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부에서 주자골로
내가 주중 머무는 거제 연초는 고현과 옥포 사이 면지역이다. 그럼에도 연초삼거리는 교통요지라 거제대로는 차량 통행이 번잡하다. 거가대교로 나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내가 지내는 마을은 연사리이고 면소재지는 죽토리다. 나는 얼마 전부터 메일 서명에 몇 자를 덧붙였다. 원룸 좁은 방 한 칸 들고나며 잠을 청한다. 연사마을 움집이기에 연사와실(烟沙窩室)이라 이름 붙였다.
거제로 와 서너 달 지나면서 퇴근 후 여기저기 산책이나 산행을 다닌다. 본격적인 장마와 무더위가 오기 전 한 곳을 둘러볼 데가 있었다. 면소재지가 죽토리인데 몇 개 자연 부락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야부였다. 언젠가 면소재지가 내려다보인 와야봉에 올랐다가 주자골로 내려가는 등산로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 봐둔 산기슭 마을이다.
원룸으로 들어 산행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연사에서 관암으로 가니 저녁 공부를 않고 일찍 귀가하는 일부 우리 학생들을 만났다. 관암은 의령 옥씨 선산과 문중 회관이 있는 곳이다. 의령 옥씨는 죽토리에 많이 사는 성씨였다. 농협 마트를 돌아 들길을 걸었다. 모내기가 끝난 논엔 벼 포기가 세력을 불려갔다. 들판 건너 길 위는 빌라들이 들어섰고 길 아래는 중학교가 자리했다.
들판에서 거제대로를 지하로 관통하는 굴다리를 지나니 예전부터 자연마을에 다세대 원룸이 혼재했다. 야부(冶釜)마을 표석에서 마을 유래가 살폈다. 쇠 불릴 ‘야(冶)’에 달군 가마 ‘부(釜)’였다. 마을 뒤 와야산 기슭에 폐광이 있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거기서 철광석을 캐 병기를 만들었던 마을이라고 했다. 남녘 해안에서 잦은 외침에 대비 자구책으로 전쟁 물자를 조달했지 싶다.
거제에 와 여기가 남녘 변방임을 실감하고 있다. 특히 왜구의 찾음 출몰로 주민들은 생계 위협을 자주 받았고 고려 말엔 일시 섬 주민들이 거창 가조로 옮겨갔다가 왕조가 바뀌어 조선 세종 때 다시 귀환한 사료를 알기도 했다. 옥포대첩 승전과 칠천도 패전의 마이너스 역사 현장이기도 했다. 곳곳에 석성을 쌓아 적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장문포엔 왜구도 그들의 성을 쌓기도 했다.
야부마을 앞길을 지나다가 지난날 섬 주민들이 겪었을 평화보다 전란이 떠올랐다. 마을 끝 개척교회를 지나니 밭뙈기가 이어졌다. 중년 부부는 해가 저물도록 밭둑에서 풀을 자르고 작물을 돌봤다. 골짜기에는 야부 앞들의 벼논에 물을 대는 소류지가 나왔다. 골짜기가 제법 깊은 시멘트 포장길이 끝난 지점 인적이 없는 농장에 묶어둔 송아지만한 개가 펄쩍펄쩍 뛰며 짖어대 놀랐다.
천애방골이 끝나고 좁은 등산로가 시작되는 들머리엔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올 법한 움막이 있었다. 물가에 그럴 듯한 정자도 세워져 있고 수국이 제철을 맞아 가득 피어나 있었다. 울타리 안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고 뭔가를 가꾸었다. 주인장은 일시 거소를 비워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울타리 밖으로 뺀 대롱으로 흘러온 샘물을 한 모금 받아먹고 숲이 우거진 길로 들어섰다.
디지기재에 이르니 이정표가 나왔다. 내가 오른 적 있는 와야봉과 수양마을 가는 길로 나뉘었다. 깊은 산중 국사봉을 거쳐 옥포로 넘어갈 임도가 개설되고 있었다. 임도 구간을 거쳐 수양마을로 가는 길로 내려섰다. 골짜기 깊숙한 곳은 약사암이었다. 영업을 하지 않은 찻집을 지나 한참 나가니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왔다. 여름에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듯했다.
숲속에는 어린이 집이 있었다. 개울가엔 한 무리 여성들이 쪼그려 앉아 자갈돌을 주워 긁어보기도 하고 붓으로 색칠을 하고 있었다. 일과를 끝낸 고현의 유치원 교사들이 그곳에 모여 현장 연수를 받고 있었다. 주자골은 깊어 한참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산기슭 따라 전원주택들이 이어졌다. 교통은 좀 불편할지라도 매연과 소음에서 벗어난 선경이었다. 수월삼거리에서 연사로 향했다. 19.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