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 날에 대한 경고
욜 2:1-11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4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5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6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7 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기어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되 그 줄을 이탈하지 아니하며
8 피차에 부딪치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며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아니하며
9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기어 오르며 도둑 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10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11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욜 2:1-11 / [주님의 날에 대한 비상 신호] 시온에서 비상 나팔을 불어라! 나의 거룩한 산 위에서 경고의 나팔 소리를 울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무서워 떨도록 해라. 주님의 심판날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2) 그날은 어둠침침한 날이요, 검은 구름이 끼고 짙은 어둠이 뒤덮는 날이다. 얼마나 강하고 많은 군대인지, 온 산들을 밤의 어둠처럼 뒤덮고 있다. 그 얼마나 막강하고 방대한 병력인가! 그들과 같은 이들은 이제까지 누구도 본 적이 없고 앞으로 오는 세상의 어느 세대에서도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3) 그들은 가는 곳마다 불을 질러서, 그들의 앞에서는 불이 먼저 삼키고 그들의 뒤에서는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따라간다. 그들이 오기 전에는 온 땅이 에덴 동산처럼 아름답고 즐거웠으나 그들이 지나간 다음에는 황량한 들판으로 변해 버렸다. 어느것 하나도 그들을 피하지 못하였다. 4) 그들의 모습은 작고 날렵한 말들과 같고 그들이 달려가는 모습은 군마들과 같이 빠르다. 5) 산봉우리들을 뛰어넘는 그들을 보아라! 그들이 내는 저 소리를 들어 보아라! 전차들이 쿵쾅거리는 소리와도 같고 온 벌판을 휩쓸며 타오르는 불꽃 소리와도 같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강한 군대의 함성과도 같다. 6) 그들이 몰려오자 만민들이 두려워 떨고 겁에 질려 그들의 얼굴이 모두 샛노래진다. 7) 그들은 보병들처럼 돌진한다. 그들은 정선된 특공대원들처럼 성벽을 기어오른다. 그들은 곧바로 전진하며 자기들의 대열을 흐트리는 일이 없다. 8) 그들은 서로 한곳에 몰리는 일도 없고, 각 사람이 제자리를 지키며 나아간다. 어느 무기도 그들을 막아낼 수가 없다. 9) 그들이 예루살렘 도성에 몰려들었다. 사면의 성벽으로 그들이 기어오른다. 성중의 각 집으로 도둑 떼처럼 창문을 넘어서 들어간다. 10) 그들의 앞에서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흔들린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은 빛을 잃었다. 11) 여호와께서 큰 음성을 발하시어 자기의 군대를 지휘하신다. 그들은 주님의 엄청난 군대요, 주님의 지시를 따르는 강력한 군인들이다. 진실로 여호와의 날은 무서운 심판의 날이요, 떨리는 날이다. 누가 그날을 견디어 낼 수가 있으랴?
메뚜기 재앙에 이어 장차 찾아올 여호와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징계와 그 심각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경고(1-3)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시온에서 나팔을 불 것을 명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나팔은 예배 때(레 25:9; 민 10:10), 전쟁 때(민 10:9; 수 6:4; 삼상 13:3), 축제 때(왕상 1:34)불려지는 것이지만, 본문에서는 앞으로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날이 어둡고 캄캄한 날이며,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고 한 것은, 구원의 소망이 사라져버린 날이기 때문입니다(2). 그리고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이 많고 강한 백성들의 침입과 살육이 순간적으로 행하여진다고 합니다. 이런 재앙은 이전과 이 후에도 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메뚜기 떼를 보내서 축복된 시온의 땅을 불에 탄 것처럼 황폐케 하신 것처럼 북방 왕의 침입(겔 38:15; 단 11:40)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황폐하게 하는 것입니다(3).
황폐하게 되는 이스라엘(4-11)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신 이스라엘의 심판은 메뚜기 떼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기병들이 달리고 용사와 무사들이 성에 기어 올라와서 그 땅을 황폐케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4, 7, 9). 또한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이스라엘의 적군들이 방비가 소홀한 산악지대로 쳐들어 온 것을 의미합니다. 침입 소리에 놀란 백성들의 얼굴이 창백해질 것입니다. 성을 기어올라 공격하는 적들이 메뚜기 떼처럼 무수하지만, 서로 부딪히거나 상하지 않고 질서 정연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앙이 닥친 날은 자연도 무서워 떨게 될 것이며, 하늘이 어둠으로 덮히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마지막 때에 나타는 현상입니다(10; 사 13:9-10; 34:4; 겔 32:7; 암 8:9). 그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실 때, 그들의 적국인 앗수르를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1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깨닫지 못하면, 원수라도 사용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에서 돌아서게 하십니다(시 5:8).
적용: 하나님의 징계는 그리스도인이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하시는 경고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경고를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경고’는 조심하거나 삼가도록 미리 주의를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수많은 경고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모든 악과 죄에 대한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찾으시고 택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 설 교 >
여호와의 날
욜 2:1-11 / 피영민 목사
서 론
요엘 1장은 요엘 시대에 일어났던 전대미문의 메뚜기 재앙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메뚜기 재앙과 같은 자연 대재앙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의 죄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질서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2) 인간과 에덴동산의 타락으로 인해 피조물의 세계가 고통당하고 육지와 바다도 모든 것이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에 보내어 죽자 요압 장군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전쟁에 졌고 우리야도 죽었다고 소식을 전하니까 다윗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다윗이 사자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삼하 11:25) 자기가 죽여 놓고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인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의 말대로 자연 재앙도 선인이나 악인 모두를 죽입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거기 있는 교회도 같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메뚜기 재앙만큼은 의미가 다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메뚜기 재앙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고 앞으로 이스라엘 국가에 다가올 더 큰 재앙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가올 더 큰 재앙을 가리켜서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라고 했습니다.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욜 1:15)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욜 2:1) 메뚜기 재앙이 오면 나라의 모든 식물을 갉아먹습니다. 나무들도 다 죽어버립니다. 하지만 메뚜기가 사람을 먹지는 못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슬퍼서 애곡하게 만들고 배고파서 고통스럽게는 만들어도 목숨을 잃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여호와의 날은 국민의 생명을 빼앗고 국가 자체를 소멸시키는 무서운 날이 될 것이라고 요엘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Ⅰ.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요엘 2장 1절 전반에서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에게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하나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라고 했습니다. 온갖 청각적인 도구를 다 동원하여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각은 아무 때나 불 수 있는 것이지만 나팔은 아닙니다. 민수기 10장에 보면 나팔의 규례가 나오는데 이것은 백성을 집합시킬 때나 행진하거나 정지할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을 불면 전쟁이 일어났으니 전쟁을 준비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날을 나팔을 불어 알리라는 것은 여호와의 날은 전쟁의 날이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요엘 2장 2-11절까지는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을 침공할 군대에 관한 설명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요엘 2장은 메뚜기 재앙에 대한 첨가된 설명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요엘 2장은 메뚜기처럼 침공하는 이방의 군대를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엘 1장은 메뚜기의 재앙을 군대에 비유해서 설명한 것이고 요엘 2장은 군대의 침공을 메뚜기처럼 비유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엘 2장이 단순히 메뚜기 재앙에 대한 부연설명이 아니냐? 이 질문에 대해 저는 명확하게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엘 2장의 사건은 여호와의 날에 나타날 재앙이고 여호와의 날은 미래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욜 2:1) “the day of the LORD is coming.” 이것은 여호와의 날이 지금 오고 있다는 진행형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이 가까운 미래에 올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요엘 2장은 여호와의 날이 앞으로 다가올 것인데 그 날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메뚜기 재앙에 대한 사건의 부연설명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요엘 2장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24장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엘 2장과 마태복음 24장을 비교해보면 요엘이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가깝게는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Titus)의 침공으로 이스라엘 국가가 완전히 멸망해버리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멀게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임하는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께서 헤롯 성전을 가리켜 이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질문합니다. 어느 때에 성전이 무너지는 일이 있겠습니까? 또 하나는 주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요엘 2장 2절을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 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욜 2:2)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 24:21) 창세 이후로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을 이 환란이 얼마나 급하게 오는지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환난이 겨울에 오면 다 얼어 죽으니까 겨울에 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안식일에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환난은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Titus)가 침략해 이스라엘 백성이 백만 명이 단기간 내에 사망하고 이스라엘 국가라는 자체가 멸망해 버린 사건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일본에 대지진이 나서 이만명 죽었는데 로마 군대가 A.D. 70년에 공격해왔을 때는 백만 명이 단기간 내에 죽었습니다. 중국에서 아무리 큰 지진이 안도 오만명이상 죽은 사건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그래서 요엘 2장 2절에도 이런 재앙은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환난은 창세로부터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앗수르 왕의 침공이나 바벨론 군대의 침공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 환난은 로마 군대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사건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자는 B.C. 800년이 아니라 400년경에 활동한 선지자로 보는 것이 더 큰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 마태복음 24장 29절은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끝에는 무슨 일이 있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신 내용입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 24:29) 이 말씀은 요엘 2장 10절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욜 2:1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 24:30)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예수님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요엘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과거에 일어난 메뚜기 재앙을 부연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깝게는 로마 군대의 침공으로 인해서 국가적으로 멸망할 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멀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세상 모든 불신자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라 하는 것이 제가 이 말씀을 오래 붙들고 연구한 결과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욜 2:11) 하나님께서 로마 군대를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방 군대를 사용하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5장 9절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가리켜 내가 쓰는 종(my servant)이라 표현하셨고 이사야 44장 28절에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가리켜서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경우에는 불신자인 이방 왕이나 불신국가의 군대도 당신의 종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이스라엘 침공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세워놓으신 이스라엘 국가를 향한 심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고 로마 군대를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Ⅱ.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해야할 일
A.D. 70년 이후로 이스라엘은 국가를 잃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 세계에 흩어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엘이 예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은 가까이 왔고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한 어감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욜 2:1)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이 확실하면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습니까? 어떤 대책을 세워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조금 수준 떨어지는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닭을 기르는데 닭장에 닭이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자기 생일에 닭을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예쁘고 한 마리는 못생겼습니다. 그래서 못생긴 닭을 잡아먹기 위해 세 마리를 모두 불러놓고 내가 며칠 뒤면 생일인데 퀴즈를 내서 맞히면 안 잡아먹고 못 맞히면 잡아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예쁜 닭을 불러 ‘1+1’은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2’라고 정답을 말해서 통과시켰습니다. 그 다음 예쁜 닭을 불러 ‘1+2’는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3’이라고 정답을 말해서 또 통과시켰습니다. 마지막 못생긴 닭을 불러서 ‘418859×528335'는 얼마냐고 물어보자 차라리 물을 빨리 끓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닭이 머리도 안 좋은데 복잡한 문제를 내니까 차라리 물을 끓여 자기를 잡아먹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날이 어차피 올 것이라면 차라리 물을 끓이라는 자포자기하는 태도로 기다려야겠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욜 2:12-14) 여러분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이 확실하고 지금 돌이키기에 너무 늦었다 할지라도 “이제라도”(Even now) 옷을 찢는 형식적인 회개만 하지 말고 마음을 찢는 참된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실로 방향을 전환해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혹시”나 복을 주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2주 전에 부흥의 역사에 관한 세미나를 했는데 한국에 일어난 최초의 부흥이 1907년 장대현 교회의 부흥입니다. 그 부흥 운동을 이끈 사람은 길선주 목사님입니다. 원래 이분은 도가에서 도를 닦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목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설교를 해도 아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다고 합니다. 너는 형식적인 회개만 하지 말고 또 남에게만 회개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친구의 유산을 정리하면서 100불 훔친 것을 지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길선주 목사가 설교하다 말고 자기는 도둑놈이라면서 자기 친구 유산을 정리하다 100불을 훔쳤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고백하고 난 이후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활짝 열고 성령을 어마어마하게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마음을 찢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혹시 복을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실제로 B.C. 400년에 예언한 여호와의 날은 A.D. 70년에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470년의 간격을 두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과 교회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470년 사이에 하나님께서 큰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회개를 하되 개인적인 회개에 그치지 말고 국가적인 회개, 집단적인 회개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죄도 개인적인 면이 있지만 집단적인 면도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이 올바로 살려고 해도 김정일 치하에서는 올바로 살 수가 없습니다. 또 아무리 신앙 갖고 살려고 해도 이슬람 국가에 살아서는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최근에는 죄의 집단적인 측면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도 회개도 개인적인 측면이 있고 집단적인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 불러 모두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장로들도 오고 어린아이들도 오고 젖 먹는 아이들도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갓 결혼한 신랑, 신부도 방에만 있지 말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갓 결혼한 신랑은 1년 동안 군대도 면제해줬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랑, 신부도 나오라는 것입니다. 나와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큰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Ⅲ.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요엘 2장 18절은 회개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욜 2:18)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하고 마음을 찢으면 하나님의 중심이 뜨거워지시고 백성을 긍휼히 여겨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470년 동안에 유다 백성을 위해서 두 가지 영광스런 복을 주셨습니다.
첫째, 물질의 복을 주셨습니다. 침공한 메뚜기 떼를 모두 바다에 몰아죽이시고 다시 유다 백성에게 곡식, 포도주, 물질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북편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전군은 동해로 그 후군은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욜 2:20) 실제 하나님의 백성은 불경건해지면 물질의 복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술 먹고 바람을 피우면 물질의 복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도 막아버리시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찢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 경건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막았던 것을 다 풀어놓으시고 물질의 복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가난하게 살게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축복을 주셨습니다. 물질의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28-29) 이 말씀은 우리에게 친숙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요엘 2장 28절의 예언이 우리 앞에 이루어졌다고 말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요엘이 예언한지 오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이 예언은 정확하게 오순절에 이루어졌습니다. A.D. 70년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 이런 복이 임한 것입니다. 그날 이후 32절 말씀대로 유대인들 중에 남은 자는 구원받았고 이방인들 중에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성령이 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 론
호세아의 예언대로 A.D. 70년 여호와의 날은 정확하게 도래하였습니다. 육체적인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멸망했습니다. 로마 장군 티투스(Titus)의 침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요엘 2장 3절을 보시겠습니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욜 2:3) 육체적인 이스라엘은 이처럼 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우리도 성령을 받아 예수님을 믿는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중심이 뜨거우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옛날 로마 군대 얘기를 바쁜 이 시간에 왜 이야기하느냐? 여러분 여호와의 날은 로마 군대의 침공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로마 군대보다도 더 무서운 하늘의 군대가 쳐들어 올 것입니다. 그 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0)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도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다가올 여호와의 날은 불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물심판은 노아의 때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늘에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불심판이 21세기를 사는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압구정동에 가서 이 세상은 불로 망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준비하느냐고 물어보면 우리를 광신자 취급할 것입니다. 또 명동에 나가서 똑같이 질문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로 망할 것이니 방주로 들어오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고 바쁘다며 방주로 가지 않아 모두 죽은 것입니다. 하늘은 불에 의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땅도 녹아지는 불심판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가올 불심판에 준비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물 끓여 잡수시라고 자포자기하고 계십니까? 요엘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제라도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방향전환을 하는 사람은 물질의 복과 영적인 복을 받게 되고 이생과 내세에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온 다음에는 늦습니다. 불심판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원자 발전소 몇 개만 터져도 난린데 동시에 다 터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불심판의 때가 왔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준비하는 것은 다른 것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사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 모두 경건하게 사시고 여러분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은 오늘 결심하시고 예수님을 믿어 불심판에서 구원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라도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요엘 2:1-3, 12-17 / 박한응 목사
할렐루야!!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어느새 9월도 종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지난여름 그렇게도 무덥던 날씨가 이제는 시원한 날씨가 되어서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심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와 같은 날씨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면서 우리들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오묘하신 창조의 섭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창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 * * * * *
오늘 본문 말씀 12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의 말씀 제목을「이제라도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정했습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라도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제라도’ 라는 말은 그 일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라도 빨리 하라 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제라도’ 라는 말이 몇 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다니엘서를 보면 유대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 느브갓네살왕의 총애를 입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죽일 계획을 세워 왕의 신상을 만들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사람은 풀무불 속에 던져 죽이는 법안을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그 신상의 낙성식이 거창하게 거행되는데 온갖 악기가 울려 퍼질 때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절을 하지만 세 사람은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이때 왕이 그들에게 한 말 중에
(단3: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고 위협을 하였으나 세 사람은 왕에게 대답하기를
(단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바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근래에 와서 세계 곳곳에서는 기상 이변으로 인하여 온갖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다의 수온이 상승하므로 인하여 잡히던 어족들은 고갈되고 열대성 대형 해파리들이 온 바다를 뒤덮고 있어서 어부들은 조업을 포기해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해마다 바다에는 적조가 발생하여 양식 업자들이 수백억 원의 피해를 내고 있습니다.
바다뿐만 아니라 농작물에도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하던 신종 병충해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약을 더 많이 쳐야 하고 그래서 농민들은 더욱 어려워만 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저 해마다 겪는 일들이라고 안일하게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그 상처가 큽니다. 그냥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이와 같은 어려움과 재난과 천재지변들이 계속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원인이 오늘 본문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저는 태풍이 남태평양에서 발생을 하여 북상을 할 때마다 그 진로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동안의 태풍을 보면 용케도 우리나라를 비켜서 대한해협을 거쳐 동해상으로 빠져나가든지 아니면 저 먼 필리핀군도 앞에서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국 쪽으로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난번 18호 태풍도 타이완을 휩쓸어 많은 인명피해를 입히고 난 후 곧바로 북진을 하였다면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주었을 텐데 동족으로 방향을 바꾸어 일본 열도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이번에 새로 발생된 19호 20호 태풍도 19호는 중국 나부지역으로 상륙을 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을 하고 많은 재산 피해를 냈습니다. 20호 태풍은 일본을 향해 복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애국가에 있듯이 하나님이 보우하신다고 믿어 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이 나라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를 감찰하고 계십니다.
(시33:13-14)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 도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내 맘대로 살 때 하나님은 진노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읽은 요엘서는 주전 830년 전 지금으로부터는 약2843년 전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하는 요엘 선지자가 외친 말씀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가공할 만한 메뚜기의 재앙과 가뭄의 재앙을 통해서 장차 임할 여호와의 날 즉 심판의 날을 대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해야 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과 같이 요엘 선지자는 외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은 회개해야 할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감증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좀처럼 사람들은 회개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애굽의 바로가 마음이 강팍해져서 아무리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도 회개치 않고, 아무리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재앙을 내려도 회개치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이 부족한가? 또는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를 생각하면서 철저하게 회개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또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1:18-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오늘은 이 회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들도 철저하게 회개하는 시간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정결된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회개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로 인간은 죄악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이 이와 같이 멸망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슥1:3)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말씀들은 모두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1:19-20)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2. 왜 회개를 해야 합니까?
(1)앞에서도 말했듯이 회개는 타락한 인간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요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철저한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회개야말로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도 복음을 전하시기에 앞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입니다.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2) 회개는 죄 사함 받고, 성령을 받는 길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행2:38-41)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3. 누가 회개를 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2:16-17절의 말씀을 보면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회개하여야 할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예외가 없이 모두가 회개하여야 합니다. 남녀 노유를 막론하고 신랑과 신부도 제사장도 왕도 모두가 회개하여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전체 국민의 4분지1의 숫자가 되는 1천 2백만이 됩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사회는 점점 어지러워만 가고 있고, 범죄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나라의 대형 범죄 사건들 중에 65%가 기독교인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바로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철저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①지금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피터 왜그너 박사는 그의 교회론 에서 21세기의 위기는 교회 안에 참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교인들의 영적 성분을 보면 10%의 교인은 아주 잠들어서 깨어날 줄 모르고 푹 자고 있는 사람들이고 80%는 살짝 잠들어 있고 정말 깨어 있는 신자는 10%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마음 깊이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잠에 취해서 푹 자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요? 아니면 비몽사몽간에 잠에 취해 있는 사람은 아닙니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정말로 믿음 안에서 깨어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 주님은 마7;21절 말씀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②그리고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형식적인 회개를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할 때에 겉옷을 찢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애통하는 마음의 진실 됨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인데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겉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욜2:13)
체면치레로 하나님을 믿는 척하고 교회에 와서는 거룩한 것 같은데 사회에 나가서는 불신자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와 같은 데에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되어야 합니다.
(삼상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고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③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치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준행 하여야 합니다. 즉 행함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약2:17) 말씀하셨습니다.
(신28: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라고 하셨고
(신28:15-16)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성전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 응답하기를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뜻에 맞고 내 맘에 드는 것만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2) 교회의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7절 말씀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 되는 목사들이 회개해야 할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외치기를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3) 왕을 비롯하여 방백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나 대통령과 그 아래에서 보좌하는 방백들이나 장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성경의 역사나 인류의 역사나 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인들에게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 상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다윗과 같은 성군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히스기야, 요시야 같은 왕들이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다스릴 때에는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반대로 사울이나 르호보암, 아합 같은 왕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나라가 침략을 당하여 이방인들에게 포로가 되고 또는 이방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치며 어려운 고통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를 보아도 누가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왕이 되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흥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못사는 나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요엘 선지자는 왕으로부터 온 국민이 회개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욜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고 하였고 사무엘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삼상7: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나라는 저 청와대의 구중궁궐 안에 있는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하여 국회의원과, 국방을 담당하고 있는 국군 장병들과, 이 나라의 장래 일군을 키우는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가들과, 또는 산업 전선에서 땀 흘려 일하는 근로자들과, 농어촌 각지에서 일하고 있는 농어민을 비롯하여, 온 국민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 마음을 찢어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켜야 합니다.
한 사람이 회개함으로 이 나라 온 국민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고, 애굽의 바로 왕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계속하여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나라의 살길은 오직 회개의 길밖에 없습니다. 회개의 길만이 이 민족이 살길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리고 어떻게 회개를 하여야 하고, 또 회개를 하면 무슨 축복이 임하는지는 오늘 저녁에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오늘의 우리들의 신앙과 믿음을 돌이켜 보고 진정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믿음이 되도록 지금까지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회개하여 죄 사함 받고 나아가서는 이 나라와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 재를 무릅쓰고 니느웨 백성들처럼 회개하여 이 민족을 구원하는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이 민족을 구원코자 먼저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회개 운동을 일으키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에게 책망의 말씀을 전한 나단 선지자와 갓 선지자와 같이, 또는 니느웨성에 가서 회개를 전파한 요나 선지자와 같이, 이 시대에 역사를 바로 이끌 수 있는 회개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먼저, 회개의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가정이 살고, 나아가서는 이 민족을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는, 마지막 말세의 사명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여호와께 돌아오라
욜 2:1-2 / 박봉수 목사
지난 수요일 2월 17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부활절인 4월 4일까지 주일 외 40일 동안을 사순절로 지키게 됩니다. 교회는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절기로 이 사순절을 지켜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40일은 참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40일 동안을 금식하시며 준비하셨습니다. 모세도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금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고난의 행군을 통해 연단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졌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이 40일을 경건과 절제 그리고 금식과 금욕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거룩한 절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소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사순절 첫날인 수요일에 재를 십자가 형태로 이마에 바르는 의식을 치렀기 때문에 재의 수요일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면 왜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이마에 재를 바르는 의식을 행했을까요? 한 마디로 사순절의 영적 의미를 ‘재’로 상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의 영적 의미
재로 상징되는 사순절의 영적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는 재를 바르는 의식에서 집례자가 읽는 성경말씀 두 곳에 나타나있습니다.
첫째, 창 3:19 말씀입니다.
재의 의식에서 집례자가 읽는 첫 번째 말씀은 창 3:19입니다.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줍니다. 바로 흙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본 일이 있습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라는 청자입니다. 각이 진 작은 입부분과 어깨에서부터 바닥까지 이르는 곡선미는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문양은 6단의 동심원문 속에 운학을 상감처리하여 그 조형미 또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그 값은 도저히 매길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청자도 흙일뿐입니다. 자칫 떨어뜨리면 깨지고 맙니다. 그 때 그 가치는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일단 깨지고 나면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되고 결국은 흙이 되고 맙니다.
바로 인생이 그렇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높은 경지에 올라도 자칫 한순간의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자칫 불치의 병이라도 걸리면 한순간에 환자가 되어 쓸모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 결국 죽어 한 줌의 흙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인생을 잘못 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고려청자로 대단한 줄만 알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흙인 줄은 까맣게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교만하게 됩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흙임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시인 이현주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살아라
죽어서 흙 될 생각 말고 살아서 너는 흙으로 살아라
온갖 썩는 것 더러운 것 말없이 품 열고 받아들여
오래 견디는 참 사랑 모든 것 삭이는 세월에 묻었다가
온갖 좋은 것 살아 있는 것 여린 싹으로 토해 내어
마침내 열매 맺히도록 다시 말없이 버텨주는 흙으로
흙으로 살아라 너는 흙이니
오오 거룩한 흙으로 살아라
우리가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흙으로 살기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흙이면서도 흙이 아닌 것처럼 살다가 결국에 죽어서야 흙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막 1:15 말씀입니다.
재의 의식에서 집례자가 읽는 두 번째 말씀은 막 1:15입니다. 즉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줍니다.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성자라 일컬어지는 프랜시스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저 천국에 크고 작은 보좌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에 크고 화려한 한 보좌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이 보좌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이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프랜시스가 앉을 자리라고 했습니다.
이 환상을 보았던 제자는 어느 날 프랜시스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프랜시스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일세. 가장 큰 죄인이야”하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성자로 일컬어지는 선생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때 성 프랜시스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자네가 나를 잘 몰라서 그렇지 나는 참으로 큰 죄인이야.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일세.”
성 프란시스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며 나름대로 경건한 삶을 살면서, 남들보다 덜 죄를 짓는다고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느냐 아니면 적게 지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게 인정하느냐 그리고 얼마나 깊이 회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물론이고 작은 티라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깊이 아파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회개의 눈물로 그것들을 씻어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의 실천적 의미
교회는 교회력에 따라 절기마다 성경말씀을 읽도록 본문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서일과”라고 부릅니다. 이 성서일과에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읽도록 정해놓은 본문이 바로 오늘 설교 본문인 요엘서 2장 1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특히 12-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사순절을 지키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마음속에 새겨야 할 실천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금식입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실천해 가야할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가 금식입니다.
왜 금식을 명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최초의 금식 명령은 에덴동산에서 주어졌습니다. 창 2:17을 보면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먹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대로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금식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망을 제어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육적인 배고픔을 고통스럽게 느낄 때 더불어 영적인 배고픔을 깨닫고, 그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더욱 철저하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벗어나고 우리의 영이 더욱 맑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적 상황에서는 금식이 다양한 형태로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다이어트나 바쁜 일정 때문에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금식이 아닌 ‘굼식’이 익숙해 져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의 본연의 영적 의미가 퇴색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금식은 현대인들을 강하게 자극하는 다양한 욕망들을 제어하는 데로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한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소위 “미디어금식”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디어금식이란 ‘밥(음식)’보다 현대인들이 즐기는 ‘미디어(게임, 채팅, 만화, 휴대폰, TV, 잡지 등)’ 사용을 스스로 절제하도록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고통과 사랑을 묵상하도록 하는 21세기형 금식을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여러분 나름대로 금식을 실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여러분 나름대로 금식할 것을 정해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음식 먹는 것을 금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금식과 같이 게임, 인터넷, TV, 핸드폰 사용 등을 금할 수 있습니다. 골프, 술자리, 여흥 등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금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 정도를 정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금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까지 금할 것인가? 또한 금식을 잘 실천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금식 일지를 기록하면서 하루하루 실천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실천해 가야 할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또 하나는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겉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쓴 채 울면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겉옷만 찢고 재만 뒤집어썼습니다. 회개한다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몸짓만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회개를 하되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실된 회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하기 때문에 직접 손으로 편지를 쓰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과거 편지를 쓸 때 한 번에 편지를 써 내려간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편지에 마음을 담아서 보내려고 할 때는 더 그렇습니다. 한참을 써 내려가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리고 다시 써내려갑니다. 대충 써놓고 다시 읽어보다가 찢어버리고 다시 쓰기도 합니다.
편지를 쓰다가 찢어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제대로 된 마음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찢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우리 마음이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마음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해 하면서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담고 있지는 않는지? 혹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을 담고 있지는 않는지? 그것들이 발견되면 빨리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애통해 하면서 그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셋째,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실천해 가야할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또 하나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눅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면 거기 상징적 표현들이 나옵니다. 우선 13절을 보면 “먼 나라에 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 멀리 갔다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너무도 멀리 떠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17절을 보면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을 더나보니 결국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탕자가 자기가 살려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고,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와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있어서는 안될 곳에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품을 향해 힘차게 돌아서서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영화 명장면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납니다. 배우 설경구가 연기한 주인공 영호가 철길 위에서 절규하며 부르짖습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호는 광주항쟁에 참여해서 총을 들게 된 뒤 그 인생이 망가지게 됐습니다. 그 후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경찰관 생활과 사업실패를 통해 엉망이 된 자기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 순수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절규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깨닫고 다시 돌아서야 합니다. 용기를 내서 돌아가야 합니다.
어디로 돌아와야 할까요? 우선 말씀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귀를 열고 주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골방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입을 열고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예배드리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영으로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순절을 맞이했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흩어졌던 마음을 주님께로 모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금식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찢으며 주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힘을 다해서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귀한 절기가 되기 바랍니다.
미래교회 미래사회
요엘서 2:1-3, 28- 32 / 윤창용 목사
1. 들어가는 말
최근 우리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신문지상이나 텔레비전에서 많이 본다.
작년 한해 동안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이야기되었던 것은 3D 즉 디지털(Digital), 유전공학(DNA), 디자인(Design)이었다. 그리고 단연 많이 이야기되었던 것은 '7T'이다. T는 물론 테크놀러지(Technology)다. 앞으로 한국이 선진국 수준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7T, 즉 인터넷 기술(IT), 생명공학 기술(BT), 환경 기술(ET), 문화 기술(CT), 미세 기술(NT), 우주 기술(ST), 그리고 경영 기술(MT)로 구성된 첨단기술이 독자적으로, 또 서로 결합해야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개인 휴대 전화 시대에 이어서 화상 통화까지 구축할 IMT-2000이라는 미래 통신 사업의 업자까지 선정이 되어서 앞으로 전화도 개인휴대 화상 전화 통화를 하게 될 것 같다. 예전에 팩스로 문서를 주고받는 것도 신기하고 놀라웠지만 이제는 무선 인터넷을 통해서 신용카드 조회 및 결제, 증권거래 서비스, 택배 서비스, 차량위치 정보 서비스 등 다양한 서비스를 받게 된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앞으로 주민등록증과 의료보험증,운전면허증 등 7개의 기능을 한 장의 카드에 통합된 전자주민증을 발급한다고 발표를 했었다. 예전에는 버스에 차장이라는 분이 있어서 버스 요금을 받곤 했지만 이제는 전자 카드 한 장으로 버스와 지하철 승용차의 터널 구간 요금 정산을 하게 된 시대에 살고 있다.
1999년부터 세계의 뛰어난 기업들의 지도자들이 찾아오는 다보스(Davos)의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 모인 기업인들의 통일된 견해를 들어본다.
기업인들은 오늘날 국제환경을 불확실성(uncertainty)과 가변성(volatility)이라는 두 용어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 기업들이 살아 남는 처방을 아래와 같이 요약하였다.
첫째, 변화기의 기업은 우선 고객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한다. 고객의 취향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고객이 움직일 때 기업도 따라 움직여야 한다. 빨리(fast), 신축성 있게(flexibly), 그리고 초점을 둔(focused) 움직임을 해야 한다. 즉, 3F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셋째, 그렇게 하기 위하여 기업의 조직은 하부조직을 중심으로 팀(Team)제를 운영해야 할 것이며 권한은 아래로 위임해야 할 것이다.
과거 그룹차원이 모든 권한을 가졌던 CCC(command, control, communication) 원칙은 낡은 원칙으로 기업의 패망의 처방과 같다.
넷째, 기업이 성공하려면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자본도 기술도 시장도 사람의 가치에 비하면 이차적이다. 이렇게 빠르게 시대가 변해 가도 있는데 교회는 지금 정체된 의식과 행동으로 일관을 하게 되면 복음 전파는 커녕 도리어 교회 복음 전파의 경로가 차단될 우려마저 있기 때문에 지금이 바로 우리가 시대에 적응하는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우리 한국 교회들이 빨리 시대에 적응하는 훈련을 통해서 미래의 한국 교회를 부흥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은 21세기 교회를 위한 방향성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1. 먼저 교회는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지방분권적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세계화(globalization)와 더불어 지방화(localization)를 계속한다. 세계화와 지방화는 대칭적 개념인 듯 하지만 사실은 평행적 개념을 가진다. 구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 된 세계의 지방화는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으며 세계 분열의 가능성은 어느 때 보다 높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세계화의 세계와 지방화의 세계는 같은 세계라는 점이다. 세계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닌 모순과 패러독스 속에서 발전적인 원심운동과 구심운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유사한 정치적 경제적 현상을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글로벌 패러독스(Global Paradox)라고 부른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기업은 기업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분리와 통합을 반복하게 하며 새로운 부족주의(tribalism)를 탄생시켜 동질성의 체제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세계화와 지방화의 역설적 발전은 교회구조의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는 교회도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지방분권적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지방 분권적 구조로 전환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평신도들의 제자화 훈련과 사명 감당을 위한 헌신적인 !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앞으로 교회는 보다 세부적인 조직으로 나누어질 것이다. 셀 교회는 21세기 대안 목회 방침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러하다. 보다 평신도들의 역할이 강조되어진다면 교회의 구조가 초대 교회의 모습과도 같은 구조로 전환되리라고 본다.
2. 교회의 예배가 이제는 예전의 예배를 넘어서 축제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요즘 신세대들의 말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신조어들이다. 또 신세대들은 탈 근대주의와 탈문화와 탈 구조라는 문화형태와 소비형태를 만들어내는 세대이다. 이들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 자신들의 사고를 표출하고 쇼핑하며 예배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세대이다.
이들에게 가상적인 공간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가지지 못한 또 다른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이런 이들에게 예배도 이제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축제의 예배로 탈바꿈을 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 미국의 신학자 콕스(Harvey Cox)는 세 가지 유형의 교회를 설명하면서 교회는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기의 교회, 감사와 축제가 있는 시편의 교회,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계시록의 교회가 있다고 하였다. 교회의 예배는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하고, 감사와 축제가 있어야 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서 그는 "예배에서 축제성이 상실된 다음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 나왔다"고 하였다. 미래 교회의 예배는 예전의 예배를 넘어서 축제의 예배로 나아가야 미래인들에게 영감과 의미를 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예배가 축제의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예배의 주체자라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3. 아톰(원자)시대에서 비트(beat)시대로 전환해야 한다.
디지털(Being Digital)의 저자 네그라폰테(N. Negraponte)는 이전의 시대는 아톰의 시대였지만 정보시대는 비트의 시대라고 하였다. 아톰 시대는 도서관의 책을 한 사람이 빌려 가면 없어지지 만 비트 시대의 도서관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정보를 빌려 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비트의 시대는 정보의 독점 보다 공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될 것이며 일반 생활에서도 물질의 양 보다 질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결국 양에 대한 관심이 현재와는 다를 것이다. 종전의 산업성장의 원동력은 토지와 자본과 천연자원이었지만 미래의 네오 산업은 기술을 그 원동력으로 삼는다. 이러한 비트 시대의 미래산업의 추세는 컴퓨터, 전자 자본재, 소프트웨어, 장거리 통신, 광섬유, 로봇, 세라믹스, 데이터 베이스, 정보 서비스, 유전공학들이 발달하게 되며 정보산업이 전 산업을 주도하는 새로운 산업형태로 발달할 것이다. 미래의 신 산업을 주도할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인 컴퓨터와 로봇이 새로운 비트 시대를 이끌어갈 것이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의 이우정 교수가 보조의사 없이 로봇과 함께 수술을 성공하였다. 일반적으로 2-3명이 필요한 보조의사의 역할 로봇이 대신함으로 집도의사 혼자서 수술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교회의 사고도 아톰에서 비트(beat)로 소유에서 공유 내지 분배로 속히 전환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의 비트 사고로 전환을 위해서는 이제 교회의 모든 행정적인 일이나, 교회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은사 중심의 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지역 간의 거리로 조정된 구역 중심의 활동, 혹은 나이로 나누어진 여전도회와 남전도회를 중심으로 교회 활동이 움직여 왔으나 앞으로는 모든 일이 달란트와 은사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져야 할 것이다.
4. 산업사회의 구조에서 정보사회의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얼마 전 조선일보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자"는 캠페인을 벌리고 정보화를 위해서 인터넷 산업을 육성시키고 인터넷 활용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왔다.
미래학자들은 정보를 '숨은 설득자(hidden persuader)'라고 부른다. 정보야말로 미래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정보를 많이 소유한 사람이 결국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 산업사회는 제품을 강조해 왔지만 미래 사회인 정보사회는 서비스를 강조한다.
그러기에 교회도 그 구조적인 모습을 유연한 관리 체제의 모습으로 선회해야 한다. 너무 빨리 변하는 사회에서 목회자가 1년 치 목회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너무 안일한 대응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한 달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1년 치 목회계획은 고착화된 우리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변화하는 세계에 너무 방치된 냠맛?모습을 흡족해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정보사회의 구조로 교회가 변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교회 구조를 우선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단순화된 상태에서 즉각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구조로 변환이 가능할 것이다.
5. 소유구조에서 대여구조로 선교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소득이 높아지면 소득이 낮을 때와 달리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첫째는 정체성(identity)의 발견이며
둘째는 대여개념의 발달이다. 요즘 리스 문화가 IMF 한파로 주춤하지만 앞으로 이 리스 문화(대여문화)는 계속 번창할 것으로 보인다. 이 대여개념은 모든 사회에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미래사회는 전통적 가치관과 신념들이 붕괴되고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될 것인데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미래형 가치관은 임시성과 일회성의 발달이다. 임시성(disposability)의 발달은 미래인들로 하여금 버리는 문화(throw-away culture)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월세나, 전세로 집을 얻어 살려는 젊은 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 집을 소유함으로 물게되는 취득세조차도, 집을 등기하는 일 자체도 귀찮아하는 부부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사고구조는 교회관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줄 것이다. 동시에 교회는 그 구조를 소유에서 대여로 전환해야 할 것이며 선교의 정책도 소유에서 대여로 환수에서 환원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피 선교지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도 우리의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의 힘을 빌려 줌으로 선교사가 대신해 준다는 인식으로 선교정책을 전환되어야 할 것이고, 선교지의 모든 활동이 우리!
의 지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서로가 나누어서 한다는 인식으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선교지에 보내는 교회가 피 선교지에 지배권을 행사하는 일이나 피보조 교회에 대해 보조교회가 소유권을 지니려고 하는 발상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6. 심방목회에서 교육목회로 전환해야 한다.
미래사회는 인류공동체가 보편화되는 우주적 사회로서 이동성(mobility)이 극대화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세계화의 동인 가운데 하나인 여행은 세계로 하여금 더욱 좁아지게 하고 있다. 1994년 통계에 의하면 한해동안 비행기 탑승자의 연인원은 10억에 이른다. 세계의 모든 도시와 인구가 오늘날처럼 이동률이 심하고 이직률이 심한 때는 일찍 없었다. 미래인들에게는 일정한 고향이나 주거가 없이 자기가 사는 곳이 곧 집이다. 잦은 이사와 여행은 사회를 기존의 사회현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유목민적 사고의 사회로 탈바꿈하고 동공화를 촉진하게 할 것이다. 1996년 6월 12일에 발표한 바에 의하면 서울에서는 매일 자가용 승용차가 320대가 증가한다고 한다. 이러한 도시의 변화는 이동성을 가속화하며 이러한 이동성의 발달은 교회로 하여금 기존의 목회구조를 무력화할 것이다. 실제로 대도시에서는 심방 중심의 목회가 점차로 어려워질 것이고 심방목회의 대행물이 속히 제공되어야 할 시점에 왔다. 미래사회의 이동성의 발달과 미래인의 일회성의 발달은 교회의 소유개념 보다 대여개념이 발달할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심방목회에서 탈피하는 요인이 될 그 대안은 평신도의 성결성에 입각한 양육 즉 교육목회가 될 전망이다.
7. 교회성장에서 사회봉사로 전환해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는 심각한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교회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전반적인 출생률의 감소로 인한 교인의 감소에 기인한 것이며 나아가서 교회가 수행하던 위로, 도움, 안정, 긴장해소의 기능들을 대신 해주는 기능적 대행물(functional alternatives)의 발달 때문이다. 그간의 한국교회의 교회성장 신드롬은 기세가 꺾이고 있으며 이제 다시 한국교회가 성장하기 위하여 교회성장 신드롬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미래교회는 자기 중심적 교회관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이며 이미 부분적으로 이러한 중심이동의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동안의 교회의 관심은 교회성장이었고 선교는 개인영혼구원 혹은 교회성장이라는 제한적 의미를 가졌지만 정보 사회에서의 교회의 관심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본질적 물음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개념도 개인구원이라는 제한적 개념에서 개인구원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통전적 개념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새로운 변형의 시도는 사회봉사로 교회의 관심이 전환될 것이다.
나가는 말
정보 시대, 멀티미디어 시대를 맞이하여 분명히 우리 교회의 구조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정보시대를 대비하는 한국 교회의 준비는 아직 미흡하다. 현재의 목회 망뗄?한국 교회 구조는 분명히 새로운 천년 시대에 적응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기에 위의 제시한 한국 교회 구조의 변혁을 통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