 시대를 논하여 공이 벼슬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은 점을 추적해보면 그의 은미한 뜻을 또한 알 수 있다.
김과당이 공에게 준 시에 “길이 은둔처를 차지하여 이 몸을 깃들이며, 시사가 변하는 것을 듣지 않네. 정원에 가득한 소나무와 계수나무는 눈 속에 매우 어울리니, 물 위에 노니는 오리 갈매기가 어찌 티끌을 받으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을 알아본 작품일 것이다. 공이 죽은 뒤로부터 수백 년이 지났고 또 여러 번 병화를 겪어 남긴 글이 산실됨이 많아 평소의 사적이 모두 전해지는 것은 아니니, 애석하다.
공의 뒤로 효행과 절개 그리고 문학에 뛰어난 이들이 서로 이어져 기술할 만한 성대한 점이 있다. 축산공(丑山公 축산군 지사를 지낸 종위(從渭))은 초상화가 남아있는데, 후인들이 합강 가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판공(參判公) 부인 민씨(閔氏)의 정렬(貞烈)에 대한 일은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에 보이고, 그의 정려각은 지금도 현곡촌(玄谷村) 앞 길가에 있다.
휘 집(楫)은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된 적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밀양공(密陽公)이라 일컫는다. 그는 어릴 때 정 문장공(鄭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배워서 고제(高弟)가 되었다. 휘 전(𣝕)은 병자호란 이후에 은거하여 당호를 신정(新亭)이라 하고, 비분강개하는 회포를 부쳐서 뜻을 술회한 시를 지었다. 휘 요(橈)는 경전에 밝고 행실을 계칙하였으며, 아버지상에 삼년복 입기를 마치고도 또 다시 삼 년 동안 상주로 지냈다고 한다. 응현(應鉉)은 곧 신정공의 증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휘 모는 훌륭한 문학과 행실이 있어서 뛰어난 덕으로 고을에서 칭찬을 받았다. 응현은 늙어서도 독서하여 순후(淳厚)하고 신선(信善)하였으며, 그 집안의 전통을 이어서 바야흐로 선조의 덕을 찬술하여 후세에 전할 것을 도모한 사람이다.
[주-D001] 족자(族子) : 고조부 이상에서 갈라진 집안의 조카를 말한다.[주-D002] 문정공(文貞公) 현(賢) : 1298~1377. 본관은 평산(平山), 어렸을 때 이름은 몽월(夢月)이다. 자는 신경(信敬), 호는 불훤재(不諼齋, 不萱齋)로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신숭겸(申崇謙)의 12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1315) 성균시(成均試)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원(元)나라에 가서 주공천(朱公遷), 허겸(許謙), 전당(錢唐) 등과 종유하며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대학자가 되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원나라에 초빙되었는데 명제(明帝)가 사례(師禮)로 대하고 불훤재(不諼齋)라는 호(號)를 내렸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주-D003]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로 1457~1464년 사이이다.[주-D004] 증점(曾點)의 …… 경계하였다 :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각기 자신의 뜻을 말하라고 하자 증점(曾點)이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 여섯 사람 및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께서 위연히 감탄하면서 “나는 증점을 허여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증점을 광자(狂者)에 분류하고 있는데, 광자는 뜻이 크지만 행동이 따르지 못하여 중도의 도리에 너무 지나친 사람을 말한다.[주-D005] 상사공(上舍公) 희(禧) : 신희(申禧, 1426~1526)는 풍호정의 동생으로 1465년(세조11)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흥해 훈도(興海訓導), 풍천 교수(豊川敎授),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를 역임하였다.[주-D006] 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로 1488년~1505년 사이이다.[주-D007] 김종유(金宗裕) : 1429~?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중용(仲容), 호는 과당(瓜堂)이다. 김숙자(金叔滋)의 둘째 아들이며 김종직(金宗直)의 형이다. 1453년(단종1) 진사에 합격하여 안음 훈도(安陰訓導)와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주-D008] 김성일(金誠一) : 1538~159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학봉집》이 있다.[주-D009] 쌍령(雙嶺) :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일대를 말한다. 여기에서 1637년 1월 3일 조선군은 청나라군과 싸워서 대패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쌍령전투이다.[주-D010] 원 사직(元司直) : 성이 원씨(元氏)로 사직(司直) 벼슬을 한 사람이다. 사직은 오위(五衛)의 한 관직으로 현직(現職)이 아닌 문무관(文武官)과 음관(蔭官)을 임용(任用)하였다. 정5품으로 부호군(副護軍)의 다음이며 부사직(副司直)의 위로 실무는 없었다.[주-D011] 동정(同正) : 실지 직무를 집행하지 아니하고 벼슬자리의 명목만을 띠는 벼슬로, 차함(借銜)의 벼슬 이름 아래에 붙여 쓰던 칭호이다.[주-D012] 증점(曾點)의 …… 이름하였으니 :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며 산수간에 한가로이 노는 아취를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기 자신의 뜻을 말하라고 하자 증점(曾點)이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 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풍호정’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주-D013] 정자(程子)가 …… 보았다 : 《논어》 〈선진〉에 나오는 위의 글 주석에서 정자(程子)가 “증점과 칠조개(漆雕開)는 이미 큰 뜻을 보았다.”라고 하였다.[주-D014] 성병(聲病) : 문장시부(文章詩賦)를 짓는데 있어서 평측(平仄)과 성조(聲調)에 얽매이는 병폐(病弊)를 말한다.[주-D015] 분택(粉澤) : 수식하고 윤색하여 꾸미는 것을 말한다.[주-D016] 맹자(孟子)가 …… 논한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온다.[주-D017]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 1617년(광해군9)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말하는 듯하다. 임진왜란 중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비롯하여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한 책이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져서 유교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워 나라를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자, 국민 도의를 다시 회복하고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간행한 책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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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訥先生文集卷之二 詩 / 鳳覽書院遺墟
黃墩元氣紫陽來今古參看命世才那意楸鄕籩俎 地禽啼艸茂雨聲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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