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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
박기완(문학박사)
차례1.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
(1)경교(景敎)
(2)로마카톨릭
(3)프로테스탄트
①칼 구츨라프 목사
②로버트 토마스(최난헌) 목사
③롯스와 매킨타이어 목사
④이수정(李樹庭)
2. 핍박, 수난 그리고 순교
(1) 한국 카톨릭 교회의 수난
①신해교난
②신유교난
③황사영 백서사건
④기해교난
⑤한국인 최초의 신부 순교
⑥병인교난
(2) 한국 기독교 교회의 수난
①초기 시대(선교 초--일본의 한일합방)
②첫 기독교 순교자
③어려운 일들
④일제 통치 기간
⑤공산당의 침략
3. 초기 성도들의 업적
(1) 카톨릭 선교 초기 신자들의 업적
①조상숭배(제사) 거부
②불굴의 신앙 증거
(2) 프로테스탄트 선교 초기 신자들의 업적
①개화운동과 사회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
②일제 때 민족주의 정신 함양에 주력
③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주역을 담당
④의료사업, 교육사업으로 국민에 봉사함
⑤신학문을 도입하고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자로 봉사
⑥국가적, 민족적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
1.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
(1)경교(景敎)
동방기독교를 이름. 동방기독교는 헬라 문화권을 벗어난 시리아 문화권에서 발전한 기독교를 말한다. 이는 Edessa를 중심으로 했다. 이는 일찍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A.D.635년에 퍼시아 사람 아브라함이 당나라의 서울에 경교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1595년 명나라에 왔던 마테오 리치가 흩어져 있던 기독교의 역사 흔적을 찾아 보고 경교가 성행했음을 증거했다.
우리 한반도에도 이때 이미 당나라를 통해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얼마 전 경주 근처에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발견되었다.
(2)로마카톨릭
1592-1598년간의 임진왜란 때에 일본을 통해 들어옴. 제 1군단장 고니시(小西行長)는 일본 예수회의 신자였다. 그가 인솔한 왜군이 서울에 입성할 때 십자기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그들은 선교가 목적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 종교를 악용하였다.
조선시대 때 몇 몇 유명한 학자들이 스스로 입교하였다(이수광, 허균, 이승훈, 정약용 형제, 권철신 형제, 김범우). 1785년 주일마다 모여 미사를 드렸다.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 김범우의 집. 1785년 김범우의 집은 형조판서의 급습을 받고 양반들은 훈방되었으나 중인인 김범우는 투옥되어 모진 고역을 당하고 마침내 충청도 산골로 유배가서 수 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국내에 있어 한국 최초의 카톨릭(기독교) 신자로서 순교자가 되었다.
(3)프로테스탄트
①칼 구츨라프 목사
1832년 7월 화란계 독일 선교사 칼 구츨라프 목사가 중국에 있는 모리슨 목사에게서 받은 한문 성경을 들고 배를 타고 황해도 서쪽 해안과 충청도 홍천 및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성경을 한국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곳 주민들과 함께 우리말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였다. 그가 체류한 기간은 약 2개월 정도이었는데, 그 당장에는 어떤 결실이 없었으나,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②로버트 토마스(최난헌) 목사
영국 웰스 사람으로 런던 선교회의 파송으로 1863년 출발, 상해를 거쳐 1864년에는 산동성에 주재하였다. 한국에서 온 카톨릭 신자들로부터 한국 교회의 형편(병인교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베루네 주교 등 3명의 선교사와 8천여 명의 교인이 희생. 박은식 저 '한국통사'에는 12만 명이라고 함.)을 듣고 한국 선교를 희망하게 되었다.
1865년 한국인들과 함께 어선으로 황해도 해안에 상륙하였으나, 파선으로 인하여 일단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약 2개월 간 백령도에서 전도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우리말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 이듬해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쉐만호의 통역관으로 대동강 상류 쑥섬까지 가서 평양감사와 통상교섭을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강 언덕으로 끌려 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1866년 9월 3일(2일) 그는 형리에게 성경을 주었으나 거절당했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순교 당하였다.
그는 대동강 상류로 올라가는 도중 강서 포산에서 그 지방 사람들에게 성경(신약)을 배부하며 전도하였다. 그의 사형을 집행한 형리는 자기가 의인을 죽였다는 자책감으로 내던졌던 성경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후일 이영태라는 그의 조카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율서(Dr. W.D. Reynolds)박사를 도와 성경 번역사업에 종사하였다. 1933년 9월 14일 대동강변에는 그를 기념하는 예배당이 세워졌다. 그가 바로 프로테스탄트로는 첫 순교자였다.
③롯스와 매킨타이어 목사
매킨타이어는 롯스의 매부였다. 1872년 만주로 와서 개척 선교를 시작. 한국인에게 전도하기를 힘썼다. 1873년 의주 지방의 청년 학자 4명,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만나, 자기들이 있는 만주 우장(牛莊)으로 가서 함께 지냈다. 이 네 명은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그들로부터 기독교의 도리를 배웠다.
1876년 그들은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신자). 그후 의주의 상류계급에 속하는 서상륜이 함께 하였으며 1881년에 그도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1882년에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고 누가, 요한 두 복음서를 찍어내었으니, 이것이 최초의 한국어 성경이었다. 1883년에는 마태, 마가 복음과 사도행전을 그리고 1887년에는 드디어 신약전서 '예수 셩교 젼셔'(신약)를 약 3천 부 출판하였다.
그후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서상륜의 집에 모여 성경을 읽고 강해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것이 실질적인 한국 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소문이 관가에 알려지게 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서상륜은 아우 서경조와 함께 의주를 떠나 황해도 송천(속명 소래)으로 이사하였다. 후일 여기에 송천교회(일명 소래교회)라고 하는 한국 최초의 정식 예배당이 세워졌다.
④이수정(李樹庭)
일본 도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대원군의 완고한 보수주의에 반대하였으며, 그로 인한 신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 망명하였다. 일본인 목사와 미국 선교사들과 친교를 맺는 중에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어져 1883년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이 독실한 신자라는 소문을 들은 당시 일본 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 목사는 평소 생각하던 한국어 성경 발간의 뜻을 이루고자 이수정을 찾아가 취지를 말하고 복음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줄 것을 부탁. 이수정은 쾌히 승락하고 번역하였음.
1885년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가던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에게 한국어 성경(4 복음서)을 건네주었다. 이는 세계 선교 역사상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2. 핍박, 수난 그리고 순교
(1) 한국 카톨릭 교회의 수난
①신해교난
1791년 정조 신해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름. 조야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결국 이들은 처형을 당하였고,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많은 수의 서양 책들이 불태워졌다.
②신유교난
1801년 1월 11일 순조의 섭정으로 들어 앉은 정순왕후는 사학(邪學)을 박멸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특히 5가통(家統)의 법을 만들어 서로 감시하고 보고하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뿌리를 빼려는 정책을 썼다. 이때 이가환, 권철신이 혹형으로 옥사하였고, 이승훈, 최필공, 정약종이 참수당하였으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한편 우리나라에 잠입하여 선교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자수하여 군법으로 처단 당하였다.
③황사영 백서사건
황사영은 정약전의 형의 사위로 주문모 신부를 사사하여 그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다. 박해가 심해지자 고향 창원을 떠나 충청도 제천 배론(舟論)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그를 찾아온 황필과 모의하여 한국 교회를 구할 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길이 62cm 폭38cm가 되는 흰색 비단에 1만 3천 자의 글로 주 신부의 순교와 교난을 자세히 적어 북경 주교에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잡히어 그 글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황사영은 대역모 반역죄로 몰려 1801년 11월 27세의 나이로 참형을 받았으며, 3백여 명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④기해교난
1839년 헌종 5년 우의정 이지연은 사학을 박멸하기를 주장하였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등 30여 명이 참형을 당하였고 1835년 이래 밀입국하여 선교하던 모방, 앙베르, 샤스땅 등 3명의 프랑스 신부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극형을 받았다.
⑤한국인 최초의 신부 순교
김대건. 25세 때 새남터에서 참수당함.
⑥병인교난
1866년 고종 3년 정월에 대원군이 천주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프랑스 신부 9명과 남종삼, 정의배 등을 비롯한 8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를 죽였다. 이때 탈출한 리델 신부가 중국 천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오즈 제독에게 보고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북경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는 조선 정벌의 결의를 언명하였고, 이를 전해 들은 대원군은 탄압을 더 강화하였다. 결국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 오고 양국간에 싸움이 있었다.
(2) 한국 기독교 교회의 수난
①초기 시대(선교 초--일본의 한일합방)
정식 박해가 없었다. 그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의 섭리
-카톨릭 사업...카톨릭 순교자들, 불굴의 신앙심
-정치적 변동...대원군의 은퇴
-개국조약...1882년 미국과 우호통상조약, 선교사들이 들어옴
-기독교의 사회적 공헌...의료사업, 교육사업
②첫 기독교 순교자
-토마스 목사: 1866년 병인교난 때 순교
-백홍준: 1876년 만주에서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받고 전도 활동 시작. 1894년 한국인으로서 기독교 첫 순교자.
-한석진: 산 순교자. 1893년 평양에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음. 체포되어 사형선고 받음. 마포삼열과 원두우(H.G.Underwood)에 의해 왕의 사면장이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사형현장에 있었고 마음으로는 벌써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③어려운 일들
-돌에 맞은 선교사: 제1회 안수 목사가 된 이기풍은 일찍이 예수 믿기 전에 평양거리에서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졌다.
-목숨을 건 세례: 기독교 첫 수세자 노춘경(알렌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은 1886년 7월 11일 원두우 목사에게 세례를 받을 때 국법에 위배되는 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세례를 받았음.
-여자의 수세: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은 묘안을 내었다. 정부 고관의 아내 전삼덕은 휘장을 드리우고 머리가 들어갈만한 구멍을 내어 세례를 받았다.
-문중에서 쫓겨나는 기독교인: 남자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를 배반하고 문중에서 쫓겨나는 것을 각오하여야 했다. 여자는 지극히 곤란한 일이었다.
④일제 통치 기간
-교회는 주목과 박해의 첫째 대상이었다.
선교사들이 교육사업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고, 교회 출석하는 성도들이 대부분 강한 민족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제국주의와 신사참배 등은 기독교정신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기독교 신자들은 일본을 반대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도 박해의 한 원인이 되었다('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그리스도의 군사들아 일어나라' 등의 찬송과 하나님의 왕국 같은 내용이 일본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함).
-한국 교회 박해 음모 사건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또오 히로부미를 암살한 후 새로 부임한 데라우찌 총독은 무단정치를 감행하였고, 국내 유명 인사들을 대량 체포 구금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명 데라우찌 살해 음모 사건이라 하나, 사실은 그 반대로 기독교인을 중심한 한국 고위층 인사 살해 음모사건이었다. 1911년 가을까지 157명을 체포하였는데, 그 중 123명이 1912년 6월 28일 서울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 중 105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세계적 관심과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고문
발가벗기기, 채찍질하기, 태우기, 쇠뭉치로 때리기, 몸 졸라매기, 오래 가두기 (이상 매켄지 선교사의 증언). 그 밖에도 손톱 밑에 침놓기, 거꾸로 매달기, 콧구멍에 물붓기, 못방석에 걸리기, 전기 고문 등 많은 고문이 있었다.
-삼일독립전쟁의 보복으로 박해가 극심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로 수난을 많이 당했다.
⑤공산당의 침략
공산군의 통치하에서는 종교활동 자체가 금지되었다.
-북한
8.15해방 전까지는 북한의 교세가 남한의 교세보다 훨씬 더 강하였다.
신의주와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인들의 정당까지 만들려고 추진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에도 기독교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활동과 민족갱생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공산당이 이를 억압하였다. 정당 추진 기독교 인사들이 대량 검거당하였으며 살해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일제 때보다 더 큰 탄압이었다. 김일성 괴뢰정부의 첫 선거일을 1946년 11월 3일 주일로 정하였으며, 신학교들을 폐지하였다. 어용의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그 조직이 기독교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직영하였다.
-남한
8.15해방 후 남한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왔다. 그러나 공산당의 지하조직이 일으키는 반란사건으로 고난을 당하였다.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 때 여수에서 손동인, 손동신 형제가 순교함. 그들의 부친 손양원 목사가 그 범인 학생을 양자로 삼았고, 그는 회개하고 신자가 되었다. 그 후 손 목사는 6.25 사변 때 공산당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지금 여수 애양원 교회 옆에 이 3부자의 묘소가 있다. 6.25 사변으로 신앙심은 더욱 강화되었고, 교회마다 새벽기도가 시작되었다.
3. 초기 성도들의 업적
(1) 카톨릭 선교 초기 신자들의 업적
①조상숭배(제사) 거부
윤지충의 영웅적 순교로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다. 중국의 카톨릭 신자들은 조상숭배에 타협하였으나 조선에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순교자의 대부분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순교하였음.
②불굴의 신앙 증거
많은 신자들이 투옥되거나 사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본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후일 프로테스탄트 전도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프로테스탄트 선교 초기 신자들의 업적
①개화운동과 사회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
<여성 운동>...YWCA, 여학교 등을 통한 여성 계몽과 여권 신장
<가정생활의 개혁>
<청년 운동>...YMCA, 한국 기독청년면려회, 청소년 범죄자를 위한 사업, 소년단운동, 아동헌장 제정,
<사회 구호사업>...고아원, 모자원, 양로원, 나환자 수용소, 수족절단자 재활사업, 결핵환자 관리사업, 기독교 세계봉사회,
<한국어 연구와 교육의 발전>...주시경, 성경 출판, 한국 기독교 문맹퇴치회
<대한 기독교 서회>...교도소 도서운동, 기일(J.S. Gale) 선교사의 한영사전
<기독교 방송>...1954년 12월 서울에서 시작.
<기독학생 농촌계몽대>...1956년 11월 서울에 있는 21명의 기독학생으로 조직.
②일제 때 민족주의 정신 함양에 주력
③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주역을 담당
삼일독립전쟁 주도자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④의료사업, 교육사업으로 국민에 봉사함
<1895년 전국에 콜레라>...이때 서울에만도 5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의료 선교사들이 희생적으로 봉사한 결과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생명을 구했다. 이로써 정부와 일반 국민들로부터 큰 감사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광혜원>...한국의 최초 상주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알렌은 의사였다.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 때 민영익의 생명을 구하고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광혜원을 설립하고 의료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세브란스 의과대학>...1900년 에비슨이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들어가 세브란스(Louis Severance)란 사람으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아 와서 병원을 설립하였음.
1904년 9월부터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는 한편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였다. 이것이 세브란스 병원이며, 또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전신이다.
<배재학당>...언더우드(미국 장로교)와 아펜셀러(미국 감리교)는 최초로 안수받은 목사로서 한국에 정착하여 선교하였는데, 아펜셀러는 1886년 6월 8일 6명의 남학생으로 배재학당을 시작하였다. 그 다음 해 고종황제가 직접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리었다.
<이화학당>...1886년 6월 한 명의 정식 학생으로 출발한 이화학당은 스크랜튼 의사의 모친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시작하였다. 그 이듬 해 1월에는 7명으로 늘었으며 이 해에 황후께서 직접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리었다(배꽃이 황실의 상징이었음).
<기타 교육기관>...중등학교로는 경신 중고등학교(1885년 언더우드가 시작한 고아원이 그 모체), 정신 여자 중고등학교, 평양의 광성학교와 정의 여학교, 숭실학교, 숭의 여학교, 대구의 계성학교와 신명 여학교 등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특히 소학교 교육은 특기할만하다. 문맹퇴치에 큰 역할을 하였고 일제 때에도 사설로 소학교를 운영하여 국민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⑤신학문을 도입하고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자로 봉사
선교사들이 총명한 한국 학생들을 미국 등지로 유학을 보내 주었다. 그들은 후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신학문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한국내 여러 분야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대표적 인물: 서재필(독립신문), 이상재(YMCA), 윤치호(1891년 문교부 차관, YMCA), 주시경(한글연구, 독립신문), 조만식(북조선 건국준비위원장), 이승만(초대 대통령), 원한경(원두우의 외아들, 교육가) 등
⑥국가적, 민족적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
이 기도가 오늘날까지 한국을 지탱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