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은 본능이다. 이 본능은 여행을 갈 때도 꿈틀댄다. 좀더 유려한 풍경과 좀더 예쁜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곳을 여행지로 고르는 것이다. 경남 함양 개평마을로 떠난 이유다.
‘좌(左)안동 우(右)함양’이란 말이 있다. 함양이 경북 안동에 버금가는 선비의 고장이란 의미다. 이 말의 중심에는 개평마을이 있다.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집성촌인 마을은 조선시대 때 수많은 유학자를 배출했다.
대전통영고속도로 지곡 나들목(IC)을 빠져나와 5분 정도 더 달리면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즉 개평마을에 닿는다. 마을의 첫인상은 친근했다. 선비·유학자 같은 단어만 듣고 엄숙한 분위기를 상상했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집집마다 돌담이 정겹게 쌓여 있고, 그 돌담들은 어깨를 맞댄 것처럼 이어져 있다. 돌담 너머엔 감·석류 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능소화는 돌담을 넘어 흐드러지게 늘어져있는 모습을 구경하며 돌담길을 걷는 일이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60여채의 고택 사이에서 <미스터 션샤인>에 나온 ‘일두고택’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마을 입구에서 발걸음을 뗀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고택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일두고택은 조선시대 성종 때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정여창 선생의 고택이다. 일두(一蠹)는 정여창 선생이 스스로 지은 호(號)로, ‘한마리의 좀벌레’란 뜻이라고 한다. 그 의미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 정여창 선생의 겸손함이 느껴진다.
고택의 솟을대문엔 붉은 바탕에 흰색 글귀가 쓰인 편액 5점이 걸려 있다. 임금이 충신·효자·열녀가 나온 가문에 주는 정려편액이었다. 한 집안에 정려편액이 이렇게 많이 걸린 곳은 전국에서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정려편액을 훑어본 뒤 안으로 들어섰다. ‘ㄱ자’ 모양의 사랑채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노송(老松)이 먼저 반겼다. 사랑채는 지면보다 약 2m 높았다. 그래서 안쪽을 보려면 고개를 뒤로 젖히거나 5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했다. 함부로 내부를 볼 수 없게 일부러 이렇게 만든 듯했다. 건물 구조에서부터 사대부의 위엄이 느껴졌다.
사랑채 옆으로 난 일각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 마당엔 우물을 파놓았는데, 여기엔 사연이 있다. 과거 개평마을에선 집 안에 우물을 파는 것이 금지됐었다고 한다. 배가 항해하는 형상을 띤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나는 것과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하동 정씨 가문에 내려오는 학자의 정기를 끊어내고자 이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도 이곳은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됐다. 작품 속에서 일두고택은 조선의 정신적 지주인 고사홍(이호재 분)이 사는 집으로 등장한다. 일본은 주권을 지키려고 전국 선비들을 모으는 고사홍이 마음에 들 리 없다.
이에 친일파 이완익(김의성 분)은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첫번째 방법으로 이 집을 허문다. 이후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여주인공이자 고사홍의 손녀인 애신(김태리 분)은 본격적으로 의병의 길을 걷는다.
역사 속에서 일본의 패악질로 사라진 곳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가슴에 돌 하나가 얹혔다. 한편으론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준 영웅들 덕에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저 감사했다.
고택 감상이 끝나갈 때 즈음 갑작스레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런데 우산을 쓰고 걷는 돌담길의 운치도 나쁘지 않다. 마을 왼쪽으로 나오니 개울가가 보이고 이내 ‘일두 선생의 산책로’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선비인양 여유로운 걸음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맥문동과 달개비꽃 등 차분한 색감의 야생화와 고택이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지대에 다다랐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로 연노랑을 띠던 돌담은 진노랑으로, 연두색 나뭇잎은 초록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덩달아, 무채색 아스팔트와 빌딩에 둘러싸여 건조했던 눈과 마음도 촉촉이 젖는 듯했다.
함양=최문희, 사진=김덕영 기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의병’ 소재로 다뤄 배우들 열연 볼 만
집집이 돌담이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개평마을 골목길.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길을 걷다보면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이 든다. 케이블 채널 tvN에서 7월부터 방영 중이다. 의병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모두 24부작으로, 30일 종영을 앞두고 있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등으로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