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 샌델의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4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육지에서 1600km 떨어진 남대서양을 표류했습니다. 19일째 되던 날, 선장은 제비뽑기를 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정하자고 했습니다. 나흘간 세 남자는 17살 난 소년의 경정맥 급소를 칼로 찔러 죽인 뒤 소년의 살과 피로 연명했습니다. 24일째 되던 날 생존자 3명이 구조되었습니다.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구명보트 사건을 바라보는 두 사고방식이 정의를 이해하는 두 가지 상반된 시작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어떤 행위의 도덕성은 전적으로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달렸다는 시각입니다. 모든 걸 고려해 최선의 상황을 도출하는 행위가 옳다, 또 하나는 도덕적으로 볼 때,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샌델은 의무와 권리에는 사회적 결과를 떠나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은 목숨의 숫자를 세고,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특정한 도덕적 의무와 인권은 워낙 기본적인 덕목이라 그런 계산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특정 권리가 그렇게 기본적이라면, 타고난 권리든 신성한 권리든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든 절대적 권리든 간에, 그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더불어서 그것은 왜 기본 권리인가?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법 개혁가 제러미 벤덤Jeremy Bentham(1748-1832)은 이런 질문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자명합니다. 그는 타고난 권리라는 말에 조롱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벤덤은 인생의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실현에 있으며, 쾌락을 조장하고 고통을 방지하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도덕과 입법의 기초원리라고 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주장했습니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벤담에 따르면, 옳은 행위는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것 일체를 가리킵니다.
벤담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거쳐 자신이 주장하는 원칙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모두 고통과 쾌락이라는 감정에 지배된다. 이 감정은 우리의 ‘통치권자’이다. 이는 모든 행위를 지배할뿐더러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그의 주권에 달렸다.’”
공리주의 철학은 우리 모두가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도덕적, 정치적 삶의 기초로 삼습니다. 정부는 법과 정책을 만들 때,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란 ‘허구의 집단’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뤄집니다. 따라서 시민과 입법자들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정책에서 얻게 되는 이익을 모두 더한 뒤 총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까?”
벤담은 모든 도덕적 주장이 반드시 행복 극대화를 전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도덕적 싸움은 알고 보면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공리주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두고 이견을 보일 뿐이지, 원칙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벤담은 공리 원칙이 정치 개혁의 기초가 되는 도덕 과학을 제시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형벌정책을 더 능률적이고 인도적으로 개선할 방안을 여럿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원형교도소’로서 중앙에 감시탑을 설치해 교도관이 재소자들을 관찰하되 재자들은 교도관을 볼 수 없게 만든 곳입니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원교도소를 민간업자에게 운영하게 하고, 민간업자는 그 대가로 죄수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데, 이때 죄수들은 하루 16시간 노동을 합니다. 이 계획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시대를 앞선 제안이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에서 이 제안이 부활해, 교도소 운영을 민간 기업에 위탁하는 방안이 논의도기도 했습니다.
샌델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공리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약점이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임을 지적합니다. 공리주의자들에게 개인은 단지 사람들의 선호도를 더할 때 계산되는 한 항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1930년대에 사회심리학자 에드워드 손다이크Edward Thorndike는 공리주의의 가정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정부 보조를 받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다양한 고통을 겪는 대가로 얼마를 받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사 결과, 새끼발가락 하나를 절단하는 대가는 $57,000였고, 길이 15cm인 산 지렁이 한 마리를 먹는 대가는 $100,000였으며, 주인 없는 고양이를 맨손으로 질식시키는 대가는 $10,000였고, 마을에서 15km 떨어진 캔자스의 농장에서 남은 인생을 사는 대가는 $300,000였습니다. 손다이크는 이 결과가 모든 행위는 하나의 저울로 계량, 배교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손다이크의 어이없는 가격 목록은 그런 비교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결과를 보면서, 설문 응답자가 정말로 캔자스 농장에서의 삶의 미래를 지렁이를 먹는 것보다 세 배 불쾌하게 여겼다고 결론지어야 할까? 아니면 워낙 별개의 체험들이라 의미 있는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어야 할까? 손다이크는 응답자의 1/3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그런 체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을 내놓았다고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응답자가 그 체험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게” 여긴다는 점을 암시한 부분입니다.
벤담의 최대 행복 원칙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은 첫째,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하는 오류를 점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반박에 답을 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73)입니다. 밀은 벤담의 친구이자 제자인 제임스 밀의 아들입니다. 제임스는 아들을 집에서 가르쳤고, 존은 신동으로 자랐습니다. 그는 세 살에 그리스어를, 여덟 살에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 열한 살에는 로마법의 역사를 썼습니다. 스무 살 때 신경쇠약에 걸려 이후 여러 해 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해리엇은 당시 두 아이를 둔 유부녀였지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해리엇의 남편이 죽자, 두 사람은 결혼했습니다. 벤담의 신념을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한 밀은 해리엇을 가장 훌륭한 지적 동반자이자 협력자로 신뢰했습니다.
밀의 저서 『자유론 On Liberty』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영어권 세계의 고전입니다. 이 책의 요지는,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라는 것이 밀의 주장입니다. 밀이 말하는 자유의 원칙은 벤담의 공리주의 원칙보다 더 엄격한 도덕적 기초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밀은 우리가 공리를 극대화하되, 매 순간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되리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수가 반대 의견을 막거나 자유사상가를 검열할 수 있다면, 오늘 당장 공리가 극대화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불행이 늘고 행복은 줄 것입니다.
반대 의견을 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면 장기적으로 사회가 행복해진다고 믿은 이유는 무엇일까? 밀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반대 의견의 전부 혹은 일부가 사실로 판명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다수 의견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이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다수 의견이 독단이나 편견에 빠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관습과 관례를 다르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답답하고 순종적인 체제로 전락해,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힘과 활기를 잃기 쉽습니다.
밀의 설명에 따르면, 순응은 삶의 적입니다.
“지각,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활동, 나아가 도덕적 기호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능력은 선택하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관습에 따라 행동할 때는 선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 경우, 사람들은 최고를 분별하거나 탐하는 것에서 경험을 쌓을 수 없다. 정신과 도덕도 근력과 마찬가지로 사용해야 좋아진다. ... 세상이, 혹은 내 몫에 해당하는 세상이, 내 인생 계획을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유인원처럼 흉내 내는 능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계획을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만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밀은 관습을 따르면 인생에 만족하면서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비교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무엇을 하느냐뿐만 아니라 어떤 태도로 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하다.”
밀은 행동과 결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도 중요함을 역설했습니다. 그에게 개성이 중요한 이유는 쾌락을 주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욕구와 충동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아닌 사람은 인격이 없는 사람이며, 그것은 증기기관차에 인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샌델은 공리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박, 즉 공리주의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저울로 계량한다는 주장에 대한 밀의 반응 역시 공리와는 무관한 도덕적 이상에 기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밀은 긴 수필 『공리주의』에서 공리주의자들이 저급 쾌락과 고급 쾌락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벤담에게 쾌락은 쾌락이고 고통은 고통이었습니다. 이 경험이 저 경험보다 더 나은가, 못한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로 인한 쾌락이나 고통의 강도와 지속성입니다. 벤담은 여러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샌델은 벤담의 공리주의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가 사적 판단을 배제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모든 취향이 동등하게 계산됩니다. 벤담은 이 쾌락이 저 쾌락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저울에 올려 계량하고 비교할 수 있다는 벤담의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공리주의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쾌락에도 분명 고급과 저급이 있다고 믿습니다.
콜로세움에서 그리스인을 사자 우리에 던진 로마인을 예로 들면, 이 끔찍한 짓거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희생자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그 행위는 고상한 쾌락이 아닌 비뚤어진 쾌락을 충족한다는 생각입니다. 비뚤어진 쾌락을 충족하기보다는 취향을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벤담과 달리 밀은 욕구의 양이나 강도만이 아니라 질을 평가해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공리만으로 그 구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밀은 “행복을 양산할수록 옳은 행동이며, 그 반대 상황을 초래할수록 나쁜 행동이다. 행복이란 쾌락이 있고 고통은 없는 것이며, 불행이란 고통이 있고 쾌락은 궁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도덕 이론의 바탕이 된 삶의 이론인 쾌락 추구와 고통에서의 해방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목표”라고 확신하며, “모든 바람직한 것은 ... 쾌락이 내재한다는 점에서, 혹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막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했습니다.
밀은 쾌락과 고통이 전부라고 주장하면서 “더 바람직하고 더 가치 있는 쾌락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밀은 간단한 시험을 제안합니다. “두 가지 쾌락이 있을 때, 그 둘을 경험한 사람들 전부 혹은 거의 전부가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좋아한다면, 그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 따위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이다.” 밀은 “(어떤 행위가) 바람직한 무엇인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실제로 사람들이 그것을 바란다는 사실뿐이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쾌락을 질적으로 구분하는 그의 시험은 한 가지 분명한 반박의 여지가 있다면서 샌델은 우리가 대개 고급 쾌락보다는 저급 쾌락을 더 좋아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샌델은 우리가 더러 플라톤을 읽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보다는 소파에 누워 시트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이처럼 어떤 행위가 특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즐기기 쉽게 때문에 더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합니다.
밀은 가장 뛰어난 사람도 “더러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고급 쾌락을 제쳐두고 저급 쾌락을 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누구나 가끔은 소파에서 빈둥거리고 싶은 충동에 굴복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렘브란트와 텔레비전 재방송의 차이를 모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밀은 이 점을 지적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약 바보가, 아니면 돼지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면, 문제를 자기 쪽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급 능력을 신뢰하는 밀의 표현에 수긍이 가지만, 샌델은 밀이 그 말에 기대면서 공리주의 전제에서 벗어났음을 주장합니다. 욕구는 더 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람과 욕구와는 별개인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상에서 나옵니다. 어떤 쾌락이 고급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고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샌델은 우리가 『햄릿』을 위대한 예술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그보다 못한 오락거리보다 그것을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급 능력을 끌어내고 더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밀은 공리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히 쾌락과 고통으로 이분해 계산해버린다는 혐의를 벗기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공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