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쇠고기때문에 문제가 한참이죠. 덕택에 우연히 알게된 역사적 사실이 있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지금의 경주일대, 그러니까 경주에서 포항으로가는 형산강유역지역하고 지금의 경주시남쪽의 옛날부터 월성이라 불리던 지역에서는 돼지를 안키운다더군요. 돼지하면 방목, 방목은 삼포제, 이포제같은 밭농사랑 연관이 있죠. 그래서 알아본 결과 역시나 이곳사람들은 밭농사를 안짔더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라건국신화에 보면 6성이 나오고, 이들 6가지 성씨가 유래된 지명이 나오죠. 여기가 지금의 경주의 남쪽에서 동쪽에 이르는 지역인데 여기사람들은 온니 논농사에 소는 키우고 돼지는 안키우더군요.
같은 남부지방이라도 부산(옛날 가야)이나 아니면 대구(왠만큼신라가 크고 있을때 신라땅이 됨)만하더라도 밭농사를 많이 짓죠. 그리고 혁거세도 나정인가 하는 우물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있는 6성의 기원마을들또한 그기원에 꼭 하천이나 우물, 저수지등을 끼고 있는것또한 흥미롭더군요. 제가 알게된 경주 손씨의 경우 활천인가하는 천근처땅이 그들 씨족의 기반이더군요. 그러한 천들은 원래 관계용수를 대거나 하는 천으로서의 역활을 하는 거겠죠. 근데 그 활천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또랑정도의 규모밖에 안되는 한 가문의 상징으로 나오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다른 씨족과의 경계선 같은 것은 확실히 아니고요.(하천이 집안땅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흐르고 있는거니) 그 지방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경지비율을 생각하면 그천이 애초에 인공적으로 그러니까 농업용운하나 관계용수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그러한 집안땅이 있는 곳을 상징하는 곳이 될수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꽤나 들더군요. 지금 사람들은 천으로 알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고 그 것이 일개 하천에 불과하더라도 거꾸로 왠만한 시기동안 하천으로 불릴만한 것을 만약에 공사로 만들었다면 그유역사람들이 다같이 답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겠죠. 그래서 그 천이 가문의 상징이 되지 않았나는 의심을 해봤습니다. 게다가 왠만큼 오랬동안 개간을 해댓으니 밭은 없는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그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일단 가정하고 그 당시의 우리나라역사는 한참 농업용수로를 만들고 논을 늘려나가고 있는 시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제랑 또 어딘가에 있는 저수지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될듯 싶구요. 밭하고 틀려서 논은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적으로 쌀농사가 될수있게 된 지역은 낙동각하구삼각주일대밖에 없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신라건국신화와 더불어서 당시 사회 지도층들의 경제적 기반과 군사적 기반이 어디에 있는지 나름 유추가 가능하지 싶더군요. 두말할거 없이 경제적 기반은 농업, 군사적 기반도 농업과 관련된 집단노동이었을 겁니다. 부산같은 경우에는 바로 옆의 양산만해도 논비율이 엄청난데 밭비율이 많았다고 하네요. 해운대나 송정같은 곳에 원래 있던 자연 취락에는 밭이 다 하나씩 있었답니다. 논은 있는집은 있고 없는집은 없구요. 당연히 소뿐만 아니라 돼지도 키웠구요. 부산출신 귀족으로 유명한 사람이 하나 있죠. 바로 정철입니다. 그의 집안인 동래 정씨집안은 한때 하마정같은 것도 자기들 사는 동래 앞에 세운 고려대의 대가문이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고려대에나 들어서 알만한 인물을 배출해낸 지역의 경우 원래 산이 너무 많아서 밭도 좀 있는 거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부산에서 수영천 다음으로 큰 하천이(낙동강빼고) 온천천입니다. 이 온천천유역이 예전부터 동래라고 불린 곳이지요.(임진왜란당시 동래부사가 죽은 바로 그곳입니다. 윗동네, 아랫동네할때 그 동네가 아니고요.) 그리고 동래부사가 있던 읍성이 있는 곳인 명륜동일대에 교과서에도 나오는 복천동고분군이 있으니 왠만큼 옛날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수 있죠. 그런데 희안하게도 그 온천천이 명륜동을 지나서 그 다음으로 지나는 연산동일대는 가장최근까지도 늪지대로 남아있다 최근에 들어서야 매립되어 사람이 사는 곳으로 바꼈습니다. 즉 이곳사람들은 코앞에 논으로 일궈 먹을 땅이 있는데도 끝나정 그땅을 옛날모습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줘버린거죠. 그 원인은 복천동 고분군을 보면 잘나타납니다. 복천동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익히알려진 가야계의 유물들, 그러니까 이지역의 유지들은 예전부터 농업이 주업이 아니었던 게지요. 또 한예를 들고 싶은 곳이 부산의 만덕사주변의 땅인데 이곳은 지역지에 분명 고려시대에 만덕사가 들어서면서 취락이 들어섰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만덕사에서 얼마멀지 않은 곳에 계단식 논들이 있죠. 이 논들이 고려때부터 있어온 것임을 알수 있죠. 연산동과 대조군으로서 설정해야되는 곳이라 할까요. 이곳은 확실히 경작에 불리한 곳이데 누군가가 개간을 해버렸군요. 고려 어느때쯤에... 그 유명한 정철의 경우도 후삼국말기에 유명해진 호족계열이 아니라 고려왕정이 들어서고 고려의 지배계층인 문벌귀족. 그리고 후에 조선이 들어서고 조선말기에 동래상으로 유명해진 계열(역시나 동래정씨)임을 감안하면 6성으로 대표되는 신라, 삼한의 지배계층과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죠.
과거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에는 무슨무슨평야, 무슨무슨평야가 있다는 식의 기술을 했죠. 이는 마치 우리나라에 곡창지대가 있다는 투의 기술입니다. 그러나 경상도 일대를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논으로 바꿔먹을만한 땅임에도 그렇지 않게 된 곳이 있음을 알게되며 또한 워낙 오래갈아먹어서 그 기원조차 애매한 곳조차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게됨니다. 그리고 그 것은 특정시대에 어느 산업이 가장중시되었는가 그 산업의 주체가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이었는가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죠. 전라도의 경우에도 이러한 가정이 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 한반도에서 자연적으로 벼농사를 지을 수 있게끔 된 지역은 낙동강하구의 삼각주일대의 매우 좁은 구역임이 분명합니다. 나머지는 죄다 농민들이 가꾸고 일궈서 만든 것이지요. 관계로(큰 물줄기)를 파고 다시 그 주변으로 작은 물줄기를 파서 물길을 내서 논을 튼겁니다. 결국 삼한, 통일신라때의 식량생산과 인구를 조선조를 기준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완전한 오류란 얘깁니다. 그리고 밭의 생산량(칼로리환산)은 품종에 좀 심한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조와 삼한때의 작물종이 같다는 것도 완전한 넌센스죠.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몇몇 부분은 역시나 좀 뜻이 모호하군요. [양산만해도 논비율이 엄청난데 밭비율이 많았다고 하네요.] 이런 구절만 해도 양산에 논이 많다는 건지 밭이 많다는건지 구분이 안가네요. [양산만해도 논비율이 엄청난데 (원래는) 밭비율이 많았다고 하네요.] 정도 말씀 하시는걸로 이해하긴 했습니다만;;
하여튼, 개간사(?) 일종의 기술사라고 봐야 될까요. 당장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초기때부터 꾸준히 간척과 밭의 논 전환이 이루어졌지요.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화로 감소 하지만 숙종대 거의 복구되고 그 이후에 조선의 전결이 제자리 걸음인것은 개척이 안되었다기 보단 개척지,은결등의 토지조사가 제대로 안된 이유가 크고요 (애당초 토지조사도 돈 잡아먹는 골 아픈 사업이다보니-.-a)
아 그리고 활천의 경우, 조금 고려해봐야 될게 논 개간을 위한 인공수로일수도 있지만, 씨족과 역사를 함께하고 지명이 붙을 정도라면 역시 오래된 자연천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큰 하천들은 개간과 벌목등으로 토사가 퇴적되서 퇴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형도 잘모르고 제 전공도 아니라 딱히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제 추측입니다.
옆에 있는 양산만해도 논비율이 엄청난데 부산은 밭비율이 많았다고 하네요로 수정해야 겠네요. 댓글로 다는 귀차니즘 ..
논의 발달과정에 대해 많이 알게되서 감사합니다. 더 알고 싶은데 참고할만한 서적은 없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