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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FIFA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아시아 지역 최초 개최)
2002년 5월 31일부터 2002년 6월 30일까지 32개국이 대한민국과 일본에 각 10개씩 위치한 무려 총 20개 경기장에서 64경기를 치렀다.
이는 양국이 모두 대회 단독 개최를 상정
하고 경기장 건설/보수 계획을 세웠는데, 대회가 공동 개최로 결정된 뒤에도 이 계획
을 그대로 진행하는 바람에 결국 역대 가장 많은 경기장에서 치러진 월드컵이 된 것.
이 때문에 일본 측에서 32개국 출전, 64
경기 → 40개국 출전, 96경기로 늘려달라
고 FIFA에 강력히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
지 않았고, 결국 경기장 하나당 고작 서너 경기만 열렸다.
실제로 무려 2,000억을 들여 지은 서울
월드컵경기장도 개막식과 개막전을 포함
해 고작 세 경기만 열렸다. 그나마 그 세 경기들도 입장권 시스템 오류에 비인기 경기들만 개최되어 만석을 못 채웠다.
보통 월드컵은 유럽의 프로축구리그 일정
에 맞춰서 6월 중순 ~ 7월 중순에 열리는 경우가 많지만, 대회가 열리는 대한민국과
일본은 이 시기가 장마철이기 때문에 대회 16강 토너먼트 이후의 경기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 시기를 조금 앞당겼고, 결국 5월 31일에 개막하여 6월 30일에 폐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일 월드컵 이모저모
01
21세기의 시작을 알린 02년 월드컵의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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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회의 정식 명칭은 ‘2002년 한·일 월드컵(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이다. 본래는 알파벳 순서에 따라 ‘2002년 일·한 월드컵(2002 FIFA World Cup Japan/Korea)’으로 명칭이 내정되어 있었으나 대한민국 측에서 이에 반발함에 따라 명칭이 위와 같이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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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가 대한민국의 반발을 받아들인 이유는 결승전이 일본에서 치러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피파는 “개막전은 한국에서, 결승전은 일본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대회 명칭 또한 같은 순서로 한다” 는 성명 발표와 함께 이 대회 정식 명칭을 ‘2002년 한·일 월드컵(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으로 확정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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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 주심을 맡았던 에콰도르 출신 모레노 심판은 이탈리아 측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라 레푸블리카>를 비롯한 이탈리아 일간지는 직접 모레노 주심을 찾아가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이 일간지의 기자들은 “당신은 월드컵에서 주심 역할을 수행하기엔 너무 뚱뚱한 것 같다” 는 등의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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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폐막 후 모레노 주심은 칠레의 TV 방송에 출연, “나의 16강전 판정은 공정했다고 생각하며 이탈리아 측은 스스로의 패배를 오심으로 합리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페어플레이 정신을 뒤로 제쳐두고 어떻게든 경기에서 이길 궁리만 하고 있다. 이는 1930년대 무솔리니 시절부터 변치 않는 이탈리아인들의 습성” 이라며 판정 논란을 모두 일축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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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대한민국과 스페인의 8강전 선심을 맡았던 토무상게 알리 심판은 “사실 모리엔테스의 골을 취소시킨 것은 나의 실수였다. 물론, 고의는 절대로 아니었고, 내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라며 뒤늦게 오심을 인정해 화제를 불러 모았다. 당시 스페인은 호아킨이 올린 크로스를 모리엔테스가 헤딩골로 연결시켰지만 그 전에 볼이 골라인을 넘어갔다는 알리 선심의 판정으로 인해 득점을 취소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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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한민국의 골키퍼 이운재는 이 판정과 관련, “선심이 깃발을 들어 올렸기 때문에 일부러 플레이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만약 계속 플레이를 진행했다면 모리엔테스의 헤딩슛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며 알리 선심의 판정이 경기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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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한민국의 히딩크 감독은 온 국민들의 염원이자 목표였던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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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에서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당한 프랑스는 종합순위 29위에 머물렀고, 이는 전 대회 우승국이 다음 대회에서 거둔 역대 최악의 성적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월드컵 참가 역사상 최초로 본선 무득점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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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회 우승국에게 자동 출전권이 주어지는 전통은 2002년 대회를 끝으로 폐지됐다. 그로 인해 2002년 우승팀 브라질은 2006년 대회 지역예선에 참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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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7일과 28일, 역대 최초로 FIFA의 관할 아래 월드컵 공식 콘서트가 일본에서 열렸다.
▶ 2009년 타이타닉 마지막 생존자 97세 밀비나 딘 사망
비운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생존자 밀비나 딘(Dean·97)이 2009년 5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고향인 영국 남부 사우샘프턴의 양로원에 살던 밀비나는 잠을 자다 사망했다.
1912년 2월 12일생인 밀비나는 살아남은 706명 중 최연소 생존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부모, 오빠(당시 2세)와 함께 그해 4월 14일 타이타닉에 올랐다. 부친 버트람 딘(당시 27세)은 운영하던 선술집을 팔고 새 삶을 찾겠다며 가족을 데리고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밀비나의 가족은 원래 타이타닉 승객이 아니었다. 다른 배를 예약했으나 파업으로 예약이 갑자기 취소돼 타이타닉 표를 받았다. 네 사람은 3등칸에 함께 탔다.
딘은 2002년 인터뷰에서 “가족을 살린 것은 아버지였다고 모친에게 들었다”면서 “다른 사람들은 타이타닉이 가라앉을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신속하게 대피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부친은 가족을 구명보트에 태웠지만 자신은 타이타닉과 함께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밀비나는 8세 때 처음으로 모친에게 사고 소식을 들었다. 모친은 사고 당시 기억 때문에 날마다 두통을 앓았다. 모친은 1975년 95세로, 오빠는 1992년 81세로 각각 사망했다.
밀비나는 1997년 ‘타이타닉’ 시사회에도 초대받았으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상상으로만 남겨두고 싶다”면서 끝까지 보지 않았다.
▶2009년 2009 환경주일연합예배(서울
주교좌성당 ). 대한성공회와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NCCK) 생명윤리위원회가 공동 주최
▶2006년 대한적십자사 인도네시아 지진피해 긴급 의료단 활동.
▶2006년 대한민국 제4회 지방 선거가 치러졌다.
▶2005년 마크 펠트 전 FBI 부국장,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결정적 제보자로 확인.
▶2004년 가나무역 김선일씨 이라크 무장단체에 피랍
▶2002년 FIFA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아시아 지역 최초 개최)
▶2002년 2002년 FIFA 월드컵이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개막
▶2002년 제주국제자유도시
방송[JIBS]이 개국했다.
▶2000년 제3차 한나라당 전당대회서 이회창 총재 재선
▶1999년 한국-몽골 정상회담, 김대중 대통령 첫 국빈 방문
▶1998년 북미 친선남자농구경기 평양서 개최
▶1996년 네타냐후(Netanyahu),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됨.
▶1996년 제1회 바다의날
▶1996년 FIFA는 2002년 축구 월드컵을 한일공동 개최하도록 결정
21세기를 여는 첫 월드컵축구대회의 팡파르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게 됐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1996년 5월 31일 스위스 취리히 FIFA본부에서 집행위원회를 열고 2002년의 제17회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키로 결정했다.
주앙 아벨란제 국제축구연맹회장은 이날 밤 11시 취리히 돌더 그랜드호텔서 요한슨 유럽축구연맹회장 및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등 부회장단,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 사무총장, 나가누마 겐 일본축구협회회장 등 FIFA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집행위원회는 한일공동개최안을 놓고 토론을 벌인 결과 표결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발표했다.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공동개최 대회로 기록될 이날 결정으로 한일 양국은 경쟁자 입장에서 동반자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한국은 월드컵을 향한 국민적 열기와 정부 유치단의 추진력으로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킴으로써 공동개최를 유도하는 외교적 성과를 얻어냈다.
▶1996년 1998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
에서 부르키나파소가 모리타니와 0대 0
▶1996년 북한 과학자 정갑렬-작가 장해성씨 한국으로 망명
1996년 5월 7일 중국 북경 주재 일본대사관을 거쳐 한국에 망명을 신청한 북한 과학원 산하 음향기기연구소장 정갑렬씨(45)와 별도의 망명 절차를 밟은 북한 중앙방송 소속 방송작가 장해성씨(52)가 1996년 5월 31일 낮 홍콩을 출발 서울에 도착했다.
작가인 장씨는 지난 1월 한-중 국경을 넘어 북한을 탈출 중국 내에서 머물다가 5월 14일 홍콩에 도착, 한국 공관에 망명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정씨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발명전시회에 참가한 뒤 귀로에 북경에 머무는 동안 5월 7일 북경 주재 일본대사관을 거쳐 한국 측과 연결된 후 홍콩으로 옮겨가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에 망명한 두 사람 모두 북한 최고 대학인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계층이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발명 및 신기술 전람회에 참석했다가 귀국 도중 망명한 정갑렬씨는 북한 과학원 산하 메아리사 음향연구소 소장이며 장해성씨는 방송작가로 북한 중앙방송 문예총국 라디오 담당이다. 정씨는 8살 때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했으며 망명 동기는 북한에서 과학자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 장씨는 김정일 우상화 작업과정에서 김정일의 출생지가 북한이 아니고 소련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친구에게 말한 것이 문제가 돼 처벌을 받게 돼 북한을 탈출했다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4년 제4회 평통기독교인 동경회의 개막
▶1994년 북한핵. 유엔안보리, 의장성명 채택.
▶1992년 신유고슬라비아, 연방의회 선거실시. 사회당 승리.
▶1992년 리세포르 소글로 베냉 대통령 방한.
▶1990년 부시-고르바초프, 위성턴 장상회담서 통일독일의 유럽내 역할 논의
▶1990년 북한 군축안 제안. 협상타결 뒤 3-4년간에 걸친 3단계 군축 통해 남북한 병력 10만으로 감축
▶1989년 한국ABC협회 창립
신문-잡지 발행부수 공사기구인 ABC가 한국에서도 탄생했다. 사단법인 한국ABC협회는 1989년 5월 31일 프레스센터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그간 언론계 광고계의 과제이던 공사단체를 가동시켰다. 외국에 비하면 크게 늦었다. 초대 위원장은 서정우 연세대 교수가 맡았고 1995년부터 언론인 조용중씨가 2대 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일간지 판매 담당자와 연세대 서정우 교수, 광고업체 실무자 등이 참석하여 신문판매부수 공사제도인 ABC 협회 창립 발기인 총회를 갖고 있다.
1993년 7월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평화신문 인천일보가 처음 ABC공사를 신청했다. 이어 8월에 중부일보, 10월에 서울신문 한국교육신문이 부수 내역을 협회에 보고, 참여사는 7개가 됐다. 그러나 이들 신문의 공사 결과를 심의할 인증위원회가 구성되기 전에 유료부수 등 공사 규정이 일부 개정되는 바람에 공사 보고서가 제대로 발간되지 못했다.
첫 ABC 보고서는 조선일보가 발행-유료부수가 가장 많은 것으로 공표했다. 이후 일부 신문사가 ABC공사에서 발을 빼는 바람에 1998년부터 일간지는 조선일보 만이 ABC공사를 받고 있다.
▶1986년 프랑스 아리안2호 로켓3단계 발사과정에서 미점화.지상통제소에서 파괴.
▶1985년 제1회 동경국제영화제 개막
▶1983년 제4회 기독교사상 강좌 '선교
100주년과 민족의 전통' 개최(KSCF)
▶1983년 우노 소스케, 일본 수상으로 선출
▶1981년 세계궁도대회 우승
▶1980년 신군부, 국가보위비상대책
위원회 설치, 의장에 최규하
▶1979년 고리원전, 저압터빈의 유기관 연결부분 고장으로 가동 중지
▶1978년 아름다운 별 창간. 월간잡지.
편저자 조용기 목사. 발행인 김성혜 내용은 어린이용 신앙잡지로 기독교만화. 순수신앙동화.
▶1976년 시리아군, 레바논 진격.
▶1976년 전국에서 첫 반상회
1976년 5월 3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국민조직의 최하부단위인 반(班) 구성원들의 월례회인 반상회가 열렸다. 반상회의 주요목적은 주민간의 의사소통과 국민화합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매달 말일을 정기반상일로 정한 후 처음 열린 반상회는 남자보다 여자가, 청장년보다는 노인들이 많았고 주민요망사항 토론보다는 공지사항 전달이 많은 모임이었다.
이날 오후 6시부터 9시 사이 전국 25만5천개 반에서 일제히 열린 이 반상회는 주민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토론함으로써 행정기관과 주민간의 협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빠른 곳은 저녁7시, 늦은 곳은 9시에 회의가 시작됐다. 각반이 반장과 구청에서 파견된 담당관이 참석한 이날 반상회는 출석점검이 끝나고 공지사항 전달 때에는 지리함을 느끼는 듯 조는 이들까지 있었으나 `요망사항 말하기`에 이르자 회의분위기는 활기를 띠었었다.
반상회는 1917년 일본이 한국국민 통제와 지배체제의 유지 강화를 위해서 열린 것이 기원이었고 1976년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처음에는 매달말일에 개최되던 반상회 일자는 후에 25일로 고정됐다.
▶1974년 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골란 하이츠(Golan Heights)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내용의 조약을 맺게 함.
▶1973년 미국상원,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 지원자금 중단의결
▶1972년 문교부, 고입체력장제도 실시요강 발표
▶1971년 동성호 캄차카반도 근해서 소련 경비정에 피납
▶1970년 페루에 지진, 5만여명 사망
▶1970년 제9회 월드컵 멕시코서 개막
▶1967년 외환 보유고 3억 달러 돌파
▶1965년 여배우 브룩 실즈 출생 (1965 26세)
▶1962년 증권파동 발생. 증권시장에서 약 5백억환 결제 불이행
▶1962년 이스라엘 텔아비브(Tel Aviv) 부근에서 나치 지도자이자 유태인 학살의 주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전범죄로 사형됨
전직 나치스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2년 5월 31일 이스라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15일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1906년생인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독일과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살고 있던 유태인의 체포-강제이주-살해를 계획하고 지휘했다.
독일이 패전한 뒤 가족을 데리고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그곳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얻은 뒤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의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은신해 있던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비밀정보부 모사드의 끈질긴 추적끝에 1960년 5월에 아르헨티나에서 납치돼 이스라엘로 비밀리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었다.
모사드의 아이히만 납치가 국제법을 위반했고, 나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한 1950년 법률이 형벌 불소급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점 등을 둘러싼 이스라엘 검사와 독일 변호사간의 법정공방이 뜨거웠으나 이스라엘 법정은 검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61년 영화배우 게리 쿠퍼 사망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 씩이나 수상한 미국 영화배우 게리 쿠퍼가 1961년 5월 31일 사망했다. 쿠퍼는 1901년 미국 몬타나주에서 출생했다. 대학을 중퇴한 뒤 만화가로 활약하다가 쿠퍼가 영화계에 데뷔한 것은 24세 때인 1935년이었다.
장신에 미남이었으나 특징이 없다는 이유로 5년 이상 엑스트라로 전전하던 그를 스타덤에 올라서게 한 영화는 `모로코`와 헤밍웨이 원작 `무기여 잘 있거라`였다. 출세작으로는 1930년 디트리히트와 공연한 `몽고`였으며 주요작품으로는 잉그리트 버그만과 함께 출연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백주의 결투`가 있다.
▶196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독립 공화국을 이룸. 스와트(C R Swart)가 대통령이 됨.
▶1961년 남아프리카연방, 영국 자치령에서 독립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립
▶1959년 싱가포르 제1회 총선거. 싱가포르는 6월 3일에 자치국 독립선언을 하고 6월 5일에 이광요 내각이 성립하였다.
▶1955년 한-미 잉여농산물협정 조인 70여 여인 간음혐의 박인수 검거
1년간 70여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한 혐의로 박인수씨가 1955년 5월31일에 검거됐다. 대학 재학 중 전쟁 발발로 입대했던 훤칠한 미 청년 박인수는 해병대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해군장교구락부(LCI),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 댄스 홀을 드나들다 1954년 제대한 이후로도 해군 대위를 사칭, 인기 댄스홀을 휩쓸며 여성 편력을 펼친다.
1955년 7월 22일 재판정에 선 박인수. 1심에선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박인수가 만난 여성들은 대학생이 대부분이었으며 고관, 국회의원 등 상류층 가정 출신도 많았다. 검찰은 박을 혼인빙자 간음죄로 기소했지만 정작 이 죄는 친고죄. 박인수를 고소한 여성은 둘 뿐이었으며, 그나마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한 여성은 너댓밖에 안됐다. 권순영 판사는 박인수 피고에게 공무원 자격 사칭에 대해서만 2만환의 벌금형을 과했다. 그러나 세간은 떠들썩했고 검찰은 항고했다. 항소심에서 박인수는 징역 1년형을 받았고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유죄가 확정됐다.
"댄스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내놓은 정조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고의로 여자를 여관에 유인하는 남성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는 게 유죄 판결 이유였다. 박인수 사건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던 1950년대 한국의 웃지못할 풍속화다. 자유로워진 성 풍속도, 그러나 여성의 정조와 순결을 강조하던 윤리의 이중 잣대, 미군 문화를 통해 전파된 춤 바람과 댄스홀, 이 모든 새로운 사회문화 코드의 조합이 박인수 사건으로 응축됐다.
▶1953년 한국레지오마리에 창설.가톨릭 평신도단체.광주교구산하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처음 도입,조직됨.
▶1952년 동독, 서베를린 경계선 봉쇄 시작
▶1952년 소련에서 볼가-돈 운하(Volga Don Canal)가 개통됨.
▶1952년 전시연합대학 해체
▶1948년 제헌국회 개원(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 김동원)
▶1948년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 피선
▶1948년 제헌국회 개원
5ㆍ10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원들의 제1과제는 헌법 제정이었다. 이에 초대 국회를 제헌국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 헌정 사상 최초로 국민이 주권자로서 직접 국민대표를 뽑는 제헌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은 뒤 1948년 5월 31일 역사적인 제헌국회 개원식이 거행됐다.
1948년 5월 31일 열린 제헌의회 개원식에서 최고령자인 이승만 박사(왼쪽 가운데)가 사회자로 선출돼 의사진행을 하고 있다.
5ㆍ10선거는 총유권자의 95.5%의 높은 투표율을 보인 대한민국 수립의지를 증명한 선거로 198명(2년 뒤 제주도서 2명 선출)의 의원이 선출됐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 의석수 200석 가운데 정당별로 무소속 85석,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석, 한국민주당 29석, 대동청년단 12석, 조선민족청년단 6석, 대한노동총연맹 1석, 기타 10석을 차지했다. 초대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 김동원 의원이 선출되어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첫발을 내딛었다.
▶1945년 타이베이 대공습.
▶1942년 체코의 애국주의자가 게슈타포(Gestapo : 독일비밀경찰) 지도자 하이드리히(Heydrich)를 암살함.
▶1940년 경성신학교로 개칭(구제 전문학교령에 의한 4년제) 제1대 교장에 이명직 목사 취임
▶1938년 총독부, 각종 토목공사에 부인동원령 시달
▶1936년 콜스톤 출생. 남침례회 선교사. 한국명 고성일. 침례회선교부 소속 복음선교사로 한국에서 활약함.
▶1935년 [인도] 퀘타에 지진, 주민 약 5만명 사망.
▶1935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20세기 폭스가 설립했다.
▶1933년 일본 광동군 대표와 중국군대표 사이에 당고정전협정 성립
▶1933년 일본 관동군 대표와 중국군 대표 사이에 당고정전협정 성립
▶1930년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생 (1930 61세)
▶1930년 한국독립당, 상해에서 결성
▶1929년 영국 총선, 노동당 승리.
▶1926년 미국 프로이트 베테트-리차드 E.버드, 북극 왕복비행 성공.
▶1923년 모나코왕 레이네에 공 출생 (1923 68세)
▶1916년 영국, 유틀란드 해전서 제해권 확립
▶1912년 총독부, 모든 관리에 무관 복장 착용을 지시
▶19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영국으로부터 독립
▶1908년 이화학당 메이퀸 대관식 시작
▶1906년 쉘 출생. 독일 로마가톨릭 사제. 그는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변증학,
비교종교학, 기독교미술사 교수가 되었고,
주임사제가 되었다.
▶1902년 남아프리카 전쟁 종료 (보어전쟁 종결)
▶1902년 보어전쟁 종결로 트랜스발-오렌지 양공국 영국의 식민지화
1902년 5월 31일 트랜스발국이 영국에 항복함으로 3년에 걸친 보어전쟁이 막을 내렸다. 전쟁결과 보어군은 총병력 7만여명 가운데 7천여명이 전사했고, 집단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2만3천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영국도 불명예스러웠다. 인구 50만명에 군병력 7만여명 뿐인 보어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영국이 동원한 군병력은 45만명이었다. 이 중 5천7백여명이 전사했으며 부상으로 목숨을 잃은 수만 해도 1만 6천여명에 달했다.
고도로 훈련되고 규율이 엄격한 대영제국 군대가 엉성하기 그지없는 보어인 민병대에 이처럼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영국 본토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한편에서는 반전운동이 고조되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정부를 중심으로 국왕 특별조사단을 구성, 군을 현대화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영국 정부를 당혹스럽게 한 점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영국의 잔인성에 대해 세계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점이었다. 50여만명 뿐인 트랜스발을 점령하기 위해 영국은 군병력 45만명을 동원했고, 전쟁 막바지에는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해 보어인들의 전답과 가옥을 불사르고, 21만명의 비전투원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해 이들 중 2만3천여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보어전쟁은 1899년 10월 11일 네덜란드 계 남아프리카 이주민으로 구성된 보어군이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나탈주를 전격 침공함으로 시작됐다. 배경은 19세기 초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 식민지를 획득했다.
이곳으로 대거 진출하기 시작한 영국인들과 일찍부터 이곳에 정착,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네덜란드 계 남아프리카 이주민인 보어인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지자, 보어인들은 영국과의 충돌을 피해 남아프리카 북쪽 지방으로 집단이주, 그곳에 트랜스발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세웠다. 영국이 이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자 보어인들은 영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제1차 보어전쟁 (1881-1884)이다.
전쟁결과 영국의 종주권과 트랜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함께 인정하는 런던협정으로 양국관계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1886년 트랜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 자유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이를 차지하려는 영국의 내정간섭이 차츰 노골화됐다. 수차례의 협상에도 원만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계속 갈등을 빚자, 마침내 트랜스발국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보어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1886년]이화학당(梨花學堂) 설립
이화학당 학생들 단체사진.
1886년 5월 어느날, 가마를 탄 한 여성이 하인을 거느리고 벽안(碧眼)의 스크랜턴 부인을 찾았다. 스크랜턴은 미국 세계여성해외선교부(WFMS)가 조선에 파견한 선교사. 1885년 6월에 조선 땅을 처음 밟은 스크랜턴은 조선 여성을 교육하는 것이 시급함을 깨닫고, 서울 정동(貞洞)에 학교 부지 6100여평을 매입한 뒤 이듬해 2월부터 건물공사를 시작했다. 곧 학생모집에 나섰으나 교육을 받을 여성들은 여전히 집안 깊숙한 곳에서 나오질 않았다.
이런 때 상류계층의 여성이 제발로 찾아왔으니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고관의 소실로 결혼까지 한, 이름을 알 수 없어 김부인으로 불린 여성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이 되고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1886년 5월31일, 김부인 한 명 만을 상대로 한 역사적인 첫 수업이 시작됐다.
근대적인 여성교육이 첫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부인은 불행히도 병이 들어 석 달만에 중도하차해야했다. 6월 말, 10살 난 꽃님이가 가난으로 딸을 부양할 수 없었던 엄마를 따라 이곳을 찾았고, 곧 4살 난 별단이도 이곳에 보내졌다.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가 된 김정동(박에스더)이 문을 두드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11월, 학수고대하던 200평 규모의 한식 기와집 교사(校舍)가 완성된 데 이어 이듬해 2월, 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고종황제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校名)을 하사한 것이다. 정동에 배밭이 많아 `이화(梨花)`로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화여대는 1935년에 화빈궁(정조의 후궁)의 묘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 `신촌시대`를 열었다.
▶ 1895년 공문에 국문 또는 국한문혼용령 공포 (고종 32년)
▶ 1887년 프랑스의 외교관 겸 시인 생 종 페르스 출생
▶ 1832년 프랑스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 사망
▶ 1819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시인 휘트먼 출생
▶ 1809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요셉 하이든 사망 -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