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백일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중 저수지 위쪽에서
보리가 팬 것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지금쯤 전북 고창 학원농장의 청보리밭에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을 것이다.
가까운 창녕 남지 유채꽃 축제장에도 청보리 이삭이
패었을 터이고.
언제 부터인가 우리 경남지방에서는
보리를 심은 논이나 밭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지금쯤 보리가 팰 시기인데도 보리나 밀은 보이지 않고
마늘과 양파와 봄배추만 보여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6.70년대만 하더라도 이맘 때 들에는 보리 이삭이
바람에 부드러운 물결을 치지 않았던가.
밀밭도 더러 섞여 있었고.
밀가루를 만드는 밀을 대부분 수입하면서도 농민들은
밀 농사도 짓지 않는다.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서 그런가?
해마다 보리 이삭이 팰 때쯤 되면 어렵게 살던 농가에는 식량이
떨어져 갔다.
어린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들에 나가 쑥이나 나물을 뜯어
먹기도 하고,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서 먹기도 하였으며,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죽을 쑤어 먹기도 하였다.
그 어렵던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그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없앤 분이 박정의 대통령이었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갯길
주린 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정동원의 보릿고개 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