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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프로생활을 마감하는 J리그 진출 1호 노정윤.(사진 김병준) |
2006년 K리그 정규리그 최종전 울산과 포항의 경기가 벌어진 11월 5일 울산문수월드컵경기장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1990년대 한국축구의 허리를 떠받쳤던 미드필더 노정윤(35)이었다. 지난 4월 16일 제주전을 끝으로 사실상 선수생활을 정리했기에 그가 있는 곳은 울산 벤치가 아닌 관중석이었다.
이날 경기는 울산으로서는 더없이 중요한 일전이었다. 울산은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울산이 이날 경기에서 이기고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서울-경남전에서 서울이 지면 지난해처럼 극적으로 4강 플레이오프에 나설 수 있었다.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노정윤에게도 이날 경기의 의미는 남달랐다. 일찌감치 은퇴를 선언하고 2급 지도자 자격증을 땄지만 울산과의 계약기간은 올시즌이 끝날 때까지였다. 때문에 이날 열린 포항과의 경기는 노정윤이 선수 신분으로 맞는 마지막 일전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울산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후반 13분 헤딩 결승골을 터뜨린 돌아온 ‘사자왕’ 이동국의 활약에 힘입어 포항이 1-0으로 승리했다. 같은 시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는 김은중의 페널티킥 결승골로 서울이 경남을 1-0으로 물리쳤다.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울산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울산의 탈락은 노정윤의 선수생활이 서류상으로도 완벽하게 끝났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노정윤은 11월 16일 SPORTS2.0과의 인터뷰에서 “(울산-포항전이 올시즌 울산의)마지막 경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울산까지 내려가 경기를 봤다. 몸담았던 울산의 플레이오프행이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 이제 선수생활에 미련은 없다. 몇 년 전부터 (은퇴를)생각했고 차근차근 준비했다. 구단에서 은퇴식을 해 주기로 했는데 울산이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오르지 못하면서 동시에 많은 일들이 겹쳐 결국 없던 일로 됐다. 1993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이후 14년 동안 가족들이 내 일정에 맞추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제는 내 시간을 가족을 위해 쓰고 싶다”고 말했다. 노정윤은 12월 미국으로 떠나는 가족의 뒷바라지를 위해 바쁘게 지내고 있다. 울산이 코치직을 제의했지만 노정윤은 미국행을 선택했다.
선구자는 외롭다
일본 국내선수들의 기량이 늘면서 J리그 팀들이 한국선수를 선호했던 과거의 경향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연봉과 수당에서 한국과 격차가 줄어든 까닭에 선수들 또한 이전처럼 J리그를 동경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재진(시미즈 S펄스), 김진규(주빌로 이와타), 김정우(나고야 그램퍼스) 등 실력 있는 선수들이 여전히 J리그에서 뛰며 한국선수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에이전트의 권유로 K리그가 아닌 J리그를 프로 첫번째 무대로 선택하는 선수들도 적지 않다.
한때 일본프로축구에서 한국선수는 기량과 체력은 물론이고 강한 승리욕까지 있어 최고 수준의 외국인선수로 인정받았다. 1999년 세레소 오사카에서 J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던 황선홍 전남 코치는 “일본 프로축구에서 한국선수가 좋은 대우를 받게 된 데에는 노정윤의 역할이 컸다. 1993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한 노정윤의 연봉이 이후 J리그에 진출하는 한국선수들이 받는 연봉의 기준이 됐다”고 말했다.
부평동중-부평고-고려대 출신인 노정윤은 K리그 드래프트를 거부한 뒤 1993년 초 J리그 원년 멤버로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했다. 한국선수로는 처음이자 1993년 J리그에서 뛴 유일한 한국선수였다. 산프레체히로시마에서 노정윤의 높은 가치는 이듬해 큰 폭으로 오른 연봉이 말해 준다. 헌신적인 플레이로 동료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확고부동한 믿음을 얻은 노정윤은 350%로 껑충 뛴 연봉 계약서에 서명했다.
노정윤은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첫 해 연봉이 2천 5백만 엔(약 2억 원)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J리그의 대부분 팀들이 한국선수를 영입할 때마다 2천 5백만 엔을 첫해 연봉의 기준으로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1억 엔 수준까지 올랐고 몇몇 선배들은 이 정도의 연봉을 받았다. 현재 J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도 잘하고 있지만 당장의 활약상을 떠나 아직 3천~5천만 엔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으니 성공 여부를 속단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노정윤이 J리그에서 뛴 기간은 산프레체 히로시마를 시작으로 세레소 오사카(1999~2001), 아비스파 후쿠오카(2001~2002) 시절을 포함해 10년이다. 그는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때는 1993년 입단해 이후 5년 동안 몸담았던 산프레체 히로시마 시절이라고 했다. 산프레체 히로시마가 1994년 J리그 전기리그 정상에 오르며 노정윤 또한 처음으로 우승의 감격을 만끽했다. 그해 노정윤은 10골 10도움을 기록했다. 1999년 세레소 오사카에서는 황선홍과 한솥밥을 먹으며 ‘킹메이커’의 역할을 했다. 그해 노정윤이 기록한 10개의 도움 가운데 7개는 황선홍의 발끝에서 마무리됐다. 황선홍은 그 해 24골을 터뜨리며 J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많은 한국선수가 J리그에서 활약했지만 득점왕에 오른 선수는 올시즌까지 황선홍이 유일하다.
그러나 앞선 자는 외로운 법이다. 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헤쳐나가는 개척자의 고통을 주위에서는 쉽게 지나쳐 버리게 마련이다. 노정윤의 이름 앞에 ‘J리그의 선구자’라는 호칭을 별생각 없이 갖다 붙이지만 그 이면에는 뼈를 깎는 노력이 숨겨져 있다. 한국축구연구소 김덕기 사무총장은 “노정윤이 일본에서 특히 힘들었던 건 아마도 언어 문제였을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경기 도중 쓰러졌는데 사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괜찮다’는 의사 표시를 못 해 결국 교체됐고 들것에 실려 라커룸까지 갔다. 구단은 노정윤을 병원으로 옮기려고까지 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노정윤은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5년 뛰는 동안 외국인 감독이 3차례나 교체됐다. 새 감독이 오면 말이 통하는 일본 선수나 자신의 전술적 취향에 맞는 외국인선수를 영입한다. 이 기간 J리그의 외국인선수 보유 한도가 5명에서 3명으로 줄었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이를 악물고 뛰었다. 당시에는 에이전트도 없고 서로 의지할 한국선수들도 없었기 때문에 만삭인 아내를 이끌고 슈팅 연습을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몸담았던 5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뛴 외국인선수는 내가 유일했다”며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되돌아 봤다.
1998년 무슨 일이 있었나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 등이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했다. 이들은 PSV 에인트호벤과 페예노르트 등 명문 클럽에 둥지를 틀었고 뛰어난 활약으로 현지 팬들에게 ‘한국선수’의 강인한 인상을 심었다. 그러나 이들에 앞서 네덜란드 팬들과 구단의 관심을 끌었던 동양인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노테우스’ 노정윤이었다.
노정윤은 “세레소 오사카 시절이 내 생애 최고의 전성기였다”고 회고했다.(스포츠 서울) |
노정윤은 1997년 시즌을 끝으로 산프레체 히로시마를 떠나 유럽행을 모색했다. 물론 순탄치는 않았다. 독일 분데스리가 FC 쾰른의 테스트 기회를 얻었지만 불합격했다. 이어 당시 2부리그 소속이던 포르투나 쾰른의 입단 테스트는 통과했지만 에이전트와 논의한 끝에 2부 리그보다는 경쟁력이 있는 네덜란드 리그로 눈을 돌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노정윤과 동고동락했던 에이전트인 이반스포츠 이영중 대표는 “당시는 지금과 달리 한국선수의 해외 진출이 많지 않았던 때였다. 수많은 구단과 접촉한 끝에 네덜란드 리그 중위권 팀인 NAC 브레다에서 (노정윤에게)관심을 가졌는데 어느 정도 운도 따랐던 것 같다. NAC 브레다의 허버트 노이만 감독은 선수 시절 차범근 수원 감독과 한솥밥을 먹은 절친한 사이였다. 노정윤은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고 2년 계약을 맺게 됐다”고 밝혔다.
노정윤은 네덜란드 리그에서 뛸 때 “편안했다”고 했다. 노정윤은 네덜란드 리그를 “재미있게 축구를 할 수 있는 전술적, 환경적 조건이 충족돼 있는 리그”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어 “(NAC 브레다는)중소 규모의 팀이었지만 축구에 대한 열의는 명문 팀 못지않았다. 특히 아약스와의 경기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 우리 팀은 0-1로 졌지만 나와 함께 아약스의 골키퍼 에드빈 반 데 사르가 현지 언론으로부터 최고 평점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반스포츠 이영중 대표는 노정윤이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J리그로 복귀한 사정에 대해 “많은 팬들이 (노)정윤이가 못해서 1년 만에 네덜란드 리그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현지 팬들과 구단 관계자들의 (노정윤에 대한)반응이 대단했다. 네덜란드 리그 최고의 팀은 예나 지금이나 아약스다. 당시 모르텐 올센 아약스 감독이 ‘(노정윤이)2년만 젊었어도 영입하고 싶다’고 말했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옛 기억을 되살렸다.
노정윤은 1998년 1월부터 12월까지 NAC 브레다에서 뛰며 25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네덜란드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년 만에 네덜란드 생활을 접은 이유는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 노정윤은 “가족과 함께 쇼핑을 하는 사이 누군가가 자동차 유리창을 깨고 휴대전화를 가져간 사건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깨진 창 사이로 바람이 쌩쌩 들어 오는데 가족들이 심하게 떨던 장면이 며칠 동안 잊히지 않았다. ‘이 고생을 하며 여기서 계속 뛰어야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며 J리그로 급하게 복귀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노정윤의 주위 사람들은 네덜란드에서 뛰었던 기간이 짧았다고 해서 활약상 자체를 낮게 보지 말라고 입을 모았다. 노정윤의 유럽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한 지인은 “유럽에서 아시아 선수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편협하다. 송종국, 이영표, 박지성이 2002년 월드컵에서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단기전인 월드컵과 장기전인 리그는 분명히 성격이 다르다. 한일월드컵 이후 네덜란드 팀에서 한국선수 3명을 받아들인 데에는 당연히 이들의 실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8년 네덜란드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노정윤의 공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뼈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유일한 아쉬움은 K리그
평소 “월드컵경기장이 아깝다” “축구 행정을 이 따위로 하는가” “축구계를 분열시키지 말라”며 대한축구협회와 한국프로축구연맹 그리고 한국축구연구소를 싸잡아 질타하던 노정윤의 쓴소리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강도 높은 그의 쓴소리는 한국축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니다. 한국축구에 대한 또 다른 애정의 표현이다. 그는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스스로 다짐했던 한가지가 있다면 은퇴만은 K리그에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노정윤은 길었던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2003년 부산행을 선택했다. 그는 “부산의 행정이 투명했기 때문에 예전부터 호감을 갖고 있었다”며 부산으로 이적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노정윤이 1993년 K리그 드래프트를 거부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프로선수가 뛰고 싶은 팀을 선택할 수 없는 당시 축구계의 현실 때문이었다.
노정윤은 부산으로 이적한 첫해 27경기에 출전해 2골 5도움을 기록했다. 이듬해에도 20경기에서 1골 4도움을 올리며 노장의 힘을 보여줬다. 그러나 2005년 울산으로 옮긴 뒤에는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2005년 시즌 23경기에서 모두 교체 멤버로 나섰다. 노정윤은 “곧 은퇴할 선수가 선발로 뛰어서 뭐하겠나.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뜻에서 코칭스태프에게 교체 멤버로 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경기에서 공헌하지 못하는 대신 노장의 역할에 보다 충실하고자 했다. 노정윤은 구단 경영진과 만나 선수들의 처우 개선 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난해 막판 상승세를 타며 K리그 정상에 올라선 울산의 뒷심에는 수당 확정 등에 따른 동기부여가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한번 해보자’고 의지를 다지는 선수들의 정신력은 챔피언의 조건 가운데 하나다. 결국 노정윤은 1994년 산프레체 히로시마 시절 이후 11년 만에, 또 2003년 K리그를 선수생활의 마지막 무대로 선택한 이후 처음으로 우승 트로피에 감격스런 입맞춤을 할 수 있었다.
14년간의 프로생활에 ‘후회는 없다’고 단언한 노정윤에게도 하나의 아쉬움은 있다. 노정윤은 “14년 프로선수로 뛰면서 전성기라면 세레소 오사카 시절이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 팀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기 때문에 일본 매체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수없이 들어왔다.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K리그에서 와서는 ‘조금 더 빨리 왔었으면’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K리그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팬들에게 보였다면 지금과는 조금은 다른 상황에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노 정 윤
생년월일ㅣ1971년 3월 28일
체격조건ㅣ170cm, 74kg
출생지ㅣ인천광역시
학력ㅣ부평동중 - 부평고 - 고려대
A매치 경력ㅣ21경기 3골
경력ㅣ1993년 ~ 1997년 산프레체 히로시마 (일본)
1998년 NAC 브레다 (네덜란드)
1999년 ~ 2001년 세레소 오사카 (일본)
2001년 ~ 2002년 아비스파 후쿠오카 (일본)
2003년 ~ 2004년 부산 아이콘스 (현 부산 아이파크)
2005년 ~ 2006년 울산 현대
SPORTS2.0 제 26호(발행일 11월 20일) 기사
김덕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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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하..좀 어이없어....꼭 보니껜..노정윤이가 무슨 개척자, 선구자 처럼 묘사가 되어있어...노정윤이는 J리그를 개척하여 국위선양과 함께 한국선수의 위상을 높히고 후배들의 길을 터줬다..근데 이천수는 스패인에서 실패하여 한국 이미지 말아먹었다....ㅎㅎ...뭐 이러식으로 말하던데.....내 참 어이가 없어서...
노정윤 선수...J리그..그 딴데 안가도 되니...당신도 스패인 가지 그랬수~~어디서 스패인리그하고 K리그한테 6대 0으로 ?지는 J리그하고 비교...ㅋㅋㅋ 내 참...그리고 자기가 98년도에 이미 네델란드 리그에 진출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에...네델란드에서 박지성,이영표, 송종국을 영입했을때..무시할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고 하던데..이건 좀 아니자나....ㅎㅎ
솔직히 노정윤이 K리그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건 좀 불쾌하다.
ㅎㅎ 이제 노정윤선수같은 경우가 또나오겠군요... 실력있다 하는선수들은 다 일본 갔다 한국오겠군요...
아우..넘 길당..^^;;
굳이 자신의 공이라고 보는 건 맞지 않는 주장이네요. 세 사람의 네덜란드 진출은 자신과는 무관한 히딩크 감독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보는 게 옳은 판단이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