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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에게 부어 줄 성령
욜 2:28-32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욜 2:28-32 / [주님의 날에 임하시는 성령]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나의 비를 부어 준 다음에, 너희 모두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다. 너희의 늙은이들은 여러 가지 꿈을 꿀 것이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온갖 환상을 볼 것이다. 29) 또 그날이 오면 너희의 남녀 노예들에게도 똑같이 나의 영을 부어 주고 30) 땅과 하늘에서 이상한 상징들, 곧 피와 불과 버섯 연기들을 보여주겠다. 31) 여호와의 그 위대하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캄캄해지고 달은 피같이 붉어질 것이다.' 32) 그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 약속하신 것과 똑같이 시온산과 예루살렘 도성에서 구원을 받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불러내시는 자들은 살아 남을 것이다.
요엘 선지자는 지금까지 특정한 지도자들에게만 임했던 하나님의 영이, 차별 없이 우리 모두에게 임할 것을 예언합니다(욜 2:28-29).
만민에게 영을 부으시는 하나님(28-31)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신이 특정한 사역을 위하여 선지자들이나 사사들에게 임하였습니다(출 31:3; 민 11:25; 24:2; 대상 12:18; 삿 3:10; 삼상 10:10; 겔11:15). 그러나 요엘 선지자는 만민에게 그리고 남종이나 여종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오순절에 실제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행 2:1-21).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 없이 모두가 동일하게 성령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갈 3:28-29; 골 3:11).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은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장래 일, 하나님의 꿈, 하나님이 보이시는 환상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던 이사야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 노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사 11:6-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는 일과 관련된 하늘과 땅의 다양한 징조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임박했음을 나타냅니다(막 13:7-8).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32)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 임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건짐을 받고 피할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분께 다가가서 간절히 부를 뿐만 아니라(창 4:26;12:8), 믿음으로 부르는 것과(시 99:6; 145:18; 롬 10:9, 13) 여호와를 간절히 찾는 것(슥 13:9)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심각한 재앙으로 인해 크게 훼손되었음을 전재합니다. ‘피할 자’라는 것은 구원 얻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과 기근으로 폐허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기억하시고 남은 자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특별한 성령의 체험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에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 그 은혜가운데 성령님과 함께 하는 자,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으로 항상 이어지게 됩니다.
< 설 교 >
성령이 임하시면
욜 2:28-32 / 박인걸 목사
미래 저축은행 회장 김찬경(57세)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 돈을 횡령하고 8000억 여 원의 불법 대출을 해준 일로 인하여 그 은행은 결국 부도가 났고, 은행에 저축한 서민들만 엄청난 피해를 봤습니다. 그런 그가 횡령했던 비자금 중 56억 원을 랜드로보 차에 싣고 중국으로 밀항하기 위하여 아산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내려왔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이 사람의 친구인 김씨가 이 별장 관리인으로 2년 동안 있었는데, 친구 차에 돈이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친구가 잠든 밤에 그의 차를 부수고 트렁크에 있던 돈 56억 원을 몽땅 자신의 쏘랜토에 싣고 도망을 쳤습니다. 결국 김찬경 씨는 밀항도 못하고 경찰에 잡혀 지금 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한편 친구 김 씨는 그 돈을 가지고 내연녀와 함께 2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흥청망청 썼습니다. 그가 지난주 경찰에 2년 만에 잡혔습니다. 경찰이 조사를 해보았더니 전국에 오피스텔 세 곳을 얻어놓고, 매월 내연녀에게 수백에서 수 천 만원의 생활비를 대 주었으며, 2년 동안 24억 원의 돈을 썼답니다. 매월 2억 원을 쓴 셈입니다. 현금 31억 9300만원 오피스텔 침대아래 숨겨 놨었는데 경찰이 찾아 저축은행 피해자들에게 돌려준다고 합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두 사람 다 나쁜 사람이며, 친구의 돈을 훔쳐 달아난 놈은 더 나쁜 놈입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이를 두고 하는 말이며, 이 사람도 소망교회 소금회 맴버라고 합니다. 직분은 모르겠으나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살면 되겠습니까? 성령받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겠습니까? 오늘 성령 강림절에 다시 한 번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예언자 요엘이 “말세의 때가 되면 성령이 임하신다고 하면서 그 영을 만민에게 부어줄 것인데 자녀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라.”(욜2:28-29)고 했습니다. 요엘이 예언한 성령이 예수님 승천과 함께 성령을 사모하며 기다리던 120명의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 날이 오늘 우리가 지키는 성령감림절의 기원입니다. 온 방안에 바람소리가 나더니 불의 혀 같은 현상이 각자의 머리에 임하고 각자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요엘서(본문)을 인용하였습니다. 성령은 어떤 영입니까?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과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성령은 지식의 영(intellect)(고전2:10-11),② 성령은 의지의 영(will)(고전12:11),③ 성령은 감성의 영(emotion)(엡4:30),④ 성령은 마음에 임하는 영(갈4:6), ⑤ 성령은 모욕(insult)을 당하기도 하는 영(히10:29),⑥ 성령은 속임을 당할 수도 있는 영(행5:3),⑦ 성령은 훼방을 당하시기도 하는 영(마12:31-32),⑧ 성령을 거스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영(행7:51),⑨ 성령을 소멸시킬 수도 있는 영(살전5:19),⑩ 성령은 근심하는 영입니다.(엡4:30),
그렇다면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1) 열정을 일어납니다.(욜2:28)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 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프뉴마라고도 하지만 두나미스라고도 부릅니다. 두나미스는 능력, 권능을 의미하며 열심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열정이 있고, 열정을 가지고 살다보니 그 사람의 하는 일이 잘되고 성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선 모세를 보겠습니다. 그는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에 붙을 불을 보았고, 불 가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행7:30), 80세 된 모세가 하나님을 체험한 후 200만 명의 히브리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바로와 싸워 이기고, 광야길 40년을 지도자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도 열정의 사람입니다. 그는 사무엘에 머리에 기름을 부을 때 주의 영에 크게 감동(삼상16:13)되었습니다. 이후 골리앗과 싸워 이겼습니다.(삼상17:49), 사울의 핍박과 박해를 이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국력을 신장시키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준비하였으며, 수많은 적들을 소탕하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열정의 근원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아합과 싸워 이겼고,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아보았으며, 수많은 이적과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냈습니다. 기근을 이기는 힘과 갈멜산에서 바알제사장들과의 격돌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천은 역시 성령이 그와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임한 성령의 능력은 제자들로 하여금 심기일전하게 하였고, 교회부흥의 견인차역할을 하게 하였으며, 거대한 조직교회였던 유대교와 싸움에 승리하며 기독교 확장에 주력하였습니다. 바울 역시 성령이 충만하여 초대교회 지도자요, 선교사요, 전도자요, 성경의 저자요, 목회자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병을 이기는 힘이 옵니다. 작년에 우리교회 와서 집회 한 최낙중 목사님은 우울증, 폐결핵, 만성위염, 신장염, 위 십이지궤양을 앓았습니다. 매일 중환자실을 드나들었습니다. 남자 몸무게가 48킬로였습니다. 앉았다가 갑자기 졸도했습니다. 죽기를 소원했으나 몸이 너무 약해서 의사가 수술 불가판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다 죽겠다는 각오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다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37일 만에 치유 받았습니다. 깨끗이 난 것입니다. 성령이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였고, 병을 치유 받게 하였고, 목회자게 되게 하였고, 우리교단 총회장에 되게 하였고, 지금은 청소년 선도를 위하여 국내외 적으로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죄와 악을 이기는 열심히 일어납니다. 성령을 받으면 거룩한 일에 열정이 일어납니다. 성령을 받으면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다하게 됩니다. 학생은 공부에 열정을 쏟게 됩니다. 사업가는 사업에 열정을 쏟게 됩니다. 정치인은 정치에 열정을 다 합니다. 과학자, 의사, 법관, 목회, 회사원, 등등, 어느 직종이나 분야에서든지 열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반드시 그 분야에서 성공합니다. 왜 럴까요? 성령이 그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사단은 사람을 쓰고 버립니다. 그래서 박수나 무당, 점쟁이, 신탁하는 자들은 말로가 비참하거나 좋지 않게 끝납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살아 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깁니다. 칭송을 받습니다. 존귀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영은 선한 영이며, 인격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열정을 준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또 무엇을 줍니까?
(2) 비전이 생깁니다.(욜2:28)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요.”(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라고 했습니다. 비전은 꿈입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녀가 자라서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겠다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그냥 생각합니다.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고서 외국에 팔려나간 고아가 그 나라에서 총리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렸지만 최악의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형들의 배신으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이겨내며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슴에 품고 결국 애급의 총리가 된 것이 비전입니다.
나의 생활이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고 싶다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을 사고, 큰 차를 굴리며,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하와이에다가 별장을 짓고 오고 가는 것들은 비전이 아닙니다. 돈을 벌어서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쓰겠다고 하는 것이 비전입니다. 자녀들을 잘 가르쳐서 서울대학에 보내고, 판, 검사를 만들고, 의사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비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입니다. 비전은 자녀를 가르쳐서 그 자녀들이 이웃을 섬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져서 건물을 크게 짓고, 교인을 많이 확보하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얼마나 많이 구원하겠다는 꿈이 비전입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한민국을 하나님 믿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제물포 앞 바다를 밟았는데 130년이 된 지금 우리 나라는 축복의 땅이 된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를 복음화 하겠다는 비전을 안고 30대 청년 때에 건너갔습니다. 검은 대륙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윌리암 케리는 1793년 의사 J.토머스와 함께 인도에 파견되어 근대 의료선교의 선구자가 되었다. 아도니람도 동 인도에가서 선교사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평생 중국선교사로 살았습니다. 칼 구츨라프는 중국 마카오와 천진에서 평생 선교사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준다.”(28) 고 한 것입니다. 우리교회 젊은이들이 이런 꿈을 갖기 원합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것은 목회였습니다. 하지만 첫발을 내딛을만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끌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재촉하였습니다. 28세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상경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야 했습니다. 7년이란 세월을 보냈습니다. 학문성과 영성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86년에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도전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까지 한 교회에서 성실하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동네서 개척하여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이 동네서 늙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 하소연 하듯 물었습니다.“하나님 저에게 주신 비전이 이정도입니까? 예배당도 크게 짓고, 교인도 수천 명 되고, 세계 방방곡곡을 돌며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그랬더니 주님은 제게“목회가 사업이냐? 목사가 기업 사장이냐? 소돔 같은 거리나 아골골짝이라도 나와 함께 라면 가겠다고 그 때 말하지 않았느냐? 지금 아주 성실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고, 내 백성들 잘 가르치고 있지 않으냐? 그리고 시골 촌놈을 데려다가 박사까지 만들어주지 않았느냐?”그러시면서 “앞으로 더 귀하게 내가 사용하리라. 쓰리라.”하시더라고요. 저는 주님께 부끄러워서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성령은 비전을 품게 하시고 그 비전을 따라가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런 비전을 품기 원합니다.
성령은 비전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성령은 또 무엇을 주실까요?
(3)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라.”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최고의 비전가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인류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가르침, 그의 삶, 그의 능력, 그의 권세, 그의 비전, 그의 열정, 그의 인격, 그의 지도력, 그의 겸손과 온유, 전부가 인류에게 위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인들, 법관들, 학자들, 사업가들, 군인, 남녀노유, 빈부귀천,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었고, 병든 자들에게 치유를 주었으며, 억압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사단의 권세에게 신음하는 자들을 풀어주었습니다. 온 세상이 흑암에 둘러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빛으로 동정의 빛으로 세상을 구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과 가정을 구원하였고, 나라들과 민족들을 구원하였으며, 사회와 환경을 바꾸었고, 온 세상을 희망과 꿈이 있는 세계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꿈을 줍니다. 용기를 줍니다. 희망을 줍니다. 의욕을 불어넣어 줍니다. 가치 있게 살도록 합니다. 도전의식과 거룩한 용기를 줍니다.
한국의 명문 연세대학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번지(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에 위치한 연세대학교의 캠퍼스입니다. 언더우드의 큰아버지인 존 토마스 언더우드(John Tomas Underwood)는 10만 달러를, 로스앤젤레스의 찰스 스팀슨(Charles S. M. Stimson)은 대학 설립용 자금으로 2만 5천 달러를 기부하여 오늘이 한국 최고의 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미국에 돌아가서 교사 건립용 기부금 모금을 했는데 스팀슨에게서 위 기부금을 얻은 후 사망하였고, 후임 교장인 에비슨이 기부금으로 교사를 건립하였습니다. 연희전문학교는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의 숲이 울창한 토지 190,320평을 매입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한국에 건너와 대학을 세워서 젊은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비전을 품은 언더우드에 의하여 세워진 대학교는 1915년 이래 지금까지 수십 만 명이 졸업하였으며, 한국 사회에 준 영향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성령 받은 한 사람에 의하여 이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성령 받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영적인 영향을 줍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친구에게 영적이며 인격적이고 삶을 통한 영향을 줍니다. 성령 받은 교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좋은 영향을 줍니다.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으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열정의 영입니다. 비전의 영입니다. 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영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는 영입니다.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맞아 더더욱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령만이 대안이다
요엘 2:28-32 행 2:37-42 / 이정익 목사
오늘 주일은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을 받으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기다리며 기도하였는데 10일 만에 성령이 그곳에 강림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이 세상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 사후 성령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보이지 않게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셔서 보이지 않게 어느 곳에서나 역사하시고 무슨 일에나 함께 간섭하시며 섭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요엘서 2장을 보면 이미 기원전 800년 전에 활동하던 요엘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이 성령강림 사건이 예언되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기원전 800년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 요엘이 기원 33년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의 칭호를 보혜사라고도 하고 위로자 권면자 상담자라고도 부릅니다. 이 보혜사는 예수님의 계승자이고,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신 또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부재 시 예수님 대신 성도들 가운데 거하시는 영(요 14:17, 20:15, 15:1-11, 17:23)이시고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영(요 15:26-7)이시고 가르치시는 영(요 14:26-15:26-7 16:12-15)이시며 우리의 삶이나 모든 사역에 섭리하시고 계시하시고 간여하시고 이루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이 세상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교회탄생
교회는 세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고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으며 건물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지금 교회 안에 와 앉아있는 여러분 전체를 보이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주님만 아십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안 보이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건물로서의 교회는 이 예배당을 말합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에 이 세상에 예수를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믿음의 공동체 즉 이들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 교회가 예수사후 성령강림을 통해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이런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브라함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거룩하게 구별(대하 20:7, 사 41:8-9 – 시 16:3)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은 그들을 교회라 하지 않고 총회 또는 회중이라고 부릅니다. 이 총회를 히브리어로 “카할”(신 9:10, 10:4, 18:16)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시대 때 총회에는 언약의 백성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들을 거룩한 민족, 거룩한 백성(출 19:5-6)이라고 부릅니다. 그 백성들이 정기적으로 모였습니다. 대표적인 총회가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출 23:14-17)이 있습니다. 그 때는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들을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수가 많고 우월하고 뛰어나서가 아니고(신 7:7) 모든 나라에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리고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 불러내셨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만은 아닙니다. 그곳에 이방인이나 잡족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출 12장38절을 보면 출애굽 할 때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들이 그들과 함께 따라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때 이미 하나님의 구속사에 이방인에 대한 구원 스케줄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행 2장)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공동체는 혈육 공동체가 아니고 언약 공동체이었고 구원 공동체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공동체는 예수의 죽음, 부활, 성령 강림이 이루어지고 그 후에 예수를 주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신약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 강림으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공동체를 언약공동체라고 한다면 신약의 공동체는 주님 한분에게 연결된 연합이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공동체 일원은 모두가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됩니다. 네 것 내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장의 모습입니다. 2장44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입니다. 이 모습이 교회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혈육공동체나 민족 공동체 차원을 넘습니다. 이 같은 결과는 성령이 주신 결과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생명과 같은 물질을 이렇게 선뜻 내 놓고 나누고 통용하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이런 일들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하시니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교회의 변화
기독교 역사가 이제 2천년이 넘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가 변화무쌍하게 변하여 왔습니다. 처음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신앙이 신선하였고 참신하였고 뜨거웠습니다. 그런 신앙이 시간이 지나고 역사가 오래 되면서 기독교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의 세대였습니다. 예수 사후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그때 기독교는 참 뜨거웠습니다. 나가서 증거하였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 때를 산 증인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제자들이 가는 곳 마다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 충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체험한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성령이 강림하시자 성령을 힘입어 거칠 것이 없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믿음은 내가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고 터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신앙에 힘이 있고 중심이 있고 권위가 만들어집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그랬습니다. 부모님 세대들은 다 성령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구체적이었습니다. 기도 응답 경험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 세대는 기도할 때 보면 달랐습니다. 밤새워 기도하였고 눈물로 기도하였고 구체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8,15와 6,25를 경험 세대들입니다. 그래서 모두 신앙이 생생하고 확신이 있었습니다. 직접 경험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신앙시대는 직접 경험한 신앙인들이 사라지고 성령사역이 시들해진 세대를 말합니다. 그들은 신앙경험이 희미합니다. 막연함도 있고 주워들은 신앙인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들어서 아는 신앙 세대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개념적입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신앙이 확신이 없고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6,25 역사를 체험한 세대들과 후에 태어나 전해들은 사람들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와서 북침설이다 미국의 조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제시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두를 친일파라고 매도합니다. 체험세대들은 그런 헛된 소리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구체적으로 보고 체험하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세대들은 생생하던 믿음시대의 믿음을 버리고 신앙시대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성경이 변질되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헛된 소리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중세 종교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기독교가 더 많이 변질되어 갔습니다. 이 시대는 본질이 외면되고 부수적인 것들이 첨가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는 수도원을 만들고 깊은 수도원에 들어가 수양하고 금욕을 하다가 마침내 금욕주의를 낳습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어느 정도 수양과 금욕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금욕주의는 신앙이 아닙니다. 금욕주의나 세속주의는 이미 신앙의 길에서 벗어난 신앙입니다. 음식을 만들 때 조미료를 너무 많이 사용하면 본래의 맛이 사라지듯 중세 기독교가 그래서 맛을 잃은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수단이 난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뜻 있는 신학자들과 신앙인들이 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종교인이 되면 곤란합니다. 종교인은 기독교에서 많이 이탈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증세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직업적인 종교인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너무한 것은 그들이 너무 직업적인 종교인이 되어서 생명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안에서 너무 안일하거나 종교인이 되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을 질책하고 중심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교리시대로 빠지게 됩니다. 원래 교리는 신앙의 길을 안내하기 위해 연구한 것입니다. 난해한 성경을 풀어 길을 안내하기 위한 연구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교리가 신학을 낳았고 이 신학은 교파를 낳았습니다. 교리를 수립하는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교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성경을 분석하고 쪼개고 이론화하였습니다. 그 이론에 따라 파벌이 형성되고 그 파벌이 결국 오늘의 교파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많은 교파는 그래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늘은 정치적인 이유로 교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무슨 신앙의 생명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성경이 남루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늘 대원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등불에 가까울수록 빛이 밝습니다. 그런데 등불과 멀어질수록 빛이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오늘은 복음시대가 오래되니까 복음의 불빛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복음이 희미해지게 되고, 선명하고 뜨겁고 분명하던 부활이나 십자가 사건이나 예수만 구원의 주님이던 믿음의 초점이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타나게 된 것이 다원주의 신학입니다. 다원주의라는 말은 예수 말고도 구원의 길이 여러 길이 있다고 말하는 신학입니다. 구원은 다른 곳에서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풍조를 다원주의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이 신학이 널리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 다원주의 신학이 오늘 목회자들의 입에서 신학자들의 입에서 공공연하게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운동권 신학자들 입에서는 유교에도 동학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최제우를 최 메시야로 부르기까지 합니다.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디까지 갈까요. 앞으로 또 어떤 유형의 믿음의 형태가 나타날까요. 남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직 성령
그것이 말씀으로 돌아가고 성령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오늘 현대시대는 참 좋은 시대입니다. 편리하고 빠르고 눈으로 보기 좋고 쾌감도 있습니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옛날에 주어진 것들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 제도는 옛날의 삶이 훨씬 좋았습니다. 무게가 있고 깊이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이 산업화가 되면서 다 버림받았습니다. 다 흩어지고 산산이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먹거리도 옛날에는 다 순수했습니다. 무엇이나 안심하고 먹어도 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모두 화학제품으로 만들어 다 인위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수량을 많이 거두려고 화학 비료를 뿌립니다. 쉽게 잡초를 제거하려고 제초제를 뿌립니다. 벌레를 죽이려고 농약을 살포하자 벌레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인간들이 그럴수록 우리는 더 강력하게 대응하자” 그래서 벌레들이 약을 뿌려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자 인간들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강도 높은 농약을 만들어 살포하자” 그런데 결국 그것을 먹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오늘 사람들이 그것을 뒤늦게 알고 이제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농촌으로 돌아갑니다. 가공식품에서 자연식으로 방향을 돌려 유기농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의 증인 신앙 시대에는 신앙이 참 참신했습니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부활의 생생한 증언은 파급 효과가 컸습니다. 그 부활 증언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믿고 세례를 받으니 그 날에 믿는 자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 증언을 듣고 사람들은 핍박을 무릅쓰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때로 순교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가 지나면서 신앙이 변질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발상지입니다. 그 뜨겁던 신앙의 발상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가보면 교회들마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교회유지가 힘드니까 관광객을 유치하고 입장료를 받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못하는 교회는 매매하고 술집에 팔아버려 교회 종탑은 있지만 그 꼭대기에 술집임을 알리는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산실이었던 루터의 기념교회 역시 앙상한 흔적만 있고 여기가 유서 깊은 종교개혁지라는 느낌만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교회가 장차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벌써 오늘 한국교회의 주일 밤 예배는 다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뜨겁던 신앙의 열기도 다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달리 길이 없습니다. 다시 성령의 시대로 돌아가는 길뿐입니다. 예수 사후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했습니다. 오늘이 2천 년 전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셨던 날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시니 제일 먼저 제자들이 혁신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우유부단하던 신앙이 강력한 신앙으로 탈바꿈을 하였습니다. 두려워 떨던 제자들의 믿음이 확신 있고 분명한 신앙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믿지 못하던 얄팍한 신앙이 체험 신앙으로 고백신앙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졸렬하던 신앙이 밖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증거 하는 신앙인으로 탈바꿈 하였습니다. 길은 하나뿐입니다. 말씀과 성령 시대로 돌아가는 길뿐입니다. 말씀이 살아야 내 믿음이 바로 서게 됩니다. 말씀이 살아야 내안에 성령이 임재를 이루게 됩니다. 성령을 의존하는 신앙으로 돌아가십시다. 성령이 임하셔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안내받는 신앙의 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길이고 유일한 방안입니다. 성령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십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십니다. 차가운 사람을 뜨겁게 하시고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하십니다. 냉랭한 교회를 뜨겁고 충만한 교회로 바꾸십니다. 우물쭈물 하던 신앙인에게 생명위해 복음위해 영원을 위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생명의 면류관을 위해 살라고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생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기를 잃고 흙덩어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만덩어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욕망 덩어리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변화를 받고 새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을 사랑가는 교회의 모습이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고 예수의 진정한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하니 모두 세례를 받으니 신도의 수가 3천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영으로 살아야 기쁘시게 합니다
요엘 2:28-30, 로마서 8:5-8 / 이성희 목사
서로 던져 주고받는 놀이기구인 플라스틱 원반인 프리스비 제조회사인 왬오에서 1990년 아프리카 앙골라의 고아원에서 사역하는 수녀에게 7천 개의 프리스비를 보냈습니다. 이 회사의 사장 존 보우즈는 얼마 후에 이런 답신을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접시들은 훌륭합니다. 우리 모두 거기에 음식을 담아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아이들이 일종의 게임으로 그것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아이디어가 될 것 같습니다”. 프리스비의 원래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원래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마치 굉장히 신기한 것을 발견한 것같이 느껴진 모양입니다.
원래의 목적이 변경되어 자기들 마음대로 그 도구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런 잘못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모든 것은 영적 도구입니다. 영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육체마저도 영적 도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를 육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육적인 목적이 앞서 있습니다.
로마서 1:27에는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순리대로 자신의 육체를 쓰지 않았습니다. 28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체를 비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창조를 모두 마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혼돈과 흑암을 질서와 빛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람을 살아있는 영으로 만드셨습니다. 질서와 빛은 영입니다. 혼돈과 흑암은 육입니다. 질서와 빛은 선입니다. 혼돈과 흑암은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아있는 영으로 만드셨으므로 사람이 살아있는 영으로 살아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살아야 자신에게도 만족을 줄 수 있고 행복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진노, 주의 진노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사 근심하시기도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들이 보시기에 좋지 않습니까? 영으로 만든 사람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3에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실패가 없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것도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육체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실패작이 아닙니다. 사람에는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인간이 그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죄를 지은 것이고 타락하여 쫓겨난 것입니다.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5:11에는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라고 하십니다. 35절에는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고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공경하던 영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의존하고 육체의 사람이 되므로 하나님이 후회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후회하십니까? 영의 사람이 육의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은 후회하십니다. 육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공동번역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에 있는 자들이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기쁘시게 못합니다.
6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고 합니다. 7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육신 일과 영의 일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육신과 영의 대결을 말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란 육신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가장 깊은 사고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육신이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생각 곧 자기중심적인 생각만 나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전형적 인간의 모습을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육적인 것만을 추구하게 되며 하나님과 친구가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우리 속에는 반대쪽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두 마리의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세계로 끄는 힘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끼여 있습니다. 우리는 진창에서 뒹구는 천사요, 날기를 시도하는 포유동물입니다. 우리 안에는 항상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법이며 영과 육의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국가의 경계를 긋는 것도 정당의 차이를 보여주는 선도 아니다. 그 선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그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과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생각과 육체의 생각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영을 추구하지 않고, 육을 추구하는 것도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에는 영이 있어야 하는데 육이 있는 것이 문제이며, 인간의 죄인된 모습입니다.
잠언 6:16-19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일입니다. 영적인 일이 아닌 일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요즘 신조어를 보면 신체부위를 가지고 만든 말들입니다. 꿀을 발라놓은 듯한 허벅지라고 ‘꿀벅지’라고 합니다.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상화선수에게 이 별명을 붙였습니다. 아름다운 골반이라는 뜻의 ‘황금 골반’이란 신조어도 있습니다. 초콜릿 복근(초콜릿처럼 생긴 복근이라고 하여 ‘초콜릿 복근’이란 말도 있습니다. 얼짱, 몸짱, S라인 등은 이미 잘 알려진 말들입니다. 외모지상주의와 웰빙 열풍이 맞닿아 몸매에 관련한 신조어가 부쩍 늘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육체의 삶에 지나치게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을 염려하면 하나님이 좋아 하시겠습니까? “날 어떻게 보고 그런 걸 가지고 염려하지?”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인간적인 염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 ‘타임’지에 타이태닉(Titanic)과 ‘루시타니아’(Lusitania)를 비교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1912년 4월 14일, 타이태닉은 빙산에 충돌하여 2,207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68.7%가 죽었습니다. 1915년 5월 7일, 루시타니아는 독일 잠수함 어뢰에 맞아 1,949명이 타고 있었는데 67.3%가 죽었습니다. 두 배가 다른 점은 타이태닉은 배가 가라앉는데 2시간 40분이 걸렸습니다. 루시타니아는 어뢰에 맞은 지 18분 만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타이태닉은 천천히 가라앉았기 때문에 승객들이 이성적, 신사적 행동을 하였습니다. ‘타임’에는 ‘socially determined behavior’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급속도로 가라앉은 루시타니아의 승객들은 동물적, 본능적 행동을 했습니다. 인간에게 동물적 본능만 남는다면 동물보다 더 못하게 됩니다. 이런 동물적 본능으로는, 육체적 생각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늑대는 그 이빨을 잃어도 성품은 잃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품이 변화되지 못하고 육체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에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육적인 생각이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됩니다. 정채봉씨는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을 외면한다면 육체적으로만 살게 되고 이런 삶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삶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므로 기쁘시게 합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합니다. 영의 생각이란 영에게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생각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영의 생각을 가진 자는 오직 영의 일만을 좇게 됩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영의 생각이 왜 생명입니까? 영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합니다. 영의 생각이 왜 평안입니까? 영이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평안은 성령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전혀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행위에 기초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원리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원리 안에 거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선악을 아는 율법적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생명나무의 원리는 은혜이며 영의 삶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오래 전 1970년 초반에 저의 형님이 미국에 갈 때에 저의 선친께서 삼형제를 모이게 하셨습니다. 선친께서는 아들은 아버지의 유업에 대한 책임이 있는데 둘째가 아버지를 이러 목사가 되겠다니 고맙다고 하시며 목사는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니 첫째는 동생을 잘 챙겨주고, 셋째는 사업을 한다니 돈을 많이 벌어서 형을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못 받았습니다. 성직은 영의 생각입니다. 저도 인간의 생각으로 목사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의 생각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영의 생각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인생에서 육의 일이 필요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육의 일이 필요하지만 육적인 일에만 빠져 살고 영적인 생각이 없으면 안 됩니다. 물질이 중요하지만 물질 중심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삶의 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지식적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필요하지만 율법적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구약성경은 혼인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결혼한 사람은 군대에도 보내지 않고 가정에 충실하게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7:32에서 바울은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라고 합니다. 장가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까 라고 합니다. 시집간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까 라고 합니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앞서고, 영적인 삶 보다 앞서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 영, 그리스도 영으로 옷 입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옷 입는 것은 우리가 부활의 몸, 신령한 몸을 입을 사실에 대한 보증입니다. 신령한 몸을 입으면 더 이상 슬프게 할 일이 없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며 평안입니다. 영을 입어야 생명을 얻으며 평안을 얻습니다.
에스겔 37장에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생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무력한 뼈였습니다. 그러나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가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흩어진 마른 뼈는 보잘 것 없는 뼈입니다. 그런데 “내가 생기를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말씀하시고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명령하실 때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라”고 합니다. 생기는 ‘루아흐’ 즉 영입니다. 영이 없으면 그냥 뼈이지만 영이 들어가면 큰 군대가 됩니다. 영이 들어가야 힘이 생깁니다. 꿈이 생깁니다. 활력이 생깁니다. 영이 들어가야 생명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영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뼈라고 하더라도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마른 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1에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신령한 너희는”이란 말은 우리말 성경에는 “영의 사람인 여러분은”이라고 번역합니다.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숨이 있는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적 훈련을 하는 사람입니다.
결 론
“인생을 살다보면 날뛰는 황소의 꼬리를 잡아서 그 상황에 직면해야 할 순간이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황소 꼬리 잡지 말고, 하나님의 손을 잡는 훈련을 하세요. 보화를 캐는 지혜를 가지세요. 세상의 것을 잡으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영의 것을 제대로 잡아야 합니다. 든든하고 불변하고 안전한 것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영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손을 잡습니다. 영적인 생각을 합니다.
요엘 2:28에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세에”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말합니다. 성경은 종말의 현상을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요즘이 말세입니까? 말세에는 영이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고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것이 하나님께는 기쁨이 됩니다. 살아있는 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말고 영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명에 충실하자
욜 2:28 / 성흥모 목사
우리 교회는 금년 2003년도를 맞아 창립 50주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50주년을 맞아 아주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데, 아직 그렇게 잘 추진되지 않고 있지만 함께 기도하여야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세우신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교회가 진정 교회 되려고 하면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본래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 교회는 아주 많은 것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고,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었다고 자부합니다.
목회서신을 읽어가다 보니 영적 지도자의 4세대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딤후2:2의 말씀이었습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내게" 이 말은 사도바울을 말합니다. "네가"라는 말은 디모데라는 분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지도를 잘 받았습니다. 바울에게 들은 것들도 많았습니다. 그 다음에 충성된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충성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충성되지 못한 사람들을 붙들고 힘쓰는 것 보다 충성된 사람들을 훈련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에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지도자들은 시간과 열정을 기울여 신실한 형제를 찾아 그들에게 말씀을 부탁하고, 그들의 지도력을 끌어주는 일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열심을 가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18세기의 부흥운동을 이끌어간 두 사람을 들어보라고 하면 존 웨슬레와 죠지 휫필드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두 분은 당대의 최고의 설교가였고, 대중 설교로 유명하신 분들입니다. 휫필드라는 목사님은 목사 안수를 받자 자기의 고향에서 설교할 때 그 곳 성도들이 자기들의 성공회 주교에게 가서 우리 교회에서 휫필드가 설교한 후에 15명이 미쳤다고 신고할 만큼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주도하신 분입니다. 죤 웨슬레, 찰스 웨슬레와 힘을 합하여 미국 조지아주에서 엄청난 부흥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 죠지 휫필드는 일주일에 20여편의 설교를 감행할 만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관의 차이로 인하여 죤 웨슬레와 헤어지고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당대 3명의 최고 설교가라면 죤 웨슬레, 죠지 휫필드, 래티머였는데, 죠지 휫필드는 34년간 영국과 미국을 사로잡은 설교가였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성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능력에 대하여 설교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죤 웨슬레는 대중 설교도 잘 하였지만, 지도자를 많이 양성하여 소그룹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속회라는 것으로 구역예배를 잘 인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죤 웨슬레의 사역은 지금까지 세계최대의 교단인 감리교회를 통하여 이어지고 있지만, 죠지 휫필드의 사역은 당대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준비된 리더가 사역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개인적으로는 화려하게 명성을 날린 목회자라고 하여도 다음 세대를 위한 일꾼을 양육하지 못하였기에 당대의 명성으로 끝나고 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왜 훌륭하신 분입니까? 다른 사도들보다 후배들을 잘 이끌어주었고, 좋은 일꾼을 양성했다는데 있습니다. 그의 뒤에는 디모데, 실라, 아볼로, 디도, 누가, 아굴라와 부리스길라.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였던 루디아, 골로새교회의 에바브라, 아리스다고, 빌레몬과 그의 아들 아킵보, 옥중에서 얻은 오네시모, 야손, 소시바더, 로마서를 대필한 더디오, 에라스도, 구아도, 여교역자 뵈뵈, 이루 말할 수 없는 일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양성한 일꾼들이 어떤 분들이 있었습니까? 마가라는 분이 베드로의 통역을 하면서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지만, 이렇다한 일꾼들을 양성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사도 바울의 비전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 세계에서 성장한 사람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유창한 헬라어와 라틴어 실력으로 세계의 좋은 사람들을 일꾼으로 양성할 수 있었습니다. 에배소에 있을 때는 3년 동안 일꾼을 양성하는 일에 전심전력한 적도 있습니다. 바로 '두란노 서원'에서 일한 때였는데, 아침 10시 경부터 오후 4시경까지 매일 같이 6시간 정도 성경을 공부하여 지역의 많은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교회들은 바울이 양성한 일꾼들이 나가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소그룹 사역 담당 목사인 빌 도나휴는 [소그룹을 망치는 7가지 실수]라는 책에서 19세기에 북극 탐험에 도전하였던 영국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북극탐험에 나간다고 하는 이들이 2-3년 간의 장기간 사용할 수 있는 장비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들이 준비한 장비라는 것은 증기 엔진 하나에 12일치 석탄뿐이었고, 그들이 석탄을 싣는 대신에, 각 배에 1200 여권을 소장한 서재와 간부 선원들이 사용하려는 고급 도자기 세트 금과 은으로 된 접시들을 실었습니다.
그들은 북극에 가면서 영하의 40도의 날씨에도 견딜 수 있는 방한복을 가지고 가지 않고, 아름답고 멋진 해군정복을 입고 갔습니다. 이들은 북극 탐험이 어디 휴양지에 유람을 떠나는 것을 착각한 것입니다. 은으로 된 식기세트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지금 그들이 가는 곳이 어디인데, 방한복을 가져가지 않은 것입니까? 몇 년 후에 에스키모 인들이 이들의 유해를 발견하였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저는 몇 개월 전에 "인듀어런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코노미스트 주간 경제지에 어떤 기업의 전문 경영인들이 뽑은 베스트셀러로 소개된 적이 있어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명은 [인듀어런스]인데 캐롤라인 알랙산더가 글을 쓰고, 프랭크 헐리의 사진을 담아 남극대륙을 횡단하다 실패한 영국탐험대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듀어런스(Endurance)라는 말은 "인내"라는 뜻입니다. 영국 탐험대가 타고 간 배를 '인듀어런스'라고 명명하였기에 책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위대한 성공이 아닌 위대한 실패를 다루고 있었지만 내용은 위대한 리더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914년 영국에서는 아일랜드 태생의 어니스트 섀클턴을 대장으로 하는 27명의 남극탐험대가 조직되었습니다. 섀클턴은 노르웨이 조선소에서 참나무와 전나무로 건조한 두께 80cm, 길이 44m 300톤 규모의 튼튼한 목조 범선을 제조하고 '인듀어런스 호'라고 명명하고 1914년 8월 8일 대장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해가 세계 제1차대전이 일어나는 해인데도 전쟁에 상관없이 남극탐험에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유명한 지도자 '어니스트 섀클턴'을 대장으로 하고 부대장으로 프랭크 와일드, 남극 탐험에 경험이 많은 선장과 전문 선원들과 과학자, 의사가 있었으며 호주의 사진작가 프랭크 헐리가 타고 있었습니다. 이 탐험대는 12월 5일 아침 마지막 기지 항구인 남미의 사우스 조지아 섬을 출발하여 6주 동안 여러 차례 떠다니는 얼음덩어리(부빙군)을 만나 피하기도 하고 정면 돌파하기도 하면서 남극권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1915년 새해를 맞이하여 1월 24일에 얼음 사이에 갇히면서 항해는 중단되었고, 얼음을 깨면서 항해를 시도해보지만 떠다니는 얼음과 함께 육지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대장 섀클턴의 지도력은 돋보이게 되는데, 그는 전혀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였고, 또 화를 내는 법이 없었고, 실망하지 않고 얼음 위에서의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배는 얼음에 갇히고 얼음으로 덮인 바다 위에서 한 해를 보내는데 10월27일에 거세게 밀려오는 얼음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배는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였으며 대장 섀클턴은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려왔습니다.
1916년 4월 20일 대장은 5명의 대원을 이끌고 구원선을 부르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영하 30도의 겨울인데, 식량은 4주분 정도, 6m 길의 갑판도 없는 작은 배를 띄우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그것도 노를 저어 무려 1천km의 사우스 조지아 섬까지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시속100km의 강풍과 20m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데 생명을 건 모험 끝에 노르웨이 선원들이 있는 고래잡이 기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1916년 8월 30일 칠레 정부에서 내준 엘코 호를 몰고 가서 나머지 22명의 대원들을 구출하게 됩니다.
섀클턴은 부하를 먼저 생각하는 리더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대원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부대장으로 있던 프랭크 와일드는 섀클턴을 회상하면서 "처절한 시련을 겪은 인듀어런스 배의 대원들에게 유일한 축복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섀클턴의 부하였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대원은 마지막 구출되면서 "최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섀클턴이 리더라면 두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사람을 사랑하는 한 지도자를 보면서 그 때 나는 과연 어떤 지도자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역경에 빠져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섀클턴의 리더십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참으로 용감하고 위대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을 세우는 일에 열심을 내려고 합니다. 적고 큰 기관과 여러 모임을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를 양성하는 일에 힘쓰려고 합니다. 목회자와 비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일꾼들, 주님을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헌신할 수 있는 그런 일꾼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사람,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따라갈 수 있는 그런 일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야 하고, 꿈과 이상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를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을 나누고 우리의 삶속에 그분의 말씀을 적용하는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 한 분 한 분이 세상에 나가서 제대로 살아야 우리 시대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이상과 사역을 그대로 본받아 살겠다고 하는 이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라고 하셨습니다. 목회자로 사도 바울에게 기가 죽는 것이 바로 이런 말씀 때문입니다. 그도 한 사람인데, 어떻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였는지, 물론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제자훈련에 힘을 쓰지만 우리 모두가 제자로서 살려는 노력이 없다면 헛일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비전을 가져야 하고, 사명의식에 투철해야만 합니다. 그럭저럭 믿다가 인생을 끝내겠다고 하지말고, 위대한 족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낡은 외투를 벗어버리고 제자로 사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공부가 아닙니다. 삶을 바꾸는 일이지, 상식적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가치와 사명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인생으로 그치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제자 훈련에 들어갔는데, 제자훈련을 통하여 우리는 함께 자라고 함께 성숙해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목사나 전도사가 완벽하여서 누구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자라고 함께 성숙해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갈급함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대로 만족하지 말고, 나를 더 높은 목표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달라져야 하고, 우리의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식의 사람으로 살았습니까? 이제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어떤 목표를 세워야 자신을 그 목표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그가 가진 목표가 그를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 유명인사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리더십훈련으로 위대한 변화를 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책으로만 대하는 것보다 실제로 훈련을 받아보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7가지 습관 중에 두 번째는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고 합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차를 타고 교회로 들어가면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예배당으로 들어갑니다. 줄지어 서 있는 화환들, 은은하게 연주되는 오르간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배당으로 걸어가며 당신은 친구들과 가족들의 얼굴을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식장 앞으로 걸어가서 관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 관 속의 누워있는 돌아가신 분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이것은 바로 3년 후에 치르게 될 당신의 장례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마지막으로 표시하기 위하여 찾아온 조문객들이었습니다. 이 장례식에 조사를 읽을 사람은 4명이었습니다. 첫 번째의 사람은 당신의 가족과 친인척을 대표하는 사람, 두 번째는 친구 중의 한 사람, 세 번째는 직장이나 같은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동료의 대표,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나온 대표입니다.
당신은 이 때 그 사람들이 당신 자신과 당신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당신은 이들이 어떤 남편, 어떤 아내, 어떤 아버지, 혹은 어떤 어머니였다고 말해주기를 바라십니까? 어떤 친구였으며, 어떤 직장 동료였다고 말해주기를 바랍니까? 그들이 바라본 당신의 성품은 ?,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을 하였으며, 어떤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가지고 싶은 이미지, 나의 가치관, 나의 모습을 확정하라고 합니다.
어느 사람 높은 벽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거의 다 올라가 보니 사다리가 잘못 놓여 있어서 지금까지 올라온 것이 헛수고인 것이습니다. 사다리에 오를 때에는 사다리가 정확하게 놓여있는지를 확인하고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출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출발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죽음이 앞으로 3년 정도만 남았다고 하면 명예, 업적, 돈, 화려함, 인기, 쾌락 이런 것이 아니라 아마도 다른 것을 목표로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목수에게 요구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한 번 자르기 위해 두 번을 재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사명서를 작성하여 나는 이런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여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보답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성실하게 산다.
가정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
나의 전 삶은 섬김을 위하여 사용한다.
정직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가장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한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고, 좋은 인간관계를 가진다.
감사와 겸손과 인내를 생활화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판단을 내린다.
나 혼자 성공하지 않고 함께 성공을 이루어낸다.
오늘 우리는 창립50주년 기념 사업을 어떻게 하고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을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감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몇 가지 사업으로 50주년이 잘 되었고, 안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숙한 신앙으로, 진정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함께 비전을 가진 사람 이상과 꿈을 가진 사람으로 적은 예수로 살아가는 성숙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
요엘 2:28-32 / 이상호 목사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내일에 대한 희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보다 즐겁고 행복하기를 원하면서 삽니다. 오늘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내일에 대한 밝은 희망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참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빛을 발견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쉽게 좌절해버리고 맙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 중요한데 밝은 내일이라고 하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일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요 결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미래를 내다보며 오늘의 삶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은 모두가 오늘의 문제에 눈이 어두워 내일을 보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애절하게 호소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엘 선지자도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죄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재앙을 불러오게 되었을 때 백성들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도 본문의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길 좋아하십니다.
요엘 선지자는 백성들이 회개하고 죄악을 진심으로 뉘우치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회개만 하면 북편 군대가 멀리 떠나가게 하고 가뭄으로 고생하는 유대 땅에 비를 내리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내려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였습니다(20, 23절). 이것은 경제와 국방을 지켜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고 과거의 정상적인 삶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과거의 회복 정도가 아니라 더욱 풍성하고 풍요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민하는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요 만물의 운행과 질서를 주관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회개하는 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저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는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풍요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의 나라는 가난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이 들어가서 꽃을 피운 나라들은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데 아직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절대빈곤의 저주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복이 저들에게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남한은 올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매년 대풍을 이어갔습니다. 지난여름, 가뭄과 무서웠던 홍수의 피해로 흉작이 예상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참으로 기적과 같은 풍작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몇 년째 계속되는 가뭄이나 홍수로 먹을 것이 없어 수백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자선단체들의 구호활동과 지원이 없으면 체제가 무너질 위기에까지 처해 있다고들 합니다. 조그마한 땅 한반도에서 어떻게 이렇게 대조적인 현상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같은 홍수를 당해도 왜 38도 이남에는 대풍이 들고 이북에는 수확할 것이 없습니까? 이것은 곧 북한 공산주의 사회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복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에 저들의 땅에는 저주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그 나라가 부강하게 되는 것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을 떠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26절).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높이 들어 쓰시기에 수치를 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우리를 풍족하게 하십니다. 기이히 대접해 주실 것입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상근이라는 분은 시골에서 호의를 가지고 남의 논을 매주고 품삯으로 연명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공부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서울로 올라와 낮에는 남의 가게를 보아주고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는 이어서 대학원을 거쳐 박사까지 받고 후에는 교회 장로가 되고 명지대학 총장과 통일부장관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써 주셨습니다. "내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주시고 물질의 풍요로움도 주실 것입니다.
2. 말세에 하나님의 신을 충만히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엘은 유대의 축복의 비결을 말하면서 말세에 있을 성령강림을 예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에게 물질적인 축복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는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내리신 성령강림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불같이 임하시므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시대가 시작되기 전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강림하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셨고, 사사들도, 사무엘도, 사울도, 다윗도, 솔로몬도, 비범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위대한 일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시대인 신약시대부터는 하나님을 믿고 회개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특별한 사람뿐만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꿈과 환상과 비전을 보게 됩니다. 본래 구약시대에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하나님 말씀의 계시를 통해서 꿈과 환상과 비전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3.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욜 2:32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여기서의 “누구든지”란, 앞 절에서 말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어떤 민족, 어떤 환경과 조건, 그리고 배경을 떠나, 그가 불의하든, 도덕적이든, 건강하든, 약하든 그 무엇에도 제한을 두지 않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됨을 말합니다.
벧후 3:9을 보시면,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요 3:16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그를 믿는 자마다”가 본문의 “누구든지”입니다. 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인정함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자신을 순복시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눅 9:23을 보시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아무든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도덕이든, 지식이든, 재물이든, 환경이든 그가 처한 그 무엇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출 20:6을 보시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며, 신 6: 5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주를 믿으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자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민족을 복음화하고, 그 힘을 가지고 세계를 복음화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4월 10-12일 금요일에서부터 부활주일 오후까지 심령부흥성회를 합니다. 오늘 요엘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처럼 이번 부흥성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이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부은 바 되어 이제는 우리도 새로운 계시와 환상과 비전을 보며 새 시대를 준비하는 하나님의 귀한 남종과 여종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가슴을 찢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 이 세상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시되 이전보다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가정, 사회, 나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비전을 주시는 성령
욜 2:28-32 / 성흥모 목사
오늘의 교회력은 성령강림주일, 오순절입니다. 우리 총회에서는 오늘 5월의 마지막 주일은 이 땅의 청소년들,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청소년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고 청소년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5월의 가정의 달로 지키면서 청소년주일로 지키는 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며, 청소년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청소년의 시기는 파종의 시기요, 준비의 시간입니다. 잘 준비한 만큼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사용하신 것이나 바울을 사용하신 것을 보면 많이 준비한 사람은 많이 쓰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0세기를 마무리하던 즈음에 미국 타임(Time) 지에서는 “금세기 인물”을 최종 선정하여 발표하는 날이었습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1930년대 미국을 대공항의 수령에서 건져내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최고의 인물로 선정하라고 하였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정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28-1932년까지 뉴욕 주지사를 거쳤고, 1933-1945년까지 무려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입니다. 그가 1945년 4월에 뇌출혈로 서거하기까지 무려 4선에 올랐는데, 그는 소아마비 장애를 입고, 휠체어에 의지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타임지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금세기 최고의 인물에 프랭클린이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닌 ‘앨버트 아인슈타인 박사’가 ‘금세기 최고의 인물’이 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차점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선정을 놓고 방송에서는 1990년대에 시작되어 계속 발전된 과학기술 문명은 모두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발견한 과학 원리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을 천재 과학자로 만든 사물을 관찰하는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학습장애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천재 과학자라는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 금세기 최고의 과학자가 무슨 학습장애아였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천재와 둔재는 한 인간 안에서 얼마든 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천재가 될 수도 있고, 평범한 둔재로 남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계 유태인인데, 어려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언어발달이 늦어서 겨우 5살 때에 말을 하기 시작하였고, 학습부진, 지나친 결석, 산만한 행동으로 학습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여 ‘멍청한 아이’로 불렸습니다. 산수는 항상 낙제점이었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환상에 사로잡힌 저능아’라는 평가를 받고 퇴학당하였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아들을 데리고 여러 번 이사하면서 전학을 시키곤 하였습니다. 그래도 학습 부진으로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학습장애로 좌절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개발하였습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는데, 그는 상대성이론과 그는 우주에 대한 도전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참고로 타임지가 19세기의 인물로 최고의 인물은 토마스 에디슨을 선정하였고, 차점자로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을 선정하였습니다. 에디슨이란 사람은 학교에 입학하여 천치바보로 낙인찍히고 학교를 그만 둔 학습장애아였습니다. 담임선생은 그를 ‘혼란스런 문제아’로 지목했습니다. 교육전문가였던 교장선생님이 학교를 방문한 장학사에게 에디슨을 소개하면서 ‘바보’라고 보고하였던 학생입니다. 그리고 열세 살 때 퇴학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입니다. 그가 발명왕이 되어 1,093의 특허를 받아 특허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깰 사람은 역사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특허가 나올 만큼 다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최고의 인물 토마스 에디슨과 20세기 최고의 인물 아인슈타인은 공통적으로 학습장애아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을 보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비전(vision)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이란 인생의 목표요, 꿈이요, 환상, 이상이라고 번역합니다. 비전은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미래의 모습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비전이란 단어는 외국어입니다. 그래서 말은 해도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미래에 대한 구상, 미래상’이라고 짧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시각, 선견, 상상도, 꿈, 목표, 가치관, 신념 이런 말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켄 블랜차드는 “비전으로 가슴을 뛰게 하라”는 책에서 “비전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이 그 여정을 인도할지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블랜차드는 비전과 목표를 구분하여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비전은 목적을 달성해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지침을 제공하는 영속적인 것이다.” 목표와 비전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목표는 달성하고 나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비전은 미래의 행동을 위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도록 도와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표만 있고 비전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목표만 달성되고 나면 모든 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어느 누가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하고 성형을 하면서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싶다’고 합니다. 이것은 목표입니다. 그러나 비전을 그런 목표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넓고 큰 주택을 구입하고 싶다, 아름다운 별장을 가지고 싶다,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겠다, 많은 돈을 모으고 싶다, 경영자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전이 아니라 목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비전으로 알고 살아간다면 설령 누가 원하는 것을 성취한다고 해도 만족보다는 오히려 허무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목표는 그것을 성취하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목표를 수립해서 도전해야 됩니다. 하지만 비전은 우리의 삶에서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전은 우리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나침반이며, 어떠한 장애물도 뛰어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을 믿음에서 태어나고, 소망에 의하여 양육되며, 상상력에 의해 꽃이 피고, 열정에 의해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교육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해보면 지적 능력은 11세에서 15세 사이에 발달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 때에 지적능력이 가장 발달하게 됩니다. 17세가 되면 지적 발달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바로 이때에 인생의 장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 때에 분명한 진로와 목표를 가져야 하는데, 먼저 비전을 세워야 합니다.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일류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중간 단계에 들어 있는 것이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라고 하면 비전이 없이 단순히 목표만 서울대학에 들어간다고 하면 서울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목표를 다 이룬 것입니다. 그러면 허탈감에 빠집니다. 인생의 목적은 비전에 가깝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이루어가는 꿈을 꾸며, 환상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고, 비전의 인물이 되려면 긍정적인 자아상을 키워야 합니다. 자신을 모자라는 사람으로 실패한 사람으로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 말한 대로 됩니다. 긍정적으로, 할 수 있다고, 나도 꼭 하고 만다는 긍정적인 자아상을 구축해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비전을 그려보면서 상상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보지 않는 한 멋진 일을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범한 생각과 태도로 산다면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마음에 품지 않는 복은 절대로 현실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좋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대적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복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려는 은총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난 이미 나이가 많아, 난 이미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어, 에게 바로 내 한계야, 내가 무어 그렇지, 나 같은 것이 감히 어떻게 그런 일을,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겠어, 이제 난 글렀어.” 안타깝지만, 맞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기 전까지는 그 말이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잠재력,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면 큰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이 비전은 신념으로 이어집니다. 목표를 세우게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에서 더 위대한 일을 꿈꾸게 합니다. 더 높은 단계로, 하나님이 붙잡고 쓰시는 위대한 인생으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에 사용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자아개념, 이 자긍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자신의 모습, 존재가치, 능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위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로 끊임없이 더 높은 단계로 자라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십시오.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낡고 부정적인 생각을 버려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태도, 부정적인 생각은 복이 흐르는 통로를 가로막고 맙니다. 비전은 인생의 교만이 결코 아닙니다. 비전이 분명할수록 성취도는 높습니다. 비전은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미래를 환상 중에 그려보게 합니다. 이 비전을 야심, 야망이라는 말로 설명하지만, 젊은이여 야망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곧 비전이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사야43:19-21에서 “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저의 비전을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저의 사는 이유요, 제가 죽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어 이 땅에 보내어주신 그 목적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나의 것을 다 내어놓고 베풀고 나누며, 예수님처럼 섬기며 살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약 40일 정도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거의 마무리하실 즈음에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4: 25-26에서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보내어주시는 성령을 말씀하셨습니다.
요15:26에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을 아버지께로부터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은 진리의 성령으로 주님을 드러내실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요16:7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가실 수밖에 없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인 것은 예수님이 떠나가지 않으면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팔레스틴에 머물러야 하는 한계가 있지만,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 주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고,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시고,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대신하여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정리하시면서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주실 것이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눅24:49에서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어주시는데,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행1:4-5에서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물 세례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행2:1-4에서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던 중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성도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임하심으로 이미 요엘 선지자가 예언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요엘2:28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세대에 하나님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 세대에’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세대에는 하나님은 당신의 영, 당신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비인격적으로 마구 부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는 영적인 교통으로 풍성한 은혜와 넘치는 사랑과 어떠한 견고한 진영과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부어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와 같이 됩니다. 하나님은 꿈과 이상으로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는데, 성령으로 하나님과 교류하고, 성령으로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게 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하신 성전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비전을 품게 됩니다. 그냥 일반 사람들이 품는 신념이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비전입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비전입니다. 어떠한 악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고 이루어드리는 원대한 꿈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우리 안에 더러운 생각이나 못난 자아상을 다 몰아내게 됩니다. 곧 피와불과 연기 기둥과 같이 우리 안에 더럽고 추한 모든 생각을 몰아내어 버립니다.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느냐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가능성과 놀라운 잠재력, 창조적인 아이디어, 꿈으로 가득한 씨앗을 뿌리십시오. 반드시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대신하여 성령님이 같은 능력으로 우리 안에 임재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본받고, 그 분을 모시고 그 분에 살고, 그 분과 교제하며, 주님이 나를 통하여 당신이 하시고 싶은 일들을 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종종 나를 비우고 주님이 온전히 주인으로 사시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시고 성령님에게 순종하고,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 비전의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꿈을 가진 자의 복
욜 2:28-30
이 시간에 “꿈을 가진 자의 복”이라는 제목입니다. 추측이지만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중에 어느 나라가 더 잘 살게 될까요? 일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제2위의 경제강국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일본 학자의 연구논문이 있습니다. 이누미야요시유키 박사는 ‘주체성과 대상성으로 본 한일비교 연구’라는 논문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은 자존감은 비슷하지만 비현실성 낙관론에 있어서는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100배 이상 높다고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현실에만 충실할 뿐 꿈이 없지만 한국인은 좀 허황되긴 하지만 모두 꿈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논문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한국인은 꿈을 가지고 사는 민족입니다. 이 꿈이 한국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앞으로 한국이 모든 면에서 세계를 선도할 가장 위대한 나라가 되리라 확신하는 건 바로 이 꿈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은 꿈을 가지고 계속하여 발전하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한국인들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꿈을 가졌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꿈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이 꿈을 받으면 받은 자에게 따라오는 부수적인 복도 있습니다.
꿈을 가지면 어떤 복을 받습니까?
1. 꿈을 가지면 젊어집니다.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합니다. 젊으니까 말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나 이런 사람이 될 거야” 그런데 본문을 보면 만민 자녀 노인 젊은이 남종 여종 등 5~6가지의 대상이 나오는데 모두 한 동일한 선상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래일 꿈 이상 등 낱말만 다를 뿐 그들이 품고 있는 내용도 같습니다. 노인도 젊은이와 같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젊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 받으면 마음이 젊어집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장래 일은 해당사항이 없다 생각하고 현실이나 옛날이야기가 더 익숙합니다. 장래 일을 말하면 주변 사람들이 나이가 몇 살이냐고 공박합니다. 모아놓은 것과 국가에서 주는 국민연금과 노령연금이나 까먹으며 편히 살자고 말합니다. 마음이 늙었습니다. 투자는 못할지라도 에디슨처럼 부름 받는 그날까지 꿈에 불타서 살고 싶습니다.
한 편 갑자기 다가온 100세 시대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합니다. 갑자기 생겨난 30년의 공백 때문입니다. 제2의 인생을 계획해야 하는데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래는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무계획적으로 어중이 떠중이 살아갑니다. 국가나 사회도 혼란스럽습니다. 아직 젊은데 국가가 노인 취급하고 65세 이상은 자동차 면허까지 걷어가겠다고 합니다. 국민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젊음이 없는 노령은 불행합니다. 비공식 기록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노인의 안타까운 사망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1870년 인도네시아에서 출생하여 146세를 산 ‘음바 고토’라는 할아버지입니다. 장수의 비결은 인내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대답했는데 인내, 뭘 그렇게 참고 살았을까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독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 등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노인은 삶의 재미를 잃었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문과도 같았는데 그의 사망원인은 고독이었습니다.
그가 불행한 것은 하루하루 어떻게 사느냐에 매달려 있었을 뿐 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망 전까지 몸은 건강했지만 마음은 젊지 않았습니다. 모세와는 너무나 대조됩니다. 시90:10에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했습니다. 세월이 빠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가슴에 희망과 사명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몸도 젊었습니다. 신34:7에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했습니다. 당시 연수가 70이나 80이었는데 모세는 120세였고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부르셔서 갔지 아파서 간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젊으면 몸도 건강합니다. 마음이 젊으면 열심히 노력합니다. 건강관리도 잘합니다. 꿈을 가지고 더 젊게 사시기 바랍니다.
2. 꿈을 가지면 위대해집니다.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꿈은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위대한 사람이란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셉도 꿈을 꾸었습니다. 그랬기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만민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꿈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인에게도 꿈을 주십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비하하거나 자괴감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노인들의 행진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99세에 낳을 아들의 꿈을 꾸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바닷가에 모래알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이 꿈을 시들지 않게 바라보았습니다. 때가 되어 드디어 이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버지 집을 떠날 때 나이가 몇 세였을까요? 젊은 청년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창47:9을 보면 야곱이 130세일 때 요셉의 나이가 39세였으니까 91세,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서 14년 지나 요셉을 낳았으니 91-14=만 77세입니다. 장수시대라 해도 노인입니다. 이런 77세 노인이 결혼하고 이런 노인이 사업하고 젊게 살았습니다.
노아도 600세에 생애 최고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노아 방주를 만들고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600세 넘어서였습니다. 모세도 80세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젊었을 때 꿈은 모두 좌절되고 권세도 잃고 백성도 잃었습니다. 광야에서 양치며 40년을 보냈습니다. 꿈을 갈아 마시기 좋은 환경입니다. 인생이 끝났다고 여길 때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어느 사장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사장님은 어떤 사람을 쓰고 싶습니까?” 사장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똑똑한 사람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착한 사람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회사에 대한 꿈을 개발하고 아이디어를 찾는 사람을 쓰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꿈은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3. 꿈을 가지면 강해집니다.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이상이 무엇입니까? 목표입니다. 목표를 보고 전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SMI회장 폴마이어는 말했습니다. “내가 목표를 세우면 목표는 나를 끌어 준다.” 그만큼 흔들리지 않도록 꿈이 나를 붙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계획과 무계획은 그 결과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정신분석학자 빅톨 플랭클(Victor Frankle)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나치 치하에서 끝까지 견뎌냈던 사람은 마음에 분명한 희망을 가진 사람, 분명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 사랑하는 애인이나 아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 돌아가서 자신이 꼭 이룩해야할 일이 남아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천국의 희망을 가지세요. 요단강만 집착하지 말고 그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단강은 모맥 거두는 시기만 범람하지 평소에는 작은 셋강입니다. 유브라데 같은 큰 강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14:1-3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꿈을 가지고 더욱 강해지기 바랍니다.
4. 꿈을 가지면 희망이 넘칩니다.
29절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어쩌라고 자유도 없는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주실까요? 그 가슴 속의 에너지를 어쩌라고요. 그러나 어느 형편 어느 곳에 있든지 승리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꿈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창 39장을 보면 바로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을 인정하여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창39:6) 했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시위대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창39:21-23에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했습니다.
거기서만 아닙니다.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여 죄수의 몸에서 애굽왕의 총리가 됩니다. 그 때도 얼마나 왕의 총애를 받았든지 창 41장을 보면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이렇게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고하신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지혜롭게 대처하여 모두를 구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에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은사요 능력이요 꿈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기도하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성취하며 가장 보람 있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욜 2:28-29 / 박봉수 목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 중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떤 말씀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요 14:12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도 불가능해 보이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예수님께서 곁에 계셔서 도와주시면 모를까 어떻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떠나신 후 이 세상에 남겨진 우리들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쉽게 납득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마 28:20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면서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부부도 함께 있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떨어져 있는 시간도 있는 것인데 어떻게 항상 함께 계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역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면서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영이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예수의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떠나시지만 영으로 다시 임하셔서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게 됨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행할 수 있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공생애 기간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들을 하실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생하게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증언하면서 한 가지 더 첨부했습니다.
행 2:17-21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바로 오늘 본문 요엘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성령이 오셨는데 이것은 그 옛날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예언된 일이었고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뒤에 비로소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새로운 구원 역사는 성령 강림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율법의 종교를 청산하시고 복음의 종교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옛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 역사를 마감하시고 새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령으로 새롭게 시작된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세상 모든 종교와 차별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종교라는 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강림 이후 새롭게 나타난 존재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차별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가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남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고후 5:17 말씀 그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거듭남”(Rebirth/ Born Again)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 3: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후 다시 한번 더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우리의 궁금증을 대표해서 예수님께 그 뜻을 물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데 이것은 무슨 말이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세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우리가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것은 육으로 난 것이고, 다시 태어날 때는 영으로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8을 보면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으로 이 땅에 태어날 때 어머니의 도움으로 태어납니다만 영으로 날 때는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마치 나비가 된 것과 같습니다. 나비가 알이 부화되어 애벌레가 되어 한 번 태어났다가, 다시 애벌레가 나비로 변신하여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한 번 태어났다가, 이제 성령이 오셔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일까요? 어떤 점에서 애벌레와 나비의 차이와 같은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창 2: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생령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살아있는 영적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생령이란 바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뒤에 이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기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창 6:3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생령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존재론적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다시 변화가 생깁니다. 육신에 성령이 강림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흙으로 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과 같이 육신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생령과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성령으로 났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다시 태어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점점 그 교제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선 말씀을 들을 귀가 활짝 열립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묵상할 때 내게 주시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또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기도의 입이 활짝 열립니다.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모두가 성령으로 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성령으로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됨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외적인 삶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 마디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고 나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고 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 3:13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뒤 4장을 보면 40일 금식하신 뒤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우선 마귀는 굶주린 예수님께 돌로 떡이 되게 하여 먹으라고 시험했습니다. 육체적인 욕망을 자극하여 시험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능력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라고 시험했습니다. 정신적인 욕망을 자극하여 시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산 위에서 마귀에게 절하여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누리라고 시험했습니다. 영적인 욕망을 자극하여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 위에 충만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장길섭의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입니다”라는 책에 기억해 둘 만한 구절 한토막이 있습니다.
애벌레에게는 길에 늘어선 것들이 모두 다 문제입니다. 앞에 있는 돌덩이도 문제고 냇가도 문제고 막대기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이 모든 것이 구경거리입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지요.
애벌레에게는 모든 것이 다 힘겹습니다. 새가 물고 가다 떨어뜨려놓은 작은 나뭇가지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 겨우 넘어설 수 있는 힘겨운 장애물입니다. 길 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돌맹이도 넘어서기 힘든 장애물입니다. 앞길을 가로막은 작은 시냇물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나비가 되고 나면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날아가며 편안하게 둘러볼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나비는 날 수 있는 능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나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인생의 장애물들을 쉽게 넘어설 수 있습니다. 갖가지 유혹들, 시험들, 고난들 어렵지 않게 넘어설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상할 수 있습니다. 승리를 만끽하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슥 4:6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만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됨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내적인 삶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 마디로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 10:1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고자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거듭나서 생명을 얻게 될 뿐 아니라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큰 회사에 사장의 돌연사로 갑자기 후임 사장을 뽑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사회에서 파격적으로 30대 청년 사원을 그 능력을 인정해서 사장으로 발탁했습니다. 이 청년은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크게 기뻐했고, 모든 직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업무를 시작하면서 사장 자리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회사의 중대사를 결정해야 하고, 회사의 실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수많은 직원들에 대한 인사 문제도 처리해야 하고... 점점 스트레스를 받으며 염려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결재 서류에 사인할 때 손까지 떨리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정신과 의사를 찾았는데, 의사가 한 목사님을 소개하더랍니다. 그래서 찰스 알렌이라는 목사님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청년 사장에게 처방을 내 놓았습니다. 하루에 약을 다섯 번씩 먹고 일주일 뒤에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 약이 시 23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그리고 잠자기 전에 한 번씩 읽으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 사장이 약속대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루하루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손 떨리던 것도 사라지고 불안도 사라지고... 일주일 뒤에 목사님과 다시 만나서 이 청년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6)
그렇습니다. 우리가 출세해서 사장이 된다고 우리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장이 돼서 연봉이 높아진다고 우리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다른 유복한 환경 속에 있다고, 남이 누릴 수 없는 쾌락을 누린다고 우리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돈에 대한 욕심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권력, 명예, 쾌락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밑 빠진 독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독을 통째로 물 속에 넣어버리면 그 독에는 늘 물이 채워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우리 삶은 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이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했던 그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날뿐 아니라 오늘도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거듭나게 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으로 풍성한 삶 잔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은 현실적이게 하신다
요엘 2:28-30, 요한복음 14:21-26 / 백구영 목사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오랜만에 친구를 찾아가 저녁까지 대접을 잘 받고 어두워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길목까지 소경을 배웅한 친구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등불을 친구 손에 쥐어주며 "여보게 이걸 들고 가게나. 등불일세" 하고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소경 친구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면서 "자네까지 나를 조롱하긴가? 소경에게 무슨 등불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 친구는 "여보게 오해 말게나. 물론 자네는 앞을 못 보니 등불이 필요치 않을 걸세. 그러나 이 어두운 밤에 다른 사람들은 자네가 든 등불을 보고 비켜 가지 않겠나"
이 말에 소경 친구는 고마운 생각이 들어 "고맙네, 자네의 깊은 뜻은 모르고, 미안하이. 잘 있게 ―" 하고서 등불을 들고 언덕길을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얼마큼 가다가 무엇인가 "탁"하고 부딪쳤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소경은 화를 버럭 내면서 "여보시오. 당신은 눈도 없소? 그렇지 않아도 이런 일이 생길까봐 등불을 들고 가는데 소경이라고 이래도 되는 거요?"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때, 부딪친 사람이 "아저씨 등불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등을 손에 들고는 있었으나 등불은 이미 바람에 꺼져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한 토막 얘기 속에서 큰 교훈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의 눈이 어두워 믿음이 식었으면서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성령을 소멸하고서도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사랑이 식었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소경처럼 불꺼진 등을 들고 불이 있거니 믿고 어두운 길을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도 "성령" 입니다.
요엘 2:28-30절의 말씀도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특정한 때,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했던 하나님의 신이 때가 이르면, 남녀 노소는 물론 남종과 여종에게까지 임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회 계급에 차별 없이 노예들에게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영을 받고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울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를 통해서 요엘 2:28-30절의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만민에게 하나님의 신이 부어졌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행 2:17)
또한, 요한복음 14:21-26절의 말씀은 주님께서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보혜사란 요한복음에만 사용된 성령의 다른 표현으로서 "파라크레토스"는 "위로자"나 "가까이 오는 자"란 뜻으로 "돕기 위해 오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계명을 지키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4장에는 여러번 이 말씀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15절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 라는 말씀과 21절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씀과 24절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 "우리" 즉 성령님이 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모든 감정적이고 관념적인 영성을 현실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무엇을 현실로 만드시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성령님은 관념적인 사랑을 현실이 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4: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감정이나 관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려는 자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계명이란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사람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어떤 구체적인 형태나 정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상대방을 아끼고 상대가 원하는 일을, 상대방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관계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랑을 통해서만 주님을 사랑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흔히 사랑하면 감상적이고 달콤한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주시는 고통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희생이 없는 사랑은 자기 욕망을 사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희생적 의미를 가진 이 사랑만이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였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하심으로써 성령께서는 계명을 통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관념적인 관계를 현실이 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4:21에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15절의 말씀은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신 말씀이라면 21절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법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주일날 어느 개척교회의 권사 한 분이 예배당엘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집사님으로부터 낚시를 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화가 나서 욱하는 마음에 "물에나 퐁당 빠져라" 하고는 "앗차 실수했구나" 후회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낚시간 권사와 가까운 사이였고 낚시간 권사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월요일 저녁에 낚시를 갔던 권사님이 사택에 잠깐 들르겠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목사님 죄인 왔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부드러웠습니다. 방에 들어서는 권사님의 손에는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어제 제가 교회엘 나오지 않았는데도 걱정해 주셨다면서요. 다음부터는 주일을 꼭 지키겠습니다. 목사님, 늘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안집사는 "목사님이 무척 염려하시더라"고 전했을 뿐입니다.
사랑이란 엄청나고 큰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헤아려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바르게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합하게 하는 사랑은 더 큰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를 화목케 하는 사신으로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후 5;20)
셋째, 성령님은 관념적인 구원을 현실이 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4:23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에게는 주님과 성령님께서 거처를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현실화가 중생, 즉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악마가 천사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지 않던 것이 믿어지고, 싫던 것이 좋아지고 힘들던 것이 보람이 있고, 받는 즐거움이 주는 즐거움이 되고, 소유의 기쁨이 나눔의 기쁨이 되고, 복음의 기피자가 복음의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증거는 불안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집에 끼니가 있는지, 사업이 부도가 났는지, 집 식구 누가 아픈 지도 모르고 히히 낙낙 하는 철부지의 태평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주무실 수 있는 그런 안정입니다.
요한복음 14:27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새로 거듭난 성도에게 주신 이 평안은 빼앗길 수도, 취소될 수도, 소멸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복, 축복, 형통, 평안이라는 말이 16가지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은 축복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그 하나 하나를 믿고 행하면 성령님의 역사로 그 하나 하나가 다 현실이 됩니다.
이 16가지 축복의 말씀 중에 대표적인 말씀 3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의 하나는, "아쉬란"이란 말이고 또 하나는 "토브"라는 말이며 나머지는 "마카리오스"란 말입니다.
"아쉬란"이란 한순간이 아닌 우리의 생애를 통해 내려지는 계속적인 성령님의 은사를 말합니다.
"토브"란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 즉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행복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카리오스"란 주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믿음 안에서의 안정으로, 불안에서 자유로워진 상태, 은혜와 평강, 그리고 구원을 받은 기쁨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역사는 성경의 모든 계명을 지키게 하시고, 성경의 모든 약속을 현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꺼진 등불 같은 관념적인 사랑, 관념적인 관계, 관념적인 구원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현실이 된 사랑, 관계, 그리고 중생의 평안을 가지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적 부흥에 대한 약속
요엘 2:28-32 / 박봉수 목사
구약 성경에는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예언자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 다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분석해 보면 하나의 공통된 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판과 회복이라는 구조입니다.
먼저 심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저런 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이런 저런 것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다음으로 회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이러 저렇게 치료하시고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요엘서도 이런 전형적인 예언서의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1장을 보면 두 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키 어려운 큰 재앙이 선포됩니다. 하나는 메뚜기 재앙이고, 다른 하나는 극심한 가뭄 재앙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재앙을 만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엘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이런 재앙을 내리셨다고 외쳤습니다.
다음으로 회복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2:12에 보면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회복하시겠고, 재앙을 다 거두실 것이고, 재앙으로 황폐해 진 땅을 복구해 주실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요엘서는 전형적인 예언서의 메시지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요엘서가 다른 예언서와 다른 점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존의 예언서 구조에서 다루지 않던 특별한 내용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지금 심판을 받고 있는 내용이 회복되는 것을 뛰어넘어 본질적인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축복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예언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축복의 약속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8절을 보면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여호와께로 돌아온 다시 말해서 회개한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만민에게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보면 만민은 “콜 바사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콜은 ‘모든’이라는 뜻이고, 바사르는 ‘육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지 않고 하필이면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셨을까요?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있습니다.
창세기 6장 1-3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노아의 홍수가 시작되기 직전 세상에 죄악이 가득 차게 되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던 하나님의 백성들마저도 변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죄 앞에 무능하고 연약한 인간 즉 육체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성령을 거두시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영원히 성령이 육체가 된 인간들과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의 수명도 120까지로 단축시켜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홍수로 육체가 된 인간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옛날 육체가 된 인간에게 내렸던 저주가 풀릴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했던 재앙이 걷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바로 잡히고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태고 때부터 있었던 저주가 끊기고 인류의 원역사가 복원되는 놀라운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부어지는 것이 도대체 왜 그렇게 큰 축복이 될까요?
28절을 보면 “너희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장래의 일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귀가 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상을 본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이 예언이 행 2장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이 말씀 그대로 성령받은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눈이 열렸고, 능력을 받고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최근 [잃어버린 20년]이란 책을 낸 김재홍씨가 장안의 화재가 되고 있습니다. 이 분은 1982년에 감기약 부작용의 약화 사고로 실명을 해서 20년 동안을 실명상태로 보내야 했습니다. 최근에 인공각막 이식 수술로 시력이 0.3까지 회복되어 드디어 20년만에 세상을 보게 되었답니다. 이분이 눈을 뜨고 나서 처음 한 말이 “20년 만에 본 아내가 얼마나 예쁘던지... ” 이 책에서 김재홍씨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흰 머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빛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눈을 뜨고 난 뒤에 이 분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너무 행복하고 너무 감격스럽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새롭게 영적인 눈을 뜬 것을 말합니다. 새롭게 열린 심령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고 할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 믿어지지가 않았었지만 이제는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나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새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인생 자체가 변화되었습니다.
시 51:11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뒤에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다른 것은 몰라도 성령만은 거두지 마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놀라운 축복입니다. 반면에 우리에게 성령이 거두어지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사건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에게서 성령이 거두어지면 안 됩니다.
모든 육체에 성령이 부어지는 것이 도대체 왜 그렇게 큰 축복일까요?
본문을 보면 회개하는 모든 육체에 성령이 부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 11:29을 보면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12:2을 보면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특정인들에게만 주의 신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모세도 부담스럽고 다른 사람들이 시기하는 일도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구약시대에 성령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정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임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나 제사장 그리고 때로는 왕과 같은 특정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만 주의 신이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주의 신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이면 누구에게나 성령이 부어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29절을 보면 “그 때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종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리는 이방인 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방인 노예에게까지도 차별이 없이 하나님의 영이 부어질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여종에게까지 주의 영이 부어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여자는 인간 이하의 인간 취급을 받던 시대입니다. 이런 여자에게까지 성령이 부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선언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부어지되 특정인 특정 직분 맡은 사람들에게만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에게만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신분 차별도, 성차별도, 모든 인위적인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질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성령 강림 사건에서 그 자리에 참여했던 120문도 모두에게 예외 없이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사도들은 물론이고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모두 각 사람 위에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도, 에베소를 비롯한 이방 지역에도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전혀 예수 믿을 수 없던 우리 민족에게도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도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고,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고, 누구라도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겠다는 약속입니다.
32절을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0절과 31절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30절을 보면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큰 재앙이 임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 땅의 그 엄청난 재앙의 상황을 연상시켜줍니다. 당시 애굽의 물은 다 피로 변했었습니다. 불덩이가 우박과 함께 섞여서 내려 땅 위에 온통 불덩이가 가득했고, 그 결과 곳곳에서 연기 기둥이 피어올랐습니다. 바로 지옥 그 자체의 모습입니다.
또한 31절을 보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 이 우주에 정말 끔찍한 재앙이 임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0절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일어나는 재앙이라면, 31절은 앞으로 주님의 재림 때에 나타날 엄청난 우주적인 큰 재앙을 말합니다.
이런 재앙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앙의 바다인 애굽을 피해서 출애굽했던 것처럼 애굽을 떠나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롯의 일가가 한 밤중에 그 땅을 피해서 나왔던 것처럼 도망쳐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탈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큰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야단법석일 때 누전으로 그곳에 불이 났던 일이 있습니다. 건물 자재가 인화물질이 많아서 불길은 삽시간에 크게 번져서 앞문에서 불길이 타오르자 사람들이 우와 좌왕 비상구를 찾아서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비상구는 큰 자물통으로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굳게 닫힌 비상구 앞에서 뜨거운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이게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의 현주소입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바쁘게 어디론가 뛰어갑니다. 그러다 막상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고,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탈출구가 없습니다. 막다른 길 앞에서 절망하고 주저앉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뜨르가 간파했던 현대의 비극입니다. 바로 “No Exit!”(탈출구가 없다!)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2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탈출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 놀라운 약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율법 규정을 엄수할 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단 한가지 율법 조항을 어기기만 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과거 율법을 어겼을지라도, 앞으로 율법 조항을 있는 그대로 다 지킬 자신이 없을지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 50:15을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한 권사님댁에 심방을 갔습니다. 심방을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권사님 말씀이 저희 집에 오시면 우편함 안을 손으로 더듬어 보세요! 그러시더라구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심방을 갔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습니다. 소리를 쳐 봐도 대답이 없습니다. 문득 권사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편함 안을 더듬어 봤더니 그 안에 초인종이 있다라구요. 그것을 누르니 안에서 알아듣고는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워낙 잡상인도 많고 장난치는 사람도 많아서 초인종을 숨겨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초인종입니다. 기도하면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우리는 그 초인종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호와께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창 12:7-8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바로 여호와께 제사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찾는 작업입니다. 평상시에 잊고 살던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고 대화하고 교제하는 작업이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셔야만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께서 나타나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 현장에서 여호와를 찾으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께 나아갈 때 여호와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놀라운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굳게 붙잡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욜 2:28-32 / 피종진 목사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세에 하나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등 주로 기름 부음 받은 특별한 직분자에게 국한되었던 성령의 임재가 신약 시대에 들어와 신분이나 성별, 연령 등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도 차별됨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신 즉,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신다는 이 약속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까요?
첫째,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욜 2:32)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어리석은 인간을 깨닫게 해주시고, 미련한 자로 지혜롭게 하시며, 우둔한 자로 총명 있게 하여 주시고, 육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바꾸어서 무감각한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고 믿게 해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서 5:17에 보면 구원을 얻지 못한 인생은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자는 일평생동안 어두운 데서 먹고 살게 되고, 번뇌 속에 살다가 이런 병, 저런 병과 싸우면서, 또 나중에는 분노가 치밀어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영생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 9:27)이기 때문에 이런 인생으로 죽고 끝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둘째, 하늘의 권세를 힘입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욜 2:29,30) 여기에서 ‘피, 불, 연기 기둥’ 등은 출애굽 당시에 있었던 엄청난 이적으로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의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이적(異蹟)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적 속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수학적으로 재보고, 머리로 판단하여 눈으로 보고 경험해보고 느끼는 것만으로 사람을 ‘옳다, 그르다’고 판단합니다. 사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이적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가 공중에 떠있는 것도 이적이고, 조그마한 씨앗을 심었는데 아름다운 꽃이 피어 향기가 나고 열매를 맺는 것도 이적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이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권세를 힘입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안 되는 것도 되게 되고, 없는 것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모신 사람은 안 돼도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없어도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일도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4:49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 골방을 찾아가 사람과 단절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여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잃었던 능력이 회복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은사가 충전됩니다.
셋째, 큰 환난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1,32) 말세에는 개국 이래로 없었던 환난의 시대가 임한다는 것을 성경에 여러 차례 말씀했습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전갈이 쏘는 것과 같은 시험의 때(계 9:5)가 올 것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환난이 오든 그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할 때 그 어떠한 환난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환난에는 사탄이 주는 환난도 있고, 스스로 시험에 빠져서 오는 환난도 있으며,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한 환난도 있습니다(신 4:30). 환난을 안당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청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꼭 환난을 당한 후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멸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 4:31). 우리는 환난이 있을 때도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만, 평상시에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듯이 성도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넷째, 주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으로 온 인류가 멸망을 당하는 것 같아도 그 중에도 여호와의 부름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증인으로서 그분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구원을 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음으로 지금도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주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을 얻게 하고, 하늘의 권세를 힘입으며, 큰 환난을 이기게 하고, 주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히 받아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욜 2:28-32 / 이필재 목사
오늘은 전부 고향에 가셔서 교회가 텅 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 가신 분들은 전부 분당이 고향이신가? 저는 분당이 고향이라서 여기 이렇게 미리 와있습니다. 모두 즐거운 추석 명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요엘서에 나타난 두 가지 방향의 말씀 중 지난 주일의 말씀은 육신 생활에 관계되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아니하는 민족에게는 밭의 채소까지 벌레가 다 갉아먹어서 먹을 양식까지 없어지는 그런 육신적 방향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반대로 영적인 말씀, 영적인 교훈이 되는 요엘서의 다른 면의 말씀을 생각하겠습니다. 요엘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가 B.C 830년이니까 이 예언의 말씀은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면 A.D 33년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약 860년 만에 이루어진 말씀이 오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요엘서의 말씀은 신약 사도행전 2장에 똑같이 기록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장 16절에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그래서 2장 17절에서 21절까지 오늘 읽은 성경말씀이 그대로 나와 있어서,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것은 “860년 전에 요엘 예언자가 예언해 놓은 것이 지금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신약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강림 사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이라고 하는 유대인의 절기에 120명의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모여서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 충만한 역사가 나타난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이 역사는 요엘이 예언해 놓은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이니까 그 옆에서 그 사람들을 보는 동네 사람들이 비웃는 말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술이 취했나 보다. 새 술에 취했나 보다.” 베드로가 그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여보시오! 지금이 때가 몇 시요? 이제 제 삼시가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아침 9시입니다. “아침 9시부터 술 취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요?” “그럼 당신들이 떠들어대는 그건 도대체 뭐요?” “우리는 860년 전, 오래오래 전에 요엘 예언자가 예언해 놓은 것이 오늘 지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요엘에게 그 때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라 이렇게 예언했는데 그 만민에게 부어주는 사건을 지금 여기서 받게 된 겁니다. 지금 이렇게 구약 성경과 맥을 같이 하는 말을 합니다.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했고, 그것이 지금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860년 전 요엘 예언자의 예언이 성취된 자신들의 성령 충만함을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이 요엘 예언자가 말한 그 때, 하나님의 그러한 역사가 성취되는 그 때에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 했는데 그때가 언제인가? 여기서 말하는 그때는 인류의 종말적 시간, 즉 말세 때를 가리키는 그런 말입니다. 오늘 말씀 30절과 31절을 보면 인류 종말에 있어질 요한계시록과 연결되는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요한계시록에 인류의 종말에 일어날 징조가 줄줄이 나오고 있는데 요엘서에 이미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종말의 그 때가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다. 그런데 그 부어주시는 역사가 지금 시작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을 받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언제를 가리키는 것인가? 이 성서적 말세론을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는 종말론적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말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 방법의 마지막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더 이상 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순서를 보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고 노아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방주로 예비하고 사람을 구원하라고 하셨고 호렙산 불꽃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 만남의 역사로 조명이 되는 그런 구원의 방법을 볼 수 있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되신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사시고 동거하면서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이 두 번째로 나타났고 그 다음에 지금은 성령님의 역사로 인간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삼위일체라고 이런 정리를 하는 겁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오늘 말씀 요엘 예언에도 잘 나타나있고 예수님 자신이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이다.” 이렇게 요엘과 함께 말씀의 연결이 되는 그런 예언을 예수님이 또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순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다.” 성령 충만의 역사를 말하고 그다음에 곧 인류 종말적 예언이 나타납니다. 말세 때, 즉 심판 직전에는 “만민을 빨리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의 이 역사를 만민에게 아주 급속하게 많이 부어주실 것이다.” 32절에 “그대가 되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은 심판과 구원이 임박한 말세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녀가신 것만 해도 벌써 2천 년 전인데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시고 종말론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까?” 이런 말을 하는데 우리 계산입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시간 개념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는 3천년이나 2천년이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만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산에는 그게 뭐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요엘의 예언이 제자들 시대에 이루어져서 이 이후 2천년이 지났으니 요엘 이후에 약 3천년의 시간이 지금 흘러갔으니까 심판의 시기가 언제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이 시대는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 종말론적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다고 이렇게 확실하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내가 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라.” 하신 이 말씀은 언제부터 이루어졌는가? 초대교회부터 즉, 베드로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지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집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성령님의 이 역사가 아주 만민에게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사건을 오늘날의 현상으로 말씀드리면 어떠한 증거가 있을 수 있는가? 넉넉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선교의 확장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분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셨습니다. “만민에게 내 신을 부어 주리라.” 사실 예수님의 시대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민족은 이 하나님의 구원의 영은 만민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택한 백성의 의미는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만을 생각했습니다. 요엘의 예언은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아니라 성령 충만히 받은 이후에는 세계 만민 누구에게나 구원의 영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가 지금이다.” 그래서 그 예언은 예수님의 지상 선교 명령에서 다시 확실시 된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사역의 특징은 두 가지가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는 예수 믿는 자의 숫자가 계속적으로 늘어갔다는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숫자가 120명이라고 확실한 숫자를 밝히고 있습니다. 한 장 넘어가면 “그 날의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120에서 3000으로 늘었습니다. 4장 4절에 가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점점 늘어 그 다음부터는 다 셀 수가 없어 “수가 더 많아지니라.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로 계속되다가 마지막 21장 20절에 가시면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120에서 수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게 성령 사역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선교지의 확산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서대로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예루살렘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실 유대 나라라고 말하면 예루살렘의 남쪽 지방을 말합니다. 거기에 복음이 제자들을 통해 증거되다가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상종치 아니함 이러라.” 말도 안하는데 예수님 말씀대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요엘의 예언대로 만민으로 확산되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에 보세요. 고넬료는 로마 사람의 군인입니다. 그런데 로마 사람이 예수 믿고 세례 받고, 그 다음에 바울을 통해서 복음은 안디옥으로 올라가고 배 타고 구브로 섬으로 갑니다. 밤빌리아로 가고 이고니온으로 가고 아시아에서 환상을 통해서 유럽 마게도니아의 첫 성 빌립보에 가서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고린도 지방에 가서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에베소로 가서 에베소 교회를 세우고 데살로니가로 가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고 마지막에는 로마로 들어가서 로마가 가지고 있는 큰 힘을 통해서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선교사가 안 들어가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그때가 지금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이 종말론 시대에 나타난 현상은 선교의 확장성에서 확실히 요엘의 예언자와 예수의 말씀이 연결되는 하나님의 예언의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이렇게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직의 확장성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내가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까지만 해도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특정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되라고 약속한 그 사람만 되는 것이지 ‘아, 내가 제사장 되어야 되겠다. 성직자 되겠다.’ 아무도 못됩니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되면 내 남종과 여종 만민에게 내 신을 부어줄 것이다.” 약속하셨던 지금은 어떻습니까?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도 목사 안수 받을 사람 107명을 인터뷰 했습니다. 좀 까다롭게 묻습니다. 어떤 때는 인간적으로 계산해서 ‘아니, 저런 출신은 목사 안 되는 것이 좋겠다.’ 고 판단되는 사람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 어디서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까?” 질문하면 “교도소에서부터입니다.” 죄짓고 감옥에 가는 것이 직업이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교도소에도 어쩌다 한번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10~15번 왔다 갔다 심심하면 갔다 오는 사람입니다. 남을 못살게 구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한심스럽게 사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깡패 짓을 하며 날마다 남을 두들겨 패고 그랬던 사람이 목사 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못된 짓은 골고루 골라서 경험하는 그런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출신들이 목사된 다음에 더 잘합니다. “얄미운 목사 시리즈”라는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암흑가 출신으로 온갖 세상 나쁜 짓을 다 하고 살다가 어떻게 예수를 믿어서 그 다음부터 목사가 되어 지금은 아주 굉장히 거룩하게 평가받는 사람! 신학교 다닐 때 사실은 문제아라서 학생처장이 ‘이 학생 퇴학을 시킬까 말까….’ 제가 학생회장을 할 때 학생회장 오라고 하시며 이 학생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며 하셔서 나는 여러 번 불려가서 학생처장과 대화 나누며 “글쎄요. 이 학생 정말 문제아입니다.” 그러던 학생이 많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졸업하고 지금 목사가 되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교회 부흥이 잘 된단 말입니다. 얄밉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은 학문도 없는 가짜 목사가 분명한데 진짜로 취급받고 그럽니다. 하나님이 요엘에게 예언하기를 “그때가 되면 내가 이런 사람, 저럼 사람 내 남종과 여종에게 내 씨를 부어주겠다.” 여기서 이 부어준다는 말은 뭡니까? 병뚜껑을 열고 아까워서 한 방울씩 쫄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한꺼번에 확 열어젖히고 한 번에 왈칵 쏟아 붓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말세 때가 되면 그렇게 할 거야.” 그래서 성직의 확장성! “깡패 출신이었던 어떤 출신이었던 상관이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다 말세 때가 되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 약속이 지금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부흥회 때 쓰는 예화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기도원에서도 했기 때문에 교인들도 아는 게 있습니다. 집사님 가운데 한 분이 취미가 있습니다. 심심하면 나한테 전화해서 뭘 먹으러 가자고 하십니다. “목사님 지금 뭐하세요?” “그냥 있습니다.” “신문에 냉면집 생겼다고 광고가 났는데 가서 냉면이나 먹읍시다.” “그럽시다.” 그래서 가서 냉면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분은 밥 같이 먹자고 하시고는 밥 먹기 전에 반드시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얀 종이 하나를 제 앞에 내놓으십니다. 기도제목입니다. 밥 먹기 전에 밥값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나는 그대로 읽으면서 기도해 드렸습니다. 항상 해드렸습니다. 그날도 냉면 시켰는데 “목사님, 이대로 기도해 주십시오.” 보니까 이것저것 다 쓰셨습니다. “그러지요.” 기도했습니다. 그 분은 항상 그러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집사님은 자동차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되셨습니다. 제일 좋은 차타고 다니고 돈을 많이 버십니다. 그래서 막 기도 끝나고 젓가락으로 냉면 먹기 시작하려 하는데 이 집사님이 별안간에 깜짝 놀라시며 손을 부들부들 떠십니다. “아니, 왜 그러세요? 뭐가 잘못 됐나요? 집사님, 왜 그러세요?” “아니, 어떡하죠?” “왜 그러시는데요?” “목사님, 죄송해요. 잠깐만, 잠깐만요!” 그러시더니 벌떡 일어나시는데 지금 냉면집에 들어오는 어떤 사람을 보시고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다. 그러더니 쫓아가서 멱살을 잡더니 “야, 이 새끼야! 날 봐라!” 그러니까 그 멱살 잡힌 사람은 더 놀라는 겁니다. “아이고! 네가 웬일이냐? 그런데 사람 많은데서 창피하게 왜 그러냐?” “뭐라고? 창피해? 이 새끼가 창피한 걸 다 아네? 너 오늘 잘 만났어!” “이러지 말고 나가자!” 그래서 둘이 나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그나저나 기도는 끝났는데 냉면을 혼자서 먹어야 되는지 안 먹어야 되는지 어떡하란 말이야?’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멱살 잡힌 그 새끼가 목사란 말입니다. 나와 잘 압니다. 그래도 맞을 짓을 했으니 목사라도 거기 앉겠습니까? 사실은 나 때문에 나간 겁니다. 그 사람은 가고 그 집사님만 들어왔습니다. “목사님, 저 새끼가 목사요?” “목사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창피하게 사람 많은데서….” 그 사람이 과거 동대문 시절에 암흑가의 왕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들은 그 사람에게 돈 바치고 몸 바치지 않으면 장사 못했습니다. 그렇게 서울 시내에서 몇 번째 안가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북에서 집사님과 고향 친구였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집사님께 와서는 “야, 친구야! 나도 이 짓 그만하고 싶다. 나도 너처럼 선하게 장사해서 먹고 살고 싶다.” “그래라, 잘 생각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런데 깡패 짓을 해서 그럭저럭 끼니는 잇지는 장사할 만한 자본이 없다. 내가 본전만 줄 테니 나한테 자본을 좀 대줘라.” “그래? 그렇게 하자.” 그리고는 돈을 보따리로 주셨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미국으로 도망가 버린 겁니다. 그리고 처음 만난 겁니다. 그러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 나쁜 자식 나한테 사기 치고…. 그런데 저 놈이 목사가 되었다니! 목사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일이 그렇게 됐구먼. 이 일은 잘 되었소.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만약 저 사람이 아직까지 목사가 되지 않고 예수 믿지 않고 동대문 시장에서 그런 나쁜 짓을 하고 살았다고 합시다. 얼마나 많은 선량한 아줌마들이 그 엄청난 상처와 피나는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하나님이 때려잡아서 다시는 그렇게 못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소명을 받아서 뒤늦게 신학을 공부해서 이렇게 목사가 되었으니 최소한 옛날에 하던 나쁜 짓은 지금 안합니다. 그러면 이게 잘된 일이지요.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집사님도 이제 그 목사님을 목사로 존경하세요. 사람 많은데서 이 새끼, 저 새끼 그러지 마세요. 또, 옛날에 꾸어준 돈 못 받습니다. 돈이 없어요. 그 모습을 보세요. 내가 잘 압니다. 깡패 출신이었다가 별안간 목사가 되었으니 설교를 깡패 얘기나 하지 할 게 있겠습니까? 부흥도 안 되지만 몇 십 명 데리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세요. 얼굴 보시면 돈 있게 생겼습니까? 그러니까 집사님이 계속해서 축복받으려면 그 친구에게 돈을 계속 보내십시오. 그러면 되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책망하며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깡패 출신도 “이제는 만민에게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다.” 때려잡아서 “너 나쁜 짓 좀 그만해! 너는 이제부터 이렇게 살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집사님! 오늘 일 참 잘 된 겁니다. 만나서 돈 좀 주고 도와주세요. 그나저나 이 냉면 불어서 어떻게 먹습니까? 다시 시켜야지요.” 그런 적이 있습니다. 성직의 확장성! “그때가 되면 내가 엘리 지파라던가 아론의 후손 다 필요 없다. 누구든지 괜찮다! 내 남종과 여종에게 내 씨를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성령 강림에서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때를 사는 겁니다. 이때는 그때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영접하고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서 이 세상의 삶을 이겨가야 됩니다. 지금은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하는 겁니다. 왜? 인류 구원의 마지막 사역이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적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을 “구원받을 만한 때요 은혜 받을 만한 때다. 만민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확장해 가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건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결론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 마지막 말씀을 보시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내 공로 없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그때가 언제인가? 지금입니다. 남은 일은 이제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가 되면 내가 아무에게나 아주 끝없이 나의 씨를 부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 현상이 지금 나타나느라고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못하면 마귀의 영을 받게 되고 영적인 방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이 날마다 충만해야 됩니다. 여러분, 인간이 왜 만물의 영장입니까? 인간 빼놓고는 다른 동물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란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존재인 인간은 성령과 나의 영의 교통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고 이 땅을 이겨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로마서 8장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장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가 증거하느니라.” 고린도전서 2장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6장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요한일서 4장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때는 만민에게 내가 내 영을 나에게 신을 부어줄 것이다.” 이 영이 막히면 기도도 하기 싫습니다. 교회 가기 싫고 설교말씀이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영이 막힐 때 제일 하기 싫은 게 설교입니다. 설교 때문에 고민을 합니다. 영의 흐름이 없을 때 설교하는 거 참 고문입니다.
어느 토요일에 제가 설교 준비하고 있는데 대학부 맡은 전도사가 제 방을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벌개져서는 “목사님, 저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나 지난 월요일부터 지금까지 내일 대학부 설교 30분 준비하는데 일주일 동안 시간 보내고 끙끙 댔는데 지금 이 시간까지 도저히 설교 준비가 안 됩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화가 나서 성경책을 벽에 집어 던지고 오는 길입니다. 목사님, 저 어떡하지요?” “앉아보세요.” 그 친구는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한 사람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유명한 목사님들이 다 거기 나오셨습니다. 원로 목사님도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하시고 한경직 목사님도 그곳 졸업하시고 프린스턴 출신은 대한민국 오면 다 존경받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그곳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하버드에서 박사 과정 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좋은 학교가 없습니다. 그렇게 공부 잘하는 전도사님인데 지금 대학생들에게 설교 30분 준비하는데 성경책을 집어던질 만큼 답답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으니까 나한테 와서 “목사님, 어떡해야 합니까?” “그래, 왜 왔느냐?” “내일 대학부 설교를 목사님이 대신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내가 대신할 테니 장년부 설교를 네가 대신 해라!” “거기 앉아봐! 신학교에서 배웠지? 이 목회 사역은 학문과 가지고는 안 돼! 지금 그것이 영적 방해라는 것이야. 그 방해가 계속 되면 번 아웃된다. 못하고 쓰러진다. 신학교에서 성령론 배울 때 이 목회 사역은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이다. 너 그때 학점 A학점 받았지 않느냐? 그게 지금 안 되는 것이다. 영적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좋은 경험 했다. 이거 해결하지 못하면 아예 목사하지 않는 게 낫다. 이걸 해결해야 된다.” 막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목사님, 저 어떡해야 합니까?” 우는 겁니다. “지금 본당에 가서 30분 회개 기도해라. 내가 판단하겠다. 전도사하면서 새벽기도 안 나오면 기도 생활 안한다. 맞지?” “맞습니다.” “설교해야 될 사람이 기도 안하니까 마귀가 역사하고 방해 놓는 것이다. 네가 맞은 학생들을 위해 기도 한마디 안하면서 무슨 설교를 한다고? 영적 방해야. 알았지?” “알았습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왜 인간인가? 영적 존재입니다. 동물들은 영이 없기 때문에 잡아먹어도 괜찮습니다. 인간은 영생이 약속된 영적 존재입니다. “내가 마지막 때는 나의 영은 내 남종과 여종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다.” 그때가 지금입니다. 여러분, 2000년 역사에 설교를 제일 잘 하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6장 19절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뭐라고 부탁하는지 아십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설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세계에서 설교 제일 잘하는 사도가 이렇게 애처로울 만큼 평신도에게 부탁했겠습니까? 영적으로 방해 받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 시간으로 끝나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 사역입니다.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다.” 영적 흐름이 있습니다. 영적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때가 하나님이 만민에게 이 성령의 역사를 부어주시는 반면, 마귀의 방해의 역사도 그것만큼 크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노력을 많이 하고 신앙적 활동에 우리가 몸을 바치는 이유가 그겁니다. 오늘 교회 나오신 여러분, 주의 영이 항상 함께 하셔서 우리가 찬송가를 늘 부릅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주의 영이 함께 하셔서 영적으로 승리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시여, 오늘 말씀의 뜻이 이루어진 시대를 저희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영을 축복하셔서 날마다 성령 충만케 하시고 아버지가 저희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주시는 사역에 몸과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는, 종말론적 시대가 저희들 통해 선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 한 주간에도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시고 특별히 먼 길을 오고가면서 만나는 가족들 피차 평안을 나누면서 복된 시간을 갖는 축복된 한주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욜 2:28-32 / 성흥모 목사
우리는 신년부흥회를 개최하는데, 집회의 이름을 잘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부터 내려오는 대로 ‘심령대부흥회’라고 해도 될 것이지만, “성령충만 영성집회”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제가 기도하면서 이번 부흥회는 성령충만 받기를 원하는 영적인 집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교회가 개최하는 모든 집회가 세상적인 집회가 아니며, 학술세미나도 아니라 영적인 집회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가지는 부흥회는 특별한 영성집회입니다. 성령충만을 위한 영성집회이기에,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뜨겁게 찬송하고, 기도하고, 열심 참석해야겠습니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서 일하시고, 조금만 열심을 내어 오시면 됩니다. 늦게라고 빠지지 말고 나오시면, 은혜의 잔치에서 은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집회이기 때문에 참석만 하셔도 성령의 감동과 역사를 체험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간절히 기도할 때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행2:4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집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소원하는데,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소원합니다. ‘다른 언어’라고 하였지만, 예전의 개역성경이나 새번역에서는 ‘방언’이라고 했습니다. ‘언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글롯사’라고 하여 혀, 방언, 언어, 말이라는 뜻입니다. 방언이란 뜻은 한 지방의 언어를 말합니다. 때로는 한 나라에서 사용되는 표준어와는 조금 다르게 사용되는 사투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다른’이라는 말은 ‘헤테로스’라고 하여 같지 않고 다른 other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아닌 다른 혀, 다른 말, 다른 언어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다른 언어, 방언이라는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 구약의 요엘2:28-32에서 말씀해주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28:11의 말씀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살고, 성경이 삶의 표준이고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말씀의 자리에 서야합니다.
요한계시록1:3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선입관이나, 나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부터 주신 말씀, 성경대로, 기록된 말씀이 선포된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 삶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 되어야겠습니다.
저는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핵심, 성경의 가르침, 온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붙잡고 믿어야 합니다. 그 외에 비본질적인 것들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부수적인 것이라고 하면 다음에 해도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왜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습니까? 그리고 왜 성령을 보내어주셨고, 성령님은 왜 우리 중에 임재하게 하신 것입니까?
우리들 중에 예수 잘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생명으로 알지 않고, 직분을 내세우고, 권위와 위신을 찾는 일에 우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선입니다. 교회의 생활과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은 다만 예수 잘 믿기 위한 것입니다. 내용과 형식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내용이 빠져버린 형식만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더욱 알차게 담기 위하여 형식이라는 그릇을 갖추는 것뿐입니다.
초대교회가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면서 오순절을 맞이하였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습니다. 성령이 온 성도들 위에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옛날 요엘 선지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셨습니다. 물 붓듯이 부어주셨습니다. 차고 흘러 넘치도록 가득하게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의 오심을 실감나게 표현하셨으며, 우리 사람으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역사로 임하시고 부어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 초대교회 120명의 성도들은 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은혜 받으려고 하면 은혜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하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 사람들로 자기들도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본래부터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하면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프리카 유럽, 중동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함께 유대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찾아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집에서 큰 소리가 나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들이 각국에서 사용하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 교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들었는데, 자기들의 나라말로 들었습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야?”(행2:8)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또 메소보아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야와 밤빌리아,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 로마로부터 온 사람, 또는 그레데인 아라비아인들도 있었습니다. 이 여러 지역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자기 나라 자기 지방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에서 말하는 방언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있고, 또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기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게 합니다.
여러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2:7-8)고 합니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을 저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습니다. 행2:13절에 보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 사도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 삼시라는 말은 오전 9시 경으로, 어떤 사람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하여 그런 횡설수설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말하는 것을 무슨 말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바로 그 예언이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이런 강력한 현상은 이미 구약에서 요엘 선지자로 말씀하신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성부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요엘2:30-32)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른다고 하셨는데, 역사 마지막 시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지막 시대가 되면 하나님은 그 때에 능력 있는 신앙, 역사하는 믿음, 악한 시대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후 다시 오실 때까지가 마지막 날들입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남종과 여종들,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노인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을 잘 믿고 싶어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우리의 생활에서 이루어지고, 그 능력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생생하게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신앙을 가지고 싶습니다. 이것은 결코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일생 예수 믿었다고 하여도 수박 겉핥기와 같이 믿고, 얕은 물가에서 첨벙대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행하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참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과 심판의 말씀이 동시적으로 들려집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믿으면 구원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으면 본래부터 임한 심판에 그대로 머물게 될 뿐입니다. 옛날 노아 시대에 방주를 지어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순종하여 그의 식구는 구원받았습니다. 노아는 미친 소리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자기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문에서 떨어지라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 파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죽음이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명령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핵심이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그것이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떠나가시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한번 기다려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할 수 없는 믿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 충만에 거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어주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게 하셔야 합니다. 성령님을 모신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리” 성령님으로 차고 넘치는 역사, 충만한 역사, 성령님이 온전히 역사하는 신앙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 312번지는 미국의 성령운동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흑인 목사님으로 시무어(William Seymour 1872-1922) 가 파헴의 성경학교를 나와서 아주사로 왔습니다. 작은 장로교회에서 집회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당시 성도들은 그 말씀들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시무어 목사님의 메시지는 당시 기성 교회 성도들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소화시키기에 버거운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설교하려고 와보니 예배당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 성도 한 분이 이럴 수는 없다고 하여 자기 집에서 말씀을 전하시라고 초대하였습니다. 성도의 한 집에서 말씀을 증거하는데, 4일 째 되는 날에 말씀을 듣던 많은 성도들에게 성령 충만이 임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방언하는 이들이 있었고, 큰 소리로 찬양하고 명랑하게 웃기도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에 새술에 취하였다고 하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발을 구르면서 찬양하므로 그 낡은 집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다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몇 군데 집회 장소를 물색하다가 아주사 거리 312번지의 2층 건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아주사 거리의 부흥은 3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미국의 전역에서 아주사 거리의 부흥을 체험하기 위하여 모여들었습니다. 세계 많은 사람들이 아주사거리 선교회에서 일어난 영적 부흥을 체험하기 위하여 모여드는데, 예배는 아래층에 드리고, 2층은 하루 종일 개방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2층에 올라가서 쉬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열한 살의 캐들린이라는 소녀가 다락방에 있었고,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을 쳐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2층에 올라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열한 살 소녀 캐들린이 일어나더니 그 올라오는 남자를 향하여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크게 십여분 동안 말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런 소리 때문에 종을 치지 못하고 지체 되었으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예배당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낯선 남자가 어린 소녀 캐들린의 손을 잡고 강단에 올라가서 사람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유대인입니다. 저는 방언에 대해 조사하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 도시에서 제 성이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제 직업이나 제가 여기 온 목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이곳 설교자들의 설교를 낱낱이 분석하고 해부하여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강의에 사용하려고 이곳에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건물에 들어오는 순간, 이 소녀가 히브리어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녀는 제 성과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제가 이곳에 온 목적과 제 직업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제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이 소녀가 여기 사람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제 사생활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유대인은 무릎을 꿇고 울부짖으며, 마치 심장이 터질 듯한 음성으로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는 오늘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기뻐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이 소녀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그 어린 입술을 사용하셔서 한 사람에게 깨닫게 하는데, 성령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1922년에 아프리카 한 가운데서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인 갈룩이라는 목사님이 부부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공화국 내에 있는 판즈 부족의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였습니다. 판즈 부족으로는 갈룩 목사님이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판즈 부족은 식인종이었습니다. 직접 판즈 부족에게로 들어가지 못하고 옆에 있는 부족에게로 들어가서 캠프를 치고 판즈부족에게 전도하려고 했습니다. 사모님이 말라리아 병에 걸려서 자기를 돕는 원주님 한 사람에 약을 구하기 위하여 도시에 나가야 하는데, 돌아가면 사모님이 돌아가실 것 같아 판즈부족이 사는 지역으로 거쳐 약을 구해오다가 청년 몇 사람이 출발하였는데, 한 청년이 식인종에게 잡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원주민 몇 사람과 함께 판즈 부족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위를 산만하게 하면 보초들이 딴 눈을 팔 때에 들어가 구출하기 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지키는 한 집이 있어 그 청년이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보초들을 지나서 그 집으로 들어가서 묶여 있는 청년을 구출해 나오는데, 보초들이 사람들을 불러 그 집 안에 온 식인종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뒤에 자기들을 구출해줄 것으로 말한 함께 온 청년들이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추장이 모든 식인종들을 불러 모으고 무당 같은 자가 목사님 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소리를 칩니다. 마치 재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무당은 갈대지팡이를 잡고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갈룩 목사님에게 말해보라는 듯이 갈대 지팡이를 던졌습니다. 그 때에 갈룩은 스스로를 변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갈대 지팡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자 식인종들이 조용해졌습니다. 갈룩목사님이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할 지 가르쳐주옵소서. 주님의 영을 제게 보내주십시오.” 그 때에 갈룩목사님의 몸이 흔들리며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13:11)는 말씀이었습니다. 갈룩목사님은 심호흡을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술에서 그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말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도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식인종들이 그 말을 다 알아듣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판즈부족의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20분 동안 말을 하고 그런 언어가 뚝 그쳤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더니 무당이 수탉을 잡아가지고 와서 목사님과 원주민 청년의 얼굴을 그 피를 뿌리더니 가라고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추장은 두 사람이 선교본부로 돌아오는데 식인종 두 사람을 호위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이 선교사는 마음놓고 그 부족에게 들어가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인종의 습관을 버리고 예수 믿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다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오늘 성령충만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사모하는 중에 청령님의 은사를 사모하여 큰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욜 2:28-32 / 김충식 목사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이 지난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이때부터 만민에게 성령이 부어지며, 구원이 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우연히 임한 것이 아니고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말씀의 성취입니다. 남유다 제9대 요아스왕 때에 메뚜기 재앙이 임했습니다. 펄벅(Pearl Buck) 여사가 쓴 소설 대지를 영화로 만든 것을 보신 분들은 메뚜기의 재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아실 것입니다. 농작물은 물론이고 모든 초목을 훑어가서 먹을 것이 남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생태계까지 피해를 주는 심각한 재앙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메뚜기 재앙으로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 오는 슬픔 중에도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이때에 요엘 선지자가 등장하여 구체적인 죄를 열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에 미친 재앙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죄악이라고 지적합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서 유다 민족이 지은 죄가 크게 두 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바알숭배신앙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인 아합과 그의 부인 이세벨로 인하여 북 이스라엘은 물론 남유다까지도 바알 신앙의 영향을 받습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보다 힘이 열세였기 때문에 정략적으로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를 여호람왕과 결혼을 시킵니다. 그 결과 유다도 바알신앙이 조장된 것입니다. 훗날 예후의 혁명으로 여호람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죽임을 당하고 이세벨도 죽습니다. 유다는 다윗의 왕통을 이어받은 나라이기에 다윗 후손만이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정국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가 자신의 손자들을 모두 죽이고 유다를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6년 동안 성전에 숨겼다가 7년이 되던 해에 그를 내세워 아달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요아스가 왕이 되기 전 이미 3대에 걸쳐서 바알신앙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전제사를 소홀히 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민족이면서 성전 백성이라 할 수 있는데 바알 신앙으로 인해 성전 제사를 등한시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요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특히 성령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합니다. 따라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회개하라는 선포입니다.
요엘은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회개하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욜2:12) 이스라엘이 회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떠났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엘은 회개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금식하면서 울며 애통하라고 합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 전체가 모이는 성회를 소집하라고 합니다. 모두 의미있는 말씀입니다. 금식하면서 통회하는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는 분들이 시간이 너무 오래가면 안 되겠으니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에게 ‘여보 미안해요 이제 그만합시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미안한 마음 없이 단지 무마하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는 것은 구약 시대 때에는 재난을 당하거나 재앙을 만날 때에 옷을 찢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옷만 찢으면 되는 줄 알고 습관적으로 가식적이며 형식적인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찢으라는 것은 진실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소집하여 성회로 모이라는 것은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통회하고 자복할 때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많은 회중들이 함께 모일 때에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근래 한국 교회가 변질된 것이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개교회주의화 되므로 함께 모이는 성회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한국 교회는 함께 모이기를 기뻐했습니다. 1970년 초반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님이 집회를 할 때에 여의도 광장이 가득 찼습니다. 뿐만 아니라 1974년 엑스플러 성회도 역시 여의도에서 했는데 그 때에 100만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통회하고 자복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만이 아닌 한국 경제가 성장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절기를 맞이할 때는 12세 이상된 성년들은 모두 성전을 찾으라 하셨고, 특히 회개의 성회로 모일 때에는 남녀노소 장로 소아 하다못해 젖먹이나 신랑, 신부까지 소집하라고 하셨습니다.(욜2:16) 신랑, 신부 이야기가 나온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1년 동안은 모든 의무로부터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결혼한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회개의 성회로 모일 때에는 신랑, 신부나 젖먹이까지라도 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범죄한 것이 있다면 죄를 인정하면서, 슬퍼하고 마음을 찢으면서, 함께 모여 통절한 회개를 할 수 있다면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유다 민족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하라고 선포합니다.
둘째는, 유다가 회개한다면 현세적인 축복을 주신다는 선포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현세적인 축복을 약속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이 뜨거우시기에 유다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욜2:18) 마치 부모가 잘못되어져 가는 자녀를 볼 때에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을 갖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먼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농업과 목축업의 나라입니다. 농업과 목축업을 할 때에 제일 필요한 것이 물입니다. 그런데 물이 필요하다고 해서 너무 많으면 안 됩니다. 벼농사를 할 때에 물이 논에 항상 차있으면 벼가 썩어서 곡식을 걷을 수 없습니다. 때에 따라 적당히 비가 내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른 비는 곡식이 발아 할 때 싹이 잘 나오게 하는 비이며, 늦은 비는 곡식이 성숙해 질 때 알곡이 잘 맺혀지기 위해 내리는 비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효적절하게 찾아오셔서 역사하시고 선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축복은 이스라엘이 다시는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은 열국들의 틈에 끼어 있어서 항상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시는 열국들의 압제를 받지 아니하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는 풍요로움의 축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물질적인 복을 넉넉하고도 흡족하게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는 기복신앙의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실한 백성이 되고, 마음을 찢는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그만 하시면 마지막입니다만,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7을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라는 말씀이 있는데 열면 닫을 사람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축복의 문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문도 열려야 하고, 국가의 문도 열려야 합니다. 사업의 문이 열려야 하고, 직장이나 자녀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문이 열리는 축복을 삶속에서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회개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스라엘을 축복하시어 다른 신이 없는 줄 알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무엇보다 영적인 축복을 주신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육적인 축복도 주시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성령강림이라는 완성된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은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욜 2:28)고 선포합니다. 만민이라 함은 남녀노소, 신분, 민족을 초월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므로 그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본래 죄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사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시므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고 사귐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만민을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본문 32절을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리니” 말씀하며, 로마서 10:9-10에도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합니다. 하나님을 시인하면서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이 우리 인생의 키(Key)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있는데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기만 하면 누구든지 영적인 문제나 육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랍비에게 가난한 사람이 찾아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랍비님, 유월절을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아서 근심이 태산 같습니다.’ 랍비가 ‘무슨 근심이 그렇게 많습니까?’ ‘네, 유월절에 필요한 무교병 살 돈도 없고, 아이들 옷 살 돈도 없고, 아내에게도 옷 한 벌 해줘야 하는데 그 옷 살 돈도 없고, 포도주 살 돈도 없습니다. 이래저래 근심이 많습니다.’하였습니다. 랍비가 물었습니다. ‘무교병의 값이 얼마나 됩니까?’ ‘3만원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이들 옷은 얼마나 듭니까?’ ‘아이는 2명인데 10만원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 옷은 얼마나 드나요?’ ‘아내 옷도 10만원은 있어야 한 벌 살 것 같습니다.’ ‘그럼 포도주는요?’ ‘포도주는 한 2만 원짜리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랍비가 말하기를 ‘여보시오 이제부터는 태산 같은 근심을 하지 마시고 한 가지 근심만 하십시오. 25만원 걱정 하나만 하면 됩니다.’ 하더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만 성령 하나만 받으면 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업 근심, 자녀 근심, 돈 근심, 건강 근심, 노후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며 동시에 성령께서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살고 싶어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면 기쁨으로 가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자살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 문제가 단숨에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큰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 그것이 제가 져야할 십자가라면 달게 지고 이겨 나가겠습니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 부딪혀오는 여러 가지 악조건들을 이겨나가는 힘과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 살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습니다.’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해서 ‘살고 싶지만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순종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성령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일시적으로는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것이고, 우리를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금년은 6월 12일 주일이 성령강림절입니다. 앞으로 남은 두 주간 동안 성령을 사모하면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얼마 전 「나는 가수다」라는 T.V 프로그램에 어느 가수가 윤복희 권사의 「여러분」을 불렀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코 끝을 찡하게 했습니다. 그 가수는 목숨을 건 것 같은 열정을 가지고 온 몸으로 노래했습니다. 그의 열창이 청중의 가슴마다 노래의 정신으로 충만하게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가수로서의 치열한 정신과 열정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성령을 열망하면서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한 거룩한 광인(狂人)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때에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요엘 선지자는 그들에게 회복의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회개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다.’입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후에 베드로가 설교를 했을 때 그곳에 모였던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가슴이 찔렸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할 때에 베드로도 요엘과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합니다. 이 원칙과 법칙은 어느 시대나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축복의 완성인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내 영을 부어 주리니
욜 2:28-32 / 강성춘 목사 / 전주동부교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한 자리에 모였던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신기하게 여겨 이 말하는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야 하며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그들이 술에 취하였다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며 베드로는 자기와 동료들이 술에 취했다는 비방을 가볍게 일축한 뒤, 요엘서를 인용하여 말세에 모든 육체에 하나님의 신을 부어 주시겠다는 예언을 상기시키고, 지금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28)라고 합니다.
만민은 세상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닌 심판의 날 구원받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총수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자신의 백성을 구별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인 치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영적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누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떠한 답변을 제시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곧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는 사람들이라 할 것입니다. 또 조금 더 잘 아는 이들은 세례 받고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이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전도와 봉사 둥 교회와 관련된 일에 열심 내는 사람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들도 전혀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대답은 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완전한 대답은 성경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 인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로마서에서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확실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성경이 지적하듯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게 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그것을 하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바 선하고 능하고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가게 마련입니다.
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라고 합니다.
그 마음과 심령에 평안이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고 합니다.
하나님을 거슬러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합니다.
이는 신약에서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확증하는 바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와 관련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라고 성령 받은 자의 면모를 명확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만민’이란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로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구속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들에 대하여 묘사하기를 모든 나라와 종족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행 2:39)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만민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회개할 때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임한 메뚜기 재앙과 가뭄 재앙으로 인하여 황폐하여진 유다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충분히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욜 2:22-24)라고 하십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러한 회복과 성령 충만의 축복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들의 회개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간곡하게 백성들의 참된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 그리고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을 예언함으로써 백성들의 회개를 고무 시켜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은 예수님께서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라고 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을 나열하고 그들이 행할 일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세상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이 행할 일들로 제시 되는 바 장래 일을 말하고,꿈을 꾸고,이상을 본다는 것은 모두 미래지향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이 말씀을 접하는 남유다 백성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모든 민족에게 그토록 소망이 되고 희망이 되는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여호와의 날이 누구도 희망을 가질 수 없는 크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욜 2:30-31)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이 그 빛을 잃고 변하는 것을 종말론적 여호와의 날 곧 최후 심판 날이 이름을 알리는 징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징조가 종말론적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나타나게 될 것 이라는 사실은 후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눅 21:25)고 합니다.
특히 남 유다 멸망에 에스겔이 예언 하였습니다.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이며(겔 7:26)라고 합니다.
아모스도 에언 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정녕 종말론적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직전에는 크고 두려운 현상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큰 절망 속에 빠진 남 유다 백성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열방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과 이상을 보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놀라운 징조가 나타날 때에 대하여 ‘그 때’(29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그 때’가 언제입니까? 이때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 곧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셨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우리는 이 예언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사실을 분명 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 종말론적 여호의 날,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최후 심판 날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신호가 되는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지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일로서의 의미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최후 심판 날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결정적 신호로서의 의미가 함께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도 종말론적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을 다양하게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만큼 종말론적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을 보여준 사건은 없습니다. 비록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과 같이 변하는 일들은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는 곳곳에게 계속해서,그리고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오래 지나지 않은 때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도 핏빛으로 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종말론적 여호와의 날 곧 최후 심판 날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의 징조를 보면서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깨어 근신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 날은 가까웠고 점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성령 시대를 사는 우리는 늘 종말론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라도 하나님의 최후심판 날은 도래할 수 있음을 알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적 최후의 날의 도래를 바라보며 원수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벌벌 떨게 되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고 합니다.
같은 여호와의 날이지만 악인에게는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인 반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 날은 마치 출애굽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을 가능케 했던 결정적 사건이 있던 유월절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하는 날에 애굽에는 장자의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온전한 구원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이를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본받으며 그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게 될까요?
주님께서 행하시고 행 하실 일로 가능 하게 됩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고 합니다.
그리고 전하는 자가 있으면 듣게 되고 들으면 부르게 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라고 합니다.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들먹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름을 '찾고 구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오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의 '희생'을 믿는 것입니다. 그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의 '재림'을 믿는 것입니다.
'부른다'는 것은 또한 '고백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 고백은 중대합니다. 우리는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구원이 보상으로 주어지는데 죄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구원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할 자를 먼저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말함으로 전도의 과정을 역행적으로 나열하였고 그 역행적인 나열 방법을 통하여 전도 또는 전파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보내심'임을 강조합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 70인을 선택하여 파송하셨으며(눅 10:1-11) 또한 부활하신 후 승천 하시면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19, 20).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 중 첫 번째는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 없이는 결코 어느 누구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대변자입니다. '전파하다'의 원어는 '알리다'라는 뜻으로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중개하여 알리는 사자의 행위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사자는 알리라고 부탁받은 것 이외에는 덧붙여서도 빼서도 안 되며 변화시키거나 고쳐서도 안 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피동적인, 혹은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적극적인 들음 없이 우리는 전하는 이의 메시지의 핵심을 파악할 수 없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들음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진지한 들음은 믿음의 근원이 됩니다. 들음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바른 들음 없는 바른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고 합니다.
이는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의 인용입니다.
복음 자체가 아름다우니 전파자의 발도 아름답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진리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 받는 자들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2)고 합니다.
젊은 시절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비전을 부여받은 바울은 참된 이상이며 비전이신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으며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한 평생을 헌신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자들은 거리로 뛰쳐나가서 여러 나라의 방언을 말하며 복음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들은 담대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은 점점 이방인들에게까지 퍼지고 그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겁에 질려 있던 제자들은 담대함을 얻어서 로마 당국에 체포될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의 한 번 설교에 오천 명씩, 삼천 명씩 회개하는 대대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은 사람의 마음에 용기를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며 말씀 곧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까지도 감동 시키사 많은 사람들을 주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 사실 믿고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