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외 2편
권상진
나는 혀로 굴린 눈사람
어느새 동그랗게 부풀려 있었지
말들이 내려 쌓이는 골목에서
뭉치고 굴려진 나는 어느새 뜻밖의 문장
끝말잇기 놀이의 첫 단어는 이제
아무도 기억나지 않아
몇 번의 입담을 거치고 나면 나는
그들만의 정반합
맑은 날에도 눈은 내렸지
어쩌다 내게 닿으면 태도는 바꿔
금세 온순해져 버리는 물방울들
말의 허깨비들
가능한 입을 다물기로 했어
예와 아니오만으로 이루어진 대답이
변질을 지나 창조에 닿았다면
그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의 문제
골목의 사계절 내내 눈이 내렸지
걸어 들어간 사람들마다
눈사람이 되어 나왔지
더러,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접는다는 것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변용
어느 낭만적 고양이의 죽음
이 악장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먼저 이해해야 해
속도와 음정이 서로 다른 음표를 향해
고양이는 오선지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큐사인이 불러오는 격렬한 템포
간결한 클라이맥스가 지나면
일제히 한곳으로 향하는 관객들의 시선
안단테 안단테
낭만적 고양이의 짧은 악절
뒷골목의 쓸쓸함으로 얼룩진 수트와
조율을 마친 팽팽한 수염으로 슬쩍 표정을 가리고
허공을 보듬는 우아한 몸짓
느려지는 지휘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속도를 늦추는 음표들, 바퀴들
죽음의 완벽한 해석에서 시작되는 여린 떨림은
아방가르드를 지나 다시 낭만주의 감성으로 접어드나 보다
음표들이 느린 템포로 우회를 시작한다
악보 위에는 혼신을 다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 권상진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 (걷는사람 / 2023)
권상진
경북 경주 출생. 2013년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눈물 이후』, 합동시집 『시골시인 K』. 2015년 복숭아문학상 대상, 2018년 경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