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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민족을 양분했던 베를린 장벽이 철폐되어, 동, 서독 사람들이 물밀 듯이 장벽을 넘나든다고 한다. 남의 나라 일일망정 우리가 크게 기뻐하는 것은 그 일이 우리에게도 통일의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제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과 고문으로 죽인 ‘냉전’ 이란 괴물이 사라지고, 이 땅에도 통일이 오리라는 희망의 크기와, 냉전 논리에 근거하여 태어난 국가 보안법을 이용해 아직도 연행, 고문, 폭행이 난무하는 우리 현실이 안겨주는 비통함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클지 나는 모르겠다.
2차 세계 대전의 범죄국가였던 일본, 이태리가 통일된 국가로 번영을 이루어 왔고, 세계 범죄 행위 때문에 민족이 동,서로 나누어야하는 처벌을 받았던 독일이 하나 되려는 이 시대의 변화!
2차 세계 대전의 피해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죄도 없이 민족이 갈라지는 판결을 받아야만했다. 우리를 갈라놓은 강대국들에 대한 증오심보다 더 큰 증오심을 동족에게 품고 서로 총칼을 겨누는 우리 민족을 독일 민족과 비교 해보면 수치감을 넘어 비통함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저 희들 나라 이익 때문에 이 민족을 갈라놓은 강대국들을 은인처럼 떠받들어온 이 철부지 민족아!
순진하다보니 워낙 교활한 강대국들의 달콤한 선전에 속았노라고 해두자. 또 지적 성숙도가 낮은 코 흘리게 철부지일수록 원색적인 감정 때문에 토라져 심통 부리는 기간이 길 수도 있고, 우리가 바로 이성보다는 감정이 좀 더 앞서는 편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아무리 철부지라지만, 45년간이나 심통을 부리다니, 성숙되지 못한 철부지 민족아!
형제간에 싸움 붙여놓고, 프로 권투 보듯이 좋다고 손뼉 치며 응원하는 무리들의 사악한 심보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철부지 민족아!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하라고 부추기는 말이 무슨 큰 진리인양 떠받드는 철부지 민족아!
토라진 형제가 돌멩이 들었다고 이간질해대며, 총으로 무장하라는 충동질을 조언으로 받아들이는 철부지 민족아! 너희가 거머쥔 총칼은 누구에게서 샀단 말이냐!
이제 새로운 세대만이라도 어리석은 기성세대를 닮지 말고 남과 북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통일의 역군이 되게 하려면, 그들에겐 민족의 하나 됨을 일깨워주고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치는 ‘새 교육’이 있어야겠다.
1.교육의 사회적 기능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여성 교육에 상당히 관심을 두었던 인물이다. 그의 일생이 인류 역사에 끼친 해악 행위는 나름대로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 당시의 여성 천시 풍조를 고려해보면, 진보적인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는 교육과 사회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 국가 관리에 교육을 최대로 이용한 인물이었다.
그의 지론은, 독일이 부강한 군국주위 국가가 되려면, 어린 소녀들에게 철저하게 군국주의 국가관을 주입시키고, 또 그들이 성장하여 자녀를 키우게 되면, 군국주의 어머니가 되어 그 자녀를 같은 방식으로 교육시키고, 그 결과 30-40년이 지나면 독일의 군국주의는 완성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군국주의라는 단어 대신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넣는다면, 그리고 우리 교육이 진정 민주주의를 심어줄 수 있는 교육이라면--- 30 내지 40여년이 지나면 민주 사회가 성숙해지리라 기대할 수 있겠다.
30-40년을 내다보고 수립한 그의 교육정책은 독일을 강대한 군국주의 국가로 만들었고, 그 결과 1차 세계 대전 동안, 고통을 참아내게 된 것 역시 청소년 시절부터 철저하게 군국주의 의식화교육을 시킨 결과였다.
결국 독일교육은 군국사회에 필요한 국민을 제공하는 역할로부터, 군국주의 사회를 유지시키고 나아가 그 사회가 목표로 했던 세계 제패라는 꿈에 근접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볼 때, 교육과 사회는 상호보완 작용이 있다는 것을 실증한 셈이다.
이것을 뒤집어서 보면, 어느 특정 사회의 교육 내용을 분석해보면, 그 사회를 통치하는 집단이 구상하는 미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 미래 사회 구도가 바람직한지, 그리고 전체 국민에게 유익한 모습인지를 판별해낼 수 있다.
교육과 관련지어볼 때, 아주 중요한 관심사는 통치 세력의 도덕성이다. 가정주부가 사용하는 칼이 강도의 손에 들려지면 무서운 흉기가 되듯이, 도덕성이 극히 결여된 통치 집단이 교육을 독점하게 되면, ‘교육이 사회 발전을 위한, 바른 사회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순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나 독일에서처럼 국민을 그릇된 방향으로 의식화시키는 사악한 도구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집권층이 이념분야에서 특히, 교육을 악 이용해왔기에, 거의 모든 국민이 세뇌 화되어 있었다.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말들은 경제 체제에서 나온 말이고, 민주주의니, 전체주의(독재주의)니 하는 말은 통치체제에 관한 용어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국가이니 무조건 민주국가라고 국민들을 의식화 시켜온 것이다, 과연, 자본주의 체제를 고수한 히틀러의 독일 정부가,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준수했으니 민주국가였던가?
결국 경제운용에 있어서 자유 경쟁을 기본으로 한 것이, 통치 체제에 있어서 민주주의라는 확증이 되지는 못하며, 따라서 ‘ 자본주의 국가이므로 민주국가’라는 말은, 국민을 얕본 선전, 선동 술책이었다.
민주체제하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스스로 결점을 보완해 나갈 수 있는 자정능력이 있었으나, 독재체제하의 자본주의 체제는, 정치인이 정치를 하고 정치인은 기업가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부정부패가 창궐하게 되어있다.
그동안 통치체제에 있어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억누르기 위해서, ‘ 자본주의 자유 경제체제이니 이미 민주국가’라고 선전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자유 민주체제를 부정하는 체제 전복 세력이다. 용공, 좌경이다 얼마나 매도하고 탄압해왔던가!
바로 이러한 병폐를 일찍 자각했기 때문에, 선진 국가들은, 교육을 통치 집단에게만 맡겨두지 아니하고, 국민 모두의 관심사로 공개 참여의 길을 열어놓고 있으며, 교육 자치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 분야에 대한 국민 감시 기능이 부족하여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과 독일이, 국민을 패권주의로 몰고 가 얼마나 큰 민족적 수난을 초래했으며, 부정, 부패를 기반으로 해서 권력유지에 눈이 멀었던 해방 이후의 한국 독재자들이, 교과서를 이용하여 독재체제를 찬양하도록 얼마나 의식화 시켜왔는지 깊이 인식하고, 바른 사회를 위한 바른 교육에 국민적 관심을 기울일 때이다
한 사회의 교육이, 나이 어린 소년 소녀시절부터, 성실하고 진실 되며 도덕적인 삶을 목표로 하는 국민 교육이 될 때,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만, 예의를 빙자하거나 화합을 빙자하여, 부정과 부패를 묵인하고 굴종을 미덕으로 여기게 하는 부도덕한 의식화 교육이 주류를 이루게 되면, 부정, 비리, 폭력이 난무하는 독재사회의 현실유지 기능은 할지 모르나, 진정한 화합과 진취적인 기상에 밑바탕을 둔 창의력 신장으로 민족적인 도약의 기틀이 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면, 건전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소수 정치인들이나 통치 세력들의 폭탄 적인 선언(6.29선언 혹은 5공 청산을 위한 몇몇 인사들의 퇴진 등등 )보다, 제도개선, 특히 교육을 국민에게 공개하는 제도개선이 중요하며, 그러한 조치가 이루어질 때, 통치세력이 국민을 또 속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민주화 조처를 취하겠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게 된다.
2. 한국 사회 비극 탄생의 배경
현재란 과거를 딛고서서,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는 말은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오늘의 현실이란, 과거의 과정을 똑같이 밟다보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끝장면만 보았을 때, 이해가 아니 되면, 필름을 앞으로 돌려 다시 보아야만이 마지막 장면의 의미가 명확하고 바르게 이해되듯이, 복잡한 한국의 현 사회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바른 삶의 자세를 유지하자면, 적어도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를 조명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돌이켜 보면, 독재자들은 혹은 해방 후 반민족적인 친일파들의 처별 시점의 상황만 두고 본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을 두둔하는 엉뚱한 실수를 저질러왔다.
하지만, 그들의 과거 행위부터 논리적으로 검토한 지성인들은, 잔인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과거를 반드시 단절시켜야한다는 합리적 이성과 거시적인 시야로 그들의 처벌을 주장했었다.
정부가 말하는 좌경, 용공, 민주세력, 반민주 세력, 극우집단 사회범죄 집단의 활개, 노사분규, 농민 문제 등등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용어와 사건들과 이 모든 세력들의 충돌 속에서, 일반 국민들은 역사적인 시각이 부족하면 어리둥절해 진다,
이 땅에 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휘말려 들게 되어 있는 격변의 역사 현장에서, 정확한 근세 역사 이해와 그에 따른 현실 파악이 없이는, 표면에 나타난 현상에 대하여, 그럴듯하게 선전, 선동하는 측의 말장난에 따라, 감정적인 지지와 반대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 진실에 입각’한 역사의 이해도 있어야겠다. 왜곡, 굴절된 혹은 미화된 역사교육으로 잘못 의식화된 사람들은, 잘못된 신념에 때라 철저하게 반민족적 ,반역사적 행위를 하는 다른 확신 범이 될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 이전까지 비교적 자주 독립된 사회를 유지하던 한반도는, 당나라의 군사적인 도움을 얻어 삼국을 통일한 신라시대부터, 통치에 있어 자주성을 상실한 모습이 빈번해 진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 한반도는 조공을 바치는 단계에서 심지어 왕의 옹립, 폐위까지 원나라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속국 형태를 띤 사회가 되고, 이조시대엔 왕위에 오른 후,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은 반쪽 국권이 있는 사회가 된다.
이렇게 통치에 있어 외세의 간섭을 받는 미완성된 자주국가 속에서, 외세에 대하여 굴욕적인 복종 자세로 보이고, 심지어 그 외세를 배경으로 정권다툼을 벌리던 지배층(양반 계급층)은 직접적인 고통을 받지 않고 안락한 생활을 했으나, 국민 대중들의 생활은 비참했었다.
지배층을 위한 경제 부담뿐만이 아니라, 지배층을 지배하는 강대국에 보낼 모든 조공 역시 국민의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피지배층인 국민 대다수가 이미 이러한 고통을 받는 가운데, 이씨 조선의 말기엔 정치마저 극도로 문란해져 부정, 부패가 극심해진 나머지 결국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 땅에서 일어난 동학 혁명세력이 주장한 것은 외세의 침입을 물리치고, 부정, 부패를 척결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외세에 아부하며 부정, 부패를 일삼는 양반 지배층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노비제도 등 철저한 계급분리 덕분에 거머쥔 권력을 이용하여, 안락한 생활을 꾸며온 양반들에게는 청천하늘에서 날벼락을 맞는 격이었다,
그 당시 한반도와 종주국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던 청나라에게도 큰 손실이었다. 종주의 관계를 지지해온 양반 계급의 몰락은, 종주관계의 청산 아니면, 적어도 새로 태어난 지배 세력과 종주관계를 복원하자면 많은 세월과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겠다.
따라서 청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민비의 군사요청을 수락하고 , 동학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병해 온다.
바로 이 시점에, 그동안 한반도에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설치하려던 일본이 참여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키고, 동학 혁명군을 무참하게 진압해버렸다.
지금부터 100 여 년 전인 1890년대에, 외세의 배격과 부정부패 척결, 그리고 만민의 평등을 외쳤던 동학혁명 구호가 1980년 말부터 이 땅에서 또 들려오는 것은 우리를 착잡하게 만들뿐이다.
권력과 안락한 생활을 보전하느라 이 땅에서 외국 군대들이 전쟁을 하도록 끌어들인 양반 지배층은, 다시 세력 다툼을 벌려, 외국 군대들이 또 이 땅에서 전쟁을 하게 만든다.
즉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지원을 받는 친일파 신흥 권력가들에 대항하여 청국을 지지하던 옛 지배층들이, 이번엔 러시아에 의존하여 재도전해 왔고, 그래서 러일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땅의 지배층들이 끌어들인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이 양반 지배층들의 탐욕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해방이후 이 땅에 있었던 6.25동란은 무엇이라 표현해야할까?
아무튼 을사보호조약과 한일 합병을 거쳐 이 민족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그 이후 역시 이 땅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민중이었으며, 양반 출신의 지배 계급들은 고스란히 친일세력으로 둔갑하여, 지주로써 혹은 식민지 신흥재벌로써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강대국들의 해외 식민지를 더 많게 확보하려던 치열한 경쟁 때문에 발생했듯이, 2차 세계대전 역시 해외 침략을 목표로 한 강대국들의 세력충돌이 근본 원인이었다. 이 근본적인 원인을 감추고, 군국주의 독재와 민주수호의 싸움(성전)으로 묘사해온 해방이후 역사책은, 진실 접근보다는 2차 세계대전이후, 강대국들의 욕심 사나운 만행을 숨기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2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에서는 군국주의 독재세력 집단인 독일과 이태리가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침공, 스페인의 내란 개입 등으로 세력을 확대한 후, 여타 약소국 들을 병합해나가는 과정에 있었다.
스탈린의 통치하에 있던 소련은 독일의 히틀러와 합작하여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고, 또 핀란드에 침공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국내 사정상 유럽에서의 전쟁을 회피하고 있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를 향해 있는 미국과, 서양보다는 늦었으나 동양에서는 가장 먼저 강대국의 대열에 낀 일본은, 기존 유럽의 강대국들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어 있는 유럽과 아프리카로 진출하자면 마찰이 예상되 었다.
미국은 이미 해외 식민지로 확보해 놓은 필리핀과 괌도 이외엔 남아시아 진출도 용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도 이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화했기 때문에 , 전쟁이 아니고는 진출이 불가능했다.
결국 오랜 역사는 있으나 국력이 열세하여 이미 열강들의 부분적인 영토 침탈은 발생 했지만, 아직도 독립 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중국이 거대한 사냥물로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과 미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일본군이 미국의 진주만을 먼저 폭격했다는 군사적 사실만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러한 기술의 배후에는----, ‘공격을 받은 미국은 부처님이나 예수 같은 평화주의자였으나,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렸다.’는 암시로 미국을 미화시키는 것이다.
“일본이 왜 미국을 공격했느냐?” 또 공격 목적은 그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느냐 여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게 만든 미국과 일본의 그동안 갈등은 무엇이었느냐를 밝히다보면, 미국 역시 도덕적인 신뢰를 상실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아무튼 2차 세계대전시, 일본과 미국의 충돌은 아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는 두 나라의 탐욕에서 유발된 것이다. 일본은 이미 한반도를 병합하여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해 놓았으며, 또한 지리적으로 미국보다 인접해 있고, 청일전쟁, 만주 사변을 통하여 중국에 대하여 군사력의 우위를 입증한 경험이 있는 만큼, 중국 대륙을 먼저 강점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데, 미국이 개입해 오니, 미국을 선제공격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바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에 열린 얄타 협정에서, 미국이 마치 자기 땅덩이를 할애해 주듯이 소련에게 중국에서의 이권(일본이 차지했던 대련, 여순 지역)을 넘겨줄 것을 약속한 행위와 한반도에 소련과 미국이 함께 진주한 행위에 대한 설명이 된다. 아마 미국 역시 일본처럼 한반도를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폴란드를 처리 한 것과 미국이 남한을 처리한 방법은 매우 유사하다. 히틀러의 나치군에게 점령된 후,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폴란드 국내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줄기차게 폴란드의 독립을 위하여 싸워왔지만, 소련은 그 세력을 꺾고, “루불린”에 소련이 설치했던 친소 세력을 중심으로 전후 폴란드 정부를 수립시킨다.
반면에 미국은, 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그 지도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점령자가 피 점령자를 다스리는 군정을 2년이나 남한에서 실시하며, 김구선생 같은 민족주의자들 대신에 미국 하와이에서 귀국한 친미파 이승만을 중심으로 정부가 수립되도록 지원했다.
소련이 세운 김일성 정권과 미국이 세운 이승만 정권!
돌이켜보면, 친청파와 친일파의 싸움으로 청일전쟁, 친일파와 친노파의 싸움으로 노일전쟁, 그 후 득세한 친일파들 등살에 징병과 정신대로 끌려가 참여한 대동아 전쟁, 친일파를 제끼고 들이선 친소파와 친미파의 싸움으로 6.25전쟁이 이 한반도에 있어왔다.
6.25이후엔, 미국과 소련으로부터의 치열한 무기 구입 경쟁으로, 우리의 재산이 얼마나 해외로 유출되었고, 따라서 민족의 평화통일과는 정반대의 길로 치달았던가! 또한 안보를 빙자한 탄압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 손실이 있었던가!
3.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민족의 자주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외세에 의한 조국 분단에서 유래된다. 또 분단의 고통을 생각하다보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천사 같은 마음으로, 경제적 손실과 피흘려가며 애쓴다고 우리 정부가 말하는 우방 미국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6.25이후, 잉여 농산물인 강냉이 가루와 우유가루를 무상으로 지원해준 미국은, 전쟁에서 피를 흘린 대가와 그동안의 무상 원조의 대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냉이가루, 우유가루, 밀가루로 일반대중의 감정을 친미 감정으로 확고하게 확보했으며, 또한 전쟁으로 미국군의 주둔에 대하여 해방직후 군정통치 기간 중 형성되었던 저항의식도 사라졌다고 확신한 이후엔 미국 본토와 한국의 경제적 관계 설정이 문제였다.
전쟁직후 아직은 구매력이 없는 국가라고해서, 차관 형식으로 산업시설과 무기를 판매 하게 된다. 또한 미국 대기업들의 한국 내 공장 건설이 이루어져 한국 시장에 직접, 뛰어든다.
이제 이 시점부터 우리 사회는 격렬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역대 독재 정부가 선무당 사람 잡듯이 밀어붙인 미숙한 경제 운영은 농촌 사회를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그러한 농촌의 피폐화에 견디다 못하여 농촌인구는 도시로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도시로 밀려온 인구는 진출해오는 외국기업들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고 결국 값싼 공산품 생산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은 선진국, 특히 미국의 경제안정에 도움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만약에 값싼 상품이 없었다면, 미국의 물가상승은 지금보다 더 심해졌으리라. 따라서 무역 적자를 들먹이며, 이제 농산물 수입 완전 개방이라는 압력을 거세게 가해오는 미국의 속셈은 한국농촌의 기반을 더욱 약화시켜 농촌 인구를 도시로 빠져나가게 하여,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 하자는 전략처럼 보인다.
농촌인구가 도시로 몰리면 몰릴수록,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따라서 노사분규는 적어질 것이며, 결과 안정적으로 값싼 공산품의 생산지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동시에 한국이 자국의 잉여 농산물에 의존을 심화시켜 경제 종속관계를 탈피하지 못하도록 묶어두자는 계략이 숨어있는 것이다.
공산품의 무역적자는 무기판매를 촉진하여 매워나가고, 여타 한국이 취약한 금융서어비스 산업에 진출하여 부를 확대하고, 나아가 4대 식량 수입국인 한국을 영구 시장으로 확보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미국의 이익인가! 더구나 6.25를 통하여 철저하게 반공 이데올로기 교육을 시켜 놓았으니, 군사 주둔비 마저 부담하겠다고 미국 정부의 재정 부담을 덜어주니 얼마나 좋은가?
북한 군사력과 비교나 해주면 순조롭게 무기 팔고 사회 안정과 화합을 내세우며 노동운동 탄압해가며 값싼 공산품이 들어오는데, 통일이라니! 어림없다. 무기를 못 팔면 어떡하라고!
결국 이 땅에 가장 필요한 것은 민족의 자주화와 통일, 그리고 그것을 밑바탕으로 한 민주화와 부정부패의 척결이겠다. 민족의 자주화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하고, 통일이 없이는 민주화가 불가능하며, 민주화가 없이는 부정부패가 없는 바른 사회가 되지 못한다.
4. 교원 노조의 참교육과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이미 “교육의 사회적 기능”이란 부문에서, 교육 내용을 분석해 보면, 통치 집단이 목표로 삼는 미래 사회 모습(이상)을 엿볼 수 있고, 또 미래 사회 모습이 바람직한지 여부를 판별 해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제 우리 사회의 교육 내용을 점검해 보고 현 통치 세력의 목표가 바람직한지 여부와 부정적인 경우에 과감한 수정을 촉구해야 한다.
사실 교원 노조 측이 “참교육”을 주장한 것은, 현 교육 내용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문교부 산하에 근무하는 관리들과 사학재단을 개인소유물로 생각해온 이사장들은, “ 그 동안 수학 시간에 가르친 내용이 거짓교육이었느냐? ” 라고 반문하며, 그동안 교육에 문제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또 그 유치한 논리를 전달교육 받은 교장, 교감, 장학사들은, 그대로 현장 교사들을 설득했고, 일부 자연 계열 교사들이나 예체능 과목 교사들은 전교조의 참교육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지식과 교양이 요망되는 교육계 근무자들이란 점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경박한 언행은 “참”이란 말의 의미마저 파악하지 못한 지적, 결여 혹은 말꼬투리를 잡아 생떼를 쓰자는 악의에서 나온 것만 같다
원래 “참”이란 말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란 의미도 있지만, “품질이 썩 좋은” 이란 뜻도 내포되어 있다. 참교육이란 말은 질이 낮은 주입식 암기 방법에 의한 입시위주 교육보다는, 이해와 창의력 신장 중심, 단편 지식을 종합하여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표현력 신장 중심 교육 등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바, 교육학을 공부하고 교육자로써 자기 연수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현행 입시 중심 교육의 개선 방향을 생각할 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련만.....
“거짓 교육”이란 말은, 수학이나 과학 같은 자연 과학 분야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인문 과학 분야 즉 역사,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도덕 등에 관련된 내용을 담은 영어, 국어, 국사, 사회, 도덕등과 간은 과목에서 또 생활지도면에서 거짓이 말이 포함되었으며, 그 부분을 바로 하자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특히 이런 분야는 국민에 대한 정신교육(의식화) 분야이며, 잘못된 내용으로 국민이 의식화되었을 때, 그 피해가 극히 크기 때문이다.
사실, 오랜 기간에 걸친 잘못된 독재교육의 결과, 민족 사이에 내분이 심화, 독재 체제의 장기화, 부정부패의 온존, 퇴패와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청소년 범죄의 흉포화와 마약, 인신매매의 만연 등과 같은 일그러진 사회 모습이 고착화되어 버렸다.
전교조가 주장하는, 민족교육이란,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이 땅에서 피까지 흘린 우방”등의 표현으로, 마치 자신들의 이익을 떠나 타민족까지도 자기 민족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에 진주한 것처럼 강대국들에게 얼빠진 감사 표시를 해온 사대주의 사상의 제거부터 시작해서, 우리 본래의 문화는 배격하고, 외국의 저질, 퇴폐문화까지 모방하는 것이 현대감각이 뛰어난 세련미로 통하는 문화적인 오염제거, 또한 강대국들의 이간질에 놀아나 민족 내부갈등을 조장하는 내용보다는, 같은 핏줄의 동족애와 아량을 키워나가는 통일 지향적인 교육을 뜻한다.
그렇다고 해서 외래 문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은 결코 아니다, 문화란 원래 높은 문화권에서 낮은 문화권으로 물처럼 유입되기 마련이며 한 사회의 문화란 여러 사회의 문화적 파편들이 유입될지라도, 그 본질적인 내용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요소들의 유입으로 더욱 풍요로워 진다. 는 “티. 에스. 엘리옽 ”의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문화도 고대에 외국에서 유입되어 우리의 것으로 토착화 되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문제는 민족의 주체성을 상실해 가며, 강대국의 문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태도에 있다. 우리 고유의 탈춤이나 풍물을 배운다고 해서, 문제교사, 문제 학생으로 탄압하던 문교부가, 사제 동행정신을 함양시킨다는 명목으로 춤을 못 추는 교사까지 학생들과 디스코를 추라고 독려한 사실(서울시 교육감의 지시였었음)을 생각해 보면, 일제시대의 한국 문화 말살 정책이 떠오르며, 섬뜩하게 마저 느껴진다.
본래 예술이란 아름다움의 추구일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디스코란 군대 병영안의 생활을 모방한 현 교육 현장에서 쌓인 청소년의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오락이지, 잔잔한 정서를 함양하는 품위 있는 예술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락과 예술도 구분 못하는 아둔함이여..... 디스코를 발레로 착각하는 무지(無知)여!
또, 음악 교과서엔 양 음악이 거의 전부요, 우리가락은 한쪽 편에 형식적으로 구색 맞추기 위한 것처럼 실려있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우리가락하나 못하는 현실을 보고, 우리 민족 문화의 계승이 단절되지나 아니할는지 염려하여 민족 교육을 부르짖는 것이 왜 이상하게 보이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일제 식민지 시절에 우리의 문화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 연이어, 미군정과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회상황의 전개로, 우리의 고유의 것들이 생소해져 버렸나 보다. 그리고 일본의 통치하에서, 일본어만 잘하면 득세하던 경험이, 미군정을 거친 현재에 이르기까지 피나는 영어 공부로 몰아갔고, 강냉이, 우유, 밀가루로 심어놓은 친미 감정이 ‘ 미제는 모두 좋다.’라는 의식화에 이르게 된 모양이다.
이제 논리는 분명하다. 도둑교육을 시키면 도둑놈이 나오고, 일본 교육을 시키면 일본 놈이 나오듯이, 우리 민족의 교육을 시켰을 때, 생각도 언행도 한국인인 우리 제2세대가 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우리의 주관을 확립하고 외국의 문물을 선별하여 받아들이는, 그래서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을 양성해야 겠다.
민주 교육 이념은, 미래의 사회 모습을 현재의 독재사회가 아니라 민주 사회로 설정하고, 그에 맞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권을 쥐고 있는 현 세력은, “우리 사회는 자유경쟁과 개인의 능력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 체제로, 이미 민주국가이며 더 이상 민주화 운운하는 사람들의 실체는 민주를 내세운 좌경, 용공 주사파들로 체제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라고 매도한다.
굳이 개혁을 체제 전복이라고 말한다면, 경제에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의 부정이 아니라, 통치 체제에 있어서 독재 체제의 전복이요 민주체제의 확립이겠다.
교육 민주화에 대한 국민 이해를 위한 전교조의 노력은 철저하게 경찰력을 이용하여 물리적으로 막고, 통치 세력들은 마음대로 언론과 행정 기관을 통하여 선전해대는 한쪽만의 언론의 자유를 민주 체제이며 자유 민주 체제 수호 노력이라는 말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바로 이런 독재세력이 ‘자유 민주 체제를 전면 거부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라.’는 것은 교육을 정치에 악 이용하기 위한 부당 지시이기에 거부하는 것, 또 악명 높은 전 두환의 5공화국을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한 정부’라는 식으로 작성된 거짓 교과서 내용의 개편, 교육 비리가 없는 학원 운영, 예의와 화합을 내세운 비리 옹호와 침묵 배격 등으로, 제자들을 건실한 민주 시민으로 양성하기 위한 것이 바로 민주 교육이다.
교원 노조가 주장하는 교육 이념 중, 일반에게 가장 추상적이며,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마“인간 교육”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문도 결코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극히 실체적인 사안이다.
대개 교육이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치닫다 보니, 교육이란 일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것이라고 잘못 의식화 되어 버렸다. 따라서 훌륭한 학교의 기준을, “모의고사와 입학 성적이 좋은 학교”라는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교사도 드물다.
완벽하게 포괄적인 개념은 못되지만, 교육이란 ‘ 모든 면에서 좋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다. 즉, 지적으로 빈약한 상태에서 좀 더 풍요로운 상태로, 바르지 못한 언행을 좀 더 바람직한 언행으로, 불안정한 정서를 안정감이 있게 등등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겠다. 이 중에서 무식(無識)을 유식(有識)으로 바꾸는 지적 변화란, 교육의 여러 분야 중 일부이련만----, 그 하나 만을 교육 전부라고 고집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교육에 요구하는 것은, 건전한 가치관과 인생관을 소유한 건전한 시민 양성이 첫째요, 그 사회에 필요한 산업지식인 내지 기술인의 양성은 두 번째 요구여야 한다. 건전한 사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서는 건전한 가치관과, 성실성이 지능적인 반사회적인 성향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통치 세력은 거꾸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둑과 깡패, 인신 매매단이 날뛰는 사회가 되건 말건, 지식이 많은 기업 종사자만 배출하여, 경제성장을 높였다는 치적 내 세워 집권하면 그만이라는 잘못된 사고가 지배적이다.
이 땅을 일본인들이 지배하고 있을 때엔. 식민지 통치에 보조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초 지식 전달이 교육의 전부였다. 왜냐하면, 식민지 통치는 고분고분 수용하는 유능한 인간 기계를 원했지, 건전한 가치관과 인생관이 있어 비인도적인 식민 통치를 거부하는 한국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교육을 받으면 일본인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듯이, 그러한 식민지 교육을 받은 세대는 반은 일본인이 되어버려, 현 집권층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기계를 요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이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떨치고 인간 교육을 실현할 때이다.
원래 교과서(교육 과정)는 크게 문자화된 교과서와 비문자화된 교과서(잠재적 교육 과정), 2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다. 물론 문자화된 교과서란, 국어, 영어, 수학과 같은 종류를 의미하는 것이고, 비문자화된 교과서란, 사회의 한 개체로서 교접하는 대상들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것들을 열거해 보면 대략 친구, 가정, 학교 주위 환경, 교사, 종교, 생활지도, 학교운영 사회 분위기 등이 되겠다.
문자화된 교과서가, 학생의 지적 성숙을 제일 목적으로 하는 매개체(媒介體)이다면, 비문자화된 교과서란, 건전한 인생관, 가치관, 인격, 생활 습관 등을 가르치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교과서이다. 이러한 교과서의 중요성과 영향력 때문에, 건전한 교우관계 지도, 음란, 퇴폐 영업소의 학교 주변 설치에 대해 규제 등으로 부정적인 내용의 학습을 차단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바로 건전한 가치관과 인생관을 심어주는데 가장 크게 기여할 이러한 분야가 너무도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비리에 찌든 학교 운영, 화합과 예의를 앞세운 진실 추구의 억제와 복종 교육, 금전의 유혹에 빠져 편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교사의 모습, 도덕과 윤리보다는 힘이 중요하다는 독재 사회 모습, 바른 길을 가기보다는 눈치껏 살기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어느 정도의 비리는 넘기자는 비리 묵인 의식화 교육등등, 이미 건전한 차기 세대 교육은 방치된 체 내박쳐 두고 있다.
이러한 교과서로 터득한 인생관은, 힘(실력)을 길러 약한 자를 억압하고 강한 자에게 아부해서라도 물질적인 풍요와 권력을 쥐고, 적당하게 비리도 눈감아주는 사교성과 굴종하는 시민을 지향하는 인생관이 되겠다.
정치가 망하면 한 세대의 암흑이지만, 교육이 망하면 아예 민족이 뿌리까지 망하는 것을 역사가 보여 주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신의 생계와 지위 보호를 위하여 교육 운동을 본의 아니게 탄압하는 것은 동정이 가지만, 참교육 내용 자체를 비방하는 행위는 도덕성의 결여라는 꾸중의 차원을 넘어 범죄 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제 또 하나의 박 종철, 또 하나의 권 인숙이 나오는 비극이 없는 사회, 세상이 못되었을지라도 너만은 바르게 살라는 인생 교훈이 제자를 죽음에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하여 몹쓸 교사가 되거나, 적당하게 변신하는 처세술이 앞으로 터득해야할 삶의 지혜라고 가르쳐 또 다른 인생의 파멸을 가져오는 몹쓸 교사가 되는 사회가 아닌 참다운 사회를 건설하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겠다.
참교육 만세! 전교조 만세!
* 현 국민의 힘이 집권했던 시절 중 노태우 대통령 독재 시절에, 해직 고통으로 터져나온 신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