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기독교방송국 양희은의 정보마당에서 양희은 씨와 이숙경 사관(한성수 사관부인 한성수 목사 가족은 영광장로교회 파송선교사로 러시아에서 4년 사역 후 돌아와 구세군사관으로 사역 중임)의 인토뷰 내용입니다. 4년간 구소련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선교사로 지내면서 겪은 이야기들은 해외선교사들의 삶이나 구소련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한성수 사관 가족은 타쉬켄트에서 교회를 세우고 고려인 사역을 8개월 간 햇습니다. 현제 그 교회는 타쉬켄트 감리교회 (원동욱 선교사)의 모체입니다. 모스크바에서는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모스크바영광교회를 세워 사역했으며 샘물교회 김성식 목사가 사역하고 있습니다.
4월 28일
1.우즈베크와 러시아에서 생활한 기간?
(중앙아시아 우즈베크의 수도 타쉬겐트에서 8개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3년)
- 언제 갔나? (92년 5월 27일)
- 왔나? (95년 12월 20일)
- 가족과 함께 떠나 셨나요? 예
- 가족관계는? (1남 1녀 11살과 9살)
- 자녀를 데리고 떠나셨는데 아이들 문제로 걱정되진 않으셨나요?
(구소련으로 간다고 할 때 아이들 문제만큼은 마음이 천근같고 안스러웠어요.
그러나 첫째로는 그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겼고 둘째로는 그때 아이들이 6살과 4살이
이었는데 더 어리지도 않고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것이 감사했어요.)
2.떠나기전 걱정되진 않으셨나요? (일단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서고나자 모든
염려에서 초연해졌고 담담했어요.)
- 출발땐 어떤 준비를 하셨나요?( 갑자기 가게 되었기때문에 특별한 준비가 없었어요).
- 말은 어느나라 말을 썼나요? ( 러시아어)
- 항공편을 이용하셨나요? (서울에서 모스크바로 10시간 30분비행했고 모스크바에서
택시로 외곽도로70-80km를 달려 다른 공항에서 4시간을 날아 타쉬겐트에 도착)
- 우즈베크는 선교활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교회 등록을 하는데 무척 까다곱고 힘들어 변칙적으로 고려문화쎈터,한글학교등으로 등록하
여 활동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우즈벡인 상대의 선교활동은 상당히 경게하고 있습니다.어느날 우즈벡 여의사가
자기딸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하여 조심스 럽게 심방을 하여 손짓 발짓 동원하여 예수님을 영접시키
고 기도를 했습니다.
- 초기 음식이나 주거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모든 음식에 거의 사용되는 상체라는 향료의 풀과 요플레와 비슷한 스미따나가 있는데 너무 비위가
안맞아 처음에 멋모르고 샀다가 그냥 버렸는데 1년 지나니 자연스러워지고 좋아하게 되었어요.
주거는 거실 하나 방 하나 있는 집에 월세로 살았는데 , 이런 집을 거기서는 두칸 집이라고 합니다.집주
인이 열쇠를 2개 주길래 2개 뿐인줄 알았지요 그런데 어느날 교회 갔다와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집안에 인기
척이 있는 거예요. 저의 가족은 도둑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요.전화하러 들어 왔다는 거예요.그 나라는
열쇠 하나는 반드시 주인이 갖고 있어요.
모스크바에 간지 얼마 안되어서 유선교사라는 분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에 모두들 염려하며 기도했던 일이 있었
읍니다. 나중에 유선교사가 말하길 밤중에 집주인의 친척이 술을 먹고 미리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고 들
어 와 폭행하니 강도로 알고 피했으며 밤새 무서워 집에 들어오지 않자 이웃 선교사와 함께 사모님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인데 납치로 와전되었던 것이었읍니다
- 우즈베크에서 러시아로 옮긴이유?
파송교회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비자의 어려움이 있었고 교회에서는 인편이 아닌 은행으로 선교비를
송금하기를 원했으며 또 기왕이면 러시아인 중심의 선교가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3. 추위로 고생않으셨는지?
타쉬켄트는 너무 덥지요 더워서 고생하였는데 모스크바는너무 추워서 버스를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보
면 눈물이 찔끔 찔끔나요.
- 우즈베크와 러시아의 기후차이는 어느정도?
92년 11월말 한목사님이 우즈베크에서 영상 20도에 비행기를 타고 4시간후 도착한 모스크바는 온통
설경에 영하 15도였읍니다.
- 기후 적응이 어렵지 않았나?
타쉬켄트는 덥긴 해도 건조해서 그늘에만 들어가면 서늘합니다.
모스크바에서는 10월 초면 파카와 방한모 쓰고 이듬해 4월말까지 모자를 쓰지 않으면 머리가 얼고
고혈압에 걸립니다. 그러나 실내는 비교적 난방이 잘 되어있습니다. 내복 입은 사람들이 없습니다.속
은 얇게 입고 겉은 완전무장하는데 우리는 속 내복을 든든히 입고 겉은 그저 있는것 하나 걸치게 되지요.
- 기후로 인한 특색이라면 어떤 것,기후로 인한 사고는 심각하지 않나요
모스크바는 10월 중순이면 첫눈이 오고 대체로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온통 은세계가 됩니다.
그러나 눈이 와도 즉시 염화칼슘을 뿌려 자동차의 소통이 원할하며 인도 위의 눈도 불도자로 말고 더녀서
걸을만 합니다.
4.우즈베크나 러시아에선 한국인들을 어떻게 부르나요?
- 러시아어로는 까레이쯔끼 입니다만 한국말로는 다 다릅니다. 현지 교포를 고려인, 서울서 온 즉 대
한민국 사람은 한국인, 평양에서 온 북한인은 자기들 스스로 조선인이라고 부릅니다.
- 우즈베크에 있는 한인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 (35만이라던데)
35만은 구소련 전체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수일 것이며 우그베크는 가장 많이 살고 있어 약 20만이
며 타쉬켄트에는 약 5만이 살고 있읍니다..과거 구소련 시대에는 민족 차별이 별로 심하지 않았는데 최근 우
즈베크의 독립 이후 간간히 민족 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읍니다. 우리 교인 중에서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고
려인이기 때문에 자주 폭행을 당하자 부대장이 부모에게 다른 부대로 데려가라고 연락하기도 했으며 직장에서
점점 우주베인들이 유리하게 되고 있읍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별로 민족차별을 느끼지 못합니다.
5.한인들의 생활상은 어떤가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는 부지런하고 지혜가 있는 민족성이기에 중간 이상으로 살고 있으며, 정서적으로도 안정
되어 있읍니다. 러시아인과 우즈벡인이라는 양대 산맥 틈에서 지혜롭게 살고 있읍니다.
-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후 정착한 1세대와 이후에 태어난 2,3세대와의 차이나 갈등은
없나요?
1세대는 이미 작고하였고 현재 6,70대의 노인이 2세대 입니다. 2,30대의 젊은이들은 4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부모들은 한인끼리의 결혼을 원하나 일부 젊은이들은 러시아인과 결혼하려고 합니다. 또 60대 이상은
한국어를 말하는 세대로 모국을 생각하지만, 40대 이하는 생긴 것만 한인이지 구소련 공민이며 모국에 대한
생각도 깊지 않다가 점차 우즈백 민족주의 영향과 개방 이후 들어 온 선교사나 상사원 유학생들을 통해 한인
이라는 의식이 고양되고 있습니다.
6.한인 들 전용 음시점이나 극장들이 있나요
- 극장은 없지만 가무단이 몇개 있으며 그중 청춘가무단 단장의 어머니와 부단장이 저희 교인이었는데 정
기 공연때 가보았읍니다. 가요는 남한노래를 주로 부르지만 한복의상과 춤은 북한 것 입니다.음식점은 국수집
이 더러 있으며 두부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꾸일륙이라는 고려인들이 세운 시장에서 살 수도 있읍니다. 숙주
나물과 증편(기지떡)을 살 수도 있읍니다. 김치라고 하는 것은 당근을 채로 썰어 기름과 양념으로 무친 것이
며 장물이라는 된장국과 가지회라고 하는 것 등을 고려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우리 집에서 무즌 음식을
만들면 열심히 도와주며 배우려는 교인 들이 있었지요 나중에 모스크바에서 서울로 돌아올떼 가지고 있던
한국요리백과 라는 책을 고려인학교 교장에게 선물로 주었읍니다.
-러시안인들의 음식은 우리 비위에 맞나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저희 가족은 잘 먹었고 아이들은 아주 좋아했읍니다.
- 식량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인가요
92년도의 우즈베크는 식량은 비교적 풍부했으나 공산품이 부족하여 쿠폰과 딸론이 있어야만 물건을
살 수 있었읍니다. 구소련의 빈곤은 어느정도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미국 등 서유럽 선진국의 시각이었고 우리
보기에는 그런대로 잘 살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상대적인 빈곤이었지 결코 우리나라의 과거 60년대의 보릿고
개와 같은 절대 빈곤이 아닙니다.집집마다 냉장고와 에어컨이 있는 곳이 우즈베크 입니다. 모스크바의 상점
에는 물건이 없어도 가정집에는 냉장고가 2,3개가 있고 먹을것이 있었읍니다 .
- 한인들이 주로 몰려 사는 곳이 있습니까?
예,타쉬켄트 시 밖에는 꼴호즈라는 집단농장이 있어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그곳 출신 젊은이들은
한국말을 하며 심지어 다른 소수민족들도 한국말을 합니다. 타쉬켄1트 시 안에도 저희가 살던 칠란자르 구역
이나 유느사밧 구역 특히 꾸일륙 구역에는 한인들이 많이 살았읍니다.이들 지역은 상대적으로 우즈벡인들이
적고 러시아인들이 많이 사는 곳입니다.
7.지리적으로 북한에 가까운데 남한 문화와의 차이점은 ?
-북한이나 남한에 대한 생각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나요?
과거 정치적으로 북한과만 관계가 있었고 남한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으며 역사적으로 볼때도 구소련
의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37년도에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과 50년 대후반에서 60년도 초에 대략 3번에 걸친
북한사회로부터 망명한 사람들입니다.따라서 언어 및 풍습이 북한지방의 전통과 관습에 가까우며 최근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북한사회가 구소련보다도 더 폐쇄적이며 경제가 어려운 것을 직접 보았는
데 개방 이후 들어오는 남한 사람들의 당당하고도 잘 사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체제가 낙후하엿
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읍니다.
5월 5일
1.화폐는 어떤 것을 쓰나요?
93년도까지 구소련 화폐인 루불을 썼는데 그 후에는 바뀌었읍니다. 93년도에 모스 크바로
갔기 때문에 바뀌었다는 애기를 들었을 뿐 바뀐 화폐를 써보지 않았읍니다.
달러의 가치는?
92년도의 우즈베크에서의 달러대 루불의 가치는 1:120에서 350루불로 높아졌고 다시 93년도 1월에
1:600에서 4월 경에 700으로 머물다가 93년 말에는 1500루불 정도 였고 구소련 독립국가가 다 비슷했지만 모
스크바보다 2주일 정도 늦게 환율의 변화가 있었읍니다. 당시 사람들의 국가 월급은 25달러 정도였읍니다.92
뎐 초에 식빵이나 지하철 요금이 30 까페이카 였는데 1루불은 100 까페이카입니다. 93년 초에 모스크바에서
지하철 요금은 2루불 하던 것이 저희가 떠나오던 95년 말에는 1000루불 하였으니 4년만에 330배 인풀레이 되
었고 실제 달러가치로도 80배나 올랐습니다. (지하철 티켓이 30:12000 에서 1000:5000)
이곳에서도 암달러상이 있나요?
92년 당시에는 100달러가 너무나 큰 돈이었으며 달러를 지닌 외국인이 범죄의 표적이 되기에 은행에
서 바꾸는 것이 무서웠읍니다. 그래서 현지 고려인 교인들을 통해서 바꿔썼으며 이것은 모스크바로 와서도 93
년 6월까지 계속 되다가 달러 환전소가 양성화된 이후에는 직접 환전소에 가서 바꿨읍니다.모스크바에서는 러
시아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달러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며 어느 거리나 큰 상점에는 환전소가 있는
상황 입니다.루불화가 계속 하락하니 저축이 소용없고 루불을 달러로 바꿨다가 다시 필요할 때는 루불로 바꿔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또 거의 모든 상점에는 물건의 가격이 달러로 표시되어 있어 그날의 환율에 따라 루
불로 환산하여 받습니다.
2.물가는 어느 정도 인가요?
한마디로 서울 보다 비쌉니다. 대부분 수잎품인데다가 유통산업이 발달되지 않아 같은 장소에서 가게
마다 물건 값이 다릅니다.급하게 물건 사고 돌아서서 옆의 매장을 보면 똑같은 물건인데 값이 더 싼 것을 보
고 어처구니 없을 때가 많아요. . . .
생필품 구하기가 힘들다고 하던데?
예 아주 힘들었읍니다.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92년도에 타쉬켄트에서는 물건이 모자랐기 때문에 월
급의 금액에 해당되는 쿠폰이 함께 발급되어서 쿠폰이 있어야만 물건을 살 수 있었고 그나마도 월급보다도 비
싼 물건들 예를 들어 침대나 소파 등을 사려면 은행에 돈을 내고 영수증을 가겨가야 합니다. 그러니 물건을
먼저 고르면서 값을 알아낸 다음 은행에 가서 현지인의 이름으로 지불하고 다시 상점에 가서 지불헤야 하니
며칠이 걸리기도 했으며 상점에서는 배달은 둘째치고 매장 구석에 있는 물건을 상점 현관 밖까지 끌어내 놓고
서도 수고비를 받기도 했읍니다.지금 모스크바에서는 상점에서 미리 운임을 받고 집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가
생기고 있어 세월의 변화를 느낍니다. 92년 당시 타쉬켄트의 생필품 상황은 아주 나빠서 설탕 성냥 등은 쿠폰
외에 다시 딸론을 주어 구입하게 했으며 저희가 모스크바로 온 93년도에도 타쉬켄트에서 모스크바에 다니러
온 사라믈은 치즈나 소세지 등을 사가기도 했읍니다.
모스크바에도 가게가 많지 않고 대부분의 상품은 수입품이라 비쌉니다. 구역마다 우니베르쌈이마 우
니베르막이라는 슈퍼나 백화점이 있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국영입니다.
3번 줄을 서야 하는데 물건을 구경하고 살피기 위해서 다음은 까사라고 하는 창구에 가서 물건 값을 내고 전
표를 받기 위해서 그 다음에 물건 값을 낸 영수증을 가지고 다시 매장에 가서 물건을 받기 위해서 3번 줄을
서야 합니다. 최근에는 달러상점이나 조립식 건물로 된 개인 상점 그리고 지하철 역 근처에 키오스크라는 우
리 나라의 토큰 판매대 같은 개인 상점들이 많이 있어 바로 물건을 살 수 있지만 국영 상점보다 다소 비쌉니
다.또 생필품은 자주 품절되기 때문에 보면 바로 사두어야 합니다.꼭 필요한 물건을 갑자기 구하려면 모스크
바 전체를 뒤져야 할 때가 많습니다.
-가장 구하기 힘든 생필품은 뭔가요?
비싸서 그렇지 지금은 구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읍니다.92년 당시 타쉬켄트에서는 전구나
건전지 카매라 밧데리 하나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교인들이 자기 집에 있던 것들을 가져다주기도 했는데 건전
지는 다 방전된 것이라 쓸 수 없기도 햇읍니다.
모스크바에서 93년 여름부터 한국식당과 상점들이 많이 생겨났고 지금은 지역신문,떡,비디오대여점
등도 있읍니다.값은 한국보다 보통 3배인데 망서리다가 꼭 필요하면 사는데 다른 물건보다 오히려 쌉니다. 예
를 들어 초코파이 10개들이가 4달러니 3000원 정도 이지요. 비슷한 외국 과자보다는 싼 편입니다 그래서 주일
학생 간식으로 주곤 했읍니다.어렵다면 한국사람에게 맞는 의약품이나 특수한 것 에를 들면 노트북 컴퓨터 같
은데 쓰는 용량이 큰 아답터라든지 95년부터는 많아졌지만 카메라에 쓰는 특수 건전지 같은 것입니다.
한국에서 손쉽게 구하는 생필품이 모스크바를 다 뒤져도 없을때가 있으며 또 있다 해도 모스크바에 온
지 몇개월 안된 사람은 구하러 다니기가 쉽지 않읍니다.대신 구해주려해도 너무 시간이 소요되는데 처음 온
한국사람들이나 관광차 온 사람들은 이런 고충을 이해못하며 가족이 없으므로 비교적 단순하게 살아가는 유학
생들도 마찬가지로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3.주택보급율은 어느 정도인가요?
-예전 사회주의 국가였기에 집문제는 심각하지 않았을텐데요
우리보다 잘 되었었는데 지금은 저의 국가에서 공급하던 것이 중단되다시피 되었읍니다.혼자 사는 노인이
라 해도 자기 아파트 또는 아파트에 자기 방이 있읍니다. 주택면에서는 우리네 노인보다 행복하지요.과거에는
국가에서 직장단위로 아파트를 거의 무료로 공급하였는데 지금은 사유화되고 있으며 할머니가 죽으면 손자들
이 서로 물려 받으려고 합니다,.우리 교회에 92세의 연고자 없는 할머니가 있읍니다,이 할머니의 아파트를 욕
심내는 이웃이 할머니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는 할머니 사후 집을 자기들에게 물려주는 서류에 서명을 하
게 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알콜 중독자를 유혹해 집을 가로체는악덕 부동산중개인들이 많기에 국가
에서는 부모의 서명 외에 아이들의 서명도 받게 하고 있으나 아직 자본주의 경제를 잘 모르는 대다수 의 시
민은 날로 지능화되어가는 부동산 중개인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읍니다.
-이숙경 사모님의 기거지는 어떠했나요 사가였나요?
타쉬켄트에서의 살던 아파트는 거실 하나에 침실 하나의 월세 아파트였읍니다. 집주인은 우크라이나
로 농사지으러 가서 비어 있었습니다. 타쉬켄트는 모스크바와 달리 소위 땅집이라고 말하는 단독주택도 많이
있었고 아파트보다 더 살기 좋습니다만 저희는 아파트에서 살았읍니다.아이들과 지내려니 좁아서 옮기고 싶었
지만 다시금 이웃들과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당시는 무척이나 염려가 되어서 그냥 살았읍니다.
4.불황이나 실업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던데
-한인들의 실직 문젠 어느정도인지?
변혁의 과도기라 그런지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아서 한번에 큰 돈을 벌려는 생각에 사로잡
혀 있는 젊은이들이 많고 놀고 있는 한인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월급은 어느 정도인가?
92년 당시 타쉬켄트에서 학교선생이나 국가공무원들은 20달러 정도였고 모스크바로 오니 70달러 정도
였는데 지금은 100에서 300달러 정도 입니다
-여자들의 취직울은 ?
99%로 남자보다도 높습니다. 지하철 기사나 버스기사들도 여자가 많고 대부분의 관청에는 중년의 여
자들이 많고 여자들이 단체장이나나 기관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5.한인 가정의 아이들은 어떤가요
-조국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요
잘사는 나라로 생각하며 와보고 싶어 합니다.특별히 민족애로서는 아닌듯 합니다.
-한국인의 피가 섞인 것을 자랑스러워 하나요
점차 서울서 온 목사나 유학생들을 만나서 관심을 갖고는 있으나 일부 몰지각한 비즈네스맨들,관광객
그리고 유학생들에게서 상처를 의외로 많이 받고 있읍니다.
-한국에 대해선 어느정도 알던가요
막연하게 알고 있으며 88이후 알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한국어나 요리 춤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불교
국가인 줄 알고들 있었으며 노인들은 죽기 전에 한복을 한벌 장만하여 죽을 때 입곤 합니다..
6.청소년들의 문화는 어떤가요
-청소년 범죄율은? 청소년 범죄들은 어떤건지?
청소년 범죄울이 늘고 있으며 아직은 단순한 절도나 사기 등이나 점차 마피아와 연계가 되고 있습니
다. 사실 조그만 장사나 개인 사업을 하려면 마피아와 연계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할 정도이며 마피아는 보호
자도 되고 중개인도 되는 사회입니다.
-청소년들이 제일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자동차나 컴퓨터 등에 대하여)
고등하생들이라면 국제적인 유명 상표의 운동화나 스포티한 옷,미니카세트 정도인데 20대
초의 청년들은 역시 자동차이며 컴퓨터는 사무실에서 많이 요구하며 아직 개인 용에 대해서는 엄두를 내지 않
는 것 같습니다.
. .
5월 12일
1.러시아에선 종교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요 처음 목회 활동하실 때의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원칙적으로 국가에서 종교활동을 인정합니다 구소련 말 고르바초프를 하나님이 들어쓰셔서 종교자유
법을 선포하였읍니다. 90년부터 한인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며 교회는 비영리 사회단체로 등록을 합니다.이 등
록에 대하여는 최근까지도 여러차례 법이 바뀌어서 많은 선교사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며 러시아정교회는
개신교를 시기하여 처음에는 가만히 반대하다가 지금은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비방하고 있읍니다.
-한인 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어떻던가요?
기독교를 러시아인의 종교로 이슬람교를 터어키 계통의 중앙아시아 다섯공화국(우즈 베키스
탄,카자흐스탄,투르크멘,타지키스탄,키르키츠 공화국)의 종교로 알며 우리 한국은 불교의 나라로 인식하고들
있었읍니다. 이는 고려인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구소련 공민들의 편견이며 지금도 간혹 왜 한국사람들이 예수를
믿느냐고 말하며 게례는 러시아인들만 받는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읍니다.이런 이유가 초기
러시아어를 잘 모를때 선교에 큰 방해요소가 되기도 했읍니다. 즉 고려인 통역인들은 러시아인들이 교회에 오
면 여기는 한국사람의 교회라며 쫓아보내기도 했는데 선교사가 언어를 모르니 어쩔 수없다가 나중에야 상황을
알고 이해시키려하면 우리도 종교가 있는 민족이라는 일종의 민족적 자만심에 오히려 선교사를 설득시키려는
경우도 있곤 했읍니다.
-러시아의 종교인은 얼마나 되나요?
통계로는 러시아정교인이 5천만,이슬람이 2천만이라는데 러시아정교회는 모든 러시아 사람을 자기네
교인으로 간주하는 듯한 태도입니다.그러나 사실은 개신교에 나가는 사람이 많아지자 역동적으로 러시아정교
회를 찾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읍니다. 대개 60대 이후의 연령층은 어린시절 자기들의 부모나 할머니들에 의하
여 유아세레를 받은 세대이며 60대 이후의 세대는 학교에서 무신론 교육을 받은 세대이기에 사실상 종교에 대
하여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감사한 것은 과거 종교탄압시대에도 지하 교회 주로 러시아 침례교나 오순절 계통
의 교회들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지하 침례교회의 교인들을 흉악범이나 몹쓸사람으로 매도하여 선전하였으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읍니다. 또 유아세례를 받은 이들을 정교회 사제가 당국에
보고하여 주택을 공급받는데 불이익을 당했다는 우리 교인 루드밀라 할머니의 하소연도 들었고 조이 안드레브
나라는 할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몰래 세레를 받게 한 것을 모르는 외할머니가 또 다시 몰래 데려가 두번 세례
를 받기도 하였답니다
-처음에 한 목회 활동은 주로 어떤 것이었나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고려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주일에 교회를 나오게 하여 예배를 드렸읍니다
만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막막했읍니다. 한목사님이 고르바초프 재단의 대학에서 언어훈련을 받던 교수를 전
도하였고 그분의 친구와 저의 러시아어 교수를 전도하여 그분들과 교회를 시작했는데 지금 그분들은 주일학교
선생이 되었고 올봄에 신학교에도 들어갔읍니다. 그후에 제가 유치원마다 찾아다니며 6주 코스의 성경공부를
시도하여 몇개월 후 몇명의 결신자를 얻었읍니다. 처음에 동양인인 저에게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마지못해하
던 이가 가장 열심있는 교인이 되어 저희가 떠나올 때는 집사가 되었읍니다.집집마다 전도지를 돌리며 한명
두명 나오는 교인들은 성경공부와 찬양을 아주 좋아하였으며 어렵게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는 이따금씩 음식을
만들어 찾아가 위로하고 아픈 부위에 약도 발라주고 기도해드려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주일학교를 무척 해보려다가 번번히 나오던 아이들이 없어지곤 했는데 3년이 지나니 주일학교를 할만한 언
어의 발전이 있었고 처음의 교인들이 믿음이 자라 교사로 헌신하게 되니 시작할 수가 있었읍니다
2.교회를 특별히 탄압하진 않았나요?
특별히 탄압이라기 보다 교회 등록 및 선교사들의 비자에 관한 규정이 자주 바뀌어 어렵습니다. 모스
크바의 주택은 99%가 아파트인데다가 기타 건물도 공공기관으로 예배처소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지역마다 있
는 문화히관,클럽,유치원,병원,학교,극장 등이 에배처소인데 점점 임대료를 올리며 그나마도 많지 않아서 이
웃의 선교사들과 경쟁관계를 피하려 하니 어렵습니다.현재 모스크바에서는 월세로 보통 300달러의 임대료면
아주 좋은 조건이며 1000달러나 수천달러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교회들도 있읍니다.임대료를 올릴때 다른 곳으
로 가려해도 갈 곳이 없어 그대로 줄 수 밖애 없지요 저희는 학교를 빌렸는데 모스크바의 선교사들 중 2,3명
정도만이 학교를 쓰고 있읍니다. 이유는 93년도에 이미 모스크바 시장이 학교장들에게 개신교를 지칭하듯 다
른 문화단체에 임대를 주지 못하게 하는 협조공문을 하달했기 때문입니다 93년도 7월에는 모든 개신교회를 러
시아정교회 밑으로 들어가게 하는 법이 국회 하원에서 통과돠고 대통령이 거부했었는데 석달 뒤 10월 사태로
그 국회의사당에 탱크포격이 가해지고 국회가 해산된 것은 우연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한인이 주로 가는 교회가 있나요
아무래도 초기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교회에 몰려 있다가 분산되고 있읍니다. 안타까운 것은 일부 선
교사들이 한인식당이나 신문에 자신들의 교회가 한인들을 위한 교회라고 광고를 내어 선교사의 보조사역자라
고 할 수 있는 유학생들이나 상사 직원 고려인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처음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사람
들을 정성껏 돌보아 주었으며 그들 또한 반주자나 예배준비 등 보조역할을 하다가 그만 “저 한인교회에 갈래
요”라고 말하면 “그래 우리는 러시아인에게 복음전하러 왔다”고 대답하며 떠나보냈지만 무척 서운했읍니
다.
3.91년이면 한창 사회주의권 붕괴의 여파가 시작됐던 시기인데요
- 그 당시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던가요
92년부터 저희는 선교했으며 그때 사람들은 자기들의 체제에 속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자존심이 상
해 있었으며 내일을 알 수 없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읍니다.
-일부에서 다시 사회주의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는걸로 아는데 체제가 무너지면서 나타난 부작용은 어떤 것
이었나요?
사람들의 습관이나 의식이 바뀌지 않은데서 자본주의나 개혁을 하려니 마치 옷만 바꿔입은 것이나 마
찬가지겠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관행을 그대로 하고 있읍니다. 자본주의 사회처럼
사람의 능력이나 일의 종류에 따라 급료가 다른 것을 알지 못하지요 고용주가 아무리 급해도 오후가 되면 일
을 어서 끝내고 집에 가려고 하며 내일 하자고 말합니다.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법이 어떻게 바
뀌었는지 잘 모르고 있으며 큰 법은 있으나 실행법들이 부족하여 일이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적응을 잘 못하는 노인들과 노동자 서민들은 옛날이 좋다고 말합니다
-체제가 바뀌었음을 제일 먼저 실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금지되었던 서적들의 출판과 상점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들이지요
4.폭력문제는 어떤가요
-마피아나 마약,매춘 문제가 심각한 걸로 아는데...
직접 경험하지 못했읍니다.
-외국인들에 대한 폭력이 특별히 심하지 않았나요?(노상강도가 많다고 하던데)
외국인들은 옷차림에서 나타나지요 한국인은 동양인이기에 금방 구별됩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이더라
도 과거 소련에 의존하던 베트남,몽고,중국,북한인들 처럼 노어를 서틀게라도 구사할 줄 알고 수수한 옷차림
이면 강도의 표적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심은 어떻던가요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인심이 사나워지기 마련인데
노인들은 외국인들을 아주 싫어하며 공산주의자들도 극단적인 민족애에 호소하여 외국인들이 마치 러
시아의 자원과 좋은 것을 착취해가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읍니다.동양인 중 특히 중국인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은데 아이들을 중국인이라고 놀림받곤 합니다.(중소국경분쟁 및 중국인의 상업차 모스크바 유입으을 싫어
함) 우리가 옷을 깨끗이 입으면 일본인으로 부르고 허름하면 중국인이나 베트남인으로 부르다가 한국인인 것
을 알면 북한이냐 남한이냐를 묻습니다. 남한이라고 하면 얕보지는 않지만 수리비나 물건 값,택시요금을 바가
지 씌웁니다.
-총기 사용문제는 어떤가요
빈번히 총기사고가 있으며 심야에 거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심야에 강력살인사건만을 보도하는 TV 체널이 있는데 사건현장이나 시체,목격자들에 대하여
여과없이 원색적으로 보여주어 끔찍합니다.
5.얼마전 한국인들이 납치되는 사건도 있었는데요 테러리스트는 어느 정도 인가요?
버스나 열차를 통째로 터는 사건 이야기 정도는 수도 없이 듣곤 했는데 한국사람들이 당했다고 하니
국제적인 뉴스거리가 되었읍니다.500달러에 청부살인이 이뤄진다고 들었으며 이웃 선교사가 살던 아파트에서
폭탄이 발견되어 몇시간 동안 주민들이 대피했던 경우,한목사가 타자기 사러 중앙백화점에 갔을때 폭탄이 있
다고 하여 백화점에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온 때도 있었읍니다.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횡포도 심할텐데...
잘 모르겠읍니다.
6.폭력에 대한 처벌은 강한가요?
심하다고 들었으며 경찰이나 감옥에 갔다와서 폐인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찰들이나 군인들은 어떤지
경찰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서워하며 될 수 있는대로 접촉하려 하지 않습니다.
군인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기의 아들이나 손주처럼 잘 대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곳도 공직자 비리 문제가 심각한가요?
네 아주 심합니다. 월급으로만 사는 사회가 아닙니다.
7.청소년들의 문화는 어떤가요
11학년까지 남녀공학이며 숙성하기 때문에 이성간의 문제가 심각하여 20살 정도의 대학생들은 이미
다 결혼했읍니다.지하철 안에서 남녀학생들이 보드카를 마실 정도이며 흡연은 아주 심각합니다. 청소년을 위
한 건전한 오락이나 프로그램이 없기에 청소년전도가 꼭 필요합니다. 청소년캠프에서 한국교회 식의 오락이나
촌극.복음성가 등을 가르치면 춤 문화에 익숙한 그들은 율동을 잘하며 좋아 합니다.
5월 19일
1.복지 문제는 어떠한지요
-노인 문제는 어느 정도인지,양로원 등이 활성화 돼 있는지
-병원이용은 어느 정도 인가요
-의료보험은 잘 운영되나요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복지는 제도적으로 잘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읍니다. 병원은 거의 다 무료이며
감기 정도로도 병원에 전화하면 의사가 직접 오기도 합니다만 약품이 없으니 차나 마시라고 권하고 돌아가기
도 합니다. 또 싸나토리아라는 휴양소가 모스크바 근교나 휴양지에 많이 있어 선교사 자녀 여름캠프나 기타
집회장소로 외국인은 돈을 주고 사용하지만 러시아인은 신청하고 의사의 소견서만 있으면 한달 정도 무료로
숙식하며 이용합니다.직장인들의 여름 휴가는 보통 한달 이상입니다. 고아원은 많이 보았지만 양로원은 보지
못했읍니다 양로원이 필요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노인들에게 저마다 독신자 아파트 또는 공동아파트라 하더
라도 독립된 방 하나씩은 주어져 있고 연금이 나오며 아프면 병원으로 앰브런스로 데려가서 며칠씩 보살펴 주
는 제도이기 때문이죠 오히려 한국의 노인들이 더 열약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의 주택보급률은
100%라고 볼 수 있읍니다.
모스크바 시민이라면 모스크바 내에서 국가 병원을 무료로 이용하며 저희가 처음 모스크바에 갔던 93
년도에만 해도 외국인일지라도 대학에 다닌다면 무료였읍니다. 그러다가 94년 이후에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이라 하더라도 쁘로삐스까라는 시당국의 허가증이 없으면 돈을 내게 되었읍니다.그런데 저는 디스크
치료차 보킷나 라는 큰 병원에 25일간 입원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거주등록만 가지고 무료로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읍니다.그 병원에서 함께 입원한 환자들에게 찬송 기도 성경공부를 시작하여 제가 퇴원한 후에도 한
목사님이 6개월간 병원전도를 하기도 했읍니다.
(차도 없이 매주일 밤에 다니다가 너무 힘들어 다른 목사에게 맡기고 그만두었음)
2.공공기관의 이용은 편한가요,관공서 등
아주 불편합니다. 어느 기관이나 매일 이용할 수가 없고 대개 주간에 화,목 또는 월 ,목,금 등 민원
업무 시간이 한정 되어 있는데다가 이른 아침부터 가서 복도에 줄서 있다가 겨우 차례가 되어 들어가도 무슨
서류가 미비되었다든지 어디 가서 다시 도장을 받아오라느니 하며 되돌려 보냅니다. 그래서 다시 서류를 고치
고 다른 기관에 허가 맡으러 가면 거기도 똑 같은 상황이라 하가서류나 등록을 하는데 한달 걸리면 굉장히 빨
리 한 것이고 아예 몇달 다디다 못해서 우리 한 목사님이나 저희 사무원에게 문의하는 목사님들이 많았읍니
다. 저도 은행 수속하느라고 하루종일 서울서 보내온 주소만 들고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는데 군인같은 수위
가 고압적인 자세로 들여보내지도 않았던 때가 있었읍니다. 답답한 일이지요 왜 그랬었냐면 구소련 체제에서
러시아 연방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보내온 주소는 맞는데도 좀 구조가 바뀌었는데 이런 것에 대한 안
내를 공공기관에서는 전혀 주지 않고 윽박지르기 때문에 오히려 현지인들은 더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포기
해버리니 선교사들이 자기의 일꾼들에게서 한계를 느끼고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저희 집에 전화하고 찾아오곤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등학생 정도만 되면 관청에 가서 서류 작성이나 수속을 할 수 있지만 러시아인
은 단순하게 직장과 집,상점이나 문화시설만 다녔기에 전혀 안해본 일을 잘 못하며 기관에 드나드는 것을 기
피합니다. 보통 선교사들이 대학을 나온 사무원이나 통역자에게 비자 관계나 등록에 관한 일을 시키면 자기가
할 엄두를 못내고 아무개 자기가 면목있는 사람이 이 일을 잘하니 그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하기 일수
입니다.
-백화점은 어떤가요 물건의 질이 떨어지진 않았나요
러시아상품의 질은 전반적으로 수준 이하이며 외국 상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읍니다.
-한국상품은 사용해보셨나요
간간히 보게 될 때 반가왔으며 전자제품은 일본 것 다음으로 한국 것이 많으며 다른 나라 제품은 필
립스 외에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한국상품의 인기도는 어느 정도인지
품질 좋응것으로 인기가 있는데 안타까운 것은 질 낮은 중국.것을 한국 특히 남한 것이라 하며 소비
자들을 속이는 악덕 상인들이 많이 있으며 타쉬켄트에서는 서울상점이라고 써붙이고 질낮은 북한 것들을 파는
것도 본 적이 있었읍니다.
3.교통은 편리한가요
-버스 이용은 ,택시는 이용하기 편리한가요
버스는 두종류가 있읍니다 아프토버스라는 버스와 뜨랄리 버스라는 궤도 없는 전기로 가는 버스가 있
는데 자주 다니지 않아서 많이 기다리며 아프토버스가 더 뜸합니다. 이외에 전차도 있으며 지하철이 아주 편
리하여 출근 시간에는 40초 간격으로 다니며 낮에도 1,2분 간격으로 다닙니다. 택시는 많이 없으나 아무 차나
손들면 세워주고 행선지와 요금을 흥정하면 탈 수 있읍니다.
-중국은 자전거가 대중교통으로 많이 이용되는데 이곳에서 가장 흔한 대중교통은
무엇인가요
지하철이며 보통 지하철 역까지 3,4 정류장은 걸어다닙니다. 건강에 좋다며 걷는 것 을 아
주 좋아들 합니다.
-땅이 넓기 때문에 비행기 이용이 많을텐데 항공기는 어떤가요
모스크바에만 공항이 다섯개가 있을 정도로 항공산업이 발달되었읍니다. 92년에 처음 아에로플르트라
는 소련 국영항공을 이용할 때 대한 항공이 상대적으로 아주 친절하고 편하게 느껴졌읍니다. 그런데 지난해
귀국할 때 다시 이용해보니 소련 항공도 많이 발전하여 오히려 더 넓고 쾌적했읍니다 단지 비디오모니터가 없
어 긴 시간에 아이들이 지루해 했읍니다.
4.민속명절은 어떤 것이 있나요
-크리스마스를 휴일로 인정하나요
러시아의 달력은 2주간 늦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며 러시아 10월 혁명 기념일도 11월
7일 이지요 그러나 새해는 보통 1월 1일을 지키며 전날 밤샘을 하며 놀다가 새해를 축하합니다라는 스노빔가
두라고 인사하며 선물을 주고 받으며 크리스마스인 1월 7일을 전후하여 거의 10일간 휴무로 지냅니다.
-국가에서 지정한 공식 휴일은 어떤 날인가요
신정연휴,성탄절(1월 7일) 여자의 날(3월 8일) 노동절(5월 1일),대독 승전 기념일 (5월 9일),러시아
국가기념일,모스크바 시 기념일 등 등 입니다.(10월 혁명 기념일은 안지키다가 지난해 다시 지키게 되었읍니
다)
4.가족이 만나는 날이 특별히 정해져 있나요
우리네 추석이나 설날 처럼 가족 친지가 모이는 날은 없고 대신 생일을 아주 특별하게 셍각하며 친구
들까지 초청하곤 합니다. 민족 대이동 같은 고향방문의 명절이 없읍니다.
5.외국인이나 여행시에 주의해야 할 점이 많겠군요
-자국인들의 주된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자연경관 위주인가요 아니면 박물관인가요 얼른 생각하기에 레닌기념관 등이 학생들 수학여
행지로 많이 이용될 것 같은데...)
-가족 단위의 휴가는 어떤가요
-휴가에 대한 인식이 서구와 많이 다를텐데 기간은 어느정도인가요
자연을 좋아하기에 여행과 휴식을 즐깁니다. 모스크바의 겨울은 너무 길기에 여름에는 3개월 정도 업
무가 지연될 정도로 기관에 인원들이 교대로 뺘져나가며 교회의 출석율도 5월 부터 9월 까지는 아주 저조합니
다.과거 구소련 15개 공화국으로 있다가 가기 독립되어 분리되니 친지나 친구들이 여기 저기 다른 공화국으로
흩어졌지요 그래서 여름이면 친구나 친지를 찾아 다른 공화국 예로 우크라이나나 에스토니아 등에 놀러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름에 유하생들이 개인교수 받으려면 굉장히 비싼 돈을 내야 되며 그나마도 싫다하며 교수들은 두
세달 씩 놀러 갑니다. 또 모스크바 근교에 다차라는 통나무집을 짓고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이 많아서 부활절
무렵부터 주말인 금요일 저녁에 가서 월요일 오는데 여름방학인 6,7,8월에는 아예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이 다
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6.문화생활은 어떤가요?
-오히려 문화적 역량이 풍부하다고 알고 있는데 러시아의 발레단이나 오케스트라
교육이 유명한데
-생활체육은 얼마나 활성화 돼 있죠
-체육과 더불어 예술교육도 의무화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문화 예술을 즐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무화는 아닙니다. 일반학교에서 체육은 춤을 배우며 음악 시
간도 없고 학교내에 별도의 음악학교를 두거나 집 근처의 음악학교에 가서 피아노나 기타 악기를 배웁니다.또
음악이나 체육,발레를 하는 아이들은 별도의 학교에서 어려서부터 하기에 전문가들은 굉장히 잘하지만 일반
대중은 기본 상식도 없읍니다. 생활체육은 아주 발달되어 있어 실내수영장이 많고 수영이나 스키를 즐깁니다.
음악학교를 다니지 않은 일반인들은 노래도 잘 못부르며 찬송가 악보를 처음 대하는 이들이 많아서 악보를 보
는 것은 둘째치고 첫째단의 1절부터 4절까지 다 부르고는 그 다음 단의 1절부터 4절까지를 다시 읽다가 어떻
게 된거냐고 묻곤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