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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글이라 예수의 어록은 복음서 저자의 생각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어 작성되었고, 즉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1차적 변개가 일어났다. 이어서 이 글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필사자의 실수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본문에 넣고 싶어서 내용을 의도적으로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2차적 변개가 일어났다. 심지어 후대에는 교회당국이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명확하게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용을 고의로 수정하는 3차적 변개도 있었다. p18
예수는 지금의 거대한 기독교 조직과 교리(원죄론, 천당, 지옥, 구원론, 믿음, 예수신성 등)에 대하여 과연 상상이나 하였을까? 중세 암흑시대의 사상과 문화 억압, 지금도 진행 중인 종교 간 다툼과 학살, 일방적인 선교와 거대 자본화한 대형교회, 물질 추구, 기복신앙, 종교 간 공존거부, 타종교의 구원 부정 등은 예수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p22
성인이 가르침을 주다 보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 외에도, 시공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그러나 당시에는 필요한 도덕적 지침이나 규율, 의식(Ritual) 등을 전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풍토와 풍속에 따라 금기하는 음식이 다를 수 있고 규율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였는데도 아직도 이런 지침이나 규율 혹은 의례를 어기면 마치 큰 죄라도 범한 것처럼 이런 규율에 매여 살아가는 종교나 종교인들이 많다. p30
원죄라는 개념은 성경에 나오기보다는 초대 교부들 시대부터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기독교 교리를 정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신학자들은 이 교리의 주된 성서적 근거로 사도 바울의 저작인 로마서 5장 12~19절에서 찾고 있고, 이것을 창세기 2~3장과 연결시켜서 이해한다. 그런데 예수는 원죄를 말하지 않았다. p44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삼위일체는 예수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제 1회 니케아회의(AD 325, 여기서는 예수와 하느님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선언은 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381)에서 확정된 이론이다. 이 교리는 수세기에 걸쳐 많은 논쟁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되었다. p48
지금 믿고 있는 교회 교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여러 종파 간의 논쟁을 통하여 형성된 정치적 결과물이었다. p55
그리스도 명상공동체의 로렌스 신부는 지옥은 어느 특정한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떨어져나가는 경험이며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바로 지옥에 있다고 말하였다. 지옥은 빛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의 어둠과 부조화 속에서 겪게 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말한다. p66
예수의 동정녀 출생은 예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복음서 저자들의 장치였지만 동시에 그것에는 깊은 상징이 숨겨져 있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하는데 이 성령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p78
성령의 세례는 마음과 의식으로부터 기존의 모든 교리나 신념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왜곡이나 방해 없이 진리에 다가갈 수 있고 진리를 받을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 받을 때 그릇된 오랜 개념이나 생각은 깨끗해지고 과거의 개념에 방해받음이 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p87
인자(사람의 아들/태양)는 예수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신성한 영혼을 상징하기도 한다. p95
유대인들은 물질에 불과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집착이 무척 강하였고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성전에서 양을 잡아 신에게 공물로 바치는 것을 즐겼다. 예수는 이런 외부 의식을 거부하고 각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신에게 예배드릴 것을 전파하였다. p101
참된 기도는 명상을 통하여 내면의 성소(聖所)인 송과선에 몰입하여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참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조화롭지 못한 생각을 제거하여 의식 속에 완전한 평화와 조화만을 유지하여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마음속에 침묵이 자리 잡는다. 이렇게 되면 신과 동조가 되어 기도가 응답되어진다. p134
성소와 지성소에는 중요한 상징이 숨겨져 있다. 이 상징을 이해 못하면 예수가 전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 비의 가르침에서는 상징적으로 우리 몸은 사원이고 머리의 3뇌실이 성소, 영혼이 거주하는 송과선은 지성소로 본다. 그리고 이 지성소를 신방으로 부른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영혼과 신의 합일이 일어나서 신과 하나 즉 구원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p136
예수는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유사한 구절이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온다.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명령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라. 다만 너희들 자신이 충만하게 되어야 들어갈 수 있노라. p150
진정한 회개와 구원은 무엇일까? 구약을 신비적으로 해석하는 카발라 사상에 보면 인간의 회개는 우주적 차원의 복귀 과정이고 구원은 신에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신의 피조물로서 천국에 거주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신과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p176
하느님은 우리의 개념으로 한정지울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존재이나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원래의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기독교의 하느님, 영지주의자의 하느님, 카발라의 하느님, 한국 정통 신앙에서의 하느님 등은 모두 참 하느님을 한정시키는 이름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이름에 속는다. 참된 이름은 이 세상에 아니라 이 세계 너머의 영원한 영역에만 있다. 개념을 넘어서라는 말이다. p207
예수는 믿음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권위에 대한 믿음은 아니다. 무엇을 신뢰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완전한 앎을 의미한다. 완전한 앎 속에 믿음이 생기고 전적인 신뢰가 일어난다. 앎이 없이 믿는 것은 참된 믿음이 될 수가 없다. 믿는다는 것은 앎을 바탕으로 한 확신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신과 예수 그리고 우주법칙에 대한 앎이 없는 맹신이다. p222
물질계의 삶과 죽음은 반대 개념이 아니라 푸른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 사라지듯이 그렇게 이 환영의 세계에서 일어나서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는 물결일 뿐이다. 물질 삶과 죽음의 반대는 영적으로 깨어남이다. 환영의 세계인 물질계를 넘어선 사람은 삶과 죽음을 넘어선 것이며 근원과 합일되어 영원히 존재한다. p227
영의 세례는 진리의 세례로 우리의 그릇된 개념을 정화하여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영의 세례처럼 영의 할례도 영혼을 가리는 어둠을 제거하여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p237
하늘나라는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만 뜨면 우리 마음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고 이 자리에 바로 펼쳐져있다. 무지한 사람들은 햇살이 찬란히 비치는데 눈을 감고는 사방이 어둡다며 어디에서 빛을 볼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 p269
혼인에는 3단계가 있는데, (1)남녀의 육체적 결합, (2)외적 자아와 영혼의 결합, (3)영혼과 신의 결합이다. 이것은 남녀 영혼의 분리,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의 분리, 신과 영혼의 분리의 반대개념이다. 이처럼 혼인은 신비스러운 의미가 숨겨있다. 우리 모두는 신방에서 영적인 결혼을 통하여 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p275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예수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뜻을 지닌 보통명사로 깨달은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깨달은 자를 “붓다”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 지금은 그리스도가 거의 예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그리스도는 깨달은 자에게 사용될 수 있는 보통명사이다. ?석가모니 붓다처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p302
예수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가 전하는 진리를 통하여 깨달은 사람은 어떤 외부적 조건(재산, 직위 등)에서도 평온을 유지하나, 세속적인 성취나 집착을 통하여 얻게 되는 물질적 평화는 그 외부조건만 사라지면 쉽게 사라지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주는 영원한 평화와 물질이 주는 일시적 평화는 천지 차이이다. p342
빌립 복음서 19절은 가장 주목 받는 구절 중 하나이다. 이 내용은 정통 기독교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글이다. 부활은 영혼의 신성 불꽃이 살아나서 신과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하고 예수는 늘 그런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육체가 죽고 나서도 부활할 필요는 없었다. 성경에 보이는 죽은 후 부활은 단지 인류에게 교훈, 즉 자신처럼 누구나 죽음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극적 장치였다.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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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성경이고 가장 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는 종교가 기독교이고 오늘날 세계를 이끄는 주도적인 나라 상당수가 기독교 국가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인류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기독교 영향력을 생각하면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운명과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인류 문화와 인간 사고를 지배하는 기독교 교리에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운명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그래서 기독교 창시자인 예수와 예수의 말씀이 담긴 성경에 대한 학술적이고 이성적인 탐구는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 어록이 담긴 4복음서는 신뢰할 만한가?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인가?
예수는 하느님 아들인가?
생전에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던 바울이라는 사람의 신앙고백이 담긴 바울 서간문은 진실을 담고 있는가?
후대에 교부들이 완성한 대속론, 원죄론, 예수 신성론, 사후론 등은 예수의 가르침인가?
후대에 작성된 정경목록은 근거가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질문을 떠나 가장 결정적인 질문인
예수의 가르침은 진리인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느님 아들이란 이유로 그분이 남긴 어록만이 아니라 제자들이 남긴 신앙 고백 문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 생전에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던 바울이라는 사람의 편지글이 정경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런 현실을 우리는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바울이 편지글에서 주장한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신이 의롭다함을 우리가 얻음, 즉 믿음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 논리가 기독교의 기본교리(원죄론, 구속론, 예수 신성론)를 형성하고 이 교리가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바울을 따르는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셨으므로 오직 예수만을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예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구원의 주제는 교회를 있게 하는 핵심 교리이다. 이런 논리 때문에 다른 종교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아서 많은 갈등이 생겨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독단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는 한 번도 인간의 죄를 갚기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이었다. 당시에는 누구든 자신이 이해한 예수를 그려낼 수 있었고 예수에 대하여 바울과 다른 견해를 펼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바울의 주장만 살아남았다.
? 또한 우리의 관심은 예수의 어록이 담겨있는 4복음서가 과연 우리가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경전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의 진위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어왔고, 성서학자들은 성경 왜곡
(내용 변경, 첨부, 삭제 등)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는 성경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예수는 4복음서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교회 교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는 직접적으로 원죄론도, 동정녀 성모 마리아론도, 보혈을 통한 구원론도, 연옥도, 삼위일체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대에 교부들이 주장한 내용이고 이런 내용의 상당 부분은 바울의 사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란 말을 하는 학자들도 상당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9y3kXA5oiBk
4복음서 저자들은 전승 자료를 가지고 자신의 시각으로 새로운 예수를 만들어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려는 저자들의 시도였다. 그들은 극의 시작인 초반부에 예수 가계도를 화려하게 꾸미고 세례요한을 통하여 예수가 예정된 메시아임을 밝히려고 하였다. 예수의 구체적 행적이 나타나는 시기부터 공관 복음서는 공동 전승 자료를 각자의 취향에 따라 순서를 배정하고 경우에 따라 내용이나 단어에 변화를 주었으며 그 결과 각자의 독특한 복음서가 나왔다. 구약의 예언 성취를 바란 마태복음서는 좋은 예이다. 예수 행적과 언행이 담긴 자료는 단편적이고 지금 복음서에 전해지는 예수 자료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실제로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어록은 극히 적은 분량이고 그것도 일반 대중을 위한 수준 낮은 비유적 설명이 대부분이다. 이런 한계를 지닌 복음서지만 그래도 정경 중에서는 이 4복음서가 예수의 진짜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책에서는 예수의 어록이 담긴 4복음서를 해석하면서 과연 바울이 주장한 내용이 예수의 가르침인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놀랍게도 4복음서에는 바울의 사상(신성론, 구속론, 원죄론)은 거의 나오지 않고 오히려 구원의 방법으로 믿음이 아닌 영지(진리)를 통한 신과의 합일 혹은 신에게로 귀향을 주장하는 영지주의 가르침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울 서간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바울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누가가 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신비 체험이나 바울 자신이 쓴 ”갈라디아서“의 기록은 바울의 주관적인 주장이거나 다분히 환상적이고 자기최면적인 사건에 대한 서술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준에서 예수를 평가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이것이 바울 서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정경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우리가 이것을 금과옥조처럼 받들 필요도 없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예수에게 던진 질문, 바울은 누구입니까?”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이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면 여기서 4복음서에서 드러나는 영지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주요 종교는 어김없이 수준 낮은 일반 대중을 위한 현교와 수준 높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비밀가르침(밀교)으로 나뉘어 존재해 왔다. 불교의 밀교는 티베트 밀교이고, 유대교의 밀교는 카발라이고, 이슬람의 밀교는 수피즘이고, 기독교의 밀교는 영지주의이다. 그리고 이 영지주의가 바로 예수가 소수의 제자들에게 전한 비밀가르침이다.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니케아회의(325년)를 통하여 예수 교리가
하나로 일원화될 때까지 기독교는 수많은 종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지금 우리가 따르는 기독교는 여러 종파 중 살아남은 종파의 교리이고 패배한 종파 문서는 거의 파괴되었다. 파괴된 문서 상당수가 영지주의 작품이었다. 영지주의는 예수가 준비된 제자들에게 전한 비밀 가르침으로 믿음이 아닌 영지지식을 통한 구원을 주장했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사라졌던 영지주의 문헌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이것은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 비밀 가르침인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은 율법 엄수나 믿음이 아니라 영지(앎)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영지주의가 기독교의 주류가 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만나는 대속론이나 원죄론, 천국론 등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4복음서에는 영지주의 내용이 비유와 상징으로 어느 정도 남아있다.
우리는 영지주의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예수의 원래의 가르침과 너무도 달라진 가르침이 진리로 받아들여져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는 현실은 더 이상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살아남은 영지주의 복음서에 대한 소개는 하모니 출판사에서 나온 “영지주의 복음서와 카발라”를 참고하기 바란다.
4복음서 저자가 자신의 믿음과 신앙에 근거하여 복음서를 만들었듯이 필자 또한 카발라와 영지주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해한 예수를 보여주기 위하여 4복음서를 하나로 정리하여 새롭게 해석하였다. 그래서 휘황찬란한 예수가계도는 무시하였고, 동정녀 출생은 상징으로 이해하였고, 마태복음에서 자주 언급되는 예언의 성취를 증명하기 위하여 인용된 구약 구절은 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대신에 예수의 말씀에 숨겨진 상징을 영지주의적인 시각에서 해석하였다. 바울 신학으로 4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해석하면 예수는 없고 바울의 주장만 남는다. 바울의 시각이 아닌 객관적인 눈으로 성경을 보면 지금의 기독교 구원론과는 너무도 다른 새로운 세계가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