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王仁)

왕인(王仁, ? ~ ?)은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百濟)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학자로서, 왜국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고 전하는 인물이다. 근구수왕의 명으로 왕의 손자 진손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사기》에는 「와니키시(일본어: 和邇吉師 わにきし)」, 《일본서기》는 「와니(일본어: 王仁 わに)」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의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데, 중국식의 왕씨 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당시 고구려(高句麗)에 멸망당한 낙랑군(樂浪郡) 계열의 한인(漢人)이 아닐까 추정하는 설도 있으며, 왕인이 전해준 천자문이, 그 당시에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사료해석 상 그 실재를 의문시하는 설도 있다.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여겨진다. 일본에서 아라타와케(일본어: 荒田別) 등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근구수왕의 명을 받들고 왕의 손자 진손왕과 함께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 해박한 경서의 지식으로 일본 오진 천황(일본어: 応神天皇))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의 문화를 깨우친 그는 물론 그의 자손도 대대로 일본의 서부 고치(河內)에 살면서 학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왕인은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의하면 그는 "할아버지 때에 귀화한 중국인"이라 한다.
역사 기록
왕인에 대한 기술은 일본의 역사서인 고지키, 니혼쇼키, 속일본기에 나타난다. 각각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고지키
고지키에 따르면 왕인은 백제에서 건너온 현자로 여겨진다.
천황은 또한, 백제국에 "백제에 현자가 있으면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그 명을 받아 (백제가) 보낸 사람의 이름이 와니키시(和邇吉師)라 하였다. 《논어》 열 권과 《천자문》 한 권, 모두 11권을 이 사람에게 부쳐 보내왔다.【이 와니키시가 후미노 후비토(文首)의 시조(始祖)이다.】
— 《고사기》 중권(中卷) ・ 오진 천황(応神天皇) 20년 기유
니혼쇼키
니혼쇼키(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왕인은 백제의 학자 아직기(阿直岐, 아치키)의 추천을 받아 오진 일왕의 초대를 받아 일본에 건너와 훗날 야마토에 귀화한 학자이다.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일본의 학자 중에는 천자문의 성립 연대가 왕인의 일본 방문보다 후대임을 들어 왕인의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또는 니혼쇼키를 편찬했을 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귀화했던 여러 명의 도래인 학자를 상징적으로 정리한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속일본기
《속일본기》에는 왕인의 자손이라는 좌대사(左大史) · 정6위상(上) 후미노이미키 모오토(文忌寸最弟) 등이 자신들의 선조 왕인이 옛 한의 황제의 먼 후손이라고 간무 천황(桓武天皇)에게 주상한 기록이 있다.
모오토 등이 말하기를, 한 고제의 후손으로 앵(鸞)이란 자가 있었고, 앵의 후손인 왕구(王狗)가 백제로 옮겨갔는데, 백제의 구소왕(久素王) 때에 성조(聖朝)가 사신을 보내어 문인(文人)을 부르심으로 하여, 구소왕은 곧 구의 손자인 왕인을 바쳤다. 이는 후미(文), 무생(武生) 등의 시조이다. 이에 모오토 및 眞象 등 8인에게 스쿠네(宿祢)의 가바네(姓)을 주었다.
— 《속일본기》 엔랴쿠(延暦) 10년(791년) 4월 무술
이 기술에 따르면 한 고제 즉 유방의 자손으로 「앵(鸞)」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의 자손 「왕구(王狗)」가 백제로 건너와 살았으며 그 손자인 왕인이 왜로 도래하여 후미 씨(文氏)와 무생 씨(武生氏) 등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으로(《신찬성씨록》에도 이와 비슷한 기술이 보인다) 왕인은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킨 뒤 백제에 망명한 중국계 학자이자 한족(漢族)이 된다.
한국에서의 왕인
대한민국에서 왕인은 고대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수한 백제의 학자로서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화를 전해 주었다’라고 기술되고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에서는 왕인이 태어났다는 집의 터(구림면)를 왕인 박사 유적으로 복원하고 매년 왕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서에는 왕인에 해당하는 인물에 대한 기술이 보이지 않고 왕인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일본의 사서에 의존하므로 왕인 박사 유적지가 왕인의 실제 출생지임을 뒷받침하는 유적이나 추가 사료가 없다는 지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