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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19일, 성진 해정창 전투에서 함경도 북병사 한극함의 6진 조선군을 격파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 북부로 계속 진격 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모리 요시나리의 제 4번대는 함경도 안변부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제 2번대와 만났다가
동해안을 통해 남하하였습니다.
그들은 6월 5일 회양성 전투에서 참살한 회양부사 김연광의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고
강원도 삼척,묵호를 지나 울진을 통해 경상도에 진입하여
예안과 영해 방면으로 진출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나가는 곳에서 살인,방화,약탈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그것은 제 2번대도 뒤떨어지지 않아서
지나가는 곳을 적지(황무지)로 만들고
닭과 개 조차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1592년 6월, 강원도로 가고 있었던 조선의 다섯번째 왕자인 순화군은 일본군을 피해
함경도로 올라가 임해군과 합류 하였습니다.
그러나 7월 18일에 일본군 제 2번대 선봉부대가 마천령을 넘고
7월 19일에 한극함의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전멸당하자
그들은 회령부로 달아났습니다.
회령부는 두만강이 흐르는 함경도 북단의 국경도시 였습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모병을 위해 함경도와 강원도에 파견 되었는데
왕자들을 모시는 수행원들은 공식적으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병력을 모으려고 하였지만
평소에 기질이 사납고 행패가 심했던 두 왕자들은 힘쎈 하인들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착취 하였으며, 수령들을 핍박 하여 인심을 잃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은 건국한 이후 북방의 함경도를 차별하여 인재를 잘 등용하지 않았으며
이시애의 난 이후엔 그 정책이 더욱 강화 되어서
이 지역 출신의 고관대작이 배출 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서울의 양반들은 함경도 지방 사람들과 혼인을 하지 않아
함경도에선 사대부가 자취를 감추었고
조정은 나라에 중죄를 지은 사람을 함경도에 귀양 보내거나 군사로 배치 하였습니다.
그리고 8년전인 1584년에 니탕개의 난이 있었을때
공을 세우기 위해 함경도의 부유한 사람들은 재산을 헌납하였고
장정과 용사들은 군수물자 운반이나 전투에 자진하여 종사 했지만
조정은 그들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고
그로인한 불만과 원한은 이때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북상하면서 조선 임금 선조를 폐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여 새로운 정치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반민들은 강원도에서 경흥까지 5리 마다 팻말을 설치하고
[이덕형이 왕이 되고 김성일이 장수가 된다.]라는 글귀를 써 붙혔습니다.
이에 함경도의 민심이 크게 동요되고 겁내서
항복하면 왜적이 죽이지 않는다 하여 앞다투어 나라를 배반하고
적에게 항복하거나 적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 했습니다.
1592년 7월 23일, 회령부 아전 국경인이
회령 역졸 이충경, 친위군 김세언, 관노비 승수,경이 등을
포섭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국경인은 전주 사람이었는데 죄를 지어 회령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회령부 아전,토관지무가 되어 재물을 모았는데
개전하고 일본군이 부령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일본에 아첨하기 위해 공을 세우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 이었습니다.
국경인은 그동안 회령에 있으면서
귀양온 사람들 중 상당수가 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는 것과
회령부 아전으로 있으면서 마련한 인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무리에 끌어들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엔 국경인이 동원한 무리가
갑기-중무장 기병 5000여명 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반란에 끌어들인 토병으로 하여금
일본군이 부령까지 왔다는 말을 듣고 성을 빠져나가려는 왕자 일행에게
성을 지키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 문의 자물쇠를 가져가서
아무도 회령부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국경인이 성 밖에서 무리들을 모아 진을 형성하니
회령성 남쪽 누각에 있었던 순변사 이영과 회령부사 문몽헌이 그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때 과감하고 용감한 성품을 지닌 고령첨사 유경천이 이영에게 귓속말로 말했습니다.
[국경인이 반역하여 회령의 군사로 따르는 자가 절반 이지만
모두 그의 심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공께선 여기서 일행의 군관들과 원역(잡무를 보는 관리)들을 모아
경계를 엄중히 하며 기다리십시오.
제가 가서 국경인을 달래어 군사를 해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들어주지 않으면 곧바로 목을 베고 여러 사람에게 깨우쳐 해산하게 할테니
공은 그들을 불러모아 항복을 받아내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안정될 것 입니다.]
하지만 이영은 나약하여 머리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신중히 하고 이런 말은 하지 말도록 하라.]
이때 국경인이 이 대화를 엿듣고
재빨리 자신의 무리로 하여금 왕자들 휘하의 군관들을 죽이게 하였습니다.
유경천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휘하의 몇 사람을 데리고 서문으로 빠져나갔는데
국경인의 무리가 감히 추격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회령판관 이염은 국경인의 무리가 난을 일으키자
성문 누각에서 목을 매달고 죽으려고 했으나
어떤 사람이 줄을 끊어 이염을 살리니
그는 줄을 타고 성을 넘어 도주 하였습니다.
국경인의 무리는 밤을 타서 왕자들과 수행원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의 처소가 있는 객사를
포위한 다음, 일제히 돌입하여 임해군과 순화군, 상락부원군 전 좌의정 영중추부사 김귀영,
장계부원군 전 병조판서 호소사 황정욱, 전 우승지 호군 황혁, 순변사 이영,
선전관 조인징, 함경도 남병사 이영, 회령부사 문몽헌, 함흥판관 이혜,훈련원 봉사 신희수,
그리고 이들의 가족과 노비들을 모조리 붙잡아 묶고
한 칸 방에 짐짝처럼 가두었습니다.
이때 임해군과 순화군이 반항하자 국경인 일당은 그들에게 물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김귀영의 후처 이씨가 젊어서 국경인의 무리가 그녀를 범하려고 하자,
그녀는 객사 벽기둥에 목을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반란이 성공하자 국경인은 자신의 무리들을 늘어세워 위엄을 보이고
곧 회령부사 군관 전 만호 이함, 내금위 김덕신,
판관 군관 최덕흥, 부조방장 우후군관 장응별,정인신 등을 목 베었는데
이들은 국경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아직 남아있던 군관 수십명과 함께
국경인의 무리와 싸우려고 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국경인은 예전에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향리 공억복과 관노비 청룡 등도 목을 베었습니다.
일본군이 고풍산에 이르자 국경인은 자신과 친한 향리 임민을 시켜 말을 타고 가서
일본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7월 26일,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회령부에 이를 무렵,
국경인은 붙잡은 왕자들과 수행원들과 관리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하인들을 방에서 끌어냈는데
황정욱의 8살된 손자를 붙잡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찢어 죽였습니다.
이윽고 가토 기요마사가 회령부에 입성하여 붙잡힌 왕자들과 수행원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붙잡힌 사람들을 풀어서 후하게 대접받게 하고 국경인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너희 국왕의 친아들과 조정의 재신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가하는가?
너희들이 이런 짓을 차마 하니 당연히 벨 것이고 상을 줄 수 없다!]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국경인에게 형조판서 라는 벼슬을 주고 회령부를 지키게 하였으며,
잔치를 베풀어 백성들을 대접하니
피난하여 산으로 숨었던 백성들도 천천히 다시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외에도 경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의 숙부인 국세필에게도 체찰사 벼슬을 주고
경성부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명천에서 반란을 일으킨 정말수에겐 대장이라 일컫게 하고
명천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무렵 함경도 각 진과 고을에서도 반란과 배반이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6월 17일 함흥이 일본군에게 점령 될 때,
산 속으로 도주했던 함경감사 유영립과 판관 유희진은
각각 북청과 함흥에서 백성들의 밀고로 일본군에게 붙잡혔습니다.
이때 북청 사람 김응전이 일본군을 찾아와서 스스로 유영립의 종이라고 칭하고
적진에 들어가 밤에 경계가 느슨해진 것을 틈타 그를 업고 탈출 하였습니다.
함흥 생원 진대유는 함흥 함락 이후 일본군의 향도(길잡이)로 활동하였고
일본군 장수와 일본인 통사(통역관)에게 두 딸을 주어 사위 삼아서
일본군 치하에서 기반을 잡았으며
아들 진계수를 날마다 위감사에 보내어 위엄을 떨치고
매부 박이성을 시켜 조선군의 동향과 민심을 정탐하여 일본군에게 보고 하여
일본군으로부터 재물을 받고 조선영공 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명천에선 사노비 정말수가 목남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켜 명천을 장악하였습니다.
종성에선 관노비 귀석과 성인손이 반란을 일으켜 우후 이범을 잡아 투항 하였으며
함경도 최북단 온성에선 부원관 강신 등이 온성 부사 이수를 붙잡고
일본군에게 투항 하였습니다.
함경도 북병사 한극함은 해정창 전투 이후 두만강 너머까지 달아났다가
여진족 사람들이 그를 받아주지 않아서 다시 강을 건너 돌아가는데
두만강 인근 경흥에서 토병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졌으며
철령에서 도주한 함경도 남병사 이혼은 갑산으로 도주 했다가
그곳에서 백성들이 그를 알고 공격하여
밭 가운데 토굴에 숨었다가 백성들과 싸워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때 갑산에서 반민을 지휘한 사람은 기춘년과 박연문으로서
이원형,박익겸,신세건,조응기,이혼 등
갑산부사,함경도 남병사,부자,노비들 20여명 죽이고 목을 베어
일본군에게 바치고 항복 했습니다.
그리고 경성판관 이홍업은 경성 관노 국세필이 붙잡아 일본군에게 넘겼는데
이때 그의 부인과 며느리가 자살 했습니다.
서울에서 출장 왔던 병조좌랑 서성도 일본군에게 붙잡혔는데
뇌물을 주고 풀려나왔습니다.
종성부사 정현룡은 일본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판관 임순을 시켜
항복문서를 쓰게 하였는데
항복문서 도중에 이런 글귀가 나왔습니다.
[나를 학대하면 원수요, 나를 위로하고 어루만지면 임금이니
누가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임순은 더 이상 항복문서를 쓰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외에도 반민들은 서울에서 피난온 양반들이나 장사꾼들의 피난행렬을 공격하여
물건을 빼앗고 심지어 옷까지 모두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숨은 양반들을 일본군에게 고발하거나 잡아서 넘겨주기도 하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회령을 점령한지 3일후인 7월 29일, 일본군이 회령을 떠나려고 하자
국경인 등이 청하여 말하길
[오랑캐가 번번이 와서 침략을 하니
상관들께서 오셨을 때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한다면
어찌 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며 여진족 정벌을 건의 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처음에 이들을 의심하였지만
이들이 강하여 요청하니 마침내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인들을 선봉으로 삼고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두만강을 건넜고 이틀 후 여진족 노토부락을 공격 하였습니다.
노토부락의 여진족은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직접 칼을 빼어 물러서는 일본 병졸을 칼로 쳐죽이면 독전을 하여
일본군은 노토부락의 성 아래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때 일본군에게 잡힐 처지에 놓인 여진족 사람들이 국경인에게 울며 하소연 했지만
일본군이 성을 함락시키고 성 안의 여진족 사람들을 거의 다 죽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을 험지를 올려보며 싸웠기에 많은 병사들을 잃었고
여진족이 사방에서 공격을 감행하니
일본군은 힘껏 싸웠지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노토부락에서 철수 하였습니다.
이후 가토 기요마사의 제 2번대는 종성의 문암을 거쳐
강을 건너 온성,경원,경흥을 거쳐 동해안 협로를 통해 경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일본군은 6진의 군사무기들을 불태워 버리고 말들을 모두 징발 하였으며
장전과 편전을 묶어서 횃불로 사용하였고
피난민 중에서 활과 화살을 가진 사람은 죽여버리니
백성들 중에서 무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두려워하여 땅에 묻어 버림으로서
6진의 조선군은 사실상 와해 되었습니다.
이후 6진과 함경북도는 일본군에 협력하는 조선인들의 통치에 맡겼으며
길주,함흥,북청 등지에 각각 수천명의 일본군을 나누어 배치하고
자신은 사로잡은 왕자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안변부에 돌아갔습니다.
한편 6진의 조선군이 와해되어 6진은 사실상 여진족에게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경흥과 경원 방면의 여진족들은 두메에 있는 여러 추장들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니
여진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만강을 건너
6진의 마을과 창고를 공격하기 시작 했습니다.
이로 인해 경흥부와 경흥부 관내의 조산,무이,아오지 등 4개 고을이
여진족의 습격을 받아 주민들이 거의 다 죽고
경원 관내의 아산,건원,고아산,고건원창,유신창,해창
온성의 덕명창,덕산창,해창
종성부의 장풍리,방산리,녹야창,조산리,해창
회령부의 역산창,고랑거리창이 모두 여진족에게 노략질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자신들의 군정체제에만 관심을 두어
1592년 9월에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재배되는 곡식에 대해 조사를 하였고
또한 호랑이 사냥도 하여 호피(호랑이 가죽)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함경도엔 겨울이 빨리 찾아오기에 함경도의 일본군은
겨울을 대비하여 백성들로부터 식량과 의복,땔감 등을 수탈하기 시작 했습니다.
한편 각 지방을 다스리는 반역자들은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데에만 급급하여
국경인의 경우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무고한 백성 10여명의 목을 베기도 했으며
국세필은 산골에 숨은 선비들을 색출하여 일본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정말수는 전령을 남발하여 일본군에게 물자을 끊임 없이 공급 하였고
길주에 주둔한 일본군과 결탁하여 토호(지방 세력가)들을 죽여서
의병 활동을 막으려 노력 했습니다.
또한 함경도 전역에 반민들이 퍼져서 약탈과 체포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출처:조선왕조실록(선조수정실록-1592년 7월1일)
(선조실록-1592년 10월4일,11월19일,1593년 2월22일,1595년 6월15일)
농포집(제 3권-1,2,4 장계)
연려실기술(선조본말고사)
징비록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 전쟁 이었다(P129~131)
조헌의 장계
첫댓글 ~_~ 할말없다...;; 잘쓰셨습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실감나는군요. 이제 가토군이 당할 차례네요;;
숨막히는 퇴각전...한양까지 2천리 ㄱ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