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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
단원 김홍도의 「씨름」
<檀園風俗帖> 중, 종이에 수묵담채, 27.0X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527호
씨름판이 벌어졌다. 여기저기 철 이른 부채를 든 사람들을 보니 막 힘든 모내기가 끝난 단오절인가 보다. 씨름꾼은 샅바를 상대편 허벅지에 휘감아 팔뚝에만 걸었다. 이건 한양을 중심으로 경기지방에서만 하던 바씨름이다. 흥미진진한 씨름판, 구경꾼들은 한복판 씨름꾼을 에워싸고 빙 둘러앉았다. 누가 이길까?
앞쪽 장사의 들배지기가 제대로 먹혔으니 앞사람이 이겼다. 뒷사람의 쩔쩔매는 눈매와 깊게 주름잡힌 양미간, 그리고 들뜬 왼발과 떠오르는 오른발을 보라. 절망적이다. 게다가 오른손까지 점점 빠져나가 바나나처럼 길어 보이니 곧 나자빠질 게 틀림없다.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기술은 왼편으로 걸었지만 안 넘어가려고 반대편으로 용을 쓰니 상대는 순간 그 쪽으로 낚아챈다. 이크, 오른편 아래 두 구경꾼이 깜짝 놀라며 입을 딱 벌렸다. 얼마나 놀랬는지 그림 속 왼손 오른손까지 뒤바뀌었구나. 순간 상체는 뒤로 밀리고 오른팔은 뒷땅을 짚었다. 판 났다!
이들 구경꾼 위쪽에 씨름꾼이 벗어놓은 짚신과 발막신이 보인다. 짚신 주인은 아마 소매가 짧은 앞사람이고, 비싼 발막신 주인은 입성 좋은 뒷사람일 게다. 오른쪽 위 중년 사내는 승자 편인지 입을 헤벌리고 좋아라 몸이 앞으로 쏠리며 두 손을 땅에 댔다. 그 옆의 잘 생긴 총각은 털벙거지를 앞에 놓았으니 마부인가 보다. 저렇게 누워 있는 걸 보면 씨름판은 시작한지 퍽 오래되었다.
다음 선수는 누구일까? 왼편 위쪽, 부채로 얼굴을 가린 어리숙한 양반은 아닐 성싶다. 갓도 삐뚜름하고 발이 저려 비죽이 내민 품이 좀 미욱스러워 보인다. 그 뒤 의관이 단정한 노인은 너무 연만하시니 물론 아니고, 옳거니 그 앞의 두 장정이 심상치 않다. 갓을 벗어 나란히 겹쳐 놓고 발막신도 벌써 벗어 놓았다. 눈매가 날카롭고 등줄기가 곧으며 내심 긴장한 듯 무릎을 세워 두 손을 깍지낀 채 선수들의 장단점을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 선수 두 사람의 초조함과는 무관하게 엿장수는 혼자서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먼 산만 바라본다. 엿판에 놓인 엽전 세 냥이 흐뭇해선가….
공책만한 종이 위에 스물 두 사람을 그렸는데 인물은 아래보다 위에 더 많다. 구도가 과분수니까 씨름판의 열기는 저절로 우러난다. 그런데 구경꾼은 모두 위에서 내려다본 시각으로 그렸고 씨름꾼만 아래서 치켜다본 모습이다. 그렇다, 위에서 보고 그렸으면 난장이처럼 왜소해졌을 것이다. 화가는 구경꾼들이 앉아서 바라본 시각을 그대로 옮겨왔다. 그래서 그림 보는 이가 씨름판에 끼어든듯 현장감이 살아난다.
한번 더 그림을 휘 둘러 보니, 아니 여자가 하나도 없다! 춘향이처럼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 타러 갔나 보다. 작은 그림이지만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찬찬히 바라보면 옛적에 내외하던 풍습까지 읽어내게 된다.
- 오주석 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중에서 -
씨름 구경하는 오른편 위쪽 사람들
자, 그럼 이제 옛 그림을 한 점 한 점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가 200여 년 전에 그린 그림인데요. 공책 만한 작은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개칠한 흔적 없이 단번에 척척 그렸어요.
등장하는 사람이 모두 스물 두 명인데, 우선 여기 오른편 위쪽의 중년 사나이를 보세요. 입을 해 벌리고 재미있게 씨름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재밌으니까 윗몸이 앞으로 쏠렸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두 손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 옆에 있는 총각은? 아니, 상투를 틀었군요! 총각이 아닙니다! 수염도 안 난 모양새를 보면 요즘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밖에 안되어 보이지만 장가를 들었어요. 그런데 팔베개를 하고 누웠습니다. 아니, 씨름판에 오자마자 팔베개를 하고 눕는 사람도 있습니까?
아, 이거 씨름판이 한참 진행되어서 이제 거의 막바지에 가까운가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재미는 있지만 몸이 고단해 누운 거지요. 시간의 경과를 보여 줍니다.
그 앞에 있는 사람이 쓴 모자는 털벙거지입니다. 양반이 쓰는 갓이 아니에요. 돼지털을 얽어 만든 모자인데 저걸 썼던 사람이라면 신분이 마부정도 되겠군 하고 짐작이 갑니다.
앞사람인 중년 사내는 진하게 그리고 뒷사람 젊은이는 조금 흐리게 그렸는데, 서양식이라면 맨 뒷사람이 가장 흐려져야 겠지요? 그런데 뒷사람 옷이 오히려 다시 진해졌어요. 그리고 또 그 뒤쪽에 옹송그린 꼬맹이들이 제일 진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은 무조건 앞이 진하고 뒤가 흐리게 그리지만, 우리 옛 그림에서는 뒷사람이 너무 흐려서 잘 안보이게 되면 안 좋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더 진하게 그렸습니다. 그렇게 하니깐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뒷사람까지 속속들이 잘 보일 뿐만 아니라, 이 작은 단위 화면에 통일감이 되었지요? 특히 뒤쪽의 작은 어린이들을 흐리게 그렸다면 그 귀여운 모습이 눈에 훤히 잡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요즘 같으면 어린애들이 앞자리에 왔다 갔다 하다가 어른들에게 야단이나 맞을 터인데, 옛적에는 꼬맹이들까지 어른 뒤에 얌전하게 자리한 것이, 참 예의범절이 반듯했구나 하는 그 시절 풍속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씨름"의 구심적(求心的) 구도
구도를 먼저 보세요! 관중들이 모두 빙 둘러앉아 씨름하는 것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구심적인 원형구도입니다.
한눈에 보는 이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아주 쉬운 작품이죠.
아주 가느다란 붓으로 그린 그림이네요. 참 빨리도 척척 그려 냈습니다. 앞에서 뒤로 갈수록 농도를 흐리게 조정해 가면서 단번에 그렸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완전히 외우다시피 해서 아래에서 위로 익숙하게 그렸습니다.
씨름 구경하는 왼편 위쪽사람들
여러 세부중 편의상 우선 눈만 보십시오. 가는 붓을 가지고 그저 살짝 눌러 준 것뿐인데 사람들마다 눈의 표정이 서로 다르고 개성까지 엿보입니다. 오른쪽 맨상투잡이 인물의 눈은 찔러 툭 쳐냈는데, 굉장히 재미있어 하는 느낌이들지요?
그 왼쪽 옆의 소년은 눈빛이 너무나 맑고 초롱초롱 하군요. 바로 옆 노인은 기운이 없는 듯한 눈빛에 인자한 느낌이 듭니다. 앞쪽의 갓쟁이는 좀 뚱뚱하게 생겼는데 어떻습니까? 눈빛이 똑똑해 보입니까? 아니지요, 어쩐지 좀 미욱스럽게 보입니다.
그런데 슬그머니 다리를 내뻗고 있군요. 다리가 저려서 펴고 있습니다. 역시 씨름판이 꽤 오래되었다는, 시간의 경과를 알려 주는 요소입니다. 본인이 애초부터 똑바로 앉았다면 저렇게 다리가 저려 슬그머니 내뻗을 일도 없었겠죠? 뒤쪽 노인을 비교해보면, 외관도 반듯하고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앉으신 것이 젊어서부터 자세가 단정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젊은 사람은 갓도 삐딱한 것이 평소 사람이 좀 시원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아니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부채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품이 성격도 약간 소심한 듯하고, 아무래도 영 시원치 않죠? 젊은 사람이!
두 명의 후보 선수
그 다음 아래쪽 이 두사람을 함께 보십시오. 서로 꼭 닮은 것이 어쩐지 쌍둥이 같지 않습니까? 뭐가 어떻게 닮았나 꼼꼼히 살펴보니, 우선 턱이 아주 다부지게 생겼고 눈은 또 부리부리하고 두 사람 시선의 방향이 같은 것까지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두 사람 다 등줄기가 곧고 똑바른데 앞사람은 무릎을 세워 두 손을 깍지 낀 모습이 약간 긴장한 듯도 싶습니다. 이 두 사람은 무얼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후보 선수 같죠?
지금 화폭 한복판에서 씨름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씨름 경기는 유도처럼 한 판 이기면 진 사람은 떨려 나가고 이긴 사람이 그 다음 사람과 막 바로 붙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음 판에 나갈 두 선수가 열심히 경기를 관찰하면서 다음 판에 이길 저 녀석을 어떻게 요리할까, 지금 이기고 있는 상대의 강점은 뭐고 또 약점은 뭐냐, 이렇게 판세를 예의 분석 하고 있는 중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더 확실히알려 주는 것이 발 쪽에 신발, 즉 발막신이라는 가죽 신발을 이미 벗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갓도 함께 벗어서 나란히 포개 놓았군요, 씨름판에 나갈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씨름꾼
자, 그럼 이제 씨름꾼들을 보죠. 다시 눈부터 바라보니 역시 당사자들의 눈이라 제일 골똘하고 심각해 보입니다. 특히 왼편 사람은 눈이 아주 똥그래 가지고 양미간 사이에는 깊은 주름까지 잡혀 있는데, 그 쩔쩔매는 눈빛이 너무나 처절하지 않습니까? 참 기가 막힙니다!
이런 표현은 지금의 펜 같은 도구 가지고는 잘 되지가 않습니다. 붓이라는 게 상당히 부드러운 도구지만 그 부드러움 덕에 오히려 표현력은 훨씬 더 커집니다. 앞사람을 보십시오. 어금니는 앙 다물고 광대뼈는 뚝 튀어나와 가지고 이번에는 반드시 넘겨 버리고 말겠다는 각오가 대단해 보이지요?
뒷사람이 틀림없이 졌습니다. 지금 건 씨름 기술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들배지깁니다. 들배지기라는 것은 기운 좋은 장사가 상대를 번쩍 들어 가지고 그대로 냅다 메다꽂는 겁니다.
앞사람이 이겼죠? 보십시오! 두 발을 땅에 굳건하게 디디고 서서 상대를 들어 올리려고 용쓰는 양하며 한 일 자로 꽉 다문 입술에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앞사람은 두 다리가 모두 굳건한데, 지는 쪽은 한 발이 들리고 다른 한쪽마저 들리려는 순간입니다. 그 오른손이 바나나 같이 길게 그려졌군요. 화가가 실력이 부족해 그렇게 그렸을까요? 아니지요, 손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정황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뒷사람이 분명 졌습니다.
어느쪽으로 넘어질까요?
오른편 아래쪽 사람들
이건 그러니까, 유도나 씨름에서나 상대가 왼쪽으로 자빠뜨리려고 하면 누가 '날 잡아 잡수' 하고 그리로 넘어가주지는 않죠. 안 넘어가려고 반대편으로 안간힘을, 젖 먹던 힘까지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탁, 하고 반대편으로 낚아채서 한 판 경기가 끝나게 되는 겁니다. 화가는 바로 그 절대절명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서 기막힌 그림을 그려 냈습니다. 구경꾼들이 얼마나 놀랬는지 느껴지시죠?
한데 이 두 구경꾼들이 위치한 곳은 화면에서는 구석진 자리입니다. 화가가 오른쪽 위에서 왼쪽아래로 구도를 잡고 그렸기 때문에 이 자리는 아주 외진 자리예요. 그 구석에 있는 인물을 화가는 유난히 진하게 그려 놓고서 '이 사람을 잘 봐라, 여기 힌트가 있다' 하고, 승패의 실마리를 슬쩍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들 위쪽에 짚신이 있고 또 가죽으로 만든 고급 신발인 발막신이 있습니다. 붓선을 처음에 콕 찍었다가 이렇게 쓰윽 빼내 가지고 선의 굵기 변화에 생동감을 주었군요. 2cm도 안 되는 크기지만 신발 맵시가 잘 표현되었죠! 신발 주인을 찾아볼까요? 어떻게 신발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두 씨름꾼의 옷이 주름 잡힌 정도가 비슷한데, 앞사람은 막일하는 사람처럼 소매가 짧고 뒷사람은 손목까지 길게 내려온 모양새가 입성이 훨씬 좋습니다. 잘 보시면 뒷사람은 종아리에 행전까지 깔끔하게 친 품이 역시 차림새가 좀 나아요. 그러니 뒷사람이 아마 가죽신발 주인일 듯합니다. 앞사람은 짚신 주인이고 ....
그렇다면 아까 보았던 오른쪽 위, 입을 해 벌리고 좋아했던 중년 사나이와 느긋하게 누워 미소짓던 말구종 같았던 젊은이는 아마 승자 편이라서 좋아라 했던 것 같고, 왼쪽 위쪽 갓을 벗어 놓은 두 선수가 모두 심각한 눈빛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 패자 편이었기 때문에 그랬던가, 하는 짐작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공책 만한 작은 그림이지만 화폭 안에 줄거리가 분명한, 어떤 드라마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좋은 작품에는 이렇게 많은 얘기가 들어 있습니다.
아 참, 이 그림에 이상하게 틀린 그림이 한 곳 있는데, 한 번 찾아보십시오. 틀린 곳 찾아보세요. 그렇습니다! 양손이 잘못됐지요? 오른쪽 아래 구석에 있는 구경꾼의 왼팔에 오른손이 붙어 있어요! 또 오른팔에는 왼손이 붙어 있습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이거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틀리게 그린 곳 찾기
아까 보셨듯이 이 그림의 화가 김홍도는 사람의 눈을 그릴 때 잔 붓으로 점을 한 번 콕 찍어 가지고 슬쩍 삐치는 것만으로도 인물의 나이며 성격, 그 인물이 처한 상황까지 속속들이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실력이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화가가 어떻게 이렇듯 엄청나게 멍청한 실수를 했을까, 잘 믿어지지가 않지요?
그런데 저는 김홍도의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면 - 지금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지만- 원래는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최고의 걸작에 속하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당시 일반 서민들이 사서 보라고 손쉽게, 아주 빨리 그려낸 값싼 그림이라 생각합니다.
우선 바탕 종이가 고급 화선지가 아닌 일반 장지입니다. 그러나 표면에 붓질이 잘 나가라고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많이해서 매끈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서민 대중이 보는 그림인 까닭에 화면에 어려운 글씨가 한 자도 없습니다. 물론 그림의 소재도, 모두 일반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찾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서민들 중심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를테면 <씨름>에서도 옷차림이 허술한 사람 쪽이 이기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것이 원래 25장으로 된 풍속화첩인데 다른 그림들을 보아도 작품 속에 종종 손이나 발이 뒤바뀌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화첩 눈여겨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옛 그림 보는 일이 직업이고 전공이니까, 정색을 하고 아주 찬찬히 뜯어보았더니 여기저기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세부 그림들이 많습니다!
<벼타작>이라는 그림에는 머리 위로 볏단을 쳐들어 오린 사람을 앞모습 뒷모습으로 두 명 그렸는데, 그 손모양이 꼭 같습니다! <점심>이란 작품 한가운데서 사발을 들고 밥 먹는 사람은 오른쪽 정강이에 왼발을 붙여놨죠.
이처럼 X자 구도의 복잡한 그림인 경우에 화폭 한가운데서 슬그머니 그림을 틀리게 그려 놓았습니다. 알아차리기 어렵게끔... 그런데 훨씬 단순한 작품 <잎담배썰기>는 어떨까요? 오른쪽 위쪽 이 젊은이의 발 모양을 보세요! 틀렸지요? 이렇게 간단한 그림에서도 속았지? 메롱!'하고 즐거워하는 화가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이건 다름 아닌 틀린 그림 찾기예요! 보는 사람들 재미있으라고 일부러 장난을 친 것입니다. 혹, 틀린 그림 찾기가 아니라 진짜 실수였을 수도 있다고요? 그렇다면 해석은 완전히 달라지죠. 그 경우라면 이 그림은 절대 누군가가 복사한 그림이 아니라 원본이라고 우선 판단됩니다. 남의 그림을 옮겨 그린 경우는 잘못된 것을 알고 고칠테니까요.
또 사물의 왼쪽,오른쪽을 바꾸는 실수를 한 걸 보면 화가는 좌뇌보다 우뇌가 상대적으로 더 발달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좌뇌, 우뇌의 차이에 대해선 복잡하니까 다음 그림과 함께 설명해 드리죠.
아무튼 여기서는 일단 틀린 그림의 주인공은 뒷모습이 보엿다는 점, 그리고 오른편 아래 구석에 있었다는 점만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엿장수
사람 좋아 보이는 엿장수가 있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골똘하게 씨름꾼만 쳐다보는데- 물론 엿판을 곁눈질하는 댕기머리는 예욉니다!- 엿장수는 뭐가 좋아서 이렇게 먼 산을 바라모며 싱글거리고 있는 걸까요? 엿판 위의 엽전 세 닢이 뭐 그리 흐뭇할까요?
이것은 구도 상, 꼭 그렇게 그려져야만 합니다! <씨름>은 구경꾼들이 모두 둥글게 둘러앉아 가운데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통일감이 썩 좋은 작품입니다. 단번에 그림에 집중이 되죠. 그런데 통일감만 있고 변화가 없으면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른편을 텅 틔워 놓고 거기에 발막신, 짚신 이렇게 서로 다른 신발을 모아 놓고 흩어 놓고 해서, 변화를 주었습니다. 저 신발들을 잘 보십시오. 자연스럽게 안쪽에 머리를 두지 않고 화면 바깥을 향하도록 놓았는데, 이것도 작지만 사실은 중요한 조형 장치로서 그림에 숨통을 트이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엿장수도 먼 산 바라보고 있듯이, 이렇게 시선을 바깥으로 향하게 한 것은 그림에 바람이 드나들도록 한 것입니다.
만약 여기 엿장수 대신에 심판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심판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열심히 씨름꾼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테고, 그렇게 되면 인물들이 모두 작품 중앙을 향하고 있어서, 구도가 너무 구심적이고 답답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의로 빼버렸다고 생각됩니다.
전체 구도를 한 번 더 보실까요?
전체 구도를 한 번 더 보실까요? 만약 구경꾼이 아랫쪽에 많고 윗쪽에 적었다면 그림이 재미있었을까요? 씨름판의 열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겠죠? 영 재미 없어집니다. 그래서 위가 무겁고 아래가 가볍게 보이도록 가분수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일부러 말이지요... 참 슬기롭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이렇듯 구경꾼들이 다 내려다 보이게 그리려면 화가가 3층 정도의 아파트 높이에서 내려다봐야 하겠죠? 그런데 그렇게 높은 데서 바라보았다면, 이번엔 또 씨름꾼들이 좀 이상하게 그려졌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씨름꾼은 원래 난쟁이처럼 보였을 겁니다.
위에서 보면 당연히 짜그라져 보여야 되는데 오히려 그림 속 씨름꾼 두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몸집도 더 크게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유난히 늘씬해 보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림 속 구경꾼들이 앉아서 치켜다본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즉 구경꾼의 시선을 그대로 빌려다가 화폭 한 가운데다 박아 놓았습니다.
여러분, 이 그림을 예전에 보시면서 씨름꾼과 구경꾼의 모양이 서로 맞지 않는, 좀 이상한 그림이다, 하는 그런 생각 안 드셨죠? 이게 바로 서양 사람들은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는, 한국사람들만의 기발한 재주입니다. 구경꾼의 시선을 이렇게 슬쩍 빌려옴으로써 우리는 직접 씨름 구경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들고, 그림의 현장감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꼭 있어야 할 뭔가가 없는데, 무엇이 어떻게 빠져 있을까요? 심판이 없다고요? 심판은 아까 구도상 일부러 뺀 듯하다고 말씀 드렸죠? 도장이 없다고요? 화첩에선 원래 도장을 매 폭마다 찍지 않습니다. 마지막 폭에 흔히 낙관을 하는데, 이 화첩에는 그것조차 아예 없습니다.
여기에 없는 것은 이 세상의 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자가 없죠? 여기에 처녀든 아줌마든 할머니고 간에 누군가 여성 한 분이라도 구경꾼 사이에 앉아 있다면, 그것은 이 작품이 옛날 그림이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점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그 시대의 풍속까지 소상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옛 그림 전문가라고 해서 제 얘기를 무조건 믿지는 마십시오. 정당한 의문이라면 항상 의심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이런 씨름판에서 상민하고 양반이 함께 씨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조선 풍속으로는 참 이상한 일이다 하고 생각할 수 있겠죠?
조선 정조 연간이 되면 일반 서민들 중에 경제적으로 큰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으로도 힘이 생겨서, 점차 법도에 어긋나는 양반 행색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양반을 사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아무리 나라에서 금했어도 완전히 금지시킬 수 없었다고 하는 기록이 여럿 전하는 것을 보면, 그건 이런 신분 해체 현상이 일반화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거꾸로 이때는 주변머리 없는 양반은 거의 평민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씨름을 좋아하는 양반은 씨름판 평민 속에 끼어, 음악을 좋아하는 양반은 광대 패에 들어가 평민과 함께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勝者의 신발은 짚신이었다.
첫댓글 넘 재미 있습니다. 그저 무심코 보아왔던 그림 속에 이런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
짚신이 발막신을 들배지기로 메친 통쾌함이라니... 이 아침 웃음이 절로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