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회의 평등, 결과의 평등
모든 국가공동체의
정치적 ‘틀’ 을 설명할 때, 대표적인 것이
‘기회의평등’ 과
‘결과의 평등’ 에 대한것이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틀에 대해
가장
설득력있는 설명이 백미터달리기 이다.
일반적으로
‘기회의 평등’ 은
보수파의 정치적 이념이며
‘결과의 평등’ 은
좌파가 높이 들고있는 기치다.
지금의 우리사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쉽게 나타날 수 있는
소득의 양극화 때문에
갈등구조가 커지고 있으며
더 이상
‘공정성’ 이 훼손되면 안되는
순준에 와 있다고 말할수 있다.
빈부의 격차는
어느시대,
어느사회에나 있는것 이지만
그 내용과 대응에서는
큰 차이가 나기도 한다.
빈부의 격차와
사회적인 계층은
정치체제가 어떠하든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속성이 있다.
구소련시절의
‘공산귀족 노멘클라투라’ 와
지금 북한의 김정은 일가가
여기에 해당 된다.
똑같이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도
역사와 함께하는 사회현상의 한가지다.
문제는
‘균형’ 을 잃었을때 발생한다. 그 균형을
잡아주는 힘이 곧 ‘공정성’ 이며
이는 언제나
집권세력이 가지는 숙제이기도 하다.
작금의 여당이 외면받는것은
이 숙제를 풀수있는
역량이 없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야당인 민주당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수도 없다. 때문에
좌파가 집권했다고 해서
즉시
해소될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김대중, 노무현의 집권을
‘잃어버린 10년’ 이라고 부르는게
그 증거다.
다른것과 마찬가지로 양면성이 있다.
시대에 따라
어느한쪽이 더 선호되는것은
양면중 한쪽이
그 시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개발독재’ 가 없었다면
오늘의 경제대국 ‘한국’ 이
존재할수 없는게 그런 사례다.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선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탄생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북쪽과 남쪽을 비교하면
대답은 분명하게 나온다.
그 누가
이 현상을 부정할수 있겠는가.
‘논문-이론’ 중,
그 인용빈도에서
최고의 저작은 칼 마르크스의 것들이다. 소크라테스보다 앞서있다.
칼 마르크스는,
한 개인의 ‘잘못된 이념’ 으로
2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기록을 가지고 있다.
징기스칸도,
히틀러도 여기에는 못 미친다.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된 지금까지도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치를
높이들고있는 좌파가 있다는것은
마르크스, 레닌의 이념이
꼬인사람들의
‘수단-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좌파의
‘이론적 빈곤수준’ 은 사실 유치할 정도다. 피나는
연구를 통한 ‘신념’ 이 아니라
필요에따라 얻어탄
무임승차이기 때문이다. 이제 백미터달리기로
이 이념전쟁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풀어보자.
기회의 평등은, 모든사람이
같은 출발선에서
같은시간에 함께 출발하는것을
그 핵심내용으로 한다.
그 출발,
즉
기회에서 평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혜와 편법,
부정부패,
전관예우,
낙하산인사,
불공정거래등이
법의 심판을 받는것은 기회의 평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같은 출발선에 서는것은
바로
‘공정성’ 이 된다.
물론
이 공정성과
기회의평등을 관리하는것은
집권세력-정부다.
그 최종책임자가
민선으로
직접선출된 대통령이다.
또 한쪽은
자기선거구 유권자들에 의해
직접선출된
대의원-국회의원들이다.
입법부를 구성하는것은 물론,
다수당은
집권여당이 되어
국정운염의 한몫을 담당한다.
대한민국의 정치적비극은
이 국회-국회의원들이
무능하고 부패하다는데 있다.
눈에 보이는것이 없으니
다른것은 생각할 틈이없다.
물이
새 들어오는 배 위에서
계파에 따르는
‘공천싸움’ 하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도
위험에 처한 배는 걱정하지 않는다. 같은라인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출발한 선수들은
목표지점을 향해 달리기를 시작 한다. 이게
바로 ‘과정’ 이다.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변칙’ 이 없어야 하는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결과보다 과정’ 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진다.
대표적인것이 ‘토론문화’ 다.
같은문제에 대한
서로다른 ‘시민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얘기를 나누는게 토론이다.
‘토론문화’ 가 없다는것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내 생각과 틀리면
바로
적이되고,
그건
초전박살 내야하는 대상이 된다.
‘냉면으로 통일!’ 해야되지,
거기에다 대고
‘난 설렁탕’ 하면 그건 반역자가 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다.
서로가
다른것을 인정하는것,
그게
민주주의 시작이며 끝이다.
한국의 도로는 ‘무채색’이다. 모두가 은색이다. 튀면 안된다는
피해의식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모가나면
정을 맞는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민주주의는 혹독한 토론과정 없이는
정치적으로
발전할수 없는 정교한 시스템이다. 예를들어
축구경기에서, 주심이나 선심들은
선수들과 똑같이 뛰지만 시합은 하지않는다.
변칙을 막고,
변칙에 대해 페널티를 줄 뿐이다.
말하자면 축구경기의 심판처럼
우리사회의 ‘과정들’ 을
관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달리기 선수중
‘부정한 방법’ 을 사용,
남보다 앞선다면
응당 제재를 가해야한다. 옐로우카드 와 레드카드가 그것이다.
프로축구선수들이
돈을 받고
승부조작에 가담한것은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주시민사회라 해도
그 사회공동체를 갉아먹는
‘해충들’ 은 얼마든지 있다.
서양사회에서
‘마피아’ 를 근절하지 못하는게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의 경우는
공개적으로,
일상적으로
국가공권력이 해충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는게 그런 현상이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결과에 대한 승복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건
사회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과정이 공정하고
엄격히 관리됐다면
우,열의
결과에 대해 승복할수 있다.
객관적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디테일이
공정하고 분명한데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모두가
똑같은 출발선에서
똑같은 시간에 출발했지만,
결승점에선
1등과 2등, 그리고 3등과 기타가 생긴다.
인간은
그 능력과 기량,
실력에서 똑같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우,열 이라고 부른다.
핵심이 되는 긍정적 요소는 ‘경쟁’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공동체와 국가들은
안팎으로
‘경쟁’ 을 통해 발전해 왔다. 이 원칙은
지금도 변함없이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치열해졌다고 말할수 있을정도다.
시장의 속성도 경쟁에 있다. 경쟁에서 이기는 뛰어난 인간,
두뇌가 많을수록
경제적으로 앞서는 나라가 될수있다.
지금은
단순집약노동인 ‘가발’ 을 만들어
수출하는 시대가 아니다.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은
고급두뇌에서 나온다.
우수한 인력의
수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긴 설명이 더 필요없을 것이다.
모든 경쟁에는
반드시
‘비인간적요소’ 가 있게마련이다.
그만큼
경쟁은 냉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정서적으로 순화 시키는것이
예술과 종교,
그리고 스포츠의 세계다.
발전한 국가일수록
이 분야에 더 신경을 쓰고
투자를 확대하는것도
그 중요성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모든 경쟁에서는
반드시
‘탈락자’ 가 생기는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1등과 2등, 그리고 3등은
단지
세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문화, 문명은
그 ‘탈락자’ 를 관리하는 수준에 대한
다른이름이다. 그게
시스템으로서의 ‘복지’ 다.
인간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해도
동물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에게는
‘기본적 인권’ 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예산으로
‘잠자리와 먹을것’ 을 마련하는게
그 때문이다.
나라에따라
그 내용과 수준은 크게 다르지만
‘복지’ 에 대한
정신만은 마찬가지다.
근자
서구의 선진국중
복지지출의 과다 때문에
국고가 바닥나
디폴트수준까지 간 나라들이 나타나고 있다.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 는
한국의 속담은
정말
정곡을 찌르는 경구가 아닐수 없다.
지방자치제들도
26.5조원이 책정돼있다. 복지수혜 대상자는 전부 990여만명,
사실
국가 재정규모로 볼때
큰 지출이 아닐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락자’ 전부를
카바하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모든나라가 마찬가지다 가난구제는
나라도 할수없기 때문이다. 결과의 평등은, 출발이후
서로다른 과정이야 어찌됐든
모두가 똑같이,
나란히 결승점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거기엔
1등과 2등,
그리고 3등의 우,열이란 없다.
따라서
경쟁도 없고,
그 긍정적 결과인 ‘발전’도 없다.
생산시설의 국유화와, 집단농장이 그 표본이며
그 결과는
‘가난과 고통의 평등’ 이 전부다.
지금의 북한이 그렇다.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에게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만큼 가져라가’ 는
사회주의 슬로건이
먹혀들 수 있겠는가.
마르크스가
논리적으로 예언했던
프롤레타리아트혁명도,
자본주의의 멸망도,
사회주의를거쳐 도달하는 공산주의세계도
그래서
실현될수 없었던 것이다.
발로뛰지않고,
처음부터 ‘책상에 앉아서’ 공상했던
반 인간적인 것이었다.
레닌도, 스탈린도
그중 극단적인 부분들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재생산함으로서
무서운 비밀경찰이 지배하는
‘감옥국가’ 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잔재의 하나가
지금의 북한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주의 국가’ 는
단 한번도
세상에 존재한적이 없다.
현실적으로
존재할수 없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좌파의 이념은
언제나
하나의 ‘이상’ 이지
현실은 될수없다.
한국의 보수우파는, 그 진정한 ‘보수적 가치’ 를
정체성으로 가지는
자기노력이 크게 부족했다.
‘표’를따라
카멜레온처럼 표변하는
얄팍한 술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분노와 함께 구역질이 날 정도다.
한국의 좌파는, 자기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국제미아’의 수준이다.
사회이슈가 있는 모든곳에
얼굴을 내밀고
눈도장만 받으려고 한다. ‘표’ 때문이다.
그러니
정체성이 있을수가 없다.
왜
‘잃어버린 10년’ 이라는
성토가 나왔는지
반성해보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집권하면
지금보다는
분명히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수가 없다.
그들의
이합집산은
낡고낡은 필름, 그대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후진분야가 종교와 정치다.
특히
정치는 날이갈수록
그 역기능이 커지고 있다.
정치가 발전하지 못하면
국가도 발전할수 없다.
경제규모가 커지는것 만으로는
선진국이 될수없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가 균형을 가져야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 될수있다.
선진국 문턱에서
십년넘게 헤매고 있는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인간은
그게 누구든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그게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지금의 자기처지가
그 근본에서는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것 이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 책임을 다른것에 전가하는것도
인간의 심리다.
‘주변부인생’ 이 되었을때, 사람들은
체제를 비판하고,
좌파의 유혹에 쉽게넘어간다.
지금
우리사회가 겪고있는
심각한 갈등의 근저에는
이런
부정적현상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한가지
우리 모두가
똑바로 알고있어야 할 사실은,
좌파의
‘결과의 평등’ 이 현실화 되면
‘가난과 고통의 평등’ 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그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는
오늘의 북한을 보면된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좌파는 위선적이다. 솔직하지 못하다.
기회의평등을 수용하는
좌파는 없는것일까.
그게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다.
한국의 좌파들은
먼저
그들을 연구하는게 올바른 순서다.
by/yorow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