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화폐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도안되어 있다. 동전의 다른 면에 진화론의 찰스 다윈이나 영국을 대표하는 음악가 에드워드 엘가 얼굴이 도안되어 있지만 그래도 그 앞면에, 그리고 모든 화폐에 청초했던 모습에서 오늘의 할머니에 이르는 엘리자베스 여왕 얼굴이 시대마다 도안되어 왔다. 영연방인 캐나다와 호주 화폐에도 도안되어 있다.
영연방인 캐나다의 10달러에 도안된 엘리자베스 영국여왕.
프랑스나 독일은 음악가 드뷔시나 동화작가 그림 형제 같은 예술인과 과학자를 도안하고 있는데 특히 일본이 그러하다. 1만엔에는 후꾸자와 유기치(게이오대학 설립자로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물), 5천엔에는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배, 1천엔에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끼에서 만화 <닥터 노구치>의 실제 인물로 유명한 과학자 노구치 히데요가 도안되어 있다. 워싱턴, 제퍼슨, 루즈벨트 같은 역대 대통령을 등장시키는 미국보다는 좀 더 근사하다.
그렇다면 터키는? 오로지 단 한명의 인물만 등장한다. ‘케말 파샤’로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 또는 아타튀르크로 불리는 인물이다. 무스타파 케말이 본명인데, 이렇게 불리기보다는 위대한 인물에게 부치는 존칭인 케말 파샤 혹은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로 불리는 인물은 현재 터키의 모든 화폐에 도안되어 있다.
터키의 모든 화폐에는 단 한 명의 인물, 아타튀르크가 도안되어 있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세종로는 세종대왕에서 딴 이름이다. 충무로는 이순신이고 퇴계로는 이황이고 도산대로는 안창호다. 도로 이름을 그렇게 짓는 것은 동서의 고금을 막론한다. 뉴욕에는 미국의 독립전쟁 때 공을 세운 프랑스 장군 이름을 딴 라파예트 거리가 있고 독일 드레스덴에는 칼 마르크스 대로가 있다.
그렇다면 터키는? 화폐만큼은 아니지만, 대체로 한 명의 이름이 널리 쓰인다. 역시 무스타파 케말이자 아타튀르크이며 케말 파샤인 사람이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아타튀르크 대로를 따라 아타튀르크 광장에서 내려 아타튀르크 기념관을 둘러보고 아타튀르크 경기장을 구경하는 식이다.
이스탄불의 관문 아타튀르크 공항 모습
과장이 아니냐구?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눈>을 읽지 않은 것이다. 이 소설을 보면, 터키의 중심 도시가 아닌데도, 작은 소읍이 무대인데도 거리며 공공기관 이름은 한결같이 아타튀르크이다.
바로 그 ‘터키의 아버지’ 아타튀르크, 즉 케말 파샤이자 무스파타 케말인 그 사람이 1920년의 오늘, 5월 10일에 수백 년 역사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그 흥망성쇠의 상징인 술탄 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혁명 정부를 수립했다.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은 1881년 3월 12일, 그리스 살로니카 지역에서 태어났다. 12세부터 군사교육을 받았고 1904년에 이스탄불의 하비에르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했다. 수학 능력도 뛰어나 수학교사로부터 완벽하다는 뜻의 ‘케말’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를 공식 이름으로 삼았다.
터키의 근대혁명을 주도한 케말 파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전제 왕정인 술탄제를 폐지하고 터키 민족주의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추진하는 급진적이며 혁명적인 정치운동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190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변방 지역인 시리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능력을 인정받아 이탈리아와의 전쟁 때 소령으로 참전하여 큰 활약을 했다. 1912~13년의 발칸전쟁 때는 군사령관으로서 공훈을 세웠다. 1차 대전 때는 영국군의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1916년까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연합군에 맞서 공적을 세웠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의 독립에 헌신했다.
1차 대전 이후 터키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오스만투르크 황제와 그 지지자들은 터키를 영국의 보호 아래에서 유지하려는 정책을 썼다. 일부는 미국의 위임 통치령 밑에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했다. 이 모두 오스만 제국을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은 투르크 민족의 새 미래를 구상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19년, 유서 깊은 도시 이스탄불과 마르마라 해변의 이즈미트, 그리고 에게 해에 면하는 이즈미르 등이 연합군에게 점령당하자 케말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1919년 5월, 흑해 연안의 삼순 항에서 소아시아로 들어간 케말은 8월에 에르주룸에서 ‘국민 권리 수호를 위한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독립 항전의 뜻을 펼치게 된다. 이듬해 1월에는 강대국과의 외교 정책에 관한 원칙을 세운 ‘국민맹약’을 제창했으며, 4월에 앙카라에서 개최된 ‘대국민회의’를 의장을 맡았다.
그해 8월에 정부가 연합국으로 불평등조약을 강요받게 되자 마침내 민족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케말은 1920년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2년 동안 군사 작전을 지휘하여 그리스군을 몰아냈다. 터키의 권력자로서 그가 시행한 첫 번째 정치 개혁은 술탄(황제)제도의 폐지였다. 1차 대전으로 약체가 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마침내 운명을 고한 것이다. 케말은 앙카라를 수도로 정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터키의 아버지, 곧 아타튀르크 여기까지는 폐쇄된 봉건구조에서 혼란의 근대를 넘어 현대의 신생독립국이 되는 세계 많은 나라들의 일반적인 경우가 된다. 대개의 독립 지도자들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는 바람에 정작 신생국의 책임을 맡게 되면 노년이 되거나 정치 갈등에 휘말려 사라지기 일쑤지만 케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본격적인 터키의 새 역사를 썼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터키의 거의 모든 도시에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는 그의 별칭이 붙게 된 까닭이다. 케말은 재임 기간 동안 정치 개혁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을 맨 앞에서 지휘했다. 무엇보다 이슬람 전통 유산을 현대의 터키에 맞도록 개혁한 것이 그의 업적이었다.
그는 1925년에 이슬람 전통 복장을 공식적으로 폐지시켰으며 남녀 학생이 함께 수업 받을 수 있도록 바꿨다. 1926년에는 새로 민법을 제정하여 남녀평등권을 도입했는데 그 핵심이자 상징적인 규정이 바로 일부일처제이다. 1928년에는 전통의 아랍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제한했고 로마자로 터키어를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했으며 1930년에는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 모든 개혁 조치는 사실 단 하나의 혁명적인 조치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다름 아닌 정교 분리의 원칙이다. 터키 인근의 거의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종교 지도자에 의해 정치, 사회, 문화 생활이 이뤄진다. 하지만 터키는 엄격하게 정교 분리의 원칙이 지켜진다.
마마라해(하단)와 흑해(상단) 사이의 보스포러스 해협과 오랜 역사의 이스탄불. 그 양옆이 곧 동서 양 문명이다.
물론 이러한 생활 혁명은 군부 지도자 출신인 케말의 무한 권력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권력을 갖고 백성 위에 군림하여 사회를 퇴보시키는 독재자가 많았던 것에 비해 케말은 자신의 무한 권력을 터키의 민주화와 현대화에 바쳤다. 이 공로로 터키 국회는 1934년에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경칭을 수여했고 공공 건물이나 거리의 이름을 이 명칭으로 바꿨다. 지폐 속 인물이 오직 아타튀르크 단 한 명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첫댓글 케말파샤라는 이름을 들은적이 있는데, 오늘 좀 더 자세히 알게되서 기쁘구요. 한국화폐 모조리 이씨인건 증말 짜증나는 이조후예국이라는 증거죠.. 에 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