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바깥으로의 망명 외 5편 *제21회 내일을여는작가 신인상 수상작
조희
함께라서 외롭다고
그들은 바다를 끌어안으로 간다고 했다
거울에 비춰지는
줄지어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은
죽음에 이르는 병
바다를 위해 살고 바다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멈출 줄 모르는 레밍, 레밍들은 거울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병 때문에 밤잠을 설치다가 빈 방에 오도카니 앉아 그들이 걸어간 언덕이 결국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절벽은 아닐 거야, 그럴 거야
멈추면 볼 수 있는 풍경을 모르고, 바람이 뒤돌아갈 때 들리는 풍경소리도 못 듣고, 왜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직선밖에 모르는 레밍, 레밍들, 사랑이나 주식이나 도박에 눈 먼 사람들처럼 맹목에 뛰어드는 백수광부들
가장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본 레밍만이 바다를 끌어안았을까 기어코 바다를 가져보기나 한 걸까 바다가 그까짓 것들을 알기나 할까
바다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혼자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
파도가 이불 속으로 찾아와 문고리를 잡듯 나를 흔들 때
안쪽으로 휘어질 줄 모르는 거울만이 빤히 나를 바라보고 바다는 거울처럼 반짝이고
유튜브로 툰트라 지역을 검색하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레밍들을 보고 말았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절벽에 노크한 기분
아, 직선으로 죽을 줄 아는 생명은 아름답다
이제 거울을 바꿔요
어제의 거울은 레밍의 뒷모습
거울의 옆구리를 꼬집거나 거울을 깨뜨릴 생각조차 못했었는데
커튼 사이로 거울을 읽고 난 몇 개의 햇살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것이 우르르 우르르 몸을 떨었다
어떤 부품을 위한 선 또는 어떤 선을 위한 부품
위에서 아래로 공간을 찢는 소리
툭! 울림의 최선
한 장의 낙엽
추락한 부품의 증언일까요 선홍빛 피의 무게는 앞뒤를 알아볼 수가 없어요
어떤 부품을 위한 선, 닉네임은 바닥이라고
본 적 없는 부품이 중얼거리며 왼쪽 주머니에 있는 세 개의 돌멩이를 바닥에 내려놓아요
바닥에서 바라보는 공사현장의 타워크레인은 돌멩이의 이방인
바닥에서 바라보아야만 깨달을 수 있는 시선
그것은 낙엽의 힘
무릎 성장통에 부대끼다 추락사한 사건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경찰 부품들은 사건현장에 노란 테이프로 줄을 치고 오늘쪽 눈에 돋보기를 갖다대요
도대체 성장통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경찰 부품들이 세 개의 돌멩이를 들고 뒤돌아서요 나는 돌의 중력이 사라질까봐
동전을 높이 던져요 동전은 쨍그랑 증언해요
타워크레인이 없으면 무거운 물건들을 어떻게 옮겨야 할까요 어떤 부품들은 말썽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낙엽처럼 굴러요
식물들은 바닥의 빈틈에서 나사를 조이고 새들은 나뭇가지 빈틈에 둥지를 틀고 붉은 동백꽃은 꽃의 빈틈에서 모가지째 해체되었다가 겨울에 다시 조립되겠죠
마스크를 콧등 위로 아무리 꾹 눌러 써도 코로 스며드는 바이러스를 침묵이라고 해석하는 부품도 있죠
오래된 부품들은 병원에서 녹을 제거해요 사랑에 빠진 부품들은 수리공에게 미래의 상품을 선물 받아요 나는 나에게 주는 특별한 부품을 주문했어요 납작한 자세로
문 밖에 도착한 천사에게
스스로 뱃속 깊이
당신도 주문했나요?
어떤 불멸이 되기 위해서
모든 부품들에게 열려 있는 문
어떤 낙엽을 위한
앰뷸런스가 배경이던 노란 은행나무 길을 끌고 에고에고 떠나가요 웅성거리던 부품들은 천천히 흩어져요
나는 죽은 부품
내 앞에 비(碑)를 세우지 마세요
양파
도마 위에 흰 양파를 썬다
비스듬히 눕혀지는 동그라미들
확 퍼지는 매운 냄새, 양파 속에서 어떤 울음이 새나왔고 오른손으로 두 눈을 훔쳤다
양파는 아주 작은 점에서 태어났어, 네가 말했다
점이라는 말이 섬으로 들렸다 감정이 보글거리는 프라이팬에서 삼겹살을 뒤집으며 양파를 고기 옆에 올려놓았다 소금을 뿌리자 몇 개의 알갱이가 레코드판 튀는 소리를 냈다 양파조각이 젓가락에서 낮달처럼 미끄러졌다
냉장고에 저장해 둔 슬픔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너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도래한다는 것은 달콤하지 않습니까? 육즙이 고인 삼겹살을 집어 먹으며 네가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상추에 고기와 양파를 싸먹으며 깊은 대화라고 생각했다
문득 천정에서 내려온 거미가 우리를 보고 웃었다 긴 다리로 입을 막으며 분명히 웃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거미줄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다 세상이 코미디도 아닌데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휴지로 거미를 꾸욱 눌러서 버렸다 어쩌면 오해는 거미 항문에서 시작되었을지 몰라 상상했다
우리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했다 트림을 하면 양파 냄새가 났고 히히힝 당나귀 울음소리가 솟구쳤다 우리가 점점 점이 돼 가는 거 맞지?
양파는 벗겨도 벗겨도 양파인데 우리는 우리를 벗겨도 우리를 모르고 누가 벗기는지도 모르고
양파 속에는 흰 당나귀가 산다
양파를 까도 까도 흰 당나귀가 산다
넥타이에 대한 변명
개 줄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산책을 했다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어떤 줄에 이끌리어 여보세요?
섬으로 이사했어, 꼭 줄이 끊어진 너 같았다
작년 겨울 내가 낙엽처럼 구르던 날, 너는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병원 복도 끝까지 구르며 누구 없어요? 소리쳐도 아무도 걸어 나오지 않던 복도에서는
어떤 줄이 내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한참을 울었는데 그 줄이 나를 감싸는 듯했다
개 줄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름다운 섬이 되기 위해
파도 끝으로 달려가는 어떤 불빛 같기도 했다
너를 두고 중환자실을 걸어 나오며
내가 나를 밀고 나올 때
그것이 나만의 보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왠지 뜨거웠다 숨이 가빠서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넥타이뿐인데
무언가가 내 목을 조이고 있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줄에 이끌리어
목에 감기는 것을 뒤로 젖히면서
개 줄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산책을 하고 있다
지나다니는 말끔한 사람들은 모두 투명한 줄을 매고 있다
목과 몸통 사이를 잇는
긴 복도 같은
어떤 줄 하나가 사람들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
줄을 잡은 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옛날의 여자
저 두 눈
나를 바라본다
나는 못 본 척 책장을 넘긴다
나는 그 옛날의 여자가 되기로 했다
하이힐을 신고 밥을 하고 나물도 무쳤다
여전히 그 눈빛을 못 본 척 책장을 넘겼다
가자미도 구웠다
전화가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커튼을 열어젖혔다
빛이 길게 돌아왔다
그름자에 붙은 미역줄기는 뜯어내 버렸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책장 사이에서
저 두 눈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고인들 속으로 들어간다
파울라*가 있는 연못 풍경
잉어떼가 연못 둘레를 그려요
잔잔히 일어나는 파문, 연못 속 덤불로 내려가는 수초 사이에 파울라가 있어요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미소 짓는 그녀, 꿈밖으로 자란 머리칼을 곱게 빗어 뒤로 묶었어요 손에는 꽃을 들고서
그녀는 아프리카 나무인형처럼 연못의 둥근 무릎을 껴안았어요 연못은 모서리가 닳은 달을 낳았고 피가 도는 돌을 낳았고 빛나는 거울을 낳았고 우리가 우리를 모를 때
가라앉은 산을 배경으로 그녀가 수면으로 떠올랐어요
그녀의 이마에 구름이 앉았다 흘러가요 바람이 그녀의 숨결을 읽어요 눈, 코, 잎 불룩한 배
물의 맥박은 빠르게 물결치고
그녀 옆에 어린 나를 팔에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도 나타났어요 우리는 모두 누드, 윤곽이 둥글고 굵은 원시인처럼 연못에 누워 있어요
파울라와 엄마에게는 커다란 유방과 불룩불룩한 엉덩이가 있어요 연못은 자궁처럼 깊고 물렁물렁해요 수초는 손바닥으로 물결을 뒤척이고
나는 연못에 파울라와 어린 나와 엄마를 두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신발에 연못이 묻어 왔어요 자고 나면 물이 찰랑거렸죠
새벽 물안개가 자욱한 연못, 상상이 상상을 낳고 있어요 가끔 물속에서 내가 쏟아져요
눈꺼풀에 붙은 지느러미의 시간이 안과 밖으로 흐르고
나는 연못의 굵은 허벅지를 베고 잠이 들어요
*파울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 1876-1907):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 《내일을여는작가》 (2023 / 봄호)
*제21회 내일을여는작가 신인상 수상작(심사위원: 고인환, 김명기, 김안녕, 조기조)
조희
충남 부여 출생. 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 석사수료. 현재 곰곰나루문학아카데미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