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낭당에 얽힌 비밀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는 머나먼 전설 속의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정월이나 2월이면 정말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는 날들이 많았다. 그나마 다행히 이 계절에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고사(告祀)를 지내는 일이 많았다.
제례 의식을 마치고 나면 제수(祭需) 음식을 서낭당에 가져다 놓는 풍습이 있어서 우리는 그 곳을 찾아가 떡을 먹곤 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 남자가 담대(膽大)해진다고 해 어른들도 막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땅에 기독교가 갑자기 성행하고, 유신시대에 조국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는 동안 서낭당은 거의 없어져 이제는 민담으로나 전해오고 있다. 기독교도들이 서낭당을 부정(不淨)하게 생각한 것은 그것이 우상 숭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고, 유신시대에 더욱 인멸된 것은 도로 공사에 돌멩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철모르던 시절 나는 서낭당에 대해 미신이려니 생각했으나 우리 민속을 관찰하고 공부하게 되면서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됐다. 그것이 지금은 비록 무속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서낭당은 당초부터 미신이 아니라 원시 부족 국가 시대에 돌싸움(석전·石戰)으로 부락을 방어하던 무기(돌멩이)의 저장소였다. 요즘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일종의 병참(兵站) 기지였다.
우선 서낭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그것은 한자의 성황(城隍)이 음운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성(城)이라 함은 글자 그대로 성이며, 황(隍)이라 함은 성을 쌓고서도 미덥지 못해 그 주변에 팠던 물길(해자·垓字)를 의미한다. 따라서 서낭은 본시 부락 방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역사적 문헌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예컨대 신라는 왜구의 침략이 있을 때면 돌멩이 부대를 조직해 적을 격퇴했고(‘삼국사기’ 자비왕 2년 4월), 고구려에는 당나라 군사에 대항하기 위해 특별히 조직된 돌멩이부대가 있었다(‘삼국사기’ 보장왕 4년 5월).
고려 시대에는 석투군(石投軍)이라는 정식 군사 조직이 있었고(‘고려사’ 志·兵·五軍條), 조선조에는 성황도감(城隍都監)이라는 부대를 두어 정기적인 돌던지기 훈련을 실시했다(‘태종실록’ 6년 6월 癸亥).
남한에서 서낭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동북쪽인 마천동(馬川洞·속칭 돌무데기마을) 거여동 일대의 산기슭과, 거제도(巨濟島) 장승포(長承浦) 일대의 옥포만(玉浦灣) 해안이다.
남한산성에 이토록 서낭이 많은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고, 장승포에 요새(要塞)처럼 서낭이 늘어서 있는 것은 이 곳에 왜구의 피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순신(李舜臣)의 첫 해전이 이 곳에서 벌어진 것도 우연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서낭의 전투적 성격이 가장 잘 보전되어 있는 곳은 역시 행주산성(幸州山城)이다. 내가 1980년 답사해 본 바에 의하면, 행주산성 동남쪽 기슭, 즉 한강의 북안(北岸)이 되는 덕양산(德陽山)의 남남동쪽 기슭에는 돌싸움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우리가 구전으로 들어오던 행주산성의 아낙네들이 행주치마에 돌멩이를 싸서 날랐다는 것은 단순한 민담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곳의 한강 바닥에는 사구(砂丘)가 형성되어 한강 하류 중에서 깊이가 가장 얕아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이나 한국전쟁 당시의 북한군도 이 곳을 도강(渡江) 지점으로 삼은 바 있다.
서낭의 군사적 기능은 병기 기술의 발달, 특히 화약과 총포의 발명과 함께 서서히 사라지고 민속놀이로 그 잔영(殘影)이 남아 있는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정월 대보름날의 행사로 볼 수 있었던 아래 윗마을의 돌싸움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돌싸움 행사는 만리동(萬里洞) 고개의 것이었다. 1900년대 초엽의 선교사 기록에 따르면, 구경꾼이 3만∼4만 명이었고 싸움꾼만 9000명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지는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싸움은 더욱 치열했다. 사망자가 발생하는 일은 흔히 있었고, 부자(父子)가 갈려서 싸워도 양보하는 일이 없었다.
서낭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그 위치를 주목해야 한다. 서낭은 반드시 마을로 들어가면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요로에 위치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이 제신(祭神)이나 제천(祭天)이나 제산(祭山)을 위한 것이었다면 한적하고 높은 곳에 위치할 일이지, 사람이 번잡하게 왕래하는 동네 어구에 위치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제단의 의미였다면 돌멩이의 크기가 더 클 수도 있는 일이지, 꼭 던지기에 알맞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당초에는 무기 저장고였던 서낭이 무속화 과정을 겪게 된 것은 그 신성성(神聖性) 때문이었다.
전쟁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승전에 대한 소망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출전에 앞서 동네 입구에서 전쟁에서 승리를 바라는 전승 기원(戰勝祈願) 의식을 거행하는데 이 때부터 서낭이 무속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 서낭이 있는 그 동네 입구를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그 마을의 안녕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을 성역처럼 생각하면서 신성(神聖) 개념이 부여됐다.
서낭이 무속화된 이후 부락 사람들은 서낭 앞을 지날 때면 몇 가지 지켜야 할 의식을 갖게 되었다. 예컨대 일단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리는데 이는 성소(聖所)에 대한 공경의 의미를 갖는다. 떡과 같은 음식을 바치는 것은 물신(物神)에 대한 향응의 뜻을 가진 것이며, 침을 뱉는 것은 그 곳에 모여 있을지도 모를 잡신을 떨쳐버리기 위함이다.
그밖에 색동 헝겊이나 왼쪽으로 꼰 새끼줄을 걸어놓는 것은 단장이나 장식의 의미가 있고, 까치발을 세 번 뛰거나 짚신을 갖다 놓는 것은 여행의 안전을 비는 것이다. 돈을 놓는 것은 죽은 자와 저승사자를 위한 여비의 의미가 있고, 헌옷을 걸어 놓는 것은 지금 병 중에 있는 그 주인의 쾌유를 비는 소망이며, 황토를 뿌리는 것은 죽은 자의 황천행을 비는 마음의 표시이다.
그밖에도 임신한 여인이나 생리 중인 여인은 그 곳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금기의 풍속이 있었고, 성소이므로 그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사진에서 보이는 서낭은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사기막리의 서낭인데 서낭의 무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 솟아 있는 돌멩이는 남근석(男根石)인데 이는 이 곳이 아들을 바라는 아낙네들이 치성(致誠)을 드리던 기자암(祈子岩)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변에 둘러선 큰 돌은 이미 이 곳이 성소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서낭의 무속적 성격을 부인하거나 그 신성성을 찬양할 뜻은 없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민속만큼 민족의 정서를 절실하게 표현하는 것은 없고, 서낭의 무분별한 훼손은 빗나간 근대화의 논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 부락의 단결심과 일체감을 깨트리기 위해 부락제를 금지시켰던 일제의 탄압, 그리고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 등 일련의 반 전통 운동 앞에서 사라진 우리의 유산에 대한 연민과 민족 문화의 뿌리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고 싶을 뿐이다.
원시와 문명의 차이는 멀지 않다. 원시는 문명 속에 살아 숨쉬고 있고, 문명은 원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샹델리아 휘황한 워커힐호텔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서낭의 모습은 얼마나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문명과 원시의 콘트라스트인가? [출처] 서낭당에 얽힌 비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