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
욜 2:18-27
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19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20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21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욜 2:18-27 / [주님의 응답과 풍성한 추수] 이때에 주께서 자기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기의 땅이 수치스럽게 되는 것을 분하게 여기셨다. 19)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에게 응답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많이 주어 너희가 필요한 것을 충분하게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 더 이상 너희가 세계 만민들 가운데서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 20) 내가 그 북쪽에서 온 군대들을 추방하여 먼곳으로 쫓아 버리겠다. 내가 그들을 메마른 황무지로 돌려보내리니 그들이 거기서 죽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반절은 사해 속으로 몰려 들어갈 것이고 남은 자들은 모두 지중해로 들어갈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썩는 악취가 육지로 풍겨 올 것이다.' 주께서 너희를 위해 큰 이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21) 너희 ㄱ) 대지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하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놀라운 일들을 하셨기 때문이다. (ㄱ. 대지에서 시작하여 동물이 그 중간에 서고 사람에게서 절정에 달하는 문학적인 점층법이다) 22) 너희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모든 초장이 다시 푸르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덩굴이 다시 무성해지고, 모든 나무들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 23)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민들아, 주 너희 하나님께 환호성을 올리며 즐거워하여라! 그가 내리시는 비가 용서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봄비와 가을비도 전처럼 내려 주실 것이다. 24) 타작마당마다 밀 낟가리가 다시 높이 솟아오르고 압착틀에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가 넘칠 것이다. 25)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보냈던 나의 큰 군대, 곧 그 메뚜기, 누리, 황충이, 풀무치들이 삼켰던 그 곡식을 내가 모조리 너희에게 보충해 주겠다. 26) 그때에는 너희가 다시 원하는 대로 음식을 먹을 것이다. 또 너희에게 이러한 이적이 일어나게 하시는 주 하나님 여호와를 너희가 찬양할 것이며 나의 백성이 이 같은 재난을 결코 다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27) 또한 그때에는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 중에 있다는 것과 나 여호와만이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이 다시는 이 같은 매를 맞지 않을 것이다.'
죄를 범한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크고 두려운 날이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킨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구원의 날입니다.
그 땅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18-20)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회개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긍휼은 사전적 의미로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백성들의 회개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이키며 그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 대해 열심을 내실 것이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땅의 소출이 회복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이상 이방 민족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북쪽에 살고 있는 앗수르가 침공해온다 할지라도 쫓아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의 회복과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는 오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긍휼뿐입니다.
회복시키시는 하나님(21-27)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으로 인해 온 땅과 들짐승들까지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시온의 자녀들에게 너희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2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풍성한 결실이 맺히고 밀과 포도주와 기름이 가득하게 됨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은 단지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땅과 짐승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 세계 전체에까지 임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마 6:23).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이른 비와 늦은 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른 비’는 파종할 때에 내리는 비이며(시 84:6), ‘늦은 비’는 봄이 되어 수확할 때에 내리는 비로(잠 16:15; 렘 3:3; 슥 10:1), 수확에 임박하여 곡식들이 제대로 익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대적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적용: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빠르게 지나는 느낌을 가질 때 아쉬움은 커집니다. 나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나만을 생각하던 이기심에서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는 사랑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함께 공감하고 선한 일을 도모하며 이타적인 마음가짐으로 남겨진 시간들을 살아간다면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자녀로 기억될 것입니다.
< 설 교 >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요엘 2:18-27 / 이상호 목사
1. 여호와께서 극진히 사랑하시어(18-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겠다고 합니다(19). 앞서 언급된 소제와 전제가 끊어졌던 문제의 해결입니다(욜 1:9). 또 하나님은 북쪽 군대를 쫓아내어 바다로 몰아넣겠다고 하십니다(20). 2장에 말했던 군대들을 몰아낸다는 것입니다(2:4-11). 이렇게 요엘 1-2장에서 언급했던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재앙을 종결시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회개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19; 참조. 12-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18). 여기서 "극진히 사랑하시어"(18)는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질투하기까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어의 동사완료형을 사용하여 미래에 있을 일을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처럼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지만, 자기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은 바로 응답하시며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질문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6)
2.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21-27)
요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실 용서와 회복의 결과를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엘은 1-2장의 재앙의 대상들을 "땅이여", “들짐승들아", “시온의 자녀들아”라고 부른 뒤, 두려워 말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21-23). 두려워 말고 즐거워하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뭄의 재앙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어 모든 생명이 살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까지 메뚜기 재앙으로 피해를 본 것을 회복시켜 준다고 합니다(25). 햇수대로 갚아 준다는 말은 백성의 과거의 고통을 꼼꼼하게 헤아려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며 조롱하던 수치스러운 상황(2:17)조차도 뒤집으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 덕분에 더 이상 수치를 당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27).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용서할 때 그들 때문에 고통 받은 들짐승까지도 회복하게 하십니다. 이 회복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18절의 "그 때에" 입니다.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해보면 대부분 이러한 이유로 성회로 모이기를 소홀히 하였고 신실한 약속의 백성으로 사는 일에 부족했습니다. 나는 바빠서 못 갑니다, 피곤해서 못 갑니다, 마음에 들지않아 못 갑니다.....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으니 나를 용서하라...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나를 용서하라...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노라...." (눅 14:15-24) 우리의 이러한 육신의 소욕들로 인하여 성회를 성회답지 열지 못하였고, 통회하며 금식하지 못하였고, 약속의 백성답게 세상 속에서 승리하지 못했던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떨어져 하나님께 소제와 번제조차 드릴 수 없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참담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아파하셨습니다. 특별히 수 없이 많은 이민족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며 사는 당신의 백성들을 주님은 애통해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무려 3번이나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고 선언하심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다는 당신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20절, 26절, 27절)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며 사는 꼴을 기뻐하겠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기 자녀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스라엘은 마치 블레셋 다곤 신전에서 우상을 섬기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짐승을 대신해 맷돌을 돌리는 힘빠진 삼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상실한 백성들의 모습은 아무런 능력도 행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모습이 과거의 능력과 영광만을 그리워하는 그러한 존재는 아닌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백성으로 하여금 수치를 당치 않게 하리라.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승리자의 삶을 우리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승리하려면 힘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를 원한다고 하여도 구호만 가지고 승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무력과 같은 힘을 동원한 의미 없고 명분 없는 전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의의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실력을 갖추고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그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번제, 소제를 드릴 예물조차 없었습니다. 메뚜기떼로 비유된 북편의 큰 군대가 완전히 그들을 휩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이제 주님께서 응답의 희망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응답을 위해서는 누군가 파트너가 있어야 합니다. 박수소리가 나려면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지만, 그 약속을 받을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외면하고 살았기에 응답의 삶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떠났던 그들이 돌이켜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삶이 가장 우선임을 고백하기 시작했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고, 우리의 물질이 빼앗기며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성회로 모이며 금식하며 회개하며 주 앞에 돌아오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19절에 보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주실 축복의 내용이 분명한지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을 부어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전에 하나님을 떠남으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18절 중반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성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뜨거움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여러분 감동적인 사건이 생기면 마음이 막 북받쳐 오르지요. 북받쳐 오르면 눈이 충혈이 됩니다.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약속된 자녀답게 살기로 다짐했을 때 하나님은 벌써 마음이 뜨거워져서 어쩔 줄 몰라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하신 분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 어떤 세력도 하나님을 이길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강한 그 하나님이 약할 때가 있어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이 뜨거우셔서 거두어 가셨던 은혜를 갑절이나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채찍을 하지만, 채찍을 하는 부모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너 열대는 맞아야 되겠다’ 하지만 한 대 두 대를 맞으면서 잘 못 했다고 하는 말을 부모는 빨리 듣기를 원하는 거지요. 끝까지 누가 이기나 버텨보자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식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눈물로 부모의 품에 들어오는 것, 그것은 부모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을 보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라’ 감람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고,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고, 그들이 땀 흘려 수고한 모든 밭에 곡식의 열매가 맺히는 때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줄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식을 얻기 위해서 새 포도주와 기름을 얻기 위해서 성회로 모이고, 금식하며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범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처음 예수를 믿으면 잘 이해 안 되는 것이 있지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무슨 죄를 졌나?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어요.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교회 나오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교회 나오니까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온통 그런 기도만 하는데, 무슨 내가 죽을 죄를 지었나. 그렇지요? 알고 보면, 죽을 죄요 큰 죄를 지었지요. 세상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긴 죄,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인 줄 믿습니다.
이것은 세상 법은 다스리지 않습니다. 세상 법은 뭘 훔치고, 때리고 이런 것은 감옥에 넣어도요, 우상숭배 하는 것은 감옥에 넣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은 죄요, 우리의 발걸음이 우상을 향한 죄요. 이것이 가장 큰 죄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것을 범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주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바쁜 것이 많은지..여러분 좀 더 마음의 다짐을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할 시간적인 성결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들쭉날쭉해요. 주일에 예배성수가 그렇게 되지 않고, 그저 들쭉날쭉합니다. 너무 마음이 안타까워요. 하나님 앞에서 시간의 성별에 있어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요즘에 이런 생각을 하며 주님 앞에 묵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교회가 30년이 넘으면서 좀더 새로워 져야 되겠다고 진단하면서 먼저 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수요기도회 때 집사님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제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깊이 성찰을 한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보다도 중요한 일이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몸으로 보여주세요. 난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합니다. 내 시간의 성별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시간은 없습니다. 삶으로 보여주세요. 여러분의 물질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성별된 삶을 사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인격으로 증거하여야 합니다.
감사생활이 형식적이고 인사치레인 것이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가식적으로 살지 마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성회로 모이며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날 그 때에 마음이 감동이 되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어쩔줄 몰라 하세요. 이미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주실 은혜들을 다 준비하고 있었어요. 우리만 준비 된다면 주님은 다시금 쏟아 부으시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홍수를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성회가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주님을 향한 열정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 앞에 돌아오는 그 때에 주님은 마음에 뜨거움과 중심에 뜨거움이 일어나시고, 우리를 향한 약속의 응답을 준비하시는 줄 믿습니다. 힘 빠진 삼손같이 부끄럽고 열방에 욕을 당하는 저희들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여호와 닛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땅을 소유합시다
요엘 2:18-20 / 배진기 목사
광복 70주년입니다. 나라를 잃고, 영토를 빼앗겼던 민족의 슬픔과 한을 생각하며 우리
는 광복의 감격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영토가 일본에게 빼앗겼던 서러움을
자손 대대로 기억하고 우리에게 조국 광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31년전 하나님은 이 포항의 영혼들이 자기의 영적인 영토를 잃고 신음하는 것을 긍휼
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땅을 회복 시키려고 안디옥 교회를 개척하게 하셨습니다. 이 교
회를 통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원대로 하나님의 땅을 회복하고 소유한 복된 백성들
이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회복의 보장 언약입니다. 그 핵심 내용은
“여호와의 땅을 소유하라”는 선포입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의 무서움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엘 선지자를 통해 재앙을 선포하셨습니다.
요엘1:4에 그 재앙의 무서움에 대해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자 하나님은 이방 나라의 군대로 이스라엘을 황폐케 하
셨습니다.
요엘1:5-7에 그 재앙에 대해 "(5)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
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6)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
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
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라고 경고하였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인데 그 은혜를 욕되게 하면 안됩니다. 은혜를 저버
리고 방자히 행하면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사
도인 바울은 빌립보서2:12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 경고하였습니다.
일본이 다시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고집하며 자신들의 과거의 만행을 회개치 아니하고
미국을 끼고 방자히 행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전쟁도발을 협박의 도구로 내놓고 우리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도발을 해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위기의 시기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재앙을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
음으로 회개의 자리에 서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땅을 소유합시다.
18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본문에서 언급한 “자기의 땅”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자신의 땅 바로 하나님의 소유로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이 하나님의 땅 , 바로 하나님의 소유임을 기억하고 자
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세우실 때에 그들
에게 시내산에서 계명과 언약을 주시고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한때 보트 피플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헤메는 베트남 난민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영토가 없는 백성의 슬픔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토
를 일본에게 잃고 36년의 피눈물나는 고통을 경험했었습니다.
백성은 자기의 터전 바로 자신의 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믿는 백성들의 영토와 같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 자체
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도의 영토는 하나님의 약속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소유하는 백성이 됩시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1:8에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
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형통하리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
기 전에 말씀의 영토를 정복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1:2에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간증 하였습니다. 사도요한도 요한계시록 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말씀의 영토를 정복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18절에서 "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신다"고 하였는데 개역 성경에서는
"자기의 땅을 향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다"고 하였습니다. 본문18절에 사용된 “극진한 사
랑, 중심이 뜨거운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네"라는 말로 "시기하다"라는 의
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시기"라는 표현을 쓰실 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심으로 자기 백성이 그 영토를 잃어버리는 것을 싫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말씀으로 정복되어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토가 이루어지게 합시
다. 로마서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
하였고 에베소서 5:16-17에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
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세대와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영토를 잃지말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
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하여 하나님의 영토를 넓히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하나님이 시기하시며 지키시는 여호와의 땅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습니까?
3. 여호와 하나님의 땅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백성이 되면 여호와의 땅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의 긍휼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땅을 소유합니다. 본문18절에서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고 하였는데 개역성경에서는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불쌍히 여김, 긍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카말"입니다.
하나님의 연민의 정을 말합니다. 연약하고 나약한 자를 향한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연약
함과 나약함을 보충해주기 위해 준비하고 예비한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유다서 21절에서 "하
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고 권면하였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바라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신 사랑입니다. 고린도전
서2:9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
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사랑 ,긍휼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긍휼의 사랑이 바로 이 말씀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여호와의 땅을 소유한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돌이키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
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보지 아니하고는 온전한 회개를 이룰 수 없습니
다. 온전한 회개를 이룰 때에 우리는 긍휼을 얻어 여호와의 땅을 소유한 여호와 하나님
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4. 여호와 하나님의 땅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의 무서움을 알아 회개하고 긍휼을 구하므로 여호와 하나
님의 땅을 소유하는 자가 되면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1) 흡족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 19절 상반절을 읽어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
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하나님의 축복은 흡족하게 부어지는 풍성한 복입니다. 흡족한 복은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주변이 같이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에베소서 3:20의
말씀 처럼 언제나 더하여, 넘치도록, 능히 주어집니다. 빌립보서 4:19의 말씀 처럼 하
나님의 채우심은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채우심입니다.
곡식의 풍성함은 일용할 양식의 흡족한 축복입니다. 새 포도주의 축복은 별미의 축복
을 말합니다. 기름을 주심은 풍성함에 윤택함을 더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2) 지켜주심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 19절 하반절을 읽어 봅시다.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
지 않게 할 것이며"
나라들 가운데 욕을 당하지 않게 하심은 지켜 주심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는
복보다 지켜주시는 복이 더 중요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우는 사자 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 마
귀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갖 궤계를 꾸미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귀를 대적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야고보서 4:7에서 "그
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말
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요한복음10:29에서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
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사도는 요한일서
5:18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
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말씀 하였습
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땅을 소유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3) 원수를 도말해주시는 큰 복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 20절을 읽어 봅시다. "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
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하나님은 그 백성을 지키시고 막아 주실 분 아니라 우리에게서 저주의 세력이 떠나가
게 하시고 원수의 세력을 도말시켜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심령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사탄의 권세를 떠나가게 하시고 멸해 주십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재앙의 무서움을 알아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겨 여호와의 땅을
소유합시다. 긍휼하심의 은혜를 사모하므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듣고, 읽고, 분별
하고 이해하여 여호와의 땅을 소유하는 긍휼을 사모하는 자녀들이 됩시다. 여호와의 땅
을 소유하므로 흡족한 축복, 지켜주심의 축복, 원수를 도말해 주심의 큰 축복을 누리며
삽시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며 교회 창립 31주년을 기념하며 여호와의 땅을 소유한
백성들이 됩시다. “내 안에 여호와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가?”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요엘 2:18-27 / 이상호 목사
1. 여호와께서 극진히 사랑하시어(18-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겠다고 합니다(19). 앞서 언급된 소제와 전제가 끊어졌던 문제의 해결입니다(욜 1:9). 또 하나님은 북쪽 군대를 쫓아내어 바다로 몰아넣겠다고 하십니다(20). 2장에 말했던 군대들을 몰아낸다는 것입니다(2:4-11). 이렇게 요엘 1-2장에서 언급했던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재앙을 종결시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회개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19; 참조. 12-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18). 여기서 "극진히 사랑하시어"(18)는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질투하기까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어의 동사완료형을 사용하여 미래에 있을 일을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처럼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지만, 자기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은 바로 응답하시며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질문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6)
2.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21-27)
요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실 용서와 회복의 결과를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엘은 1-2장의 재앙의 대상들을 "땅이여", “들짐승들아", “시온의 자녀들아”라고 부른 뒤, 두려워 말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21-23). 두려워 말고 즐거워하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뭄의 재앙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어 모든 생명이 살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까지 메뚜기 재앙으로 피해를 본 것을 회복시켜 준다고 합니다(25). 햇수대로 갚아 준다는 말은 백성의 과거의 고통을 꼼꼼하게 헤아려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며 조롱하던 수치스러운 상황(2:17)조차도 뒤집으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 덕분에 더 이상 수치를 당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27).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용서할 때 그들 때문에 고통 받은 들짐승까지도 회복하게 하십니다. 이 회복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18절의 "그 때에" 입니다.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해보면 대부분 이러한 이유로 성회로 모이기를 소홀히 하였고 신실한 약속의 백성으로 사는 일에 부족했습니다. 나는 바빠서 못 갑니다, 피곤해서 못 갑니다, 마음에 들지않아 못 갑니다.....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으니 나를 용서하라...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나를 용서하라...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노라...." (눅 14:15-24) 우리의 이러한 육신의 소욕들로 인하여 성회를 성회답지 열지 못하였고, 통회하며 금식하지 못하였고, 약속의 백성답게 세상 속에서 승리하지 못했던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떨어져 하나님께 소제와 번제조차 드릴 수 없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참담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아파하셨습니다. 특별히 수 없이 많은 이민족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며 사는 당신의 백성들을 주님은 애통해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무려 3번이나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고 선언하심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다는 당신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20절, 26절, 27절)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며 사는 꼴을 기뻐하겠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기 자녀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스라엘은 마치 블레셋 다곤 신전에서 우상을 섬기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짐승을 대신해 맷돌을 돌리는 힘빠진 삼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상실한 백성들의 모습은 아무런 능력도 행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모습이 과거의 능력과 영광만을 그리워하는 그러한 존재는 아닌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백성으로 하여금 수치를 당치 않게 하리라.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승리자의 삶을 우리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승리하려면 힘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를 원한다고 하여도 구호만 가지고 승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무력과 같은 힘을 동원한 의미 없고 명분 없는 전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의의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실력을 갖추고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그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번제, 소제를 드릴 예물조차 없었습니다. 메뚜기떼로 비유된 북편의 큰 군대가 완전히 그들을 휩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이제 주님께서 응답의 희망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응답을 위해서는 누군가 파트너가 있어야 합니다. 박수소리가 나려면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지만, 그 약속을 받을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외면하고 살았기에 응답의 삶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떠났던 그들이 돌이켜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삶이 가장 우선임을 고백하기 시작했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고, 우리의 물질이 빼앗기며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성회로 모이며 금식하며 회개하며 주 앞에 돌아오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19절에 보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주실 축복의 내용이 분명한지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을 부어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전에 하나님을 떠남으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18절 중반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성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뜨거움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여러분 감동적인 사건이 생기면 마음이 막 북받쳐 오르지요. 북받쳐 오르면 눈이 충혈이 됩니다.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약속된 자녀답게 살기로 다짐했을 때 하나님은 벌써 마음이 뜨거워져서 어쩔 줄 몰라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하신 분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 어떤 세력도 하나님을 이길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강한 그 하나님이 약할 때가 있어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이 뜨거우셔서 거두어 가셨던 은혜를 갑절이나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채찍을 하지만, 채찍을 하는 부모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너 열대는 맞아야 되겠다’ 하지만 한 대 두 대를 맞으면서 잘 못 했다고 하는 말을 부모는 빨리 듣기를 원하는 거지요. 끝까지 누가 이기나 버텨보자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식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눈물로 부모의 품에 들어오는 것, 그것은 부모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을 보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라’ 감람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고,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고, 그들이 땀 흘려 수고한 모든 밭에 곡식의 열매가 맺히는 때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줄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식을 얻기 위해서 새 포도주와 기름을 얻기 위해서 성회로 모이고, 금식하며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범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처음 예수를 믿으면 잘 이해 안 되는 것이 있지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무슨 죄를 졌나?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어요.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교회 나오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교회 나오니까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온통 그런 기도만 하는데, 무슨 내가 죽을 죄를 지었나. 그렇지요? 알고 보면, 죽을 죄요 큰 죄를 지었지요. 세상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긴 죄,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인 줄 믿습니다.
이것은 세상 법은 다스리지 않습니다. 세상 법은 뭘 훔치고, 때리고 이런 것은 감옥에 넣어도요, 우상숭배 하는 것은 감옥에 넣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은 죄요, 우리의 발걸음이 우상을 향한 죄요. 이것이 가장 큰 죄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것을 범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주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바쁜 것이 많은지..여러분 좀 더 마음의 다짐을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할 시간적인 성결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들쭉날쭉해요. 주일에 예배성수가 그렇게 되지 않고, 그저 들쭉날쭉합니다. 너무 마음이 안타까워요. 하나님 앞에서 시간의 성별에 있어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요즘에 이런 생각을 하며 주님 앞에 묵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교회가 30년이 넘으면서 좀더 새로워 져야 되겠다고 진단하면서 먼저 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수요기도회 때 집사님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제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깊이 성찰을 한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보다도 중요한 일이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몸으로 보여주세요. 난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합니다. 내 시간의 성별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시간은 없습니다. 삶으로 보여주세요. 여러분의 물질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성별된 삶을 사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인격으로 증거하여야 합니다.
감사생활이 형식적이고 인사치레인 것이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가식적으로 살지 마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성회로 모이며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날 그 때에 마음이 감동이 되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어쩔줄 몰라 하세요. 이미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주실 은혜들을 다 준비하고 있었어요. 우리만 준비 된다면 주님은 다시금 쏟아 부으시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홍수를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성회가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주님을 향한 열정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 앞에 돌아오는 그 때에 주님은 마음에 뜨거움과 중심에 뜨거움이 일어나시고, 우리를 향한 약속의 응답을 준비하시는 줄 믿습니다. 힘 빠진 삼손같이 부끄럽고 열방에 욕을 당하는 저희들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여호와 닛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큰일을 시행하리라
욜 2:18-20 / 엄기호 목사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남유다 민족은 사회의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이 심한 영적타락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남유다 왕국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누렸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환경적 번영이 결코 영적번영까지 만들어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이때가 남유다 역사상 가장 도덕적, 사회적으로 타락한 시기였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생활이 영적중요성은 잊어버린 채 나태와 향락에 젖어든 타락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심히 노하게 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제사의식이 요엘의 시대에 이르러 틀에 박힌 형식으로 전락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백성들은 제사 시간에 술에 만취되어 있거나 아니면 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완악한 유다 백성들에게 요엘 선지자는 "회개하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요엘 2장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범죄한 백성은 꼭 심판하신다는 사실과 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려면 빨리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구체적으로 하되 금식하면서 전민족적인 회개운동을 전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백성들이란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들이 그 죄를 깨닫고, 다시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지도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를 받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났던 탕자가 돌아올 때 탕자가 아버지를 먼저 본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먼저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돌아온 아들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큰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꾸짖거나 매를 들기는커녕 돌아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감격하여 영접해 주었습니다. 가락지를 끼워주고 좋은 옷을 입혀주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하나님은 한없이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타락하였어도, 우리가 버림받은 자일 지라도, 하나님을 떠났다가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가 본문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땅을 위해 중심이 뜨거워지셨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기도드릴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죄를 구할 때, 하나님은 자기 땅 즉 가나안 땅을 위하여 그 중심이 뜨거워지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이 뜨거우신 분이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중심에서는 뜨거운 감격이 일어납니다. 비록 이 땅이 악으로 오염되어 있어도 하나님은 이것을 성별하셔서 언약을 보시지 죄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은 중심이 뜨거워질 정도입니다.
중심이 뜨겁다는 말은 질투하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남편이 그 아내를 사랑하듯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아내와 같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 질투하는 하나님, 시기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세를 살펴보면 심히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여중생의 죽음으로 빚어진 촛불시위는 미군철수 주장과 반미운동으로 확산되었고,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고,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한반도에는 다시 전쟁의 위험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더 우려되는 것은, 북한의 사상 및 체제에 동조하는 젊은이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북한 핵문제와 반미감정 확산으로 국가신용등급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 국방, 경제, 교육 등 어느 곳 하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엘 선지자는 "너희 심장을 찢으라"고 했습니다. 당시 옷을 찢는 자는 종종 있어도 마음을 찢는 자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심장을 찢을 때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가능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우상숭배와 부정부패와 불의가 가득하고, 반목과 폭력이 난무하며 배금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하고, 온갖 죄악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이 곧 이 나라에 큰 혼란과 어려움을 가져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심장을 찢어야 합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와 아울러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하고 떠나가는 자녀들을 바라보면 슬퍼하고 걱정하는 분이시지만 돌아와서 하나님을 다시 찾는 자녀들을 바라보시면 중심이 뜨거워지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돌아올 때 그 중심이 뜨거워지십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의 중심에 뜨거운 감격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백성 때문에 중심이 뜨거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감정이라면,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은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심을 말합니다. 돌아오는 사람 때문에 기뻐하시고 감동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지난 죄를 씻어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사죄이며 완전한 용서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오라"는 것은 '방향을 전환하라', '가던 길에서 되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시편 103편 3절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악, 모든 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죄는 사하시고 어떤 죄는 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병은 고치시고 어떤 병은 고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과 인격이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전폭적이며 전체적이며 항구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옵시다. 그리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죄, 교회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고백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흡족하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흡족하리라"는 '만족하리라', '풍성하리라', '넘치리라'는 의미입니다.
곡식은 양식이고, 포도주는 음료수를 말하며, 기름은 조미료와 치료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농사도 사업도 안되어 곡식이 없었습니다. 포도가 열리지 않아 포도주 항아리에 포도주가 떨어졌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도 기적이 일어는 납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납니까? 될 것 같은데 안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많이 벌어들인 것 같은데 계산해 보면, 항상 남는 것이 없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밑집니다. 헛돈 써야 할 일이 점점 불어납니다. 벌어도 불안하고 잘 먹어도, 잘 살아도 불안합니다. 움켜쥐고 구두쇠 노릇하며 살아도 생활이 넉넉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전혀 다른 기적을 체험합니다. 늘 손해본 것 같은데 계산해보면 통장이 차고, 지갑이 차고, 마음이 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별로 번 것 같지 않은데 생활이 점점 윤택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늘 주고 살아도 살림이 축나지 않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모든 사람도 복을 받고 덕을 보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시는 욕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니다. 다시는 이방 민족에게 멸시천대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니다. 어두운 인생을 밝게 비추시고 열어주십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면 하나님이 큰 일을 시행하여 주십니다.
시편 127편에 "야웨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했습니다. 또 본문 20절에는 북편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셔서 북한 군대를 격퇴시켜 막아주시고, 남침을 못하게 하셔서 재앙을 막아주시며, 이 땅에 평화와 화합의 물결이 넘실대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일을 시행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욜 2:18-27 / 이삼규 목사
서울에 있는 실로암 안과 병원의 벽에 붙어있는 어느 환자의 글을 소개합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더니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어지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미처 표현 못한 기도까지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큰 일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달라고 기도해보셨습니까? 오늘 봉독 해 올린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중심이 뜨거워져서 긍휼히 여기시며 큰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1. 하나님은 언제 큰 일을 행하시는가?
1)하나님의 백성이 기도 할 때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의 전에서 수종드는 제사장들이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에 호소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호소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관할한다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는 비난을 하지 않겠습니까?
유다왕이었던 히스기야 시대에 참으로 진퇴양난에 빠지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죽을병이 들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와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유언을 하라고 왕에게 말했습니다. 그뿐이었습니까? 밖으로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대군을 거느리고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고 군대장관이었던 랍사게와 함께 대군을 보내어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였습니다.
랍사게는 히스기야 왕에게 앗수르 왕이었던 산헤립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사 36:5 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모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느냐
사 36:6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일반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려 들어가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사 36:7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경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사 36:8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나는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사 36:9 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장관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의뢰하여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사 36:10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히스기야 왕은 이 말을 듣고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을 갔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무엇을 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갔을 까요? 기도하기 위하여 갔습니다. 그는 신하들을 선지자였던 이사야에게 보내어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사 37:3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사 37:4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에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기도의 응답은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를 때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 37:6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사 37:7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분명하고도 확실한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 37: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사 37:15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사 37: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사 37:17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사 37:18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 땅을 황폐케 하였고
사 37:19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사 37:20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히스기야의 기도는 즉시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37:21-29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즉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산헤립의 일로 기도한 것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산헤립을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되 갈고리로 코를 꿰며, 자갈을 입에 먹여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앗수르의 18만 5천의 대군이 하루아침에 시체로 변하는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산헤립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군대 모두가 시체로 변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얼굴이 뜨뜻하여 니느웨로 돌아갔지만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뿐입니까? 히스기야 왕은 죽을병이 들었지만 15년이 생명이 연장되는 놀라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징조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사야가 기도하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뒤로 물러가는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할 때 여호수아는 기도하므로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수10:12-13).
기도할 때 하나님은 큰 일을 행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중심이 뜨거워지셔서 큰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욜 2:20 내가 북편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전군은 동해로, 그 후군은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2)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큰 일을 행하시는 것은 그들이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 때문이었습니다.
욜 2: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중심이 뜨겁다라는 말은 '카네'라는 말로서 '시기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무서운 재앙으로 징벌하셨으나 회개함을 보셨을 때 그들에 대한 애정이 되살아나신 것입니다. 재앙으로 황폐된 땅을 보시고 그 땅을 침범한 적군들을 미워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렘 31: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하나님은 언제 큰 일을 행하실 까요? 하나님은 기도할 때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큰 일을 행하십니다.
2.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시는가?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도를 응답해 주심으로 큰 일을 행하십니다.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기를"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떤 응답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1)물질적인 축복으로-새 포도주, 기름으로-흡족하게
욜 2:19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는 정도로 주실 까요? 흡족하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욜 2: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욜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욜 2: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기이하게 대접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2)대적에게 승리를 주심으로-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적군을 동서해로 몰아 넣는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을 앞에서 말씀드린 앗수르 군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기한번 써 보지도 않았는데 18만 5천의 군대를 시체로 만들어버린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루터에게 다가와 말하였습니다. "루터 선생, 온 세계가 당신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오?" 그러자 이 용감한 종교개혁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하나님과 내가 나서서 세상에 맞서야지요."
바울 사도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 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회개할 때 하나님은 큰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고 흡족하게 하여 주십니다. 모든 대적을 물리쳐 주시고 안전히 거하도록 역사 하십니다. 믿습니까?
3.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신 결과는 무엇입니까?
1)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큰 일을 목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23절), 우상들을 찬양하지 않고 그들의 곡식과 포도주를 '연애하는 자들이 준 값'(호 2:12)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큰 일로 인하여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출 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출 15: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2)하나님의 긍휼 하심으로 말미암아 위로와 영적인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욜 2:19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열국의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재난을 당하자 의기양양하여 이스라엘을 모욕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반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욜 2: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욜 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선한 일보다는 그들에게 베풀고 있는 선한 손길로 인하여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기쁨으로 종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풍족하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진정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큰 일을 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큰 일을 행하십니까?
자기 백성들이 회개하며 기도할 때 큰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중심이 뜨거워질 때 하나님은 큰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중심을 뜨겁게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체험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적인 유익과 위로를 얻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일을 행하리라
욜 2:18-20 / 엄기호 목사
존번연의 <천로역정>에 묘사되어있는, 신앙의 진리를 알고 또한 믿노라고 하면서 회개 못한 교인의 절망적인 모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열쇠가 회개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정말 충만한 하나님과의 교제, 충만하고 뜨거운 하나님과의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깊은 회개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저자인 요엘 선지자는 심판과 회개와 소망의 선지자로, 본서를 통해서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백성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났던 자녀들이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때 하나님은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지 않으신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와 같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큰 잔치를 베풀어준 아버지. 꾸짖거나 매를 들지도 않고, 그저 아들이 돌아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아버지는 감격하여, 일어나 아들을 맞아주었습니다.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더러운 거지 옷을 벗기고 좋은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놀랄만한 진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발명이 끊임없이 증대되었으며 인간의 문화는 결코 전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교만해저서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신격화 하고, 물질만능주의, 성공지향주의로 치달으며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현재 우리 삶 가운데 드러나는 크고 작은 재난과 문제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요엘 선지자는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깨어진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큰 일을 행하심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실까요?
뜨거운 중심으로 회복시키십니다.
본문 18절에 “그때에 야웨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때”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기도드릴 때,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를 말합니다. 돌아온 탕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중심에서는 뜨거운 감격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만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윤리적, 사회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나태함은 또 어떻습니까? 예배의 형식만 있을 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과 헌신이 담긴 예배가 점점 힘을 잃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요엘 선지자는 타락한 유다를 향해 선포했듯 “너희 심장을 찢으라”(13절)고 말합니다. 우리의 심장을 찢을 때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가능합니다. 회개 기도를 회복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국가적, 개인적 문제의 저변에 깨어지지 않은 마음,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의 사고가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마음을 찢는 회개와 아울러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죄인들이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그 기쁨은 중심이 뜨거워질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가는 자녀들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걱정하시는 하나님이지만, 돌아와서 하나님을 찾는 자녀들을 바라보시며 그 중심이 뜨거워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신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눅 15:7). 그러므로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하나님께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긍휼히 여기심으로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백성 때문에 중심이 뜨거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감정이라면,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본문 18절 하반절에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감동하실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모든 죄를 씻어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오라”는 것은 ‘방향을 전환하라’,‘가던 길에서 되돌아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전인적인 용서입니다. 전인적인 용서란 모든 삶과 인격에 영향을 끼친 죄에 대해 용서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감정적이며 상대적이며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전폭적이며 전체적이고 항구적입니다.
또한 시편 103편 3절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했습니다. 시편기자는 ‘모든 죄악, 모든 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죄는 사하시고, 어떤 죄는 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병은 고치시고 어떤 병은 고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약 5:11). 이 긍휼의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의 자녀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치료하시며 회복하십니다.
풍성한 응답으로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로 돌아온 사람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흡족하도록 응답을 하십니다(본문 19절). 이는 하나님의 응답이 ‘만족하리라’는 것이요 ‘풍성하리라’는 것이며 ‘차고 넘치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모든 것이 부족하며, 형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모든 것에서 넘치도록 풍성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는 욕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니다(본문 19절). 하나님을 떠나면, 그 시간부터 외면상 인간적인 성공의 길로 들어선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실패, 조소와 멸시가 뒤따르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었듯, 하나님께서는 그 돌아온 자녀에게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잔치의 주인공이 되게 하십니다. 어두운 인생을 밝게 비추시고 열어주십니다. 우리를 높이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십니다(시 23:5).
그리고 모든 위협에서 보호해주십니다(본문 20절). 개인적인 삶의 위협이든, 국가적인 위협이든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 하나님과 연합한 자에게 하나님은 이처럼 큰 일을 행하여 주십니다. 어떤 인간적인 노력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야웨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흡족하게 응답하시고, 높이시며, 외부의 위협들로부터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느덧 한해를 정리해야 하는 12월을 맞았습니다. 처음 계획한 일들이 얼마나 진행되고 이뤄졌는지를 생각할 때 아쉬운 부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 예배에 대한 열정 등에 대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개의 열매, 기도의 열매, 전도의 열매 등을 얼마나 많이 맺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이에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요엘 선지자가 선포하듯 마음을 찢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를 위해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회복함으로 나아갑시다. 우리를 향해 중심이 뜨거우신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래서 식어진 열정과 기도, 믿음과 신앙생활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즐겁게 삽시다
욜 2:21-27 / 이충섭 목사
우리는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당신이 오늘 건강하게 일어나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다면 이번 주에 죽은 1백만 명보다 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배고픔을 면하고 있다면 이 세상사람 중 5억명의 사람보다 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비를 피할 수 있고 잠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75%보다 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의 은행에 그리고 지갑에 약간의 돈이 있다면 이 세상의 8%안에 드는 부자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지금 글을 모르는 20억 명의 사람들보다 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에서 거의 마지막에 활동한 인물이 요엘입니다. 그는 587-538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었고, 515년 성전 재건, 445년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축성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엘은 이스라엘이 거쳐 온 역사를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신탁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이 선포의 핵심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26절에 구체적으로 “찬양하리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으며, 문맥적으로 볼 때 전체 본문이 여호와 찬양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흙아, 두려워 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21절)는 말씀이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23절)는 말씀, 또는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27절)는 말씀도 역시 하나님 찬양과 연관된 구절입니다.
1. 하나님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3절)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네요.
요엘이 21-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흙, 짐승, 시온의 자녀가 그것입니다. 흙과 짐승과 사람은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핵심입니다. 요엘이 “흙아, 두려워마라, ... 짐승들아, 두려워마라., 자녀들아, ... 기뻐 뛰어라.” 하고 외친 이유는 이스라엘의 자연과 인간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요엘은 예루살렘의 파괴된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초토화하고, 성전이 허물어지고, 모든 문화유산이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포로로 잡혀 가거나 굶어죽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 대한 묘사가 1:17-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흙이 말라 그 속에서 씨앗은 죽고, 곡식이 없어 창고는 비고, 곳간은 무너졌다. 목장이 없어져 가축들이 울부짖고 소떼들이 소란하다. 양떼라고 그 벌을 면할쏘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습니다. 들판의 목장이 타버렸습니다. 벌판의 나무들도 모조리 타버렸습니다. 물줄기들은 모두 마르고 들판의 목장도 모두 타버려 가축들이 벌판에서 주께 부르짖습니다.”어떤 장면이 여러분의 머리에 그려집니까? 전쟁입니다. 전쟁만이 아니라 자연재해도 겹쳤겠지요.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서 삶의 터전이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겉으로는 썩 괜찮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전쟁 터, 자연재해로 파괴된 상태와 다를 게 없습니다. 곳간이 무너졌고, 가축들이 울부짖고, 물줄기들이 모두 말랐다는 요엘의 외침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남북갈등과 남남갈등, 양극화, 생태파괴, 비인간화한 교육현장 등등,
요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줍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감사하라고 선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은 큰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들판의 목장이 푸르게 되고, 포도덩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겨울비와 봄비를 내리시고, 그래서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그득그득 쌓이고 독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고 합니다.(24절)
우리 몸에는 호르몬의 종류가 약 50여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엔돌핀이라고 하는 호르몬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 뇌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호르몬이 생성되면 피로도 회복되고, 병균도 물리치고, 암세포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엔돌핀을 기적의 호르몬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엔돌핀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편의 열 배 정도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졸려도 엔돌핀만 생성되면 졸음이 싹 가셔 버리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엔돌핀만 생성되면 그 고통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엔돌핀의 효과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과학자들이 놀라운 호르몬을 발견하였습니다. 다이돌핀이라고 하는 호르몬입니다. 이 다이돌핀 호르몬은 그 효과가 자그마치 엔돌핀의 4천배나 됩니다.
그러면 이 다이돌핀이라고 하는 호르몬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가요? 엔돌핀은 대체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할 때 생성이 되지만, 다이돌핀은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뻐할 때 만들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확실히 믿으면 다이돌핀이 나와 힘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됩니다.
밑에 상황을 보면 없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사슴처럼 높이 올라가 보면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시편 18편 1절에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고 말씀하고 시편 30편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세상에 아무리 살기가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겁게 살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나의 힘이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슬픔을 변하여 기쁨으로 바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에 기뻐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2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일을 행하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자기감정과 자기의 업적을 높이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겁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닙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짠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성서가 말하는 여호와 찬양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구체적인 행위자로 설명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역사 안에서 행동하시는 분으로 설명합니다. 2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제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으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준 이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요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 전체의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바로 요엘의 이 진술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책이 곧 구약성서입니다.
출애굽 사건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소고를 들고 춤추며 노래한 내용도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출 15:21)
세상 창조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일입니다. 노아 홍수도 그렇고 그들을 구원하신 사건도 역시 그렇습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하나님의 그 모든 놀라운 행위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본문 26절에서 <너희는 먹되 풍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배부르다는 것은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사용되었을 뿐이지 그것 자체가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배부른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는 여호와 신앙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바알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경험하듯이 배부르다 해서 늘 행복한 것도 아니고, 물론 배고프다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어디까지 배불러야 하는가, 얼마나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면 아무런 대답도 없습니다. 요엘이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 삶의 우여곡절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엘의 말씀 선포는 이미 이루어진 현실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약속입니다. 2장 12절이 가리키듯이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일으키신다는 약속입니다. 미래의 약속이지만 이런 약속을 믿는 사람은 현실의 배고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아갑니다. 하박국 예언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현재 배부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그는 환성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찬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3.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기 때문에 기뻐하며 즐겁게 할수 있습니다.(27절)
습관이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의 90%가 습관이란다. 10%의 시간만 내 의지로 통제 가능하고, 나머지는 무의식적 습관에 따라 산다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무서운 리모컨에 의해서 우리 모두는 조종당하고 있는 셈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도 습관적인 노예근성을 제거하는 데만 40년이란 긴 시간을 소비했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조종하던 이 근성을 해결하지 못하면 새 땅에서의 성공적인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서의 첫 정복전쟁을 치르기 전에 이스라엘이 했던 집단행동은 바로 할례였다(수5). 전술을 논하고 무기를 가다듬는 식의 전쟁 준비가 아닌,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는 성결의식이었다. 인생을 바꾸려면, 의도적으로 일상습관을 바꾸기 시작해야 한다. '성결'이 우리의 가장 큰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사야 49장 23절에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가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보다 세상 명예나 물질을 더 사모하면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수치를 당하고 창피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는 언제나 이방 민족을 들어 쳐서 수치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올 때는 그 수치와 욕을 벗겨 버리고, 다시 떳떳하게 얼굴을 들게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보란 듯이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발에 밝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믿음이 식어져 맛을 잃고 주님을 멀리 떠나면 사람들에게 밝히는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짓밝혀 수치와 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매일매일 순간순간 주님을 찾고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거름더미에 앉은 자라도 존귀한 자리에 앉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물 떠난 고기는 살는지 몰라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한 시간도 못 산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난 금요 새벽에 주신 말씀이 시편 138편 7절입니다.
“내가 환난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에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쁘고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기쁘고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기쁘게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환난중에 다니질라도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펴서 내원수들의 분노를 막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돈도 없고 믿음도 없고 행복도 없고 즐거운 일이 없고 기쁨도 없고 돌와 줄 사람도 없어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합니다.
오늘부터 지금부터 하나님 때문에 기쁘게 즐겁게 살아갈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는 행복의 보증수표입니다
욜 2:21-27 / 양인순 목사
감사는 보증 수표와 같습니다. 지금 현금이 없어도 감사하면 감사의 선물이 미래에 다가옵니다. 탈무드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도 배움의 자세를 갖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이 모습 이 대로를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행복은 감사와 정비례합니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감사한 만큼 행복합니다.
빌헤름 웰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 정비례합니다. 감사가 없는 마음은 지옥과 같고 감사가 없는 가정은 메마른 광야와 같습니다. 아무리 지식과 명예와 권세와 부를 많이 쌓아놓았다고 해도 감사가 없으면 진정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원료이며 풍요로운 삶의 재료입니다.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에너지입니다.
일본의 다국적 기업 내쇼널(National)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집안의 몰락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포 점원으로 일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온몸으로 살벌한 세상을 배워가며 570개 기업, 13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가난', '허약한 몸', '못 배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것들을 불평의 조건으로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함을 배웠습니다. 그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아 건강을 관리를 했습니다. 그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항상 배우는데 노력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고, 부족함이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약점과 부족함을 원망과 불평으로 채우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약함을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배움의 기회로 삼는 자에게는 발전이 있습니다. 감사로 채우는 자에게는 축복이 따라옵니다.
감사는 발전소의 풍차와 같습니다. 제자대학 훈련팀과 함께 청평 양수발전소를 견학했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쇠덩어리로 만든 풍차가 물이 떨어지는 힘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풍차가 돌면서 전기 에너지를 발생하듯이 감사의 풍차는 돌리면 돌릴수록 더 큰 감사가 나옵니다. 더 크고 놀라운 삶의 에너지를 생산합니다. 감사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감사하면 언제나 생기가 있습니다. 감사하면 우울증이 치유되고 건강합니다. 감사하면 걱정 근심이 사라집니다. 감사하면 고통과 분노가 사라집니다. 감사하면 부족함을 받아들입니다. 감사하면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게 되고, 감사하면 상처받더라도 사랑하며, 감사하면 무엇이든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감사하면 평범한 일상도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감사는 삶의 기적을 일으키는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는 감사가 이런 엄청난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감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를 너무 쉽게 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마음 중에 가장 쉽게 늙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쉽게 늙어 버려 감사 불감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질병 중에 만연하여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감사 불감증입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늘 불평과 원망을 하며 삽니다. 욕구 불만이 가득합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이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괴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영국 격언에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고 천국이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우둔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롬1:21,22) 반면에 감사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시 50:2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의 삶이 풍요롭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눅17:19)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총에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실제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상황은 전혀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표현한 구절이 바로 요엘 1장 4절입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악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메뚜기의 재앙을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 심판의 날이 모래시계처럼 점점 다가옵니다. 심판의 결과는 심각한 기근이요 결핍이요 슬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은 심판하거나 멸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구원과 회복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소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로 뜻을 돌이키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우리 하나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요엘 2장 18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그 순간에 자기의 택하신 땅과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아버지를 향하여 돌이키는 순간 이미 용서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향하여 뛰어나와 반겨 맞아주십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의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보면 별로 기뻐하고 즐거워할만한 것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돌이켜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로 가득 채워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힘들게 목매어 부르짖었지만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애를 썼지만 텅 빈 손으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내 안에 기쁘고 즐거운 일이 없는데도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가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만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내가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선취(先取)’ 라고 합니다. 내가 아직 가지지 못했지만 가지게 될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곳에 반드시 이르게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원하는 것을 손에 붙잡지 못했지만 그렇게 채우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취믿음이요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선취신앙, 선취믿음, 선취감사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큰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황무하고 메마른 땅을 옥토로 바꾸어 주십니다. 들짐승들이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주십니다. 적당한 비를 내려주셔서 마당에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칩니다. 메뚜기와 황충이 먹었던 곡식보다 더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이방인으로부터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새 영을 부어주심으로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하며, 아비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이상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미리 맛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선취의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내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은 돌이키기만 하면 이런 놀라운 선취의 기쁨과 즐거움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누려야 할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사는 자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현실과 문제를 보는 자는 원망과 불평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감사의 신앙은 선취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선취의 기쁨과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입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 선지자가 블레셋 군을 물리치고 미스바와 센 사이에 기념비를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말한데서 유래합니다(삼하7:12).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어떻게 오늘 이 영광스런 자리까지 오게 되셨는지요? 해답은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줄로 믿습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왔다고 생각하면 교만입니다. 우리 인간은 대단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장 무력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는 뭐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병원에 입원해 보십시오. 때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건강관리 잘해서 건강하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건강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벤에셀의 은혜로 돌보지 않으시면 내 수고와 노력이 헛됩니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1-2).” 아멘!
내가 아무리 집을 세워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헛수고입니다. 내가 아무리 잠을 자지 않고 지키려고 노력해도 헛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을 내도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심지어 잠을 자는 순간까지도 지켜주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됩니다.
원래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잠을 자는 그 순간까지도 지켜주는 자가 복이 있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의식의 잠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자가 복있는 자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가지고 있어도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에 걸렸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에서 큰 복중에 하나가 바로 잠을 잘자는 것입니다. 아마 불면의 밤을 지새워본 분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알 줄 압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에벤에셀의 은혜를 깨닫는 자는 감사합니다. 항상 겸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 손의 수고와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얻고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은혜를 기억하는 추수감사절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일터가, 우리의 사업장이, 우리 성지교회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깨닫는 자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절대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에벤에셀의 은혜가 더 풍성해 지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는,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는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임마누엘이라는 단어가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자는 행복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다윗은 지금 사망의 죽음이 기다리는 골짜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우리와는 남다른 배짱이나 능력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가 믿고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는 양과 같이 미련하고 약한 존재인데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편23:4)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 자는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합니다.
제 큰아들이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있던 일입니다. 아마 자기보다 큰 형들에게 놀림을 당했던 모양입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아빠를 보더니 갑자기 형들에게 달려드는 것입니다. 아빠가 오면 그 형들쯤이야 얼마든지 혼내줄 수 있다고 믿은 것이죠. 자기 능력은 안되지만 아빠가 나와 함께한다는 생각 때문에 담대하게 형들에게 대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세상의 악한 자들을 대적해서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러나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한 일이 없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죽은 나사로도 살아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병이 떠납니다. 맹인 바디매오의 눈이 활짝 열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힘들고 지칠 때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힘주시는 분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 분이 바로 지금도 내 곁에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서 ‘순안티람바노마이’-나와 동행하심으로 모든 문제를 멀리 던져주십니다.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찾는 자에게 지금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십니다. 문제는 주님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힘과 내 뜻대로 행하려고 하는 교만입니다.
어느 날 형과 동생이 먹을 것을 두고 싸웁니다. 아마 동생의 아이스크림을 형이 몰래 빼앗아 먹은 것 같습니다. 동생이 악을 쓰면서 형에게 달려듭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힘이 센 형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달려들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동생은 형에게 달려들지 않습니다. 안방에 있는 아빠를 향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웁니다. 그러면 아빠가 깜짝 놀라 달려 나옵니다. 상황을 파악한 아빠가 아들에게 아이스크림 사먹으라고 돈을 줍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내 힘으로 아무리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악을 써봐야 소용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빠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울어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빠를 향하여 부르짖으면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까지 알게하시고, 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는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감사와 찬송이 넘칩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비결은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 나온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단 위에 결박하여 올려놓고 칼을 들어 치려는 순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급하게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이제야 네 아들 독자 이삭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 알았다.(12절)’ 감동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 받으시고 수풀에 걸린 숫양을 준비하십니다. 그 숫양을 번제로 드리면서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나보다 더 잘아십니다. 믿으십니까? 자녀들은 자기들이 자신의 모든 필요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항상 하는 말이 ‘Let It Be’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내비 둬’입니다. 제발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내비 두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없는지요. 하나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제발 내버려 두세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하나님이 정말 내버리실 수 있습니다.
자녀의 필요를 부모는 경험상으로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압니다. 그런데도 철부지 자녀들은 내비둬를 외치는 것이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헌신과 순종을 기다리십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삭을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칼을 빼든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정말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을 알았다고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여기에 바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순종과 헌신의 씨앗을 심으면 놀라운 기적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기대하지 못했던 하늘의 축복이 임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지금 내 앞에 있는 환경이나 문제를 보지 마시고 아브라함처럼 믿음과 순종의 씨앗을 뿌려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호와 이레의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미리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비록 유다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재앙에 직면해 있지만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황무한 땅을 옥토로 바꾸어 주십니다. 풍성하게 하시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세 가지 은혜를 베푸십니다. 에벤에셀, 임마누엘, 여호와 이레---이 은혜를 기억하며 누리며 미리 바라보는 자는 기쁨과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지금 내가 무엇을 얻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베풀어 주실 더 풍성한 은혜를 미리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감사가 임합니다. 감사의 풍차가 돌아갈 때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고, 하늘의 축복이 임합니다.
오늘의 감사는 행복의 보증수표입니다. 내가 지금 빈 손일지라도 믿음으로 감사의 씨앗을 심으면 삼 십배 육 십배 백배의 놀라운 축복으로 채우실 것을 믿습니다. 날마다 감사로 우리의 삶을 채우는 감사의 삶, 감사의 신앙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함께 ‘날 구원하신 주 감사’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 날 구원 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감사
지난 추억인해 감사 주내 곁에 계시네
향기 론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감사
사라 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 하신 기도 감사 거절 하신 것 감사
헤쳐 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
자녀들아
욜 2:23-26 / 이성희 목사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은 꽃주일이라고도 합니다. 1870년 미국 한 회중교회에서 어린이주일에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샤론의 꽃,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주일 예배를 드린 데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꽃처럼 아름답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한 송이만 받아도 감격하고 꽃의 향기를 사람들은 즐거워합니다. 저와 같은 꽃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물론 예외입니다. 꽃가루 알레르기는 콧물과 재채기를 유발하지만 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린이는 다 좋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인간으로서의 향수를 어린이들로부터 얻습니다. 어린이는 고귀합니다. ‘어린이 헌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어린이 권리 선언문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내용에 보면 “어린이는 완전한 인격자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린이는 말과 행동과 생활전반에 있어서 어른과 동등한 인권상의 보장을 받아야 한다. 어린이는 양육 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평화를 누릴 권리가 있다” 등등의 권리를 적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이러한 권리를 잘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어린이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4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하면서 6:7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가르칠 책임이 주어졌음을 밝힙니다. 그것도 부지런히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어린이의 고귀함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18:3에는 “너희가 돌이켜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가치를 최상으로 올려주십니다. 어린이의 중요함과 천국의 주인임을 확실하게 인정하십니다. 어린이는 천국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또한 밝힙니다. 동시에 어린이도 가정과 사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어린이주일에 아이들에게 잘 하라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어린이로서, 자녀로서의 책임을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자녀들아“라고 부르는 호칭을 잘 듣고 잘 따르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18에서 4:1까지는 새 사람의 가정생활을 권하고 있습니다. 특히 새 사람의 가정 생활을 부부간의 생활, 친자간의 생활로 나누어 권면합니다. 자녀에게 주시는 중요한 권면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자녀가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은 순종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바울은 권합니다. 이 말씀은 엄격한 명령입니다. “휘파쿠에테”라는 헬라어 원문의 말씀은 선택적 사양이 아닙니다. 강한 필수적인 명령입니다. 반드시 따라야 할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명령입니다. “순종할래?” 혹은 “순종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라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아주 강한 명령입니다. 에베소서 6:1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권합니다. 왜 순종해야 합니까? 이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합니다. 옳은 일인 순종은 자녀에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부모에게 대한 순종의 의무를 동시에 가집니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자녀는 순종하게끔 지어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삭을 보세요. 아브라함의 믿음만 훌륭한 게 아니라 이삭도 대단히 훌륭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이삭의 나이가 17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117세입니다. 17세 된 이삭이 117세 된 아버지를 못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손발이 묶여서 제단 위에까지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삭의 순종은 탁월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도 그 부모에게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인간의 몸에서 볼 때 요셉과 마리아가 부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 대하여도 극진한 효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부모님께 순종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존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 교육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산나는 다음과 같이 자녀 교육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고집을 꺾어라. 이것을 빨리 꺾을수록 더욱 좋다.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고 그들을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부모는 사실상 잔인한 사람이다. 이런 부모는 타파되어야 할 악습을 자녀들에게 기르게 한다. 그리고 자녀들을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부모는 마귀의 일을 하는 사람이며 신앙을 무의미하게 하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하고 자녀들의 영혼과 육신을 멸망케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고집으로 부모를 꺾기 전에 자녀를 꺾어야 합니다. 순종보다 자기 생각이 앞서는 자녀에게 순종이 자기 생각보다 앞섬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흉악한 강도가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 어머니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면회 온 어머니와 철장을 사이에 두고 면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형수는 갑자기 일어나 어머니의 얼굴을 철장 사이로 끌어당기어 코를 이빨로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고 버려둬서 이렇게 강도가 되었다고 하는 원망 섞긴 행동이었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15:4에는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법이 얼마나 지엄합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를 죽이게 한 것이 당시의 법입니다. 신명기 21장에는 자녀가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으면 잡아다가 장로에게 데려가서 어머니가 “내 아들은 순종 않고 방탕하다”고 외치고, “성읍 사람들은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죽을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로마서 1:30에는 이교도들의 죄를 바울이 공격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이 말은 당시로서는 가장 불온한 내용이었습니다.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이교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하는 일입니다. 순종을 아는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늘 형통합니다.
둘째,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내용은 모든 일입니다.
“모든 일에”란 말의 의미는 절대 순종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선별하여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모에 대한 절대 순종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전적 순종이란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온전함은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8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선입니다. 부분적인 선이 아니라 완전한 선을 요구하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빌 4:8). 바울이 권하는 것도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4에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점과 흠이 없는 것은 순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정의하는 사랑도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견뎌야 사랑입니다. 어떤 것은 참고 어떤 것은 참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한 인내가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절대로 선별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순종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이란 말은 이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순종하면 이미 순종이 아니지요. 순종이란 말은 가리지 않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리가 긴 기린은 서서 새끼를 낳습니다. 새끼 눈으로 볼 때 어미 배에서 땅까지는 얼마나 높겠습니까? 그 높은데서 등을 밑으로 하여 땅에 떨어집니다. 잘못하면 낙사할 만한 높이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미에게서 태어나자마자 몇 초 되지 않아 새끼 기린은 웅크리고 앉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미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발로 새끼를 차서 발랑 넘어지게 합니다. 어미는 새끼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찹니다. 일어서면 다시 발로 차 넘어뜨리기를 반복합니다. 새끼가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무리를 지어 다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수의 먹이감이 되고 맙니다. 엄마 기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빨리 스스로 일어나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야속하고 고통스럽지만 어미는 새끼를 사랑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부모에게 불평하지 마십시오. 부모의 호된 훈련과 꾸지람은 정글 같은 세상에서 견딜 수 있게 하는 훈련입니다. 비록 현재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순종하십시오. 불평보다 순종이 앞서야 합니다. 순종하면 세상을 이기는 강한 승리자 됩니다. 불평이 앞서면 스스로 망합니다. 불평은 망하는 길입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 미술시간에 크레용을 안 가지고 갔습니다. 이 아이는 너무 가난하여 크레용을 가지고 갈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번번이 말을 듣지 않는 이 아이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훔쳐서라도 가지고 와야지”. 그 아이가 장차 커서 무엇이 되었겠어요? 아이가 큰 도둑이 된 겁니다. 아이에게 순종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순종하도록 옳은 것을 지시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셋째, 자녀는 부모를 주 안에서 기쁘게 해야 합니다.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자녀의 순종은 부모님을 기쁘게 합니다. 자녀의 순종은 부모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순종은 부모를 기쁘게 하지만 불순종은 슬프게 합니다. 가정은 아기의 울음소리와 어머니의 노래 소리가 멋진 화음을 이루는 곳입니다. 따뜻한 심장과 행복한 눈동자가 서로 만나는 곳입니다. 상함과 아픔이 싸매지고 기쁨과 슬픔이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어버이가 존경받고 어린이들이 사랑 받는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조촐한 식탁일지라도 왕궁이 부럽지 않고 돈도 그다지 위세를 부리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며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어린이들의 맨 처음 학교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렇게 좋은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보세요. 자녀가 얼마나 부모에게 큰 기쁨입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내가 너를 낳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정말 그 출생 때의 기쁨이 지속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3:17에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기뻐하는 자는 기쁨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께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쁨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성가에도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합니다. 가장 큰 기쁨의 대상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스바냐 3:17을 보세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면 부모의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어른들이 자녀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낳지 말아야 했는데, 실수로 낳았다”, “아들이 아니라 원수다”, “이게 애물단지다”, “나가서 죽어라”는 등의 말입니다. 순종하지 않다가 이런 때에만 순종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진짜 나가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자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네가 나의 아들 딸 된 것 감사한다”, “네가 내 기쁨이다”, “네 때문에 내가 살맛이 난다” 등입니다. 이런 말들은 자녀들에게 용기를 주고 사랑으로 자라게 만듭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20)고 합니다. 정말 우리의 자녀가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 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녀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1889년 역사에 남을 만한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들은 사촌 남매인 불법부부였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성미가 급했고, 어머니는 주부로서나 엄마로서의 일에는 흥미가 없고, 바깥 사교 생활에만 흥미를 느껴 나다니기만 했습니다. 그후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알코올 중독자인 숙모에게 맡기고 달아났습니다. 16세가 된 소년은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연명하다가, 결국 독일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그는 정치계에 투신하여 극렬분자가 되었습니다. 반란 음모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어 다시는 정치계에 나서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감형 출옥의 혜택을 받았으나 더욱 맹렬히 정치 활동을 했고, 마침내 1933년에 독일 국민의 절대 영도자인 총통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고, 그로 인해 독일과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렸고, 그 후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인류가 이 아이가 내뿜은 독기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같은 해에 다른 한 아이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흡족히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데리고 캔자스 농촌으로 이사했는데, 그 이유는 농촌 생활이 아이의 신앙 교육에 유익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을 전해 주었고, 가족 모두가 교회의 가장 적극적인 봉사자로서 이름이 높았습니다. 소년은 어른으로 성장해서도 어머니의 두 팔에 안겨 간곡하게 기도하던 매일 저녁의 일과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도 군대에 흥미를 느끼고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훗날 훌륭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의 승전장으로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44년 이들 두 사람의 동갑내기는 전투에서 대면하였습니다. 11개월에 걸쳐 히틀러는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와 싸웠습니다. 패전한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지하 방공 대피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소식을 접한 전 세계는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히틀러보다 25년을 더 살았고 1969년 80세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으며, 그의 죽음을 전 세계가 애석해 했습니다. 이 두 동갑내기 아이의 이야기는 부모들의 신앙과 가르침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가를 역사적으로 증명합니다. 성경은 “자녀들아”라고 하나님의 소리로 부르며 권합니다. 자녀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으세요. 자녀 된 자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세요. 부모의 기쁨이 되세요.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세요. 자녀의 인생은 부모와 자녀가 합작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품입니다. 신앙적 삶을 살고 존경받는 자녀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녀들로 말미암아 부모님이 기뻐하고, 가정이 기뻐하고, 교회가 기뻐하고, 사회가 기뻐하는 자녀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 여러분, 여러분 때문에 이미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십니다. 이제 부모님의 기쁨이 되세요. 모든 일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세요. 부모님이 세상에 계시는 것은 잠깐입니다. 순종하는 자녀는 이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
욜 2:23-17 / 백장흠 목사
사람들의 마음에는 잘하겠다는 의지가 있습니다. 학생도 공부 잘 하고 싶고 사업가는 사업을 잘 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신앙인들도 예수를 잘 믿고 싶어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면 몇 가지 원리를 지켜야 합니다.
1)원리대로 믿어야 합니다. 원리는 성경입니다. 처음부터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으려고 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뭐라 하는 가? 를 생각해보면서 믿어야 합니다.
2)기쁨으로 믿어야 합니다. 즉,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믿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부담스럽다 찾아오는 것도 부담스럽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를 좋아하여 찾아오는 성도들이 고맙다 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3)만족하게 믿어야 합니다. 불만이 불순종을 가져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여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만족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4)처음부터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이며 믿고 구할 때에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약속입니다. 23절을 보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 늦은 비는 말세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약속입니다.
28절에는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신다”고 하였는데 성령 받을 대상은 만민이라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선택된 사람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신약에서는 만민에게 부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29절에는 “내가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신다”고 다시 약속합니다. 남녀차별이 있을 때 남종에게 주신 성령이 여종에게도 부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을 부어주시는데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첫째, 성령이 임할 때에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 다고 하였습니다.
23절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 하나님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은혜 받은 사람들의 모습은 기쁨입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더라”(행 6:15)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1) 담대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핍박하고 돌을 던져도 담대하였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2) 거룩한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죄악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3) 자비한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감정에 끌리지 않고 원수 맺지 아니한 그리고 악독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4) 기쁨의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소망 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기쁨은 행복입니다. 아무리 좋은 여건 조건을 갖추었어도 기쁨이 없다면 이는 불행입니다. 기쁨은 참으로 중요한 에너지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고 하는 ‘와나메이커’(1838-1922) 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체신부 장관을 지낸 모범적인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가장으로, 대사업가로 체신부 장관을 지내면서 교회에서 주일학교의 지도자로 봉사하였습니다. 삶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입니다. 그의 사업 60주년 기념파티에서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큰 사업가로 그리고 모든 일에 성공자가 되었는지? 원인이 무엇이었나?” 질문에 대하여 83세의 와너메이커씨는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합니다. 기쁨으로 사는 것이 성공비결입니다. 기쁨으로 살면 건강해집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건강입니다. 건강을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으로 운동요법이 있습니다. 자꾸 움직이면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식이 요법이 있습니다. 자기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고 소식하고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게 있습니다. 심리요법입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약물요법도 있습니다. 적당한 약을 사용하는 것입다. 그러나 성령요법이 제일입니다. 성령은 기쁨입니다. 자꾸 기뻐하고 웃으라는 것입니다. 웃음은 생리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면역체를 강화하고 육체적인 고통을 완화시킵니다. 기뻐하고 웃으면서 식사를 하면 살이 찌지 않는다고 합니다. 감기에도 덜 걸린다고 합니다. 위산을 줄여주고 암의 확산을 늦추게 한 답니다. 수명을 연장시켜 준다고 합니다. 정신 없는 사람 즉 미친 사람 아픈 것 보았습니까? 자꾸 웃으니까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예쁩니다. 왜 잘 웃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400번 이상 방긋 방긋 웃을 때 더욱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웃음이 적어진다고 합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웃는 얼굴이 보기 좋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 기쁨이 있을 때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어떤 이가 하는 말 요즈음 웃을 일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면 기쁨이 주어집니다. 기쁨의 목록을 기록해 보세요. 우리에게는 기뻐할 이유가 많습니다.
(1)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 기쁩니다.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대하던 관계가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대로 현대문명은 우리에게 과학을 주었고 예수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2)주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이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별 볼일 없는 사람같이 보이지만 우리를 선택하여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면 기쁨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축복을 받으면서 주님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는 몸이요, 둘째는 몸 안에 담겨 있는 인격입니다. 셋째는 선천적인 재능입니다. 넷째, 후천적인 기술입니다. 다섯째는 시간과 재능인데 이런 것들은 어떻게 사용하고 보존 할 것인가? 그리고 이런 것들을 바르게 사용할 때 세계는 평화가 올 것입니다.
(3)무엇보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 기쁨이 옵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성령은 희락입니다. 즉, 기쁨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항상 기뻐하면서 삽시다. 기쁨은 공부해서 얻는 게 아닙니다. 낙천적인 삶을 산다고 하여 온전한 기쁨이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주안에서 살기에 기쁨이 생깁니다. 가난하여도 실패하여도 지속적인 기쁨이 있었습니다. 기쁨은 고난을 극복하게 합니다. 핍박이 와도 기뻐하면서 승리하였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서 환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복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이 임하였을 때 꿈을 주십니다.
28절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기 전에 먼저 꿈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하늘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는 늘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헬라말로 안드로포스입니다. 이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타락한 이후에 땅을 바라보고 삽니다. 땅의 것을 추구합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 비전이 생겼습니다. 하늘에 별과 달이 있습니다. 너희 자손이 그와 같으리라 하십니다.
1. 꿈이란 미래에 대한 그림입니다.
설계도입니다. 하나님이 그려주신 그림이 비전입니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꿈은 밤에 잠을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 계획을 세우고 성취하겠다는 다짐도 아닙니다. 꿈이란 야망이 아닙니다.(ambition) 야망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야망이 큰 사람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줄 수 있습니다. 서구 백인들은 야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강탈하였습니다. 많은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인도하시는 중에 주시는 거룩한 그림입니다. 소명입니다.
2. 꿈이란 삶에 대한 목표입니다.
삶에 대한 방향제시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지 아니합니다. 목표가 분명하기에 바르게 살아갑니다. 요셉은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이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이 있기에 어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여인이 유혹을 할 때에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목표가 있기에 그는 움직이지 아니하였습니다.
3. 꿈이란 미래 소망입니다.
비전이 무엇이냐 할 때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란 도전과 응전으로 펼쳐진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는 충격과 반응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충격이 오고 도전이 왔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응전하느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불평하고 좌절하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 받아 주시는 미래의 꿈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긍정적으로 받고 응하면 창조적인 미래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역사의 주역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불확실하고 분명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 니다. 이런 때에 성령이 임하여 새로운 꿈을 갖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 꿈을 가진 사람들은 어떠하였습니까?
1) 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노력하였습니다. 꿈이란 머리보다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나는 것은 죽은 꿈입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말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하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2)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계획한대로 되지 아니합니다. 그런 때에 포기 하고자 하는 나약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 마음을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1963년 3월 8일 유명한 워싱턴 대행진 때에 한 연설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꿈이 있다.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꿈만 놓치지 않는다면 미국 내에 꽉 차있는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심포니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번 시련이 와도 조금도 나약해지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은 꿈을 이루는 성공자가 되기 위하여 네 가지 C자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 ‘Curiosity’(호기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험심이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나에게는 특별한 재능은 없다. 단지 모든 것에 열정적인 호기심을 가질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Noting venture, noting win”이라 하였습니다. 모험 없이는 승리도 없다는 말입니다.
(2)‘Confidence’(신념, 확신)입니다. 이 꿈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믿음 가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 9:23)
(3)‘Courage’(용기)입니다. 꿈을 가진 이들은 담대하여야 합니다. 조금 어렵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4)‘Concentration’(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집중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꿈을 주십니다. 성령이 주시는 꿈을 가진 이는 활력이 넘칩니다. 박력이 있고 패기가 넘쳐 납니다. 삶에 생기가 넘칩니다. 살 맛납니다. 성령이 임하여 새로운 꿈을 가지고 그 꿈 이루어지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령이 임하면 이적이 일어납니다.
30절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 충만을 체험한 이들은 한결같이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중병에서 고침을 받습니다. 불치의 병이라도,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성령 받은 이들이 기도하다가 치유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인이라면 누구라도 이적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인들 10명중에 8명 이상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기적을 믿으며 그 중에 반수 이상은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교회에 처음 나온 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 질문을 하더랍니다. 하나님은 예전에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왜 계속하지 아니 하시나요? 그를 바라보던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매일같이 기적을 행하시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그걸 바라볼 여유가 없더군요.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삽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하면 기적이 나타나는데 바로 변화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변화입니다. 물론 기적이라 하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어떤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적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중에 기적은 제자들을 변화시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진흙에서 반석이 되었고, 요한은 온 마을을 불사르자고 말하는 과격한 성품의 사람이었는데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쉽지 아니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야말로 대단한 기적입니다.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되 오직 성령으로 되느니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여 자기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 합니다.
무엇이 변화되어야 합니까?
1)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마음이 달라지지 아니하였는데 무엇이 될 것 같습니까? 성령이 임하면 이것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친구가 우선이었고, 가족이 제일이었는데 마음으로부터 주님이 제일이 되었다. 그것이 변화입니다. 억만금을 주어도 그것을 사양하고 나는 예수 위해 살다가 죽으리라 이러한 자세로 살게 되었다면 변화입니다.
2)언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무엇으로 상처받습니까? 언어입니다. 말 한 마디 잘못하여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이 생깁니다.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하게 됩니다. 방언이란 언어의 변화됨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을 합니다. 격려합니다. 축복하는 말을 합니다. 말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3)생활이 변화됩니다.
예수 믿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울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를 보면 두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Pletheis’입니다. 이는 사역을 위하여 주시는 은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행 2:1-4, 4:8, 7:55절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하나는 ‘Pleres’ 라는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삶이 변화되는 게 이적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변화된 이적을 보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임하는 역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성령 받기를 사모하세요.
2. 약속을 믿고 기다리세요.
3. 뜨거운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죄는 과감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5. 부지런하고 신령한 욕심을 가지세요.
그러다가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새로운 비전을 보면서 기쁘게 수많은 기적을 행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욜 2:26 / 김원효 목사
제가 은혜 받은 성경 말씀 중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욜2:26) 다이어트를 하시는 분들에게는 ‘풍족히 먹고’라는 말이 좀 거슬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는 ‘풍족히 먹고’라는 말이 너무나도 절실하고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6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현재의 가난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더욱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싶은 소원이 항상 있었습니다. 저 역시 한국의 그런 가난한 시대를 조금은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즉 풍족히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를 비롯해 당시의 사람들은 먹는 것에 대해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당시의 인사말도 “니 밥 묵었나? 진짜 묵었나?” “식사 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라는 말이었습니다.
혹 상대방이 식사를 못한 것 같으면 밥을 한 끼 차려주는 것이 기본적인 호의고 예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밥 많이 묵어라.”라는 말이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한단다.”라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았던 저이기 때문에 제가 목회를 하면서도 하나님 아버지 집에 찾아온 성도님들을 잘 먹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감사하게도 저희 교회가 개척 때부터 지금까지 풍족히 잘 먹고 지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느 교회가 불고기를 20년간 먹어서 지긋지긋하다고 하는 교회가 있을까요? 아- 물론 있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 고기를 한 달 동안 지긋지긋하게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가 몇 년 전부터는 먹는 것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빵도 Cob's Bread 빵집을 통해 거의 지긋지긋하게 먹었습니다. 요즘은 Safeway 빵도 매주 가져와서 먹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잘 먹고 잘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풍족히 먹고 기분이 좋아서 신나게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소원합니다.
성가대에서 찬양하고, 찬양팀에서 찬양하고, 가족들도 찬양하고, 혼자서도 흥에 겨워 찬양하면서 매우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하기를 축원합니다. 요엘서에 보면 좀 특이한 구절이 있습니다.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1:4)
즉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 사과나무 및 모든 나무가 다 말라 비틀어 졌습니다. 그와 함께 인간의 기쁨과 희락도 말랐습니다. 찬양은 이미 끊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슬픔과 울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들짐승들도 먹을 것이 없어 헐떡거리고 힘없이 쓰러져 죽습니다.
더구나 전쟁이 터졌습니다. 적군이 남아있는 양식을 모두 약탈해갔습니다. 아- 살기가 너무 뻑뻑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2-13)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욜2:19)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욜2:24)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욜2:26) 할렐루야!
여러분, 말세는 환난과 재난의 시대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염병과 전쟁과 기근입니다. 요즘 미국을 비롯해 한국과 여기 캐나다 및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나라인 캐나다도 가스 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이제는 차타고 멀리 가기가 부담스럽습니다. 돈이 좀 부족합니다.
이때 축복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27:28)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양식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시132:15)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라.”(겔36:30)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주의 하나님이 아니요,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이 외국 땅에서도 축복을 받아 나누어주고 베풀어주기를 원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37:19, 21)
여러분, 가난은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난하면 수치를 당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어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의 수치를 제거해주시고 풍족히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그 풍성한 축복을 받게 하시려고 축복의 비결을 성경에 적어놓으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관심 있는 책과 동영상은 ‘부자 되는 법’에 관한 것입니다. 더욱이 굉장한 부자가 그런 강의를 하면 사람들이 아주 많이 봅니다. 보통 조회 수가 백만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하나님이 ‘부자 되는 법, 축복 받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하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에이, 그거 뻔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뻔합니다. 일단 축복의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다행히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탕자처럼 회개하는 심정으로 겸손히 돌아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습니다.(눅16:17)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풍족히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쳐준 축복의 비결은 이렇습니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13:4)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28: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그리고 축복의 아주 좋은 비결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말라기 3:10에 나오는 비결입니다. 이 축복의 비결은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이 말씀을 성도님들이 제대로 받지 못하게 합니다.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실족하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한때 저희 아버님도 이 말씀 때문에 교회 안 나가겠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때문에 저희 어머님과 아버님이 대판 싸우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일까요? 혹시 이 말씀 때문에 실족하고 시험이 들 것 같으면 이 구절을 쳐다보지도 마십시오. 저는 이 말씀 때문에 여러분들이 시험에 들어서 교회 안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때가 되어야만 합니다. 신앙도 제법 자라야만 합니다. 혹시 그 때가 되신 분들은 이 말씀대로 실천하는 중에 더욱 풍족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9)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조금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니 참 기분이 나쁜 말씀입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빠도 이 말씀 역시 진리입니다.
옛날도 그렇고 요즘도 그렇습니다. 부자가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집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좀 부족하다고 느끼시는 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풍족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미 풍족한 축복을 받으신 분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느니라.”(잠21:13)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3:17)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들이 풍족하게 먹고 행복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음식을 풍족히 드십시오. 그리고 잊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그 풍족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시고, 같이 감사하고, 같이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