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聻)(외 1편)
조연호
물드는 서쪽에 사람으로 구더기였음을 두고
할아버지들은 돌아간다 떨어진 씨앗이 내게 막대를 꿰던 날
죽어 또 귀신이 된 너와 만나 즐거웠다
언덕을 따라 억새풀의 꿈이 낮게 풀릴 때
양심을 기름지게 만드는 것으로라도
이대로 영원히 어엿한 날고기가 되어 있고 싶었다
내 찬물의 용무로 온 엄마에게
나는 당신 비린내의 용무로 왔다
한 철의 배설과 그것이 담긴 양동이를 위해 조용히 통을 때리며
이제 더는 원뿔의 색깔로 살을 찔러 보지 않겠거니
시선(視線)이 사방을 결심시켜야 할 차례였다
더러운 얼굴로만 깨끗한 얼굴을 닦을 수 있다는 걸 거기서 배웠다
하지만 형제들은 또 세잔을 보며 자위하고 말았네
특히 사과들에서
정죄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었네
단추로 깊은 바다를 채우면 밤의 옷깃이 떨어지고
지하에 갇힌 부인에게 남편이 크레용을 떨어뜨려 줄 때, 어둠 속에서 뭘 그리면 자기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될까? 전신(全身)이라는 영혼의 비계를 얻기 위해
입에 고인 침을 받들어 쓴다
이것이 거짓일지라도 저 신기루를 내가 믿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 지옥이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인가?
사과에 대한 이야기가 사지(四肢)에 곡을 붙인 노래와 섞이고 있었다
사람으로 물들던 구더기였음을 서쪽에 두고
할아버지들은 돌아간다 나는 다시 긴 심령의 세계
다시 긴 독서(獨棲)의 나날
존엄사(尊嚴死)의 발끝으로 그림자 머리를 눌렀다
어떤 의미로 외침은 늘 청각 뒤에 있었다
귀신으로 죽어 또 귀신이 된 너와 만나 즐거웠다
악기와 귀를 모두 깨버리고
목신(牧神)에 기대어 조용히 미쳐 간다
무영등(無影燈) 아래
절임을 씹는 그 밤은 따뜻했다
엄마의 피투성이 채소를 씹는 밤은 따뜻했다
포자의 밤 던져진 돌에게로 나는 떠오르고
경건이 뭔지도 모르는 이 기도가 나를 담임하고 있다
내겐 진짜 대자연이 아래층에서 비닐봉지를 쓰고 기다렸다
양초 옆에 엎드린 파라핀인 걸 긍지 삼던 밤에
거세된 소녀의 꿈은 강복(降福)하다고 말할수록 부랑하게 후퇴하는 숲
창백하게 절임을 씹는 그 밤은 따뜻했다
아름다운 미아의 모습을 하고 꺾어 따낸 꽃에게로
버러지는 정중히 헤엄쳐간다
누군가는 몰래 자기를 때리는 아이로부터 백치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노을 지는 역천자(逆天者) 건너 너의 발길질
시서(詩書)를 익히겠다며 목관악기부터 사온
아버지는 어째서 취미가 지옥인가
차라리 허기지도록 소원의 1절은 너덜너덜 늦게 온다
절임을 씹는 그 밤은 따뜻했다
나를 고소취하 하라고 외치는
여기 삯일을 베푸는 새댁의 간통자가 있다
상처에 서캐를 뿌리며 물결로 너희를 밟아 죽이리라던 신의 담장 밖
다감한 작업장은 창밖을 대패로 밀어버렸다
누운 나무가 목관(木棺)의 얇은 춤을 추도록
팔베개를 하고 잠들면 입 안이 까맣게 익는 것은 좋았다
젊은이가 다리 사이에 잎사귀를 붙이고 거니는 것은 좋았다
자기 주검을 긁개로 만들어 채탄장 깊이 파내려간
한 시기의 무영등(無影燈) 아래
부침개를 부치게 해다오 아니면 고요히 들떠서 처녀의 낱말을 집어다오
두 눈에 기저귀를 씌워주던 그 밤은 따뜻했다
잘 구겨진 함석지붕 위 어린 전령병의 군악(軍樂)이 울린다
사라지려는 반 척의 배에 몸을 묶고
몰래 숱을 미는 밤은 따뜻했다
짝사랑을 노새에 가득 채우자
더 늦게 성에 눈뜨는 손 모양으로
여기 지혜의 도구가 된 몽둥이가 있습니다
대개 손짐작으로 열차가 발착해 왔다
나와 한 해를 지내고 마른 모유(母乳)는 내게 기사계급을 수여했다
태어난 아기도 적이 찌른 낯짝의 업적을 저토록 잘 이해하고 있는데
소금에 머리를 재운 밤은 따뜻했다
절임을 씹는 그 밤은 따뜻했다
—시집『암흑향』(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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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호 / 1969년 충남 천안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4년〈한국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죽음에 이르는 계절』『저녁의 기원』『천문』『농경시』『암흑향』
첫댓글 절임을 씹는 그 밤은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