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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예배의 용어 사용
1, 예배와 예식 용어
1) 사회자는 집례자로
"사회"는 집회나 회의, 예식 등에서 진행을 맡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각종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사회자라 칭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성한 사역에서 그 일을 주관하는 사람을 사회자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하여 어떤이들은 국어 사전에도 없는 "사식" 또는 "사예"라는 말을 만들어 쓰기도 합니다. "집례"는 예식을 집행함"이란 뜻으로 교회의 예배 용어로 쓰기에 적합한 말로 여깁니다.
예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이며 만남이기에 예배의 주관자는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딸라 예배를 진행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회자라 하기 보다는 집례자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여겨 본 교단의 "예배와 예식서"(2004)는 집례자란 용어로 통일하였습니다.
다만 집례자란 말이 보다 전문적인 느낌을 주는 용어이기에 목사가 아닌 경우예는 "인도자"로 칭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성가대는 찬양대로
성가대는 예배중에 찬송가 또는 성가곡을 부르는 조직체를 말합니다.
본래 교회에서는 예배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찬양" "찬미" "찬송"등으로 불렀으며 기독교의 찬송가를 광범위하게 "성가"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도 그들의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역시 "성가"라 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일반적인 종교의 범주에 넣어 "성가"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성가대라는 이름이 최근 한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나. 사실 이는 "성가대"의 일본식 표현인 "세이카다이"가 그대로 한국에 전해지면서 통용된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1990년대 이전까지 "찬양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분명한 사실을 "성가라는 말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으며 오히려 "찬양" 이라는 말을 즐겨 쓰고 있기에 '찬양대"란 이름이 더 성경적입니다.
3)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라는 말은 삼가해야
"축원한다"는 말은 한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비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축원을 하되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뜻합니다.
문제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이런 말을 할 경우 듣는 회중이 그것을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혼동하여 무비판적으로 "아멘"하고 응답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럴 경우 설교자가 회중의 "아멘"을 유도해 냄으로써 무조건적인 "동의"나 "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으로 잘못 쓰여 질 염려가 있습니다.
설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지 결코 설교자 자신의 기원이나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설교시간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입니다.
4) 대예배는 주일낮 예배나 주일 공동 예배로
예배는 인류구원의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때달은 자들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나아가 감사함으로 드리는 응답행위입니다.
모든 예배는 이러한 동일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수행됩니다.
한국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를 "대 예배"라고 호칭하는 것은 아마도 그 시간에 전 교인들이 일제히 모여 성대하게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에 "큰 예배"와 "작은 에배"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면 무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이기 때문에 예배자의 수의 많고 적음을 따라 구분하여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에서는 주일 낮 예배를 "공동예배"라고 불러왔습니다. 이말은 전 공동체가 주님의 날에 함께 모여 정규적인 절차와 공공성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주일 낮 예배" 또는 주일 공동예배"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며 편의상 주일 아침에 여러번의 예배를 드릴경우 "주일 낮 9시예배" "주일 낮 10시예배"주일낮 11시 예배"등으로 주르거나 "주일 낮 제1부 예배" 주일 낮 2부 예배"등으로 하며 될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주일낮 11시에 거행하는 예배를 9시나 10시에 거행하는 예배보다 더 "큰 예배"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것입니다.
5) 예배봐준다. 예배 받으세요는 쓰지 말아야
"개업 예배를 봐준다" "구역 예배를받으세요" 라는 등의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표현입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참여자가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그 자리에 현존하신 하나님게 드리는 행위여야 하며 누구는 열심히 예배하고 다른 사람은 그저 바라만 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가 신자를 대신하여 해 줄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무슨 물건처럼 주고 받을수 있는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마치 점쟁이가 "점을 봐준다"거나 무당이 어느집을 위애"지성을 드려준다" "궂을 해준다"는 말을 연상케 하므로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될 표현입니다.
7) 예배. 집회. 기도회들을 구별하여 사용해야
한국교회는 한 주간에도 주일 낮을 비롯하여. 주일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밤. 매일 새벽등 여러 번의 모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나 모임들을 모두 "예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혼동을 가져올 염려가 있으므로. 그 본래의 목적과 의미에 맞게 구별하여 부를 필요가 잇스니다. '예배"란 창조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을 이룬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역사를 집약하고 재현하며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역사적으로 '예배"는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날. 즉 주일에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 시대에 미국의 감리교도들이 주중에 모이는 모임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이 "수요기도회"로 정착되었습니다. 또한 "철야기도회" 역시 웨슬리의 감리교회에서 "철야"라는이름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모임을 전부 "예배"라고 부르면 큰 혼란이 오게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을 그 종류와 성격에 따라 올바른 이름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주일에 모이는 모임은 "예배" 수요일이나 금요일에 모이는 "사경회"나 "부흥외"등은 "집회" 그리고 각종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하는 모임은 "경건회"로 부르면 좋을 것입니다.
8) 예배와 예식은 구별해야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며 예수 그리스께서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인간은 예배의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부활의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배' 그자체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만 행해질 수 있습니다.
혼인. 장례 . 취임. 임직. 헌당. 학위취득. 기념. 송별. 환영. 축하 등 인간이 중심이 되고 사람의 의도나 목적을휘한 모임은 예배라 할수 없습니다. 사람을 위한 목적이나 조건에서 출발하는 신앙적 모임은 예식이라 해야 합니다. 무질서한 모임이 아닌. 예법에 따라 모이고 진행하는 모임을 예식이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모임의 예법기준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식 전체를 예배의 형식을 따라 진행하거나(혼인예식.장례식등) 시작하는 제1부를 예식의 동기가 된 사실에 대한 감사예배(취임감사. 봉헌감사등)로 제2부에서 축하등의 순서로 진행합니다.
예) 혼인예식. 장례식. 임직식. 취임식. 회갑축하예식. 봉헌예식. 교회설립예식. 추모예식
9) 헌금과 봉헌
'헌금'이라는 말은 '돈을 바친다' 또는 '바치는 돈'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예배에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돈'만이 아니기 때문에 이말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에배에서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을 이룬 모든 구속적 은총에 감사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를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예배에서 소정의 '돈'을 바치는 것은 헌신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예배에 있어서 이 순서에 대한 지칭은 '봉헌'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봉헌'이라는 말 속에 목적물이 들어있지 않으므로 '예물 봉헌'이라고 구체적으로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우리가 예배에서 드리는 것은 재물뿐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도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예물'이라고 그 대상을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봉헌'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총앞에 성도들이 바치는 응답적 행위총칭이라고 합니다.
10)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으로
만일 설교자가 "사랑하시는 여러분" 라고 말하면 이는 틀린 어법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에서 "사랑"의 주체는 설교자 자신이기 때문에 결국 설교자가 스스로 자신을 존대한 것이 되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11) 안식일이란 말은 '주일'로
아직도 많은 성도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주일'과 '안식일'을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게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사업을 다 마치시고 쉬신 날 즉. '일곱째 날'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교회는 '안식후 첫날' 에 모여 '떡을 뗌으로" (행 20:7) 주님을 기억하고 부활을 축하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하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6:2)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초대교회가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후 첫날'에 모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날의 의미도 사뭇 달라졌습니다.
주후 165년경에 기록되 순교자 져스틴의 편지에는 '우리는 공동예배를 일요일 날에 가집니다. 왜냐하면 이날은 하나님께서 어두움에서 빛을 가져오신 날이며 한 주간의 첫 날이고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여 '주일'의 의미를 안식일과 전혀 달리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져스틴과 같은 시대에 쓴 바나바의 편지에는 주 이름을 가리켜서 '제8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제7일'과 확연히 구분되면서. 동시에 이 날이 '이 세상의 날'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날' 즉 천국의날' 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되 것이 사실이나(마 12:8,막 2:28), 위에 열거한 것처럼 주일에는 그 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풍부한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12) 성경을 읽을때
성경봉독은 예배의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록된 그을 읽는 방법은 소리를 내지않고 읽는 묵독. 소리를 내어 읽는 낭독이 있습니다. 인도자와 회중이 한 구절씩 번갈아 가며 읽는 방법을 교독. 여러 사람이 차례로 돌려가며 읽는 것을 윤독이라 합니다. 성경봉독을 맡은 이가 미리 정해져 있을 때에는 '제가 혼자 낭독하겠습니다'하는 설명은 필요하지 않으나. 인도자와 회중이 다같이 읽어야 할 때에는 '모두 다같이 낭독 하겠씁니다'라고 말해야 일제히 읽을수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같이 읽을 경우. 음악에서 합창 또는 제창이 있는 것을 끌어다 합독이니 제독이니 하는 말을 지어 쓰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없는 말을 억지로 만들어 애써 한자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라는 말이면 충분합니다.
때로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이가 있는데 봉독이란 말이 이미 '받들어 읽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중복되는 표현을 쓰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한자어로 '봉독하겠습니다'라고 하든지 우리말로 풀어 '받들어 읽겠습니다'하면 될것입니다.
13) 송영은 찬송으로
예배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에 부르는 찬송을 '송영'이라고 하는 경우를 봅니다. '송영'은 헬라어 '독사'에서 온 말로서 '천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예배 전통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께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내용의 가사로 이루어진 찬송을 송영이라 합니다. 근대 개신교 예배시에 예배 시작 부분과 끝 부분에 이러한 내용의 가사로 이루어진 찬송을 부르는 관습이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예배를 시작할 때와 끝마칠때 부르는 찬송을 모두 '송영'이라고 잘못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송영이란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이지 순서상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가사로 된 찬송만 '송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며. 그렇지 않는 경우 순서상 맨 앞이나 뒤에오는 찬송은 단순히 '개회찬송' 혹은 '폐회찬송' 아니면 단순히 '찬송'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14) 결혼식은 혼인예식으로
'혼인'과 '결혼'은 별다른 구분없이 쓰이고 있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로 혼인은 남자가 장가드는 일과 여자가 시집가는 일 곧 부부가 되기 위한 과정을 일컫는 말이며 결혼은 혼인의 완성인 결과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식'은 반드시 '혼인예식'으로 고쳐써야 합니다.
일찍이 성경을 번역하면서도 혼인이라는 말을 썼고(요 2:1) 우리나라의 헌법이나 민법 등 모든 법률에서도 '혼인'(혼인서야. 혼인신고등)을 공식 용어로 쓰고 있습니다. 본 교단의 헌법에는 혼인관계(제4절). 혼례 등 대부분 바르게 쓰고 있으나 결혼식 (25조 2항)이란 말은 고쳐야 할 것입니다.
15) 삼우제는 첫 성묘로
전통 제례에 있어서 하관 및 성분이 끝난 뒤 매일 새묘소를 돌아보는 일을 첫날은 초우 이튿날은 재, 제 3일은 삼우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례 제3일에 산소를 찾아가 살피고 돌보는 것을 삼우제라 하였습니다. '우제'는 헤아리고 염려하는 자세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덤을 쓰고 '처음으로 살피기 위해 가는일'을 첫 성묘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추도식은 추모식으로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며 제사를 드리던 것을 추념 추도 추모등의 말로 표현합니다. 추념은 죽은 이를 생각함. 추도는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함. 추모는 죽은 이를 생각하고 그리워함을 말합니다.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 보다는 다시 만날 날을 바라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정서에 더 부합되는 것이기에 추도식보다 추모식이란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주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서로 그리워하다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 갈음합니다.(?)
행사에서 축사. 권면, 격려사 들을 맡은 이들이 지루할 만큼 길게 이야기를 한 뒤에 '이상으로 축사를 갈음합니다.'라고 끝을 맺는 것을 봅니다. 이 경우 '갈음'이란 말은 끝맺는다는 뜻으로 쓰는것으로 짐작되는데 아주 잘못쓰고 있는것입니다. '갈음'이란 사전적 의미는 원래의 것을 하지 않고 이것으로 대체또는 대신 한다는 뜻의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축사를 하지 않고 '시'를 한수 읊는다든지 노래를 한곡 한다든지 했을 경우 '이 시한수로 축사를 갈음합니다.' '이 노래로 축사를 갈음합니다.' 하는 말이 성립될수 있습니다.
혹시 '가름'이란 말을 쓴다면 그것도 맞지 않습니다. 가름이란 '따로 따로 갈라놓는 일' '서로 다름'이란 뜻의 말인데 이 말을 쓰는 것은 '마지막 골이 승부를 가름했다' 라든지 '부부는 가름이 있어야 한다'들의 예처럼 서로 다른 양쪽을 나누는 분깃점에서 쓸수 있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대산히자 않고 할 말을 다했을 경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렇게하시기를 권면합니다.' '깊은 사랑으로 격려를 드립니다.'들의 말로 마치는 것이 좋습니다.
2, 기도 용어
1) 당신을 하나님. 주님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는 예의에 어긋나는 호칭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분명 하나님께 대하여 직접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2인칭이 됩니다. 그런데. 2인칭으로서의 '당신'이란 말은 결코 존대어가 아닙니다. 다만 3인칭으로 쓸 때에만 '당신'이라는 말이 존칭이 될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언어로써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존칭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며. 만일 존칭으로 사용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2인칭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대하여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올바른 언어 예법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의 사용을 삼가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그냥 '하나님' 또는 '주님'이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2) '기도하였습니다.'하는 과거형은 '기도합니다'라는 현재형으로
기도를 끝낼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기도드렸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를 종종 봅니다. 문제는 기도를 마치는 말인 '기도하다'라는 동사를 과거형으로 쓸 것인가, 아니면 현재형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볼때에 기도를 끝내는 시점에서 1초라도 이전에 발설된말은 모두 과거형이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예배 중에 하는 것이며 예배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모두 현존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인간의 현재젹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결형 어미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기도합니다'와 같는 현재형 어미가 적절한 표현입니다.
3) '주여'는 '주님'으로, '하나님 아버지여'는 '하나님 아버지'로
기도할 떼에 '주여' '하니님이시여'라고 부르는 것은 어법상 맞지 않습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대국어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법입니다.
물론 2인칭이 존칭으로 쓰이지 않을 때에는 호격 조사 '아' 또는 '야'를 쓸 수 있습니다.
예컨대 '복동아' '철수야'하고 부르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2인칭 존칭 명사에는 호격조사를 붙이지 않기 때문에 '어버님이여' '할아버님이시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같은 원리로. 우리가 기도할 떼어 하나님을 '하나님이시여' '주님이시여'라고 부르지 않고 '하나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4) 기도를 시작할 때 성경 구절을 읽는 것은
성경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전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뢰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그 분께 다시 들려드린다는 일은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하는 이들 가운데 마치 사람을 훈계하듯 설교처럼 기도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진지하고 겸허한 자세로 '아버지'를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6:9).
5) 하나님 앞에서 사람에 대한 존대어법은 삼가야
우리말 어법에서는 듣는 사람이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어를 쓰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버지,누님이 오셨어요'하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듣는 '아버지'는 '누님'보다 더 손 위 인물이기 때문에 이럴 경우에는 오히려 '아버님, 누나가 왔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입니다. 같은 원리를 적용하면. 우리가 기 할 때에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신 하나님이 최상위자이시므로 다른 어떤 인물에도 존칭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떼에 '우리 성도님들이' 또는 '우리 목사님께'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로마 가톨릭의 기도문에서도 확인됩니다. 예컨데 성만찬기도 제3양식에서 '중보의 기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지상의 나그네인 교회를 돌보시어 주님의 일꾼.교황 000와 저희주교 000와 모든 주교와 성직자와...굳건하게 하소서'이 기도문에서 '교황님' '주교님'하고 호칭하지 않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잇다. 그러므로 기도할 떼에 '우리 성도님들'이란 표현보다 '저희들' 우리 목사님께'라는 표현보다는 '주께서 세우신 사자에게' 주님의 종에게'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6) 대표기도는 기도인도로
기도시간이 되면 예배 진행을 맡은이가 '우리를 대표해서 000 장로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역할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을 대표해서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서 더 조리있고 논리적으로 말함으로써 회중이 더 잘 기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중들은 딴 생각을 하거나 방관자가 되지 말고 기도를 하는 사람과 같은 마음. 같은 간절함을 가져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중 가운데 기도를 하는 임무를 맡은 이를 가리켜 '대표 기도자'라고 하기보다는 '기도 인도자'라고 하는것이 옳습니다.
7)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부를 때에 '성부'를 부르지 않고 '성자' 혹은 '성령'을 부르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하나님께. 성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끝맺을 떼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합니다. 이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말씀에도 역시 성부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름으로 기도를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그 가르치심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주님'이란 말속에는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란 뜻이 포함되므로 이 말을 쓰는 것은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8) "지금은 처음 시간이오니"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기도를 마치는 즈음에 '지금은 처음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라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음을 자주 보게 된다. 이는 십중팔구 틀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 이전에 이미 입례송, 묵상기도. 개회찬송. 성시교독. 신앙고백. 회중찬송 등의 여러 순서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시간이 예배의 '처음 시간'이라면 이전에 했던 다른 순서들은 예배의 순서가 아니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모순일 수 있습니다. 굳이 이런 표현을 쓰려면 '지금 예배하고 있사오니'라는 말로 바꾸어 써야 합니다.
9) 예수공로 의지하여 기도합니다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에 의한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다 (요 1:12), 예수께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6: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기도하는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끝을 맺을 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10) 축복하여 주옵소서는 복내려 주옵소서로
사전적 의미로 볼때에 '축복'이라는 말은 '행복을 빌다' '신의 은혜를 구하여 빌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복을 빌'수 는 없고, 오직 '복을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빌수 있단 말입니까?
다음에 인용한 성경 말씀들은 이러한 사실을 뚜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그 (멜기세덱)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창 14:19).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 교회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라고 말하는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11) 마음에는 원이로되(?)
기도중에 스스로의 허물이나 실수를 깨닫고 부끄러움에 변명처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잡수시고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죽을 지경이 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고 부탁하시고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셔서 피땀을 흘려가며 기도하셨습니다.
잠시후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니 그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보시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셧습니다 (마26:41). 이 말은 위로나 동정. 아니면 책망이든 예수께서 연약한 제자를 바라보시며 하신 말씀이지 베드로가 미안한 마음에서 한 변명을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것'이라 하였습니다(요일 1:8-9). 신자는 기도할 때 자신의 허물과 약함에서 비롯된 실수나 죄지은 사실을 깨달은 즉시 인정하고 고백하며 철저히 회개하여 용서받을 일이지 결코 그럴듯한 변명으로 적당히 넘겨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12)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이가 '사도신경을 외우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주기도문을 외우심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라고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은 예배시작이나 종료의 기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은 사도적 전총을 가진 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의 요약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암기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에 차명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통하여(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겟습니다'라고 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글자로 쓰거나 자로 인쇄하여 보여지는 것을 지칭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 하신 분부는 외우라는 것이 아니라 본을 받으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같이 주님의 기도(주께서가르쳐주신 기고)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3. 교회행정 용어
1. 당회장 또는 위임목사의 호칭은 담임목사로
'당회장' 은 당회를 구성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직무 가운데 한 부분인 조직과 임면. 벅적 대표권. 회의의 사회와 결재. 감독과 권징 등 법적. 정치적 분야를 이끌어 가는 행정상의 신분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당회를 구성하지 못한 교회의 담임목사를 '직원회 의장'이라 하지 않습니다. 당회를 구성한 교회의 시무 장로라 할지라도 '당회서기'나 '당회원'이라 하지 않습니다.
'담임목사'는 한 교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진 사역자로서 당회장의 권한을 포함ㅘ여 예배와 예전. 예식을 집례하고. 설교.교육.심방. 상담.등 목양의 직무를 아우르는 포괄적 직무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회장이란 명칭은 행정 문서나 법적인 절차를 진행할 때가 아니면 쓸 필요가 없습니다. '위임'이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양의 임무를 맡기셨다는 사명의 자각으로 담임목사가 '해당 지 교회에서 정년까지 시무한다'라고 헌신을 약속하며. 지교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역자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정년까지 보장 하겠다'라고 순종을 약속함으로 그리스도께서 목사에게 주신 일체의 권한을 정년까지 맡기는 절차 입니다.
담임 목사로서 더 무거운 책임을 맡은 거이지 직위나 호칭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내부적 합의와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 외에 주보의 표지나 명함들의 대외적인 문서에 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인들에게도 담임목사란 칭호가 훨씬 더 관계적이며. 교인이 담임목사를 직접 부르거나 공중 기도를 하면서 지칭할 때에는 '담임목사' 아니면 목사라 한 분일 때에는 '우리 목사님'이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당회를 진행하거나 회의록 상의 서명이 아니면 교회의 대내외적인 모든 문서표기나 호칭은 '담임목사'로 해야 합니다.
2) 수석이란 말은 선임으로
세상에서는 자리에 의해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힘과 명예.부를 누리려고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성적에 의한 자리가 아니라 임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누가 크냐는 논쟁을 벌인 일이있고 (눅 9:46)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주시기를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리가 아닌.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실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참 제자의 도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고난의 걷는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수석부목사' 또는 '수석 장로'라는 말에는 다분이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권위주의적인 인상이 짖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수석.차석.말석으로 구별되는 체제 질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의 가치는 동등하지만 순서에 있어서 먼저와 나중의 구별이 있을 뿐 모두 함께 좋은 동역자입니다. 먼저 안수를 받았거나 선임을 한것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기에 '선임 부목사' 또는 선임 장로'라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3) 증경(曾 經)은 전(前)으로
국어사전에도 없고 사회 어디에서도 쓰지 않는 '증경'이란 말은 한자어를 선호하는 교계의 어떤 분들이 중국의 고대어를 차용해 온것으로 보입니다. 교단을 위해 공헌한 경력이 있는 분들의 전직을 계속호칭으로 사용하다 보니 '증경 총회장'에서 '증경지방회장'뿐만 아니라 심지어 평신도 연합기관인 남.여 전도회나 청년회까지 '증경회장'이란 호칭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듣는 사람은 어려운 문자 때문에 마치 현재 시무중인 어떤 직위처럼 느끼게 되고 당사자도 은연중 그런 느낌을 누리고 싶어 할수도 있습니다.
증 (曾)은 '일찍이'라는 뜻을 경(經)은 '지내다', '겪다'라는 뜻을 가진 문자이며 증경이란 호칭은 '일찍이 겪은', '이전에 지낸'분이란 뜻이빈다. 그러므로 '증경 총회장'은 이전에 총회장을 지낸 분을 말합니다.
당나라의 시인 노조란이 장안에 살던 한 기녀의 일생을 모사하는 가운데 당시 귀족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고발하며 쓴 시 '장안고의(長安古意)'에 다음과 같이 '일찍이'란 뜻의 '증경'이란 말을 썼습니다. "자색구름 향해 퉁소를 부는 이 누구인가 물으니 .일찍이 춤을 배우느라 꽃다운 시절 보낸이라네."
이처럼 고대 중국에서 쓴 "증경"이란 말은 그다지 심오하거나 존귀한 신분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한자어를 좋아하는 사회단체나 기관에서도 '증경회,장' '증경사장' ,'증경총장', '증경장관', '증경의원' '증경대통령' 이란 호칭은 쓰지 않습니다. 다만 '전 대통령' 또는 '제 0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신분' 이라고 표현할 뿐입니다. 교회에서도 한자나 고어를 써야만 존대어가 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전 총회장 목사 000'로 표기하고 '주후 1900년도의 제 00회 총회장을 지내신 분'리라 소개해도 존경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4) 제직이 아니라 직원입니다.
지 교회의 교역자(목사. 전도사)와 교직자 (장로. 권사. 집사)를 통칭할때 직원이라 하고 이들 전원이 모여,주어진 의제대로 교회의 업무를 논의하는 회의를 직원회고 라합니다. 장로교회에서는 이를제직.제직회라 하는데 성결교회의 헌법상 직제는직원. 직원회기이기에 성결교회의 교인은 본 교단의 용어를 써야합니다.
5) 집사와 안수 집사는 별개의 직분이 아닙니다.
집사의 직무는 '당회와 담임 교역자의 지도를 받아 교회의 ㅔㅈ반 사무를 나누어 맡으며. 고역자를 도와 교인의 가정을 심방하며. 환란중에 있는자를 돌아보며. 전도에 힘써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단헌법제 38조 2항,제39조 4항). 안수를 받기 전이나 안수를 받은 후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1년동안 한시직에 매년 임명받기를 5년이상 계속한 사람으로 나이가 35세 이상 된 이를 종신직을 하락한다는 의미로 안수를 하는 것입니다. 새 직분에 임명하는 안수가 아니라 지금까지 안수를 받지않고 '서리'또는 '임시'로 일하던 하시적 직분을 정식으로 임명하는 과정이 안수식입니다.
목사도 안수를 받지만 '안수목사'라 하지 않습니다. '목사'의 집임을 받기 위한 안수였기에 받은 직분에 해당하는 '목사'로 칭합니다. '장로'로 안수를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로 안수를 받는것이지 '안수집사로'의 임직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문서상 표기. 제 3자가 소개할때의 경우라면 몰라도 스스로 '안수집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거나'안수집사님'하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집사로 안수받은 이의 호칭은 '집사'입니다.
6) 성도는 개인에 대한 호칭이 아닙니다.
'성도'는 문자 그대로 '거룩한 무리'라는 말입니다. 사전적 정의로.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가리키며. 개신교에서는 '신도'를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미 복수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동체로서의 교회 구성원 전체나 신앙적 동아리를 지칭할 때에 쓸수는 있겠지만. 교회 직분이 없는 사람이나 개인의 대하여 '성도님'이란 호칭 또는 '김00성도'라는 지칭으로 쓴다면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개인을 지칭할때에는 단수의 개면을 가진 '신자'. '교인'.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직접 부를 때에는 '교우님'이라 하는것이 좋습니다.
7) 교회는 예배당 또는 교회당으로
'교회'는 건물이 필요하지만 건물이 곧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서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공회'입니다. (교단 헌법 제2조 교회정의). '교회'란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에 대한 지칭이며, 공동체가 모여 '예배하는 자리'로서 세운 건물은 예배당 입니다.
예수께서 피로 값을 치르시고 구원하신 것 (고전 6:20: 벧전 1:18-19)은 건물이 아닌 사람이며. 지체들의 연합인 '그리스도의 몸(엡 1:22-23)'이란 곧 사람들로 이루어진 유기적 공동체입니다.
지난날에는 예배하는 처소로서 단일 용도의 건물을 지었기에 얘배당이라 하였고. 교회는 예배당과 따로 교역자 주택. 교육관. 들의 용도로 각각 별개의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단일 건물안에 예배실 뿐 아니라 교육. 친교. 사무. 거주등의 공간을 복합적으로 배치하여 건축을 합니다.
이런 경우에도 건물의 주 용도가 예배이기에 예배당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교회당이라 해야 알맞은 표현입니다. 복합 건물인 예배당이 2동 이상 있을 때에는 본당(본관)과 별관 또는 제1, 제2, 제3,등의 숫자로 표기하거나 의미를 부여한 별도의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입니다. 때때로 초청장이나 회의 소집 공문에 모임 장소를 '00교회'라 쓴 것을 봅니다. 이런 경우 '00교회당 예배실'로, 단일 건물안에 예배실이 둘 이상이면'00교회당 큰 예배실'이라 해야 맞고 일상의 언어로도 '교회 갑니다.'가 아니라 예배당 갑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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