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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용사
욜 3:9-13
9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널리 선포할지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지어다
10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11 사면의 민족들아 너희는 속히 와서 모일지어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12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욜 3:9-13 / [세계 만민의 호출] `너희는 이 말씀을 세계 만민들에게 널리 선포하여라. 너희는 나와 싸울 준비를 하여라! 용사들을 깨워 일으키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나를 상대로 물밀듯이 밀려오너라! 10) 너희의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너희의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자도 용사가 되어라! 11) 천하의 모든 용사들아, 서둘러서 오너라! 너희가 모두 그곳으로 모여라! 나 여호와가 네 용사들을 전멸시키리라! 12) 세계 만민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오너라. 내가 거기에 앉아서 천하의 만민을 심판할 작정이다.' 13) [주께서 ㄱ) 용사들에게 명령하시다] `이제 낫으로 베어라! 곡식이 익어서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와서 밟아라! 술틀에 포도가 가득 담겨 있다. 그릇들마다 흘러 넘친다. 그들의 죄악이 많기 때문이다.' (ㄱ. 예루살렘의 용사들이나 하늘의 천사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열방이 대적하는 모습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천군천사와 함께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널리 선포할지어다(9-10) 앞에서 나온 여호사밧 골짜기에서의 하나님의 심문이 이곳에서는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열방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적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뼈 속 깊은 교만의 모습입니다. 열방은 무기로 무장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진군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나온 무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정당하게 하고, 이들이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적인 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근거로 자신을 자랑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행위가 허용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간적인 모든 노력들은 허무하게 끝나게 될 것입니다. 열방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장소는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준비한 모든 수단들은 무익할 뿐입니다.
심판하리로다(11-13) 전쟁의 자리로 부름받은 자들에는 주의 용사들도 포함됩니다. 전쟁(대적)하기 위해 모인 열방들은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전쟁이 아닌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전쟁을 위한 무기들로 무장한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곡식이 익었도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등의 표현은 열방을 향한 심판의 때가 찼고, 이들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곡식을 수확하고, 익은 포도로 포도즙을 만드는 과정으로 비유됩니다. 전쟁 무기로 무장한 열방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이들은 곡식을 낫으로 베듯이, 포도를 틀에서 짜듯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열방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천군천사와 함께 이들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2, 13).
적용: 열방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이 전쟁 무기로 무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당신의 삶은 어떤 옷을 입고 있습니까?
D. L 무디가 하루는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그의 5살짜리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무디는 그 아들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얼 원하니, 얘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서 들어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루에 앉아서 조용히 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그는 아버지와의 교제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아버지와의 교제를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설 교 >
보습과 낫을 쳐서 칼과 창을 만들라
욜 3:9-13 / 코너스톤장로교회
하나님과 전쟁을 한다면 이길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수 천년 혹은 수 만년의 시간을 준다고 충분히 하나님과 맞서 싸울 전쟁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온 세상에 있는 자원을 다 모은다 한들 하나님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에게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사도 모집하고, 병사들도 소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능한 하나님과 싸우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모집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10절을 보니,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농기구들에 사용되는 철을 쳐서 무기로 바꾸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과 자원을 사용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또,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며 전쟁터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자, 이렇게 모든 열방이 최선을 다해서 전쟁을 준비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아니요 이길 수 없습니다. 12절을 봅시다. “(욜 3:12) 열국은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여호사밧 골짜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인 이방 군대를 물리치신 골짜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한 번 더 사방에서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열국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말씀 한 번만 하시면 온 세상은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싸우려 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항하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이 모습이 13절에서는 추수하는 장면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봅시다. “(욜 3: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밞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추수 때가 되면 농부들이 낫으로 곡식을 벱니다. 이 때 알곡은 곳간으로 거둬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립니다. 따라서 13절에 낫을 쓰는 장면은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포도주 틀을 밟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는 기계로 포도를 짜내어 즙을 얻지만, 예전에는 사람이 직접 발로 포도를 밟아야 했습니다. 이 때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사방에 붉은 포도즙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 모습이 마치 사람이 죽어 흐르는 피와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포도주 틀을 밟는 행위는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비유됩니다. 악인들이 죄값을 치르는 모습이 포도주 틀에서 즙이 넘쳐 흘러나오듯이, 죄인들의 피가 땅 위에 가득 흐르게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혹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습니까? 하나님 보다 더 강한 존재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 중 사망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도 정복하셨습니다. 죽음도 하나님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원수 사탄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결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많은 적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강해 보이는 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 속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 맡겨드리면 해결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두려운 마음을 떨쳐버리고 주님의 강한 용사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모든 원수들을 능히 물리치실 주님을 신뢰하며 최후 승리를 주실 주님을 찬양하며 어떤 문제나 상황 앞에서도 담대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 두려운 여호사밧 골짜기
욜 3:9-13 / 박봉수 목사
요엘서는 그 분량이 3장 밖에 안 되는 짧은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책입니다. 그 이유는 요엘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요엘이 살던 시대가 언제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쓴 목적과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학문적인 연구가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으려 할 때는 그렇게 어렵지가 않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예언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엘은 2:28-29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이 예언은 베드로가 행 2장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한 것처럼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음으로 요엘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대표적으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이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을 말합니다.
요엘은 앞부분에서 먼저 이스라엘백성이 겪었던 메뚜기 재앙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언약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메뚜기 재앙보다 훨씬 더 극심한 재앙들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재앙이 임하는 날이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예언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신 뒤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초림하시기도 전 몇 백 년 전에 이미 요엘 선지자가 예수님의 재림 뒤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예언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된 아주 특별한 장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로 여호사밧 골짜기입니다.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않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그러니까 여호사밧 골짜기는 심판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사밧 골짜기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장소를 말합니다. 앞에서 여호와의 날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를 말한다면, 이 여호사밧 골짜기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예언을 종합해서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그 날 즉 여호와의 날에 주님께서 심판 받을 자들을 여호사밧 골짜기에 모아놓고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여호사밧 골짜기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구약이나 이스라엘역사를 살펴봐도 여호사밧 골짜기라고 불렸던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오랜 세월동안 있어왔습니다.
우선 대하 20장 사건을 중심으로 이 여호사밧 골짜기가 브라가 골짜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사밧왕 시절 암몬, 모압, 그리고 에돔이 연합군을 이루어 남왕국 유다를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왕은 자기들에게 저들과 맞설 힘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뜻밖의 명을 내리셨습니다. 찬양대를 앞세워 전쟁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왕은 그 명을 따라 찬양대를 최전방에 내세워 전쟁에 임했습니다. 놀랍게도 적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어갔습니다. 여호사밧왕이 승리한 뒤에 그 골짜기의 이름을 찬송의 골짜기라는 뜻의 ‘브라가 골짜기’라고 지었습니다. 이곳이 예루살렘 동편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이 브라가 골짜기는 작고 좁은 골짜기입니다. 이곳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가 없습니다. 특히 심판 받기 위해 모여야 할 이방인들의 수를 생각해 보면, 여호사밧 골짜기는 당연히 이곳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골짜기는 실제의 지명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골짜기라는 뜻의 상징적인 이름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사밧이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여호사밧은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상징적인 공간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사밧 골짜기는 실재하는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그 어떤 곳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호사밧 골짜기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심판을 믿으라
요엘서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예언하는 책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날이라는 시간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 골짜기라는 장소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시간과 장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구체적 사건으로 일어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히 9:27에는 이렇게 못 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게 되어있는 것처럼 죽은 뒤에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지만 죽음 뒤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죽어봐야만 확인할 수 있는 일이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이런 일은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창 6장을 보면 하나님께 이 세상을 심판하신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세상에 인간의 죄악이 가득하고, 인간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심판을 결심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120년 뒤에 홍수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의 모든 인간과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모든 생물을 다 죽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셔서 이 심판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홍수심판을 면할 길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방주를 짓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행히 노아와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장차 홍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믿고 방주 짓기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우선 저들은 노아가 말하는 홍수심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그런 홍수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상식과 당시 그들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온 세상이 물로 뒤덮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12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이와 비슷한 홍수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세상 사람들은 노아와 그 가족들을 조롱했습니다. 긴 세월 방주 짓는 일에 몰두하는 저들을 미쳤다고 손가락질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에 관한 말씀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상식으로 그리고 과학적 지식으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심판을 말하면 조롱합니다. 그리고 심판을 대비하는 삶을 살면 광신자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오늘 실제로 우리가 그런 일을 겪고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조사해 보니 성경에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경고가 무려 1500여회가 기록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약에만 318회가 기록되어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직접 심판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 13:40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재림하셔서 친히 심판하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 요엘의 말로 여호와의 날에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주님의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친히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심판을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고 기록하고 이것을 고백해왔습니다. 마치 노아처럼 세상사람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약속의 말씀을 믿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고백하십시다. 장차 여호와의 날에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판을 대비하라
이솝우화 가운데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그리스 원전에는 [개미와 매미]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번역과정에서 매미가 베짱이로 바뀐 것입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무더운 여름 동안 개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매미는 나무 그늘에서 노래만 부르고 놀기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다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지나자 매미는 굶어 죽게 됐습니다. 할 수 없이 개미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개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름에는 노래를 했으니 겨울에는 춤이나 추렴”
이 우화는 만고불변의 교훈을 줍니다. 겨울이 올 것을 알고 여름이 미리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겨울이 앞으로 닥치게 될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말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장차 여호수아 골짜기에 서서 받게 될 심판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심판이 있음을 믿는다면 그 심판을 잘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첫째,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심판을 받는 자들은 이방족속들입니다. 특히 3: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족속들을 여호사밧 골짜기에 모으셔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사밧 골짜기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고 이방족속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사밧 골짜기에 서서 심판을 받을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 5:24에서 이 말씀과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면 영생을 얻었을 뿐 아니라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심판의 과정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심판에 대한 말씀이 성경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해져서 복잡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우선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아직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되어 심판대 앞으로 나옵니다. 이 때 생명록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과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두 부류로 나뉩니다. 마 25장을 보면 심판주이신 재림하신 주님 오른편에 양과 같은 믿는 이들이, 그리고 왼편에 염소와 같은 믿지 않는 이들이 서게 됩니다.
여호사밧 골짜기는 바로 이 왼편 염소와 같은 불신자들이 불려나갈 곳입니다. 여기서 행위의 책에 기록된 죄 대로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골짜기는 두려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각자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게 되고 형벌이 정해지고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믿는 이들은 다른 곳에서 그가 한 일에 따라 상을 받고 천국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 믿어 생명록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이 여호사밧 골짜기로 불려나가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좋고 믿지 않아도 별 일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저 두려운 여호사밧 골짜기로 불려나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형벌이 정해지고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이 여호사밧 골짜기에 불려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상도중앙교회 모든 교우들이 단 한 사람도 이곳으로 불려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가운데도 이곳으로 불려나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 죄를 멀리하라
마 7:21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스스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주를 부른다고 다 심판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갈 5:9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죄라도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면, 시간이 흐른 뒤에 공동체 전체를 죄로 뒤덮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죄가 전염성이 강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판을 면하려면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코로나19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생활 속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입니다. 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목표는 감염 걸린 사람과 감염되지 않은 사람 사이의 접촉 가능성을 감소시켜, 질병의 전파를 늦추고 궁극적으로 사망률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개인 또는 집단 간 접촉을 최소화하여, 감염병의 전파를 감소시키는 공중보건학적 감염병 통제 전략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죄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접촉 가능성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가 만연된 조직이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최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죄로 가득한 환경에 나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도 최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코로나 감염을 피해야 하듯이 죄를 멀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잘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그 끝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길은 이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죄사함 받고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멀리 하며 살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죄 짓지 않으려 해야 하고 연약하여 죄를 범했을 때 속히 회개하고 죄를 씻어내야 합니다.
여호사밧 골짜기, 죄인이 심판 받는 그 두려운 자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그 자리에 서지 않도록 힘쓰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