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라는 말
본래 유대인들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나사렛당’이라고 불렸다.예수의 추종자들이라는 말이며 예수는 나사렛출신이라는 것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안디옥 출신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데는 유대에서가 아니라 이방인 개종자 누가가 태어난 지역인 안디옥이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크리스티아노스(그리스도인)란 명칭은 크리스토스(그리스도)에다가 구어체의 이아노스(라틴어 접미어 이아누스에서 빌려온 헬라어)를 접미시켜 만든 용어이다. 이 접미어는 원래 누군가에 속해 있는 노예를 일컫거나 혹은 그에 속한 가족들을 일컫는다. 대표적으로 빌립보서 4장 22절에 나오는 ‘가이사의 집 사람들’ οἱ ἐκ τῆς Καίσαρος οἰκίας. 호이 에크 테스 카이사로스 오이키아스)은 라틴어로 Caesariani이다.
헬라파 제자들이 예수를 ‘기름부음 받은 자’ 혹은 ‘메시야’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라는 말은 항상 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스도란 메시야에 대한 헬라어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일컬어 ‘큐리오스’(주)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썼다. 바울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즐겨 쓰곤 하였다.
그러다보니 이들 안디옥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르는 사람들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비아냥 대는 것은 당연하다. 즉, 저들은 ‘크리스티아노스’다. 그래서 탄생한 용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새로운 무리들에게 붙혀준 별명이며, 비꼬는 말이었다. 헬라인들이 이방인들을 일컬어 ‘바바로이’ 즉, 야만인이라고 일컬었듯,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인을 ‘개’와 같이 여겼듯, 역으로 안디옥 사람들이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를 부르는 무리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붙혀준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아니다. 다른 이들이 제자들을 핍박하는 용어였다. 거기에는 ‘그리스도’를 주구로 삼는 자들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사도행전 26장 28절에도 아그립바 2세가 바울에게 비꼬는 말이 있다.
엔 올리고 메 페이데이스 크리스티아논 포이에사이. 이를 직역해 보면 ‘간단히 말해 네가 나를 몰아세워 그리스도인 노릇하게 하는구나.’는 뜻이다. 신약에는 크리스티아노스란 말이 세 번 쓰이는데 사도행전에서 두 번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 나온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로 핍박한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 당시에 부끄러운 말로 들렸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도리어 그 이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정당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결코 스스로 자신을 지칭해서 부르는 말이 아니었다. 타인들이 제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었다. 초기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치욕적인 말을 들으면서 그들의 삶을 살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를 맹목적인 주인으로 따르는 도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었다. 그 ‘그리스도’를 우상으로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예수를 비록 ‘주와 및 그리스도’라 부르지만 그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육체 대로 부르는 호칭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따르는 그래서 육체의 종과 같이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무리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그 말로밖에는 쓸 수 없다.
아뿔사, 그런데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가고 세대는 바뀌고 있다. 안디옥 교회의 교부요 속사도였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크리스티아니스모스’라는 말을 스스로 이름붙이고 그 말을 안디옥교회의 교인들에게 공식명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따르는 자들이라는 명칭을 자기 동일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서부터 기독교가 탄생했고 오늘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타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절해야 할 용어를 채택하면서 또 다시 변용 유대교가 탄생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 덧붙혀 ‘그리스도교’라는 말로 자신들의 또 다른 패거리 집단을 형성 하였다. 그리스도교 담 밖의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자신들은 택함받은 백성이라고 자랑스러워 하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철을 밟고 답습한다.
사사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 기드온이 죽자 다시 바알브릿(삿 8:33)을 섬겼다. 바알브릿은 주인 언약(바알 베리트)이라는 말이다. 비와 폭풍의 신이며 농경신이다. 우상은 슬며시 들어온다. 그리스도를 기름부음으로 보지 않고,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알로 섬기기 시작한 것이다. 기름부음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 버렸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은 바알과의 한판 전쟁을 기록한다.
이 시대의 바알은 무슨 이름을 뒤집어쓰고 활보하고 있는가.
글쓴이/ "예수의 믿음" 지은 이 김창호(펌글)
첫댓글 신약에서 그리스도에다가 복수어미를 붙여서 크리스토이라고 사용한 적은 없는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예수님 외에는 없는 것이고,
신자들은 그 분을 주요, 임금이요,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이므로 비아냥으로 그랬든, 진심으로 그랬든 크리스티아니(그리스도에게 속한자들)라고 불리워 진것은 합당한 것이므로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하여 그리스도가 바알 브릿이 되었다는 통렬한 지적이 아프게 느껴집니다. 기름부음이 우리 각각에게 임하면 더 이상 선생이 필요없는 기름부음의 성취는 온데간데 없고 그 그리스도만 섬기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건널 수 없는 강이 느껴집니다.~^^
하필 구약의 악한 사례를 신약의 가장 귀한 용어에 적용시키는 이유가 무엇인데요?
동기가 의심스럽습니다.
솥뚜껑을 볼적마다 자라라고 생각하는 것도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한다해서 부끄러워 말 것을 권고한다. 도리어 그 이름안에서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사람들이 무어라하든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뜻은 우리 모두에게 소망이되었고 그가 주(Lord)가 된다는 뜻은 우리에게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에게도 기름부음의 소망을 불어넣어준 것이고 그와 함께 같은 길을 걸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헌데 그걸 걷어차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목매어 섬기려한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으니 바알 브릿이 되었다.
농경신과 다를 바 없이 그저 복과 구원과 천국을 베풀어달라는 복빎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기만 할까만은 현재의 기독교 일반이 그러하다는 의미다.
@타이로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베드로 그리스도, 바울 그리스도, 요한 그리스도도 있다는 말인데,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이말입니다. 있어요? 없어요?
성경에 그리스도가 복수로 쓰여진 경우가 있다면 인정해 드릴 것입니다.
만약 없는 데도 그렇게 말한다면...
님의 이론은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이론과 똑같은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 바, 뉴에이지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갈렙 요한 그리스도 베드로 그리스도 바울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왜 필요하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성을 호도하는 표현에 불과합니다. 선진들의 모든 예언은 '아들'에 수렴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의 정점이고 징조이지요. 예수 라는 이름의 계시성이 있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계시성을 강조하는 게 성서이기에 굳이 바울 그리스도라는 게 있을 이유가 없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삼아야할 하등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으로 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 행위에 다름 아니지요. 그는 이를 염려해 산으로 피해다녔거늘 오늘날은 도리어 역행의 길을 걷고 공공연히 임금삼고 있으니..
@타이로 윗글의 논조를 따른다면, 베드로나 바울이나 요한은 기름(성령)을 받은 자이니 마땅히 <그리스도>라고 불리울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라고 불리우지 않았습니다.
왜냐? 불리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예수님 외에 어떤사람도 그리스도라고 불리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갈렙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이고 요한 그리스도라 굳이 부르지 않는 것은 요한이라는 이름의 상징성은 비둘기(?)이지 예수(예수아,여호수아,호세아,야웨)의 상징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이해하던 시기를 지나 결코 육체로 이해하지 않겠다는 대전환이 바울에게 있었듯(고후 5:17), 만일 갈렙 그리스도라 칭한다면 육체대로 이해하는 것으로 글의 논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기름부음은 성소에 찾아오는 지성소의 빛이고 여기서 예수의 육체는 두 사이의 휘장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게 찌겨야 비로소 그 때 그 예수가 그리스도임이 오늘 내게 성취되는 것이라는 게 요지입니다.
@타이로 만일 박아무게 그리스도 어쩌구의 방향으로 윗글을 읽는다면 철저히 육신적으로 읽고 비판하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를 변증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타이로 염려 이해못할 바 없지만 그리스도는 여기 있거나 저기에 있는 박아무게 김아무게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각자의 내면에 비밀스럽게 임하는 기름부음이 그리스도입니다. 이 점이 각각에게 철저할 때 내가 그리스도다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무릎 꿇고 사울이 아닌 바울의 작은자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선민의식과 배타적인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기름부음이 선민의식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님은 위글을 지극히 오해하고 계신겁니다.
@타이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패거리(?), 우리만 구원받은자라는 울타리를 걷어내고 벗어나 도리어 그리스도에 충실하자는 제안이고 근원적으로 어디에서 잘못된 것일까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과 탐색의 흔적 정도로 윗글을 보시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서구신학은 되짚어져야하고 근원에서부터 다시 물어져야 합니다. 성서가 이땅에 들어온지 200년이 넘었으면 그에 걸맞는 영성의 시대가 찾아와야 합니다. 서구신학의 아류에서 벗어나 성서를 제대로 읽어가보자는 제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