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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은 질병이 발생하고 전파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재생산되고 가공되고 상상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역이라는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전염병의 복잡한 동학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염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아내는 것만큼 중요하다.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지적 욕망 혹은 헛된 신념이나 선입견이 전염병과 그로 인한 위기를 증폭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p. 6, 들어가며)
템스강은 런던을 동서로 관통하여 북해로 흐르는 강으로 런던 대부분 지역의 상수원 역할을 했다. 강은 산업혁명 이후 철강, 화학, 석탄, 방직 산업 등의 폐수에 의하여 심하게 오염되었고, 인간과 동물의 분뇨, 도살장 폐기물, 병원과 가죽 공장의 악취 나는 오물, 때로는 시체 등의 도착지였다.42 런던의 빈약한 하수도는 각 가정에서 버린 오물로 가득한 긴 배관에 지나지 않았고, 오물이 자주 막혀 정기적으로 파내야 했다.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스강은 구역질 날 정도로 악취가 심했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는 템스강에서 런던 주민들은 빨래하고 목욕하며 식수를 얻었다.43 콜레라가 퍼져 나가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p. 16, 제1장 제국주의와 함께 온 콜레라, 콜레라가 만든 근대 도시)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원초적인 공포의 대상이다. 질병의 발생은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질병에 대한 반응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공포와 불안감을 느낀 대중은 “불안의 원인을 누가 제공했는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를 묻고, 공포를 제공했다고 간주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배척하며 단죄함으로써 위험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사람들은 위험을 심각하게 인식할수록 문제를 선과 악으로 이분하고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여 자아의 경계 밖에 위치시킨다. 위험이나 공포 상황은 타자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감을 증폭시키고 그들을 경멸하거나 공격하는 계기가 된다. (pp. 44~45, 제2장 장티푸스보다 빠르게 번지는 혐오)
메리는 아일랜드 이민자이면서 여성이었기에 미국에서 언론을 통해 지나치게 노출되었고 심각한 인권 침해에 시달렸다.44 편견은 어떤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차별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차별은 정상과 일탈(비정상)의 경계를 설정하기 위한 일종의 권력적 기술로, 대부분 원칙적으로 편견을 가진 이와 차별받는 대상 간에 존재하는 권력의 불균형에서 기인한다. 특히 인종, 계급, 젠더와 같은 차별 요인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보다 서로 결합할 때 그들을 향한 편견과 차별은 더욱 부끄러움 없이 그 폭력성을 드러낸다. (p. 67, 제2장 장티푸스보다 빠르게 번지는 혐오)
중국은 코로나19 발생의 책임을 물을 최적의 대상이었다. 언론은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첫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도를 하면서 코로나19 발생이 중국인의 비위생적이고 미개한 식문화 때문이라고 했다. 서구인들은 중국인, 나아가 아시아인에 대해 불쾌감과 혐오감을 드러냈고, 건강한 자신들을 감염시키는 보균자로 간주하면서 경멸하고 회피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세계화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은 서구와 경제적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세계 최대 외환 보유고를 가진 중국을 파산 상태의 서구 경제를 살릴 구원 투수라고 봤던 관점이나 떠오르는 중국의 경제 성장이 서구 사회를 위협할 수 있다는 중국 위협론 모두 적어도 중국의 물리적 힘에 대해서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로나19에 대한 공포는 중국 책임론과 중국을 향한 공격으로 쉽게 옮겨 갔다. (pp. 94~95, 제3장 코로나바이러스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읽다)
미국이나 영국 등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1918년 봄에 발생한 인플루엔자 대유행을 보도하지 않도록 언론을 엄격히 통제했다. 그렇지만 당시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던 스페인은 인플루엔자 독감 유행 상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로 인해 최초의 환자가 스페인에서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스페인독감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p. 117, 제4장 공포만큼 크지 않았던 혐오, 스페인독감)
인류는 스페인독감을 겪으면서 중세 때처럼 전염병 공포에 떨었다. 세 차례 유행하는 동안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인종이나 계급과 무관하게 사람들을 감염시켰다.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았다. 인종과 국경도 따지지도 않았다. 인플루엔자는 평등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사망률은 달랐다. 기존 인플루엔자바이러스에 접촉한 경험이 거의 없었던 알래스카의 고립된 마을이나 아프리카 밀림 지역의 사람들은 매년 바이러스에 노출된 인구 밀집지역의 사람들보다 면역력이 떨어져 훨씬 취약했다. 실제로 알래스카에서는 독감에 걸린 한 명의 우편배달부로 인해 이누이트 주민들 대부분이 사망한 마을도 여럿 있었다. 아프리카의 어떤 마을은 스페인독감으로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다. (p. 129, 제4장 공포만큼 크지 않았던 혐오, 스페인독감)
미군 부대에서 첫 환자가 발생했음에도 미국에서는 인플루엔자의 발원과 확산의 주범으로 이민자 집단을 지목했다. 언론이나 학계는 발생 책임을 미국의 주류 백인 사회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였던 빈민이나 외국의 이민자에게 돌리기 위한 근거를 샅샅이 찾았다. (p. 130, 제4장 공포만큼 크지 않았던 혐오, 스페인독감)
퀴닌 덕분에 아프리카 내륙에 진출하게 된 유럽의 제국들은 효과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말라리아 방역이 필요했다. 영국의 군의관이었던 로스는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의 아노펠레스 모기 서식처를 빨간 점으로 표시했는데, 그 결과 중앙 고지대를 제외하고 동서 양쪽으로 펼쳐진 저지대에 모기가 골고루 서식하는 것을 확인했다.
영국 식민성은 그의 발견을 근거로 1904년에 말라리아 위험이 적은 프리타운 고지대에 백인 주거 전용 지역인 힐스테이션을 건설하고, 말라리아 위험이 많은 저지대를 토착민의 거주지로 구분하는 거주지 분리 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힐스테이션과 저지대인 평지를 연결하는 고산 철도를 부설해 백인 정착과 원주민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pp. 142~143, 제5장 전 지구적 질병에서 열대 풍토병으로 변한 말라리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보니화가 끝난 1939년, 새로 개척된 폰티네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농사를 지었고 소와 양을 키우면서 최고급 치즈도 만들었다. 이 지역은 농ㆍ축산물 생산지로 변모했고 말라리아도 사라졌다. 말라리아 근절보다는 빈곤 퇴치에 더 무게를 두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습지를 개간한 결과 말라리아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다. (p. 146, 제5장 전 지구적 질병에서 열대 풍토병으로 변한 말라리아)
제약 기업이 말라리아 백신 개발에 관심을 꺼 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약을 살 수 있는 소비자 집단의 부재였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생활 환경이 개선되면서 말라리아 백신 수요가 감소했고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가난한 환자들의 경우 비싼 말라리아 약제를 살 수 있는 여력이 거의 없어 판매 시 이윤이 남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약 기업은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들면서도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말라리아 약제 개발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냈다. 대신 그다지 까다롭지도 않고 비용도 상대적으로 덜 들면서도 선진국의 부유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고혈압이나 당뇨병 약제 개발에 우선 투자했다. 빈곤한 국가는 예산 부족으로, 제약 기업은 이윤 부족으로, 국제 사회는 관심 부족으로 말라리아를 오랫동안 외면했다. (p. 152, 제5장 전 지구적 질병에서 열대 풍토병으로 변한 말라리아)
빌앤드멀린다게이츠 재단과 같은 민간 기업은 자선 활동에 참여하면 좋은 평판과 대중의 존경을 얻어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하여 정부의 보호, 반경쟁적 관행, 유리한 법적 대우를 받아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 민간 기업의 자선 활동은 그 기업에 대한 증세 요구를 잠재우고, 기업에서 재단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금 운용의 투명성은 저하된다. 이는 부의 재분배를 위한 복지 정책에 쓸 세수가 감소하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자선 기부금 대부분이 저소득층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민간 기업의 자선 활동은경제적 불평등이나 빈곤 해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 불평등과 종속성을 강화했다. (pp. 168~169, 제5장 전 지구적 질병에서 열대 풍토병으로 변한 말라리아)
결핵에 대한 인식도 빈부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사람들은 부유한 환자의 결핵을 두고 결백한 사람이 겪는 불행이라고 안타까워했고, 가난한 환자의 결핵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위생 관념이 없어서 자초한 재난이라고 비난했다. 부유한 결핵 환자에게는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이 필요하다며 위로를 건넸고, 가난한 결핵 환자는 병균을 퍼트리고 다니기에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배제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핵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지만, 사회는 부유한 결핵 환자와 가난한 결핵 환자를 상이한 시선으로 보았다. 물론, 시선뿐 아니라 치료에도 차이가 존재했다. (p. 183, 제6장 구소련과 함께 붕괴된 결핵 방어선)
이후 서구 유럽과 북미에서 결핵이 개인적 질병을 넘어 사회적 질병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빈곤한 사람에게 만연했던 결핵이 부유한 사람에게 전염될 것을 걱정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빈곤한 사람을 위한 결핵 요양소를 설립하자는 주장이 나왔다.13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은 공중보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결핵 환자로부터 부유한 상류층을 보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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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전염병은 왜 계속 새롭게 발생할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도 왜 쉽게 종식되지 않을까?
끝나지 않는 전염병 시대, 지리적 분석으로 해답을 제시하다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말라리아, 에볼라바이러스, 에이즈, 코로나바이러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지역에서나 전염병은 예측 불허한 순간에 세계를 습격한 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19는 이제 4~6개월 주기로 변이와 재유행을 반복하며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상하수도 시설과 쓰레기 처리 시설이 미비하던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구 문명이 고도화되어가는데도 새로운 전염병은 왜 계속 나타나는 걸까? 과학과 기술이 이렇게나 빠르게 발달하는데도 병의 종식은 왜 예전과 다름없이 어려운 걸까? 우리는 언제쯤 전염병이 뒤흔드는 삶을 회복할 진전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전염병의 원인은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문제로 여겨졌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발견되었을 때도 발생 지역의 식문화가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올랐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들이 에이즈에 쉽게 걸린다거나 빈곤한 지역의 위생 관념이 전염병의 온상이라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은 전염병이 발생하는 이유를 환경과 개인위생 문제에서, 해결 방법을 과학과 기술에 기대어 찾아온 지금까지의 관점으로는 늘 뒷북을 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전염병을 제대로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해답을 제시한다. 개개인의 삶을 가로지르는 지리적 연결망과 건강 불평등 지도에 주목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모두가 안전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안전할 수 없다”
세계 보건의 핵심 키워드, 건강 불평등
지리적 연결망을 중심으로 전염병을 살피면 병의 경로가 보인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퍼져나가는지, 왜 지역마다 피해 규모가 달라지는지, 같은 지역에서 확산되더라도 왜 어떤 이에게는 비교적 가볍게 지나가고 다른 어떤 이에게는 치명적인지를 추적하면 “질병은 지역 내에서 행위자들 간의 권력관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려 주는 지표”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주지했듯 전염병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곳을 무너뜨리며 시작된다. 고령자, 어린이, 주거 환경이 열악한 사람들, 진단비나 마스크 구매 비용이 부담스러운 사람들,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사람들, 아파도 일을 쉴 수 없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되었고 타격을 입었다. 국가 단위로도 피해 정도가 달랐다. 부유한 국가가 인구의 2~3배에 다다르는 백신을 쌓아놓는 동안 가난한 국가는 극심한 유행을 겪었다. 전염병은 의도를 가지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퍼지지만 개인이 누리는 안전망과 삶의 기회에 따라 피해 정도는 균등하지 않다는 것을 지난 3년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58Rejg0WvI
전염병이 건강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현상은 새롭게 발견된 사실은 아니다. 부유한 국가에서는 이미 사라지거나 대수롭지 않은 질병이 된 말라리아는 빈곤한 지역에서 여전히 많은 사상자를 낸다. 공기 좋은 곳에서 충분한 햇빛을 쐬며 쉬는 것이 치료 과정으로서 권장되던 결핵은 한때 부유한 이들에게만 회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계급적 질병이었다. 치료 약이 상용화되며 더는 ‘죽을병’이 아니게 된 에이즈 역시 치료제 개발 초기에는 비싼 약값으로 서구와 아프리카 대륙 사이 사망자 수가 크게 차이 났다.
새롭게 주목해야 할 사실은 지구적 이동과 접촉이 전에 없이 잦아진 지금, 전염병이 건강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건강 불평등이 전염병의 유행을 심화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유한 국가가 인구의 2~3배에 달하는 코로나 백신을 쌓아놓는 사이 백신이 부족했던 가난한 국가에서는 유행이 심각해졌고, 그 과정에서 전파력이 더욱 커지고 기존 백신의 면역을 회피하는 델타, 오미크론 변이가 발생해 다시금 세계적인 유행이 일어났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백신이 빠르게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평등하게 안전할 수 없다면 결국 아무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전염병이 뒤흔든 세계, 극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인류를 습격한 전염병의 역사 속에서 ‘사회적 백신’을 구하다
건강 불평등이 세계 보건의 중요한 열쇠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 책은 질병의 불균등한 지리적 분포는 물론 질병 이면의 권력관계와 체제, 지역이 가져다주는 삶의 기회와 그 기회에 영향을 미치는 시장, 제도, 정치 규범, 문화 자산을 포괄적으로 살핀다.
콜레라와 장티푸스의 사례를 다루고 있는 1, 2장은 전염병이 어떻게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편견이나 혐오 그리고 차별을 증폭시키는지, 그리고 반대로 이러한 기존의 차별 의식들이 전염병 확산과 피해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중점적으로 분석한다. 코로나19와 스페인독감, 말라리아를 다루는 3, 4, 5장은 서구에서 발생하거나 크게 확산된 전염병 사례들에서조차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편견으로 인해 비서구가 사태의 원인으로 왜곡되는 상황을 다루며 전염병이 어떻게 서구와 비서구를 구분 짓는 허위 의식을 만들어왔는지를 보인다. 또한 ‘전염병 퇴치’가 아닌 ‘빈곤 퇴치’에 초점을 두는 방식으로 전염병 종식에 성공한 사례를 통해 세계 보건을 위해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짚는다. 결핵과 에볼라바이러스를 다루는 6, 7장은 냉전의 해체 이후 급속히 전개된 세계화가 특정 지역에서의 전염병 발생을 초래하며 이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개입 방식과 정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신자유주의 이후 생산 체제와 규모가 바뀌고, 고용 구조가 유연화되고, 국가의 역할과 개입 및 통제가 최소화되며 빨라진 전염병의 확산 속도와 세계보건기구로 대표되는 세계 보건 거버넌스의 대응이 건강 불평등의 지리적 양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알 수 있는 장이다. 8, 9장에서는 에이즈 환자의 건강권과 글로벌 제약 회사의 이익이 충돌한 사례, 코로나19의 국가별 방역 사례를 통해 세계 여러 국가가 전염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민단체와 그들 간의 초국적 연대가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 정부의 정책 선택과 집행 능력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준다.
“지역은 전염병이 발생하고 전파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재생산되고 가공되고 상상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역이라는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전염병의 복잡한 동학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염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아내는 것만큼 중요하다.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지적 욕망 혹은 헛된 신념이나 선입견이 전염병과 그로 인한 위기를 증폭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지역 간 건강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건강 불평등의 원인을 개인적 행동 습관으로 보느냐, 지역의 환경으로 보느냐, 혹은 사회경제적 구조로 보느냐에 따라 원인 파악이 달라지고 해결 방안도 달라진다.”(6p, 「들어가며」)
문화적 편견과 정치·경제·사회적 판단들이 팬데믹 상황에서 전 세계의 안전과 매우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음을 밝히는 이 책은 전염병의 발생과 확산의 요인을 인간의 삶과 분리해 온 익숙한 관점에 비상등을 켠다. 전염병은 생물학적 질병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병이라는 것, 전염병의 발생 원인과 극복 방안은 우리의 생각만큼 단선적이거나 타자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시작이다. 과학과 기술이 언제나 사후적인 대응책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 삶을 실제로 가로지르는 지리적 연결망과 빈곤·불평등 지도를 살피는 일은 어쩌면 전염병 앞에서 우리가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하게 선제적인 대응이라는 점을 이 책은 명료하게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