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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돌아오라
욜 2:12-17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16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고
17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욜 2:12-17 /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지금이라도 너희는 마음을 온전히 바쳐 내게로 돌아오너라. 금식하며 울고 슬피 가슴을 치며 돌아오너라!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의 심장을 찢으며 회개하여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주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친절하시고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쉽게 화를 내지 않으시며 성급하게 너희를 처벌하지도 않으시며 지극히 너그럽고 긍휼이 많은 분이다. 14) 혹시 아직도 주께서 마음과 뜻을 돌이키어 너희들을 남겨 두시고 당신의 무서운 저주 대신에 너희에게 복을 주시려고 결심하실지 누가 알 수 있겠느냐? 너희가 전과 같이 곡식과 포도주로 주께 제물을 바칠 수 있도록 그분은 어쩌면 너희들에게 풍성한 복을 주실지도 모른다. 15) 너희는 시온산 위에서 나팔을 불어라. 금식을 선포하고 온 백성을 모아 놓고 장엄한 집회를 열어라. 16) 모든 사람을 데려오너라. 장로들로부터 어린이들까지, 젖먹이들까지 데려오너라. 자기의 어두운 방에 있는 신랑도 불러오고, 자신의 밀실에 앉아 있는 신부도 불러오너라. 17) 제사장들, 곧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백성과 제단 사이에 서서 울며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려라. `오 우리 하나님, 주님의 백성을 보호하소서. 이들은 주께 속한 자들이오니 이방인들이 이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소서. 이방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 신은 정말 허약하고 무능력하다'고 욕하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죄로 인하여 재난을 당한 백성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12-14)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지만 오래 참으십니다(롬 9:22).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제라도 죄의 자리에서부터 돌아설 것을 요청하십니다(호 6:1; 눅 15:2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으로 인하여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눅 15:7, 10, 32). ‘이제라도’라는 것은 늦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에게 내려졌던 징계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으로,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입니다(히 12:5). 그러나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금식하며 애통하는 과정을 거쳐야하며, 옷을 찢는 것처럼 마음을 찢어 철저하게 회개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마음과 뜻을 돌이키심으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황폐했던 토지가 다시 비옥하게 되고(출 32:14; 삼하 24:16)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사(사 42:3) 하나님의 백성으로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회로 모이라(15-17) 하나님께서는 먼저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시온에서 ... 성회를 소집하라”라고 하시며,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백성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정결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레 21장). 이 성회에는 백성들의 장로들로부터 어린 아이와 젖 먹는 자까지 그리고 갓 결혼한 신랑신부까지 동참하게 했는데, 이는 나이가 어리거나 신혼부부라 할지라도 민족적 회개에는 동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기도를 했는데(대하 8:12; 겔 8:16), ‘낭실’은 성전의 동쪽 출입구(현관)이고 ‘단’은 성전의 뜰에 있는 번제 단입니다. 특히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 철저하게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잘못은 정치적 지도자의 잘못보다는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지만, 당신이 잘못을 했을 때 징계의 채찍을 내리시기도 하십니다(히 12:6-11).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면 구원해 주신다는 그 분의 약속을 믿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지금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임하기까지 누구에게나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러나 그 구원의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지금을 놓치면 구원의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설 교 >
내게로 돌아오라!
요엘 2:12-17 / 피종진 목사
갑작스런 메뚜기 재앙이 남유다 땅을 휩쓸어 전국토가 황폐하게 되어 백성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며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저들에게 보내셔서 이 재앙의 궁극적인 원인이 남 유다 백성들의 불신앙과 죄악에 있음을 지적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13절)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게 하셨습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어루만져 치료해주시며, 그들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그들을 도와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 2:12) 요엘 선지자는 남 유다의 국가적, 민족적 위기와 재난의 상황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금식하며 회개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결과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지만, 그 심판 선언을 들은 아합이 금식하면서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선고한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왕상 21:27~29). 또 니느웨에 요나를 통해 심판을 선고하셨지만 니느웨 거민들이 요나의 선포를 듣고 온 나라와 온 백성, 왕으로부터 크고 작은 모든 자들이 금식하고 회개하였을 때 선고한 심판을 내리지 않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욘 3:3~10). 이와 같이 진실한 금식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뒤바꾸는 큰 힘이 있습니다.
금식이란 생존에 꼭 필요한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행위로서, 그냥 굶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범죄한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죄악된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는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동안 범죄로 일관한 삶을 산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자만이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금식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인 구속 사역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마 4:2). 또한 일사각오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에 왕후 에스더는 자기 민족이 멸절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모르드개를 통해 수산에 있는 온 유다인들을 다 모아 자신을 위해 금식할 것을 부탁하고, 자신도 금식하며 기도하여 민족을 구했습니다(에 4:16). 모세도 언약의 말씀 십계명을 받을 때에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고(출 34:28), 에스라 선지자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하와 강가에 모이게 하고 무사 귀환을 위해서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게 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스 8:21~23).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질병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금식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보십시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앙의 감격을 체험할 줄 믿습니다.
둘째, 울고 애통하면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 2:12) 여기서 ‘운다’는 것은 슬픔의 외적 표현이라면, 애통은 내적인 슬픔 곧 가슴으로 슬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유다 백성들이 심판의 재앙을 초래한 자신들의 죄를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면서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은 후에 하나님께 목숨을 구하면서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그의 생명을 15년간 연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왕하 20:3).
시편 126편 5절을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비록 힘들고 고통과 고난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농부가 묵은 땅을 기경하여 씨앗을 뿌리듯 피와 땀과 눈물로 기도하면서 씨앗을 뿌린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쁨의 열매를 얻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6장 21절을 보면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한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우는 자들을 축복하시며, 웃는 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는 자’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도를 인정하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겸손한 자세를 지니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우는 자가 다시 웃게 된다는 약속은 그들 안에 있던 슬픔의 요소들이 제거되고 기쁨으로 바뀌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환난으로 인하여 슬퍼하거나, 자신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십니다(마 5:4).
셋째,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 2:13)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로부터 멀리 떠나 각기 죄악된 본성을 따라 그들의 길을 걸었으며, 우상을 좇아 숭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메뚜기 떼의 재앙과 같은 극심한 시련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요엘은 마음을 찢으라고 선포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극심한 슬픔에 사로잡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 옷을 찢곤 하였습니다. 아합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경고를 들었을 때에 회개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왕상 21:27). 요엘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따라가던 사람들이 우상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의 길로 행하던 발을 완전히 돌이켜 의의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란 죄악된 과거의 삶을 단절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삼상 7:3). 죄를 고백하고 울고불고 해도 하나님께 돌아가 의의 열매를 맺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정해야 하고, 자기의 마음을 찢어야 하고, 이전에 행하던 죄의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죄를 사해주시고 그 땅을 고쳐주십니다(대하 7:14). 긍휼히 여겨주시고 너그럽게 용서해주십니다(사 55:7). 생명을 얻게 해주시고(행 11:18),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행 2: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식하며 울고 애통하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 ①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어주십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②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욜 2:18) ③여호와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한 것이 없는지 돌아보고 금식하고 울고 애통하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
요엘 2:12-17 / 유일무 목사
1. 오늘 우리는 요엘서를 읽었습니다. “요엘”이란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브두엘이 요엘을 낳았을 때 부모 자신의 신앙고백을 아들의 이름 속에다가 담아서 부르기 위하여 “요엘”이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름은 그 시대의 신앙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엘이 그살던 시대, 그리고 요엘의 아버지 브두엘이 살던 시대는 하나님 신앙의 혼돈스럽던 시대였습니다.
갈멜산에서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움을 했던 “엘리야”는 그 이름의 뜻이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긴다할지라도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라고 신앙고백을 이름에다가 담았던 것입니다.
엘리야란 신앙고백적 이름을 보면서 엘리야가 그리고 그의 부모가 살던 시대는 아합왕과 이세벨 시대가 바알 숭배가 판을 치던 시대였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2. 요엘서 1장부터 읽어보면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는 메뚜기 떼의 극성스러운 공격 때문에 모든 곡식과 열매와 나무가 초토화 됐습니다. 요엘1:4 입니다.
“1: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
곡식과 포도 수확을 할 수가 없어서 성전에서 곡식의 가루로 드리는 소제와 포도주로 드리는 전제도 더 이상 드릴 수가 없게 됐습니다. 요엘1:9입니다
“9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
가뭄으로 인해서 들판의 식물이 불타 버렸고 소떼와 양떼도 먹거리가 없어서 죽어 갑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 날인 “여호와의 날“ 이 매우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요엘2:1-2입니다.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
“여호와의 날”이란 심판 날에 강력한 군대가 침략하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역사이래 그런 날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3. 여기 까지 읽으면 이스라엘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마치 깜깜한 밤하늘 같습니다.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만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인 12절부터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라도”라는 말은 언제 쓰는 말인가 하면 기회를 줄 때 쓰는 말입니다. 아무리 두렵고 무서운 심판 날이 가까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유효하고, 남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획되었던 재앙이 거두어 집니다.
그런데 가만이 생각을 해 봅니다. 심판하시는 날인 “여호와의 날”을 쥐고 흔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구원 받기 위해서는 그 심판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어른들이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한 뱃속에서 나와도 형제가 어찌 그리 다르냐”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아이는 잘못을 해서 어머니에게 매를 맞으면 절대 어머니 근처에 가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 주변을 빙빙 돌면서 도망 다닙니다. 겁에 질려 잘못한 것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머니에게 가까이 와서 비는 것 같다가도 어머니가 가까이 오면 매를 맞지 않으려고 도망을 가고, 또 다시 가까이 오고 도망을 가고...반복을 하면서 어머니를 화나가게 만듭니다. 결국 어머니의 손에 붙잡혀가지고 잔뜩 화난 어머니로부터 매 맞을 것을 다 맞고, 분풀이 매를 보너스로 맞고 울고불고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미련한 아이죠.
그런가 하면 어떤 아이는 어머니가 매를 들고 있으면 무서울 텐데도 그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안깁니다. 어머니를 꼭 붙잡고 울면서 말합니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
결국 어머니는 때리는 시늉만 하면서 두툼한 손으로 그 자식의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다신 그러지마 알겠지”
예언서에 기록된 하나님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그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계획하셨던 심판을 거두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고 심지어 우리에게 복을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엘서 2:13-14를 읽겠습니다.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찢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 유대인들이 옷을 찢느냐하면 너무 슬플 때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기가 지은 죄를 너무 안타까울 때 회개하는 맘으로 옷을 찢습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다가 보니까 속사람은 죄에 대하여서 안타까워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옷을 찢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회개하지 말고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를 거듭 거듭 촉구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5. 성경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로 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란 평가를 들었습니다. 그런 다윗이었지만 그의 일생에 크게 두 번 잘못을 했습니다. 한번은 그의 말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인구조사를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 부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강간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강간한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서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야 장군을 불러 들였습니다. 우리야 장군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아내 밧세바와 잠을 자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매우 공직 수행이 분명하고 분별력이 뚜렷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부하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부인을 품에 안을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훌륭한 군인입니다.
결국 다윗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우리야 장군을 일부러 전쟁터 중에서도 가장 싸움이 맹렬한 곳으로 보내서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궁으로 불러들여서 자기 아내를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연필을 꺼내 가지고 종이에 시(詩)를 적었습니다. 그 시가 지금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51편입니다. 시 앞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그렇습니다. 좀 길지만 다윗의 마음을 살피면서 천천히 읽어 보겠습니다.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
다윗의 이 시에서 자주 반복되는 문장을 보세요. 1절과 2절에서도 연거푸 3번씩이나 쓰였는데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어주소서”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그 이후도 계속 같은 구절이 반복됩니다.
그러면서 11절에 보면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라고 간청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지었으면서도 하나님께 아주 가까이 찰싹 달라붙어서 용서를 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고 다윗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어떤 분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도 떠나고, 교회도 떠나고, 신앙생활도 포기하는 ..그런 경우를 봅니다. 마귀의 참소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렇습니다.
“그래. 나 같이 못난 것 ...모범도 안 되면서 교회를 다닌다고...내 주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4절에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죄에 대하여 마귀와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께만 상대하겠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히 꿰뚫어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6. 한번은 독서실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는 30대 가장(家長)이 있었습니다. 고3 학생들이 대학입시를 앞두고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독서실로 가서 공부하다가 밤12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독서실 운전기사는 학교 교문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다가 학생들을 태워가지고 독서실로 데려오고 또, 밤 12시가 되면 공부를 마친 학생들을 봉고차로 집에 데려다가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운전기사는 사람은 좋은데 한 가지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습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음주운전습관이죠.
한번은 술을 마시고 밤 늦게 학생들을 집에 데려다 주다가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전봇대를 받은 것입니다. 차 안에 타고 있던 학생들은 죽지는 않았지만 여기 저기 뒹굴고 다쳤습니다. 집단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고3. 내일 모레면 대학교 시험을 볼 학생들인데 이게 웬일입니까? 학생들의 입원 소식을 듣고 어머니들이 놀라서 병원에 왔습니다. 운전기사는 도망을 갔습니다. 어머니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을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 운전기사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운전기사의 아내는 갓난아기를 하나는 업고 다른 아기 하나는 어린 것을 손에 붙잡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들에게 달려가서 병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빕니다. 한 어머니 한어머니를 차례로 붙잡고 웁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우리 남편 술먹고 운전하는 습관 알고 있었는데 못 고쳐줘서 그래요.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
등에 엎힌 아기가 큰소리로 울기 시작합니다. 손에 붙잡혀 온 아기가 큰소리로 웁니다. 엄마 그리고 아이 둘, 이렇게 셋이서 병원이 떠날갈 듯 웁니다. 여러분 애키운 어머니들께서 어떻게 마음이 모질겠습니까? 딸 같은 아기 엄마가 우니까 어머니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뭐 용서가 됐죠.
“잘못했어요” 용서를 구하면 사람도 마음이 녹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살려주십니다. 고린도후서6:2입니다.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사순절입니다. 40일 새벽기도시간을 통해서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이 주님께 돌아오는 절기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라도 성회로 모이면
요엘 2:12-20 / 김철한 목사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다. 먹을 것이 끊어지고 제국들에 의하여 짓밟히는 이 여호와의 날은 죄를 심판하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은 요엘 1장과 2장을 읽어보면 전무후무한 위기의 날이고 두렵고 떨리는 날이다. 빼앗기고 짓밟히고 무너지고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고 죽게 되는 날이다. 그러면 그 여호와의 날에 다가오는 급박한 병거 소리, 군대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앉은 채로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것인가?
위기의 메시지를 전하는 요엘은 이렇게 외친다.
1. 아직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욜2:12)
욜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다.(욜2:1) 지체할 여유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 욜2:12은 이제라도 울며 돌아오라는 선언이다. “이제라도!” 너무 늦어서 틀렸다고 하는 그 순간이지만 이제라도 돌아오기를 하나님이 명하신다. 이는 희망이 없다. 더 이상 위기를 피할 길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희망이 있다. 돌아서면 지금 이 순간 이제라도 돌아서면 된다. 아직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요엘의 활동기를 기원전 9세기, 그리고 기원전 4세기 사이로 보는데 제국의 침략과 제국이 몰락하는 대변혁기다. 어느 시대라고 할지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희망은 있다.
2. 진정으로 회개하라. (욜2:13)
요엘은 아직도 남아있는 희망을 말하며 회개를 외친다. 회개가 살 길이다. 회개가 상황을 바꾼다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가 구호가 되어서는 안된다. 욜2:12에 “금식하며”란 말은 진정성을 뜻한다.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역시 진정성을 뜻한다. 구호에 그치는 회개가 아니고 진정한 회개가 살 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외형적 전시 형태의 회개만으로는 안된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마음을 찢으면 하나님은 뜻을 돌이킨다.
욜2:13中을 보라.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참 회개가 있을 때 소망이 있다. 내가 하나님께로 향하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심판의 징조를 거두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기원전 8세기경의 예언자들이 무엇을 외쳤는가? 암5:4~6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유다의 죄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해 임하는 심판의 불 앞에서 돌아오면 산다는 메시지가 똑같은 것이다. 동시대 선지자인 호세아도 호6:1~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정의의 예언자, 사랑의 예언자, 그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살아남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대부흥 역사도 마음을 찢는 회개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의 침탈 아래 신음하던 조선 사람의 운명, 교회가 무슨 힘이 있었는가? 민족을 섬기고 사랑하는 힘이 없을 때 죄를 버리는 회개가 교회를 일으키고 성도들을 일으켜 오늘의 부흥과 한국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회개를 잊으면, 아니 죄 속에 있으면서도 회개조차도 비웃으면 희망은 사라진다. ‘이 만큼 사는 나라가 되었는데...’하고 안일에 빠지면 안된다. 자동차, 빌딩, 집, 가전 제품은 생겼지만 정말 교회나, 사회나 정의가 있는가? 사랑이 있는가? 사람이 사람을 대접하는 따뜻한 정이 있는가? 학대, 폭력, 살인, 도둑, 사기, 탐욕, 교만, 차별, 미혹, 거짓 등 정말 하나님이 싫어하는 단어들로 가득 찬 우리의 시대인데 그대로 든든히 지낼 수 있겠는가? 무너지기 전 마음을 찢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교회가 먼저 회개에 앞장서야 한다.
3. 성회로 모이는 일을 하라. (욜2:15~17)
욜2:15을 보라.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고 하신다. 나팔을 불라. 대대적으로 성회로 모이는 날을 알리라는 것이다. 누가 모여야 하는가? 욜2:16 백성들이다. 장로들이다. 어린이들이다. 젖 먹는 자들이다. 신랑과 신부들이다. 제사장들이다. 각계 각층 다 모여야 하고 어떤 예외나 핑계도 대지 말고 모이도록 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멈추게 하고 위기가 변해서 복이 되게 하는 것은 성회 밖에 없다.
오늘 욜2:16에 모여야 한다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온다. ①모아 ②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③모으며 ④모으려 ⑤나오게 하며 ⑥나오게 하고 등 6번이나 반복한다. 못 알아들어서 일까? 강력한 강조이다. 반드시 되야하는 강조이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성회가 되게 하려면 모아야 한다. 누구든지 모두 다 나오게 해야 한다.
요엘 선지자의 성회의 선포, 그것이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에서 선포하는 부흥성회다. 이미 나팔은 불었다. 교회창립 100주년기념 부흥콘서트를 한다고 나팔을 불었다. 2월 22~25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성회로 광고가 되었다. 오늘 우리의 성회의 중심은 모여야 할 나다. 그러므로 모두 모두를 나오게 하기 위해 서로 권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교회가 나팔은 불었지만 서로 서로 나팔을 불어야 한다. 금번 성회 뿐만아니라 앞으로 교회의 성회는 특별 모임의 시간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출석표를 내라. 성회에 모이게 하기 위해 문자를 보내고 전화하라. 유치한 방법이라도 다 하려고 한다. 억지로라도 모이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마음이 방심하고 ‘안 가도 되지’하는 태만함을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 ‘나는 성회에 간다.’ 마음을 바꾸라. 태도를 바꾸라. 각오를 새롭게 하라. 교회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부흥성회에 무조건 모여야 한다. 주일예배처럼 예배당 안이 전 성도들로 가득 모이도록 자리를 채워야 한다. 어떤 중요한 일도 이 기간은 피하자. 그래서 요엘의 외침 그대로 나팔을 불고 전하여 어린이들도 나와야 한다. 청소년들도 나와야 한다. 장년들도 나와야 한다. 모든 이들이 거룩한 성회로 모이면 주시는 약속이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욜2:18)
욜2: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죄를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려는 마음이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변화되신다. 하나님은 본래 자비롭고 인애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풍성한 회복의 도래가 주어진다. (욜2:19)
욜2:19 “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흉년과 기근의 삶이 종식되고 먹거리가 풍성케 된다. 물질의 회복이다. 넘치는 회복이 시작된다. 성회의 능력을 비웃지 말자. 모이는 자에 대한 약속이다.
셋째, 전쟁의 종료다. (욜2:20)
욜2:20 “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강대국의 군대를 누가 밀려오게 하고 누가 밀어내는가? 우리의 군대가 막아서지만 사실 하나님이 쫓아내고 물러가게 하신다. 하나님이 막으시고 하나님이 싸워주신다. 전쟁의 종료란 군대의 힘, 장군들의 전략, 군 장비의 개선으로 되는 것 같지만 썩은 군대, 부패한 군대는 무능할 뿐이다. 하나님이 지켜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바른 생각, 바른 정신을 지니도록 애국심과 국가관이 분명하도록 깨워주시면 그 사람은 일당백이 된다. 전쟁의 종료도 성회로 모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울며 매어달릴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넷째, 넘치는 은혜의 삶이 시작된다. (욜2:22~24)
욜2:23~24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성회로 모이면 은혜의 단비가 내린다. 마음의 가뭄을 해소하는 단비, 열매를 가득히 맺게 하는 늦은 비, 은혜의 삶은 즐거움이 넘친다. 말씀이 넘치고 성령의 기쁨이 넘친다. 즐거움을 찾는 심평이 되려면 성회를 사모하라.
다섯째, 신앙의 부흥이 이루어진다. (욜2:27)
욜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가정 생활, 교회 생활에 부흥, 그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전부라는 확신에서 온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자랑이다. 이런 부흥의 역사가 성회로 모이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오늘 저녁, 웨슬리언 교단의 목사님들을 모시고 시작되는 성회는 행사가 아니다. 우리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바꾸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요엘의 다섯 가지 약속을 받는 거룩한 모임이다. 모임을 향해 달려나오라. 바로 성회의 모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바꾸고 가정의 분위기를 바꾸고 내일의 삶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미국 제22대 대통령인 클리블랜드는 젊은 시절에 놀러다니던 친구와 주일저녁에 헤어져 교회로 들어오므로 그의 인생이 대통령이 되고 그와 헤어진 친구는 취임식 날 아침 감옥에 들어간 사형수로 기사가 실린 사람이 되었다. 이제라도 교회의 모임에 나온다면, 성회로 모이면 당신의 내일이 바뀌는 새 삶이 시작될 수 있다.
회개하면 회복됩니다
요엘 2:12-14 / 송기성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은 종교개혁 50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십자가 신학에 중점을 둔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내세운 종교개혁 95개 논조의 제1조는 참된 회개를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를 것을 역설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4:17) 하신 말씀으로 첫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복음의 선포를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는 말씀으로 마치셨습니다. 회개해야 천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욜2:12) 고 하셨습니다. 이는 회개에 대한 명령이며 촉구입니다. 회개란 죄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는 ‘이제라도’ (even now)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진심과 전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면 회복됩니다. 회복의 은총은 바로 회개에 있습니다.
오늘 3시부터 광화문 사거리에선 신사참배 80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로 모입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와 연합과 미래에 대한 기도의 모임입니다. 회개해야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관계가 회복됩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할 때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2:13)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회개하면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그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옷을 찢는 행위는 큰 슬픔과 겸손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창37:29-35;대하34:27). 그런데 그것이 형식적인 행위로 그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행사로서의 옷을 찢는 회개가 아닌 마음을 찢는 회개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옷만 찢는 형식적인 회개는 율법적인 회개에 불과합니다. 그런 회개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관계가 회복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찢는 회개는 복음적인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그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실 줄 믿습니다 (욜2:18).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쌍둥이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형 에서의 발뒤축을 잡았다 해서 야곱으로 불리워진 것입니다. 지나친 승부욕과 형에게 밀려 둘째로 태어난 열등감 때문인지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의 야심과 욕심을 충족시키고자 했습니다. 형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로챈 그는 형의 분노와 원한을 사고 말았습니다. 죽음을 면하기 위해 도망자가 된 그는 수십 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형의 분노와 복수를 면하기 위해 나귀와 낙타, 소와 양 등 550마리나 되는 동물을 예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400명을 거느리고 보복하기 위해 다가오는 형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진 못했습니다. 결국 야곱이 취한 행동은 자기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창33:3).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혀 절하는 것은 전쟁의 패자가 승자에게 완전히 항복하고 굴복하는 행위이며, 대단한 존경과 경외심을 표현하는 행위로 왕에게나 하던 인사였습니다. 야곱의 회개와 겸손, 굴복과 복종이 에서의 분노와 증오를 녹였습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울었습니다 (창33:4)
도망자 야곱, 그는 그의 형에게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리고 많은 예물을 보냈지만 그는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 그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혀 완전히 굴복하였을 때 하나님은 원수지간이었던 그 형제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의 관계 회복, 그것은 바로 진정한 회개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 다윗, 간음과 살인을 서슴치 않았던 그는 자기가 말한 대로 ‘마땅히 죽을 자’ (삼하 12:5) 였습니다. 그는 자식과 건강과 명예와 친구 등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죄과를 알고 그의 죄가 항상 그 앞에 있다고 (시51:3) 회개하며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and grant me a willing spirit, to sustain me. and make me willing to obey you. 시51:10-12) 라며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며 주님을 찬송하고 전파하며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시51:15,16,17,19).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과 같고, 다윗의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몸을 굽혀 일곱 번씩이나 절하는 사람을 결코 짓밟히지 않게 하십니다. 자기 죄과를 알고 회개하는 사람을 결코 주 앞에서 쫓아내지 않으시며 성령을 거두지 않으시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는 진정한 회개로 관계를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쁨으로 찬양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회개하면 축복이 회복됩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할 때에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욜2:14)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회개하면 축복이 회복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에게 그 마음과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복을 내려주심으로 기쁨으로 제사와 제물을 드릴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생활의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삶의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가뭄과 메뚜기 재앙과 북방에서 내려온 이방 군대로 인해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습니다 (욜1:11)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소제와 전제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슬퍼하고 (욜1:9), 사람들의 즐거움도 다 말라버렸습니다 (욜1:12). 식물이 끊어지고 제사도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도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비참한 곤경과 불행의 원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하고 세상과 우상을 가까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회개를 명령하셨으며 축복 회복을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재앙을 그치고 복을 주심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흡족하고 만족한 삶을 맞이하게 될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탕진하였습니다. 돼지치기로 전락한 그는 굶주려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께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15:21)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어떤 사본) 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코 그를 품꾼의 하나로 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은 (눅15:24)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잔치까지 열어 즐거워하였습니다.
돌아온 탕자, 그는 그가 말한 대로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죄인으로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할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 그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을 뿐 아니라 축복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환영과 포옹, 잔치와 축제의 축복 회복, 그것은 바로 진정한 회개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우스 땅의 욥, 그는 재산과 자식과 건강과 친구 등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그의 생일을 저주하며 (욥3장),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욥16:7). 그러나 그는 그의 신앙만은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스스로 한 말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습니다 (욥42:6). 고난의 불 속에서 단련된 욥의 신앙은 회개하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복을 더 주셨습니다 (욥 42:10)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탕자의 아버지와 같고, 욥의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곤경을 돌이키게 해주시고, 분에 넘치도록 복을 더해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는 진정한 회개로 복을 더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도 회복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3:19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라며 회개를 촉구하고 회복을 촉망하였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되는 날’ 이란 ‘유쾌한 날’ (time of refreshing), 또는 ‘영적 능력의 날’ (times of spiritual strength) 을 뜻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면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되는 날, 유쾌한 날, 영적 능력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축복도 회복시켜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옷을 찢는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진정한 회개를 함으로써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며, 풍성함으로 축복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위대한 승리의 길
욜 2:12-14 / 피종진 목사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실패할 수도 있고,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승리가 있다는 것은 실패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 몸부림치는데서 승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에 보면 남 유다가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일로 인해서 저들에게 엄청난 시련과 환난을 통한 하나님의 채찍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그런 형편과 고난의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그 때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엘 1:4에 보면 메뚜기와 황충이들이 저들이 지어놓은 곡식을 다 갉아먹었습니다. 사람이 이런 식량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사람도 고기로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식물이 끊어지는 기근의 재앙이 저들에게 임했고,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욜 1:16). 죄악은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갑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주신 축복을 앗아갑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제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리고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진다고 말했습니다(욜 1:17). 지금 당장에 추수할 곡식이 없어도 뿌려놓은 씨앗이 있으면 앞으로 그 씨를 거둘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앞에 정말 씨앗조차도 보장을 받지 못하고 땅에서 썩어졌을 때에 그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고난이 있어도 미래에 대한 소망을 하나님께로부터 보장받으면 오늘의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또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꼴이 없음으로 소와 양떼조차도 다 죽어갔습니다(욜 1:18).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제물조차도 상실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을지라도 우리 기독교의 복음은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가난을 부요함으로, 그리고 고통과 시련에서 찬송과 행복으로, 영광과 감사로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처참한 가운데서 위대한 승리를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12절)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 곧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길은 죽음의 길이고, 좌절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2002부산아시안게임에 아시아의 각 나라 많은 선수들과 응원단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북한의 선수들도 왔습니다. 저는 2002부산아시안게임을 위해서 특별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과 함께 기도제목을 가지고 통성 기도했습니다. '주여, 금번 2002부산아시안게임에 참석한 자들이 십자가를 보는 순간 예수님을 발견하게 해주시고 그 가슴 속에 성령이 역사하여 주셔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을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금번 2002부산아시안게임에 참석한 선수들과 임원들과 모든 관중들이 다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은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요, 영생을 얻는 길이요, 치료를 받는 길이요,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만이 우리 인생에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생이 인생에게 '내가 너를 쉬게 해주겠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진 짐도 자기가 감당 못해서 쓰러지고 엎어지고 넘어지고 좌절과 절망 속에 신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짐을 다 맡아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로 인해 모든 슬픔의 근원이 되는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해주시고, 탕감해주시고, 속죄해주시고, 새롭게 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인류를 향하여 항상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절망과 좌절 속에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서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말하기를 '이 시대는 캄캄한 어두움의 시대요, 텅 비어 있는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점점 어두워져 어느 것이 길이요 진리라는 사실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 텅 비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상실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성령도 소멸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바늘 끝 만한 소망도 상실해버리고 절망과 좌절 속에 방황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런 분이 계신다면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버림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세요.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세요. 질병이 있습니까? 만병의 의사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되 믿음으로 만나고, 기도하되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12절) 이것은 철저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실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흉악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면 긍휼과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요, 치료의 종교요, 축복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절대 남을 저주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됩니다.
어떤 분은 가장 어려운 순교가 주기도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이러한 기도가 나옵니다. 이러한 기도를 양심에 거리낌없이 드릴 수 있다면 축복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용서해주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도 이러한 기도를 드린다면 가증된 기도입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이제라도'라고 말씀하신 것은 남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인해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지만 이제라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시겠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하고 회개하며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통회하는 자를 치료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보호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13절)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온 마음과 중심을 다 드려서 섬겨야 됩니다.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몸은 교회에 와 있는데 마음은 집이나 직장 혹은 사업장에 가 있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때 온 마음을 다 드려야 됩니다. 예배시간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드릴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산 제사가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요 4:23).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찾아오셔서 치료할 자는 치료해주시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는 긍휼을 베풀어주시며, 마음이 상한 자에게는 위로와 기쁨을 주시고, 환난이 있는 자는 막아주시며, 올무에 빠진 자는 건져주시고, 힘이 없는 자에게는 힘을 주시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지혜를 주시며 좋은 일을 나타내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하는 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아모스 5:14에 보면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환난과 고통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악을 회개하고 선을 구하며 중심을 다해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허락하시고 축복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돌아와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중심을 다 드려 제단을 쌓을 때에 하나님께서 「①긍휼히 여겨주시고(욜 2:18), ②다시는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욜 2:19), ③기름진 곡식으로 채워주시고(욜 2:19), ④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며"(욜 2:23), ⑤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시고(욜 2:26), ⑥여호와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욜 2:28)」고 위대한 승리의 길을 약속하셨습니다. 환난과 고통 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이와 같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위대한 승리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순절의 메시지
요 2:12-17 / 지태일 목사
작년에 선교원 아이들이 본 인형극중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책은 쉘 실버스타인(Shell Silverstein)이 지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Giving Tree, 1964)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특별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옛날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매일같이 나무에게로 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는 숲 속의 왕자처럼 흐뭇해 했습니다. 때로는 그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고 열매도 따먹곤 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나름대로 숨바꼭질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소년은 그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는 나무대로 소년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무척이나 행복해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렀습니다. 세월은 흘러 소년은 점점 나이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모처럼 나무를 찾아갔을 때 나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놀아... 그네도 타고.. 열매도 따먹고.. 그늘에서 놀며 그렇게 즐겁게 지내..."
그 때 소년은 말하기를 "나는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많이 커 버렸어. 이젠 어렸을 때완 좀 다르게 물건을 사면서 놀고 싶어.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나무야 나에게 돈 좀 줄 수 없겠니?"
"미안하지만, 내겐 돈이 없는걸... 하지만 내겐 나뭇잎과 사과는 있어.... 얘야, 내 사과를 따다가 도시에 갖다 팔지 그래? 그러면 돈이 생길 게고, 그러면 행복해지지 않겠니?...."
이 말을 들은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사과를 한 움큼 따 가지고는 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모처럼 놀러 왔다가 같이 놀아주지 않고는 사과만 따 가지고 가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과를 따 가지고 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한동안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나무에게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 나무는 기쁨이 넘쳐 몸을 흔들면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즐겁게 놀아"
그 때 청년이 된 소년은 말합니다 "난 이제, 나무에 올라 그네 타고 놀 만큼 한가하질 않아. 앞으론 결혼도 해야하고, 아기도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난 집을 먼저 준비해야 되. 나무야, 나에게 집을 좀 줄 수 없겠니?" "난 집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걸, 아, 그렇다! 넌 내 가지들을 잘라서 집을 지으면 되겠구나!"
그래서 소년은 그 나무의 가지들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자른 가지들을 집을 지으려고 가지고 갔습니다. 나무는 가지가 다 잘렸지만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다시 나무에게 돌아왔을 때 나무는 거의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기뻐했습니다. "얘야, 오랜만이다! 어서 와! 나랑 같이 놀자!" 그 때 소년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놀기에는 너무 지쳤어! 이제 나에겐 배가 필요한데 나에게 배를 좀 줄 수 없겠니?" "그래? 그럼 내 줄기를 잘라서 배를 만들어 보렴. 그러면 너는 그 배를 타고 멀리 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소년은 그 나무의 마지막 남은 몸통을 싹둑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나무는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말합니다. 그 때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이빨이 나빠서 이젠 사과도 먹을 수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 나무는 말합니다. "내게는 이제 가지도 없으니... 네가 그네를 탈 수도 없고... 어쩌지?"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말합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기에는 난 이제.. 너무 늙었어..." 그 때 나무가 또 말합니다. "내게는 줄기마저 없으니... 네가 기어오를 수도 없고..." 할아버지가 된 소년이 또 말합니다.
"나는 이제 기운도 없어서... 줄기에 기어오를 수도 없어..."
그 때 나무가 한숨쉬며 소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안해! 뭘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고 남은 것이란 늙어 버린 나무 밑둥 뿐이라서 미안해..."
그 때 할아버지가 된 손년은 말합니다. "그래? 괜챦아. 난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 그저 조용히 앉아서 쉴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몹시 피곤하거든...."
나무가 말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자, 앉아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지 이리로 와서 앉아 쉬어...."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시키는 대로 이제 마지막 남은 나무 밑둥에 걸터 앉았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이상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Giving Tree, 1964)란 책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잘 이해가 되십니까?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소년을 위하여 자신의 잎파리도 주고, 열매도 주고, 가지도 주고, 줄기도 주고, 이제 마지막 남은 밑둥까지 다 주면서도 행복해 하며 기뻐하는 나무!!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이 자기를 아낌없이 주면서도, 마지막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놓으시면서, 마지막 피한 방울까지 다 흘리시면도 행복해 하고 기뻐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구원 위하여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으신 우리 주님이심니다. 그렇게 몸이 찢겨지고 피흘리면서 마지막 생명까지 내놓으시며 자진해 고난속에 들어가는 때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흔히들 생각하기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한 크리스마스가 제일 큰 절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날은 12월 25일로 많은 사람들이 쉬는 공휴일이고, 달력을 보면 빨간색으로 쉬는 날 이렇게 정해져있기 때문에 이 날이 가장 큰 명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큰 명절은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신 크리스마스가 아님니다. 바로 우리 죄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날을 기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한 부활절이 가장 큰 명절입니다.
바로 우리 기독교를 다른 말로 부활의 종교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엄청난 사건은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고 그 부활절이 가장 귀하고 큰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부활절에 앞서 사순절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테살코스테”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1순이 10일인데, 4순이므로 40일간을 뜻합니다. 사순절은 “40일 간의 기념일”입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은 부활 주일을 기점으로 역 계산하여 그 가운데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자고 시작된 절기입니다.
2005년은 춘분이 3.20일이니까 그 다음주일이 부활절이고, 이 시간을 따라가 보면 지난 달 일 2.13일 주일부터 이미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순절 5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로 인해 고통당하신 사건을 보며 우리가 다시금 우리의 지금 모습을 뒤돌아보며 40일간 절제하며 경건된 삶을 사는 그런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요엘서의 말씀은 사순절의 메시지를 찾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이 무엇입니까?
남 유다가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일로 인해서 저들에게 엄청난 시련과 환난을 통한 하나님의 채찍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그런 형편과 고난의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그 때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엘 1:4에 보면 메뚜기와 황충이들이 저들이 지어놓은 곡식을 다 갉아먹었습니다. 사람이 이런 식량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사람도 고기로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흘을 굶겨 놓으면 도적질 안할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배고픈 것은 힘든 일입니다.
또한 1:16절을 보면 식물이 끊어지는 기근의 재앙이 저들에게 임했고,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겼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1:17절을 보면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에 추수할 곡식이 없어도 뿌려놓은 씨앗이 있으면 앞으로 그 씨를 추수할 그 날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앞에 정말 씨앗조차도 보장을 받지 못하고 땅에서 썩어졌을 때에 그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고난이 있어도 미래에 대한 소망을 하나님께로부터 보장받으면 오늘의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는데, 도무지 소망도, 희망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또 1:18절을 보면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꼴이 없음으로 소와 양떼조차도 다 죽어갔습니다(욜 1:18).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제물조차도 상실된 상태입니다.
우상과 죄악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을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죽음으로, 고통으로, 혼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가난을 부요함으로, 그리고 고통과 시련에서 찬송과 행복으로, 영광과 감사로 나가려면 하나님은 말씀하심니다.
2. 그러면 사순절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소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모임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특별한 기회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순절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특별한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특별한 기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가 오늘 본문 요엘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12절)
12절을 보면 먼저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것이 곧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길은 죽음의 길이고, 좌절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만나며 그 심령속에 성령이 역사하여 주실 때 예수님을 믿는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심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인생만이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영육간에 치료를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만이 우리 인생에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생이 인생에게 '내가 너를 쉬게 해주겠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진 짐도 자기가 감당 못해서 쓰러지고 엎어지고 넘어지고 좌절과 절망 속에 신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짐을 다 맡아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로 인해 모든 슬픔의 근원이 되는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해주시고, 탕감해주시고, 속죄해 주시고, 새롭게 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양, 속죄하는 손 치유하시고 속죄하는 발 치유하셨네 새생명 얻은 이 몸 다바쳐 주님께 영광 돌리리, 기도할 때에 음성 주시고 찬송할 때에 기쁨주시네 내 작은 입이 내 작은 몸이 주님의 붙들린자라)
오늘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람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까? 하나님 만나시기 바람니다.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하나님 만나시기 바람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계십니까? 만병의 의사 되시는 하나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되 믿음으로 만나고, 기도하되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응답해 주심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진정한 사나이가 되려면 세 곳을 다녀와야 한다고 말했답니다. 첫째는 군대이고, 둘째는 병원이고, 그리고 셋째는 감옥이랍니다.
이 세 곳, 군대, 병원, 감옥의 공통점은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군대에 가서 고생을 해보면 자신이 누구의 도움없이 살 수 없는 힘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해 보면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원치 않지만 죄를 지어 감옥에 가면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진정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깨닫는 자야말로 사나이다운 사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를 잊은 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그래서 죄 짓고, 그래서 하나님 의지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약한 지, 무지한지, 대단치도 못하고도 대단한줄 알고 남을 업신 여기고 하나님을 겨외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다시금 새롭게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12,13절에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우리를 우리 하나님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금식과 애통도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우리 의무요, 유익이라는 것을 철저히 확신하시기 바람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일을 충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확고부동한 결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목적으로 삼으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 규칙으로 삼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 축복으로 여길 때라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이 일을 명령하고 촉구하며 속히 이 일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사순절 멧세지는 참회입니다.(12,17절)
12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라고 말씀했습니다. 17절에는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하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심이 무엇입니까?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12절)
여기서 '이제라도'라고 말씀하신 것은 남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인해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시겠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하고, 회개하며,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통회하는 자를 치료해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보호해주심니다.
울며 애통하며 철저한 회개, 진실히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흉악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면 긍휼과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요, 치료의 종교요, 축복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절대 남을 저주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됩니다.
어떤 분은 가장 어려운 순교가 주기도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이러한 기도가 나옵니다. 이러한 기도를 양심에 거리낌없이 드릴 수 있다면 축복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용서해주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도 이러한 기도를 드린다면 가증된 기도입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지난 해 서울 중앙지법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두 정치인의 공판이 열렸습니다. 한 사람은 한화에서 10억원을 받은 혐의로 수감 중인 이재정 전의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기업인들로부터 4억원을 받은 혐의로 수감 중인 안희정씨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법정 태도는 정 반대여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재정 전의원은 성공회 신부로, 신학 교수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제가 됐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재판 석상에서 진솔한 참회를 고백해서 재판정을 통곡의 바다로 만들었답니다.
이에 비해 안희정씨는 큰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것이고 이것은 일종의 향토장학금으로 받은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을 했답니다.
이 재정 전의원은 구치소에 들어간 뒤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됐을 것입니다. 눈물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눈물의 참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희정씨는 구치소에 들어갔어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를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눈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회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 여러분에게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참회로 우리가 정결하고 거룩하게 다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13절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온 마음과 중심을 다 드려서 섬겨야 됩니다.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회하는 심령,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기쁨 주시고 환란도 막아 주시고 힘 없는에게 힘 주시고,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가게 하시고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거룩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16절)
16절을 보면 “백성을 모아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먹이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장로들, 어린 아이들, 젖먹이들, 신랑 신부들까지도 다 나와 거룩을 회복하게 하라 말씀하심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통적으로 명하는 말씀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라는 말의 뜻은 구별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하고 패역한 이 세상과 철저하게 구별되셨듯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1) 하나는 거룩에 대한 열망입니다.
연어라는 고기는 참으로 신비로운 동물입니다. 어떻게 자기가 태어난 그 자리, 강가를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요? 어떤 놈들은 2년 만에 또 어떤 놈들은 심지어 5년 만에 돌아온답니다. 저 태평양 한 가운데를 휘 젖고 다니다가 알을 날 때면 저 강원도 양양에 있는 산골짜기 개천을 찾아옵니다. 바위가 가로막고, 수중보가 가로막고, 심지어 폭포가 가로막아도 죽기 살기로 그 자리를 찾아옵니다. 연어는 어떻게 태어난 강의 냄새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일까요?
허슬이라는 학자는 "연어는 태어나서부터 바다로 나갈 때까지의 기간에 자신이 태어난 강의 냄새를 기억하고, 회유를 한 후, 그 냄새에 의존하여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온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연어에게 발신기를 붙여 연안에서의 이동을 관찰해 본 결과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물이 흘러 나오고 있는지를 탐색하면서 이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그 강의 물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로 나가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연어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거룩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연어가 그 열망을 잃어버리면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열망을 잃어버리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처럼, 주님과 같이 끝까지, 괴로우나 즐거우나 성공이나 실패나 잘될 때나 안될 때나 항상 주님과 같이 살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 우리 삶 속에서 주님의 향기를 날리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 이 열망이 회복되시기 바람니다.
2) 다른 하나는 거룩한 삶을 위한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삶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yes” 예, 아멘, 이 세상에서는 “No”, 아니오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반대가 되면 큰 일입니다.
이 세상이 유혹합니다. 부정부패를 저지르라고 유혹합니다. 이 때 우리가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음란한 자리로 나아가자고 유혹합니다. 이 때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을 말하라고 유혹합니다. 이 때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습니다. 여러 가지 손해를 봅니다. 때론 핍박도 받습니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2005년 5번째 사순절(四旬節, Lent)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부활절(Easter)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신앙 성장을 꾀하는 영적 훈련의 시기가 되시길 바람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말씀듣고 은혜받으시길 바람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40일간의 사순절에 정말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과 평강 그리고 참된 만족을 얻어 하나님 품에 안기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사순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심령이 깨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심령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람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회복하시기를 바람니다. 그래서 주시는 은혜 다받아 누리며 사용하며 승리하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만왕의 내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사순절의 의미
욜 2:12-17 / 박봉수 목사
지난 주간 브라질 삼바축제가 뜨거운 열기 속에 막을 내렸습니다. 이 삼바축제의 공식명칭은 “리오데자네이로 카니발”입니다. 카니발 중의 카니발이라 일컬어지는 이 리오 카니발은 열정적인 삼바 춤과 화려한 가장행렬 그리고 과다노출과 광란에 가까운 무질서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려고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이 카니발이란 축제는 사순절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사육제(謝肉祭)라 번역하고 있는 카니발은 라틴어 “카르네 발레”(carne vale)에서 왔습니다. “카르네”는 고기라는 말이고, “발레”라는 말은 그만 또는 안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직역해 보면 “고기여 안녕, 고기는 그만”이란 뜻입니다. 사순절이 시작이 되면 40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이 시작되기 때문에 미리 고기를 많이 먹어두자는 것에서 시작된 축제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카니발들은 사순절 시작 3-7일 전에 벌어지는데 이때 본격적인 절제와 금육이 시작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준비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미리 먹어두고 미리 할 일들을 해 두고 한 바탕 축제를 벌이면서 절제와 금육을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카니발은 사순절을 준비하기 위해 시작된 축제인 셈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카니발은 사순절 준비라는 본래 취지와는 관계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노는 일에만 광적으로 몰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때 한 해 향락과 놀이의 절정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카니발이 끝나도 더 이상 사순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경건과 절제의 삶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마 24:38-9에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말씀했습니다. 말세적 현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아가 홍수 심판의 경고를 받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광적으로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깨어 근신하며 준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고 광적으로 향락에 빠져듭니다. 특히 경건의 깊이를 더 해야 할 이 사순절 바로 직전에 더욱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사순절을 잊어버립니다. 여기서 우리 시대의 짙은 영적 어둠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이런 세상의 탁류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더욱 경건을 연습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사순절에 더욱 우리의 경건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이란 무엇입니까?
사순절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테살코스테”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40일 간의 기념일”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해서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자고 시작된 절기입니다.
금년에 부활주일이 4월 11일이니까 이 규례를 따라보면 지난 주 수요일 이미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이 됩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40일일까요?
성경을 보면 40일은 경건한 삶과 관련된 상징적인 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모세도 40일간 시내산에서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을 저 광야에서 훈련받았습니다. 이렇게 40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건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한 해에 한 번은 40일 동안 절제하며 경건을 힘써 연습하자는 뜻에서 사순절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순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초창기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준비하면서 금식했는데 이것을 본받아서 부활절 전에 금식을 했고 철저하게 기도와 신령한 훈련을 했습니다. 사순절은 이런 초대교회의 전통을 본받아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초창기 사순절이 만들어졌을 때 저녁 직전에 식사만 허용이 되었고, 육류는 어떤 것이라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14세기에 와서 많이 완화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정오의 식사와 간단한 저녁 식사가 허용이 됐습니다. 이제 금식 기도보다는 절식 기도로 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주가무를 삼갔고, 연극 관람이나 연애소설 읽는 것도 금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피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이런 전통을 그대로 따를 필요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경건생활을 위해 두 가지는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절제입니다.
먹기는 먹되 먹고 싶은 욕망의 노예가 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적당히 쉬고 재창조를 위한 문화생활은 하되 향락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빠지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무엇엔가 사로잡혀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육의 굴레에 사로잡혀 자유를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만남을 갖자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쫓겨 중단했던 기도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영적인 나태함으로 약해진 기도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우리의 영이 더 강건해지게 하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 절제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기도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사순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사순절의 메시지를 찾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소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모임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특별한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특별한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내게 돌아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우리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마치 거울 앞에 서는 것처럼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위선을 떨던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공적에 취해 살던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허물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사순절은 소위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지난 수요일이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재의 수요일에는 특별 예식을 가졌습니다. 이 예식에서 주의 종들은 재를 성도들의 머리에 얹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기서 재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재를 머리에 얹어주는 것은 방자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게 됩니다. 나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면 거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진정한 사나이가 되려면 세 곳을 다녀와야 한다고 말했답니다. 첫째는 군대이고, 둘째는 병원이고, 그리고 셋째는 감옥이랍니다.
이 세 곳의 공통점은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군대에 가서 고생을 해보면 자기가 누구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힘없는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병원에 입원을 해 보면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보면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진정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깨닫는 자야말로 사나이다운 사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를 잊은 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그래서 죄 짓고, 그래서 하나님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다시금 새롭게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참회하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17절에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하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통곡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죄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늘 주의 전에 나와서 백성들의 죄 때문에 울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눈물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19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두 정치인의 공판이 열렸습니다. 한 사람은 한화에서 10억원을 받은 혐의로 수감 중인 이재정 전의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기업인들로부터 4억원을 받은 혐의로 수감 중인 안희정씨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법정 태도는 정 반대여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재정 전의원은 성공회 신부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제가 됐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재판 석상에서 진솔한 참회를 고백해서 재판정을 통곡의 바다로 만들었답니다. 이에 비해 안희정씨는 큰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것이고 이것은 일종의 향토장학금으로 받은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을 했답니다.
이 재정 전의원은 구치소에 들어간 뒤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됐을 것입니다. 눈물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눈물의 참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희정씨는 구치소에 들어갔어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를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눈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회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 여러분에게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참회로 우리가 정결하고 거룩하게 다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셋째, 거룩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백성을 모아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먹이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을 회복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통적으로 명하는 말씀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라는 말의 뜻은 구별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하고 패역한 이 세상과 철저하게 구별되셨듯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거룩에 대한 열망입니다.
참 연어는 신비로운 동물입니다. 어떻게 자기가 태어난 그 자리를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요? 어떤 놈들은 2년 만에 또 어떤 놈들은 심지어 5년 만에 돌아온답니다. 저 태평양 한 가운데를 휘 젖고 다니다가 알을 날 때면 저 강원도 산골짜기를 찾아옵니다. 바위가 가로막고, 수중보가 가로막고, 심지어 폭포가 가로막아도 죽기 살기로 그 자리를 찾아옵니다. 그 자리의 물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저 뜨거운 열망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거룩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연어가 그 열망을 잃어버리면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열망을 잃어버리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처럼 살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 우리 삶 속에서 주님의 향기를 날리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 이 열망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거룩한 삶을 위한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답변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yes”, 이 세상에서는 “No”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반대가 되면 큰일입니다.
이 세상이 유혹합니다. 부정부패를 저지르라고 유혹합니다. 이 때 우리가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음란한 자리로 나아가자고 유혹합니다. 이 때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을 말하라고 유혹합니다. 이 때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습니다. 여러 가지 손해를 봅니다. 때론 핍박도 받습니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거룩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거룩에 대한 열망이 다시 불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용기가 다시 솟구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이 시작됐습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심령이 깨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심령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 / 사순절을 절제하며 기도하며 보내게 하옵소서. 자신을 돌아보고, 참회하며, 거룩을 회복케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