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전고(官職典故) 대제학(大提學) 대제학에 뽑힌 자는 관직을 논할 것 없이 항상 겸대하였고, 비록 죄를 받았거나 상(喪)을 만난 자일지라도 역시 갈지 않았으며, 죄에서 풀리거나 상을 마치면 전과 같이 근무하였다. ○ 국초(國初)에는 문형(文衡)을 주관하는 이가 예문관 대제학이나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직하였으면 문병을 맡게 되었으나, 그렇지 아니하면 비록 문사(文事)를 주장하는 벼슬을 하였더라도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안지(安止)와 박형원(朴亨元)이 그랬었다. 홍섬(洪暹)의 시에는 안ㆍ박 두 사람이 없다. 성종조 이후에는 양관(兩館)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무하게 하였는데 문병을 관장하게 함이었다. 《지소록》 ○ 국조고사(國朝故事)에는, “태조조(太祖朝)에 권근(權近)이 문병을 주장하였다.” 하였고, 남곤(南袞)이 중종에게 아뢴 말에는, “세종조에 신장(申檣)ㆍ신석조(辛碩祖)가 수대제학(守大提學)이 되었다.” 하였으며, 김종직(金宗直)의 《이존록(彛尊錄)》에는, “세종 기해년 조상치(曹尙治)의 과거 방(榜)은 대제학 유관(柳觀)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하였으나, 홍섬(洪暹)의 시와 《지봉유설》에는 모두 이 말이 없다. 《조야기문》 홍섬의 시에, 계회제지주항정 / 季淮踶趾舟恒正 어달성감개곤용 / 魚達成勘漑袞容 노양국창신정인 / 老讓國昌申鄭忍 길충순신귀무궁 / 吉忠淳愼貴無窮 이라 하였는데,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 호가 용재(容齋))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 호가 인재(忍齋))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金貴榮)을 이름이다. 근세에 문형(文衡)의 선생안(先生案 전임자의 명단)을 이 시로써 차례를 정하였기 때문에 권근(權近) 이하 여러 사람이 모두 들지 못하였는데,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또한 문형(文衡)을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므로 누락되었다.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그 끝 구(句)를 고치기를, ‘길충순퇴과전동(吉忠淳退寡傳東)’이라고 하였으니, 이황의 호가 퇴계(退溪)이고, 노수신의 자는 과회(寡悔)이며, 김귀영의 호는 동원(東園)인 까닭이었다. 유근의 시에, 율아애로경명익 / 栗鵞厓鷺景明益 해백송사효회동 / 海白松沙孝晦同 퇴익필구사불수 / 退益弼懼辭不受 계이위자기명공 / 繼以爲者幾明公 이라 하였는데 이는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아계(鵞溪) 이산해(李山海)ㆍ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ㆍ노저(鷺渚) 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 자 경문(景文))ㆍ이덕형(李德馨 자 명보(明甫))ㆍ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성민(洪聖民)ㆍ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ㆍ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ㆍ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ㆍ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ㆍ이호민(李好閔 자 효언(孝彦))ㆍ유근(柳根 자 회부(晦夫))을 이름이다. 효언의 다음과 회부의 위에 이이첨(李爾瞻)이 있었으나 빼고 넣지 않았다. 백사의 다른 호는 필운(弼雲)이고 심희수의 자는 백구(伯懼)이다. ○ 문장의 의발(衣鉢)을 서로 전함은 본래 고사(故事)가 있다. 권제(權踶)가 문형을 주관하다가 병이 위독하자 여러 사람이 의논하기를, 다음 문형을 맡을 사람은 정인지(鄭麟趾)라고 하였으나, 권제는 안지(安止)에게 위임하고 죽었다. 안지가 대신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파직(罷職)되고, 인지가 주관하게 되었다. 《필원잡기》 권채(權採)가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는데 일찍 죽으니 벼슬은 승지였다. 김 장군(金將軍) 자웅(自雄)이 심히 애석하게 여기므로 박이창(朴以昌)이 말하기를, “자네는 문형을 주관할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 목은(牧隱 이색)이 죽으니 양촌(陽村 권근)이 주관하였고, 양촌이 죽으니 춘정(春亭 변계량)이 주관하였으며, 춘정이 죽으니 윤 대제학(윤회(尹淮))이 주관하였고, 윤이 죽으니 권지재(權止齋 권제)가 주관하였는데, 지재가 만약 죽으면 남수문(南秀文)이 반드시 주관할 것이다. 수문이 만약 죽으면 내가 또 있고, 내가 죽으면 장군이 있는데 채(採)가 일찍 죽는 것을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가.” 하였으니, 그 말 속에는 문장이 날로 점점 저하된다는 뜻이 말 속에 은연(隱然)히 나타나 있다. 《필원잡기》 ○ 중종조에 남곤이 대제학으로서 정승을 배명받고 대제학은 면직되기를 청하니 임금이, “누가 대신할 만한가.” 하고 물었다. 남곤이 아뢰기를, “죄입은 사람 중에 몇 사람 해당될 만한 자가 있으나, 새로 죄입은 사람으로는 이행(李荇)만이 매우 합당합니다만 품계가 낮습니다. 그러나 세종조에 신장(申檣)ㆍ신석조(辛碩祖)도 수대제학(守大提學)이 되었는데 이행은 아직 가선(嘉善)도 되지 못하였으며, 이 밖에는 어떤 사람이 합당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행을 특히 가선 품계에 올려서 수대제학으로 임명하였다. 《동각잡기》 ○ 중종조에 이행이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기를, “소세양(蘇世讓)이 마땅히 문병을 관장할 만한 사람이니 아래 벼슬에 둘 수 없습니다.” 한 까닭으로 통정(通政)에서 가선(嘉善) 자헌(資憲)으로 올랐는데 모두 행이 청한 것이었다. 세양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을 원하므로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두 달이 되지 않아서 행이 또, “문장이 뛰어난 선비를 외직으로 나가게 함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말하였다. 《지봉유설》 ○ 세조 2년에 신숙주(申叔舟)을 우의정으로 삼고, 그대로 문형을 맡게 하였는데 정승으로서 문형을 겸하는 것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 명종조에 홍섬(洪暹)을 대제학으로 삼았는데, 노쇠하였다고 하여 사임하므로 정승들에게 의논하니, 그때 영의정이 아뢰기를, “문장은 기운에 따라서 성했다 쇠했다 하는 것입니다. 홍섬의 나이가 쇠모(衰暮)에 가깝고 문장 역시 퇴보하므로 간절히 사퇴하는 것이오니, 마땅히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홍섬은 마침내 벼슬이 갈렸다. 《우복집(愚伏集)》 ○ 명종 경신년에 홍섬이 대제학을 사임하므로 새 대제학을 내어야 되었는데, 정원에서 고사(故事)대로 무릇 가선 이상인 문관을 모두 패초하여 함께 경복궁 빈청(賓廳)에 나아갔다. 영의정 상진(尙震)ㆍ좌의정 이준경(李浚慶)은 북쪽 벽 앞에 앉았고, 옆으로 꺾어서 서쪽 벽에는 홍섬이 첫 자리에 앉았으며, 여러 재상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홍섬이 옛 예에 따라서 자신이 그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는데, 예조 판서 정유길(鄭惟吉)ㆍ지사 윤춘년(尹春年)ㆍ동지 이황(李滉)을 추천하고, 이어 정승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모(李某)의 학술과 문장이 실제로 이 임무에 합당하지마는, 산골에 굳게 숨어서 나오지 아니하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주서(注書) 윤근수(尹根壽)가 추천된 사람의 단자(單子)를 가지고 아래에서 올라와 앞에 나아가서 권점 찍기를 청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임금의 의향이 유길에게 있음을 알고 가선 품계의 사람은 유길에게 권점을 많이 하였고, 박영준(朴永俊)이 처음으로 이황에게 권점하였다. 추천 단자가 한 재상에게 돌아갔는데 그 재상이 자리에서 나와 앉으며 정승에게 말하기를,“사람마다 각각 한 사람씩 권점하는데, 내 생각에는 세 사람을 모두 합쳐서 아울러 권점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정승이 허락하였다. 권점하기를 마치고 영의정 앞에 가지고 가서 보니, 정유길이 16점이고 이황은 12점이었으며, 윤춘년은 5점이었으므로, 영의정이 춘년의 이름을 가리키면서, “여기가 너무 적으니 내가 권점하겠다.”고 하였다. 춘년이 이래서 6점을 얻어 후일에 첫째로 추천되었으며 권점이 많다고 하여 정유길이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는 평시에 있었던 고사(故事)이고, 난리 뒤에는 문병을 주관할 사람을 낼 때에 다만 시임 정승과 6조 판서만을 패초하여서 모임을 갖고 권점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박충간(朴忠侃)은 음관(蔭官)으로서 마침 판서가 되었는데 거만스럽게 권점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월정만록》 ○ 선조 원년에 대제학 박순(朴淳)이 아뢰기를, “대제학과 제학이 비록 같은 관(館)ㆍ각(閣)의 직임이오나 제학의 임무가 대제학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지금 신이 대제학으로 있는데, 이황이 제학으로 있습니다. 나이 많고 학식이 높은 선비는 도리어 아래 임무에 있고, 후진 초학(初學)이 중한 지위에 있게 되었으니, 신의 직임을 갈아서 이황에게 제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명하였더니, 모두 박순의 말이 옳다 하므로 이에 서로 바꾸기를 명하였으나 황은 늙고 병들어서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며 힘껏 사퇴하여 허락을 얻었다. 《조야기문》 박순이 대제학이 되었는데 인망이 흡족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돌길의 발자국 소리는 자는 새가 안다 / 石逕跫音宿鳥知 라는 시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는 새도 능히 세상 사람의 눈을 속이는가.” 하였으니, 대개 그의 문장이 문형에 맞지 않는 것을 기롱한 것이었다. 당시에 문형을 맡는 자는 모두 늙고 학덕이 높은 선비였으니 박순이 기롱을 당함도 마땅하다 하겠지마는, 지금 문형을 맡은 자는 순에게 비교하여도 그 차이가 또 하늘과 못[淵] 같을 뿐만이 아니니, 인재의 품이 점점 낮아짐이 이에 이르렀는가. 효종조에 대제학을 권점할 때에 어떤 무관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이름도 혹시 권점 중에 들지 않을까.” 하니, 듣는 자가 웃었다. 《국당배어(菊堂俳語)》 ○ 옛 규례에는 반드시 호당(湖堂)을 겪고 추천을 받은 자라야 문형이 되었다. 심언광(沈彦光)이 일찍이 문형 권점에 참여되었으나 호당을 겪지 아니하였으므로 사퇴하였다. 선조조에 황정욱(黃廷彧)이 비로소 호당을 겪지 아니하고서 문형이 되었다. 임금이 정욱의 글을 좋아하였고, 노수신(盧守愼)이 극력으로 추진하여서 드디어 제학에서 승진하여 대제학을 겸하였다. 호당에 휴가를 주어 글 읽게 하는 제도를 창설하면서부터 문병(文柄)을 주장할 자는 반드시 호당에서 글 읽은 사람을 임용하였던 까닭으로, 언광이 권점에 참예되었으나 일찍이 글 읽는 휴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 번이나 소를 올려서 사퇴하였던 것인데, 정욱은 홀로 호당을 겪지 아니하고서도 얻었으니 세상에서 모두 영예(榮譽)라고 하였다. 《지소기》 ○ 조종조에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병을 주장하였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으로 삼았던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중종조 이후로부터는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하였다.” 하나, 세조조에 신숙주가 영의정으로서 대제학과 예조 판서를 겸하였으니, 이 말은 믿기 어려운 듯하다. 어세겸(魚世謙)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성세창(成世昌)ㆍ유성룡(柳成龍)이 모두 정승으로서 대제학을 겸하였으며, 이행과 이덕형(李德馨)은 통정(通政)으로서 천거를 받았으므로 모두 가선에 올려서 대제학을 제수하였으니, 벼슬 제도는 적당한 사람을 얻는 데 있는 것이고, 일정한 규정은 없는 것이었다. 《지봉유설》 ○ 이덕형도 나이 31세에 문형을 잡았다. 그때 도당(都堂)에 모여서 권점하였는데, 홀로 덕형에게 권점이 하나만 찍혔으므로 만좌(滿座)가 놀랐다. 김귀영(金貴榮)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노부(老夫)가 한 짓이다. 덕형이 나이 젊고 품계가 낮은데 반열(班列)은 여러 선배보다 앞섰으니, 그의 재주와 덕이 노숙(老熟)하기를 조금 기다림이 어떻겠는가.” 하니, 덕형이 그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백사집》 근래에 대제학이 된 사람으로는 이덕형이 가장 젊었다. 그때에 덕형이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통정 품계로서 천에 뽑힘을 받았는데, 권점할 때에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이 홀로 덕형에게 권점하지 않고서 말하기를, “이덕형은 나이가 젊다. 그 전에 나이 31세에 문형을 맡은 자가 어디 있었는가. 나는 그를 성취(成就)시키고자 한다.” 하였으니, 선배들의 인재를 사랑하고 아끼는 뜻이 이와 같았다. 《지봉유설》 ○ 옥당에 옛날부터 큰 벼루가 있었는데 항상 장서각(藏書閣)에 간수하였다가 대제학이 옥당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서 여러 학사들에게 글 짓기를 시험할 때에 내어다가 사용할 뿐이었다. 남곤(南袞)이 문형이 되고서는, 별도로 큰 벼루 한 개를 옥당에 간수한 것과 같이 만들어서 자기의 집에 두었다가 문형을 사임한 뒤에는 이행(李荇)에게 전하였다. 그 뒤에 여러 사람이 대제학을 지냈으나 벼루는 그대로 이행의 집에 있었다. 정사룡(鄭士龍)이 대제학이 되었을 때에는 이행은 이미 죽었는데, 부인이 벼루를 사룡에게 보내면서, “이는 용재(容齋 이행의 호)의 뜻입니다.” 하여 이로부터 으레 문형을 주관한 사람에게 전하여졌다. 임진년 병화 뒤에 이덕형이 그 벼루를 돈을 주고 구해서 이이첨(李爾瞻)에게까지 전하였는데, 이이첨이 죽임을 당하자 벼루 역시 잃어버렸다. 신흠(申欽)이 문형을 맡은 뒤에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을 쪼아 옛 것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김류(金瑬)ㆍ장유(張維)에게 차례로 전하였다. 고사(故事)에 문형이 갈릴 때마다 벼루를 전할 때에는 반드시 서로 주고 받은 시축(詩軸)이 있었으니 드디어 문단(文壇)의 아름다운 풍습이 되었다. 계유년에 장유가 문형에서 두 번째 갈릴 때에 최명길(崔鳴吉)이 대신하게 되었는데, 벼루를 보내면서 한 수의 율시(律詩)를 주었는데 그 율시에, 불문에서 의발을 전하는 풍습이 / 空門衣鉢有宗風 예문관에서 벼루를 서로 전하는 일과 자못 같도다 / 藝苑相傳事頗同 묘한 솜씨는 각각 은 붓을 뽑았고 / 妙手各拈銀不律 문심은 애오라지 돌벼루에 의탁하였네 / 文心聊托石虛中 문형을 두 번씩이나 주관하매 선배에게 부끄럽고 / 齊盟再主慚前輩 교장은 옆에서 보고 졸장을 비웃는다 / 巧匠傍觀笑拙工 이로부터 문단에 정채가 더할 것이네 / 從此騷壇倍精彩 삭방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훌륭한 대장을 맞이하듯이 / 朔方旗鼓得元戎 하였다. 《계곡만필(谿谷漫筆)》 ○ 인조조에 이명한(李明漢)을 도승지(都承旨)로서 대제학을 겸하게 하였더니, 전례에 없던 일이라고 하여 본직은 갈아주기를 청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전례에는 의거할 데가 없으나 이경석(李景奭)이 일찍이 예문관 제학을 겸하게 되었으므로, 도승지가 비답을 받아서 내릴 때에 직제학을 고쳐서 제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이 대제학은 일이 신규에 관계되오니 전하께서 결재하소서.” 하므로, 그대로 겸무하도록 특명하였다. 〈백주행장(白洲行狀)〉 ○ 인조조에 김류가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특명으로 대제학을 그대로 겸무하게 하였더니, 해면되기를 청하는 차자에 대략 아뢰기를, “대제학은 으레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하는데, 지성균관사는 2품의 품계입니다. 어찌 정승의 직위에 있으면서 다시 2품 관직을 겸할 수 있겠습니까. 관방(官方 관에서 지켜야 할 예법)이 차례를 잃게 되면 관계됨이 적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북저집(北渚集)》 ○ 현종 무신년에 문형의 망(望)을 추천할 참인데 원임대신 이경석(李景奭)이 전(前) 대제학으로서 추천하는 일을 관장하여야 함에도 병중이었으므로 임금이 경석에게 자기 집에서 추천하도록 명하였더니, 경석은 감히 그럴 수 없다 하고 대루원(待漏院)에 나아가서 적어 올렸다. 〈백헌시장〉 ○ 숙종조에 김수항(金壽恒)이 정승이 되었으나 그대로 문형을 겸하였고, 남구만(南九萬)ㆍ최석정(崔錫鼎) 또한 그대로 겸하였다가 곧 사면되었다. 《조야기문》 ○ 정승으로서 문형을 겸한 사람은 신숙주ㆍ어세겸(魚世謙)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성세창(成世昌)ㆍ유성룡ㆍ김수항ㆍ남구만ㆍ최석정ㆍ조태억(趙泰億)이었다. ○ 3대가 잇달아서 문형을 맡았던 사람은 이정귀(李廷龜)ㆍ명한(明漢)ㆍ일상(一相)과 김만기(金萬基)ㆍ진규(鎭圭)ㆍ양택(陽澤)이었다. ○ 부자가 문형을 맡았던 사람은 성현(成俔)과 세창(世昌), 이식(李植 이행의 현손)과 단하(端夏), 이진망(李眞望 경석의 종손)과 광덕(匡德), 김수항(김상헌의 손자)과 창협(昌協)이었다. ○ 형제간에 문형을 맡았던 사람은 김만기(金萬基)와 만중(萬重), 민점(閔點)과 암(黯)이었다. ○ 한 집안에 문형을 맡았던 이는 권근(權根) 같은 이가 없었다. 권근과 그 아들 제(踶), 외손자 서거정(徐居正), 손서(孫婿) 최항(崔恒)이었다. 《지소기(識小記)》
[주D-001]지공거(知貢擧) : 여기서의 공거(貢擧)는 과거를 말한 것인데, 지공거는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반드시 대제학이 한다. [주D-002]수대제학(守大提學) : 대제학이 될 계자(階資)가 못 되는데, 임시로 대제학의 직무를 행하는 것을 ‘수대제학(守大提學)’이라 한다. [출처] 관직전고(官職典故) 대제학(大提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