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숱하게 공연된 연극 '아일랜드'의 작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인종 격리가 엄혹했던 시절에도 검열에 굴하지 않고 인종 차별을 비판하는 연극을 꾸준히 올린 아톨 푸가드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AP 통신이 10일(현지시간) 전했다. '핏줄'(The Blood Knot)과 '해럴드 아무개 선생과 학생들'(Master Harold… and the Boys)' 등의 작품으로 조국의 인종 시스템이 어떻게 "매일 이어지는 부정의"로 인간성을 뒤틀리게 만드는지 보여줬다.
워낙 고령이라 숙환이 원인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정확한 사망 원인과 일시, 장소, 유족의 임종 여부 등 사망 정황이 알려진 것이 없다.
남아공 정부가 고인의 별세를 확인하며 "위대한 문호이자 연극의 우상 중 한 사람을 잃었다. 그의 작업은 우리 나라의 문화적 사회적 지형을 바꿔놓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게이튼 맥켄지 남아공 체육예술문화부 장관은 “우리는 저주받고 격리됐지만, 그것이 미친 영향에 빛을 비추고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길을 일러준 위대한 예술인들이 있어서 축복받았다. 우리는 이 대단한 남자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고 고개를 숙였다.
고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연극들은 모두 소수 백인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초래한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몇몇 독자들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 작가 자신이 백인이란 점에 놀라기도 한다.
그는 흑인 배우들과 작가들과 협업함으로써 정부의 격리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핏줄'에 이른바 'light-skinned'(백인이라고 쓰기 어려울 때 쓰던 표현) 형제로 출연했는데 이 작품은 여러 인종을 캐스팅한 남아공 최초의 메이저 연극으로 알려져 있다.
푸가드는 정부의 요주의 인물이 됐으며 흑인 극단 워크숍 '서펀트 플레이어스'(The Serpent Players)를 지휘한 뒤 4년 동안 여권을 빼앗기는 수난을 겪었다. 다섯 명의 워크숍 참가자가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정치범들이 수감된 로빈 섬 교도소에 끌려갔다. 푸가드의 가족까지 정부 감시 대상이 돼 편지를 열어보고 전화는 도청됐으며, 한밤중에도 경찰이 들이닥쳐 가택 수색을 하곤 했다.
푸가드는 인터뷰를 통해 아프리카에서 최고의 극장은 남아공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매일 반복되는 부정의와 잔혹함이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도 필적할 곳을 찾을 수 없는 기본 가치들을 깨닫고 생각하며 느낄 수 있는 성숙함을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아파르트헤이트의 폭력을 사보타주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최선의 사보타주는 사랑"이란 말도 보탰다.
1950년 남아공의 찻집에서 일어난 일을 그린 ’해럴드 아무개 선생과 학생들'은 토니상 후보로 지명됐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절정이던 1983년 초연됐을 때 이에 항거했던 활동가 데스몬드 투투(2021년 타계)도 관객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커튼이 내려진 뒤 “여러분이 박수를 치지 않을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는 어떤 것을 말하자면, 우리는 이 나라가 인간 관계에 끼친 것들에 대해 아주 자주 얘기해 왔다”고 말했다.
1980년 잡지 타임은 한 연극 리뷰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의 남아공에서 흑인과 백인 모두를 집어삼킨 "영혼의 빈곤과 뒤틀린 도덕적 에너지의 왜곡을 고발한다"고 했다.
고인은 1932년 6월 11일 반건조기후 카루(Karoo)의 미들버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잉글랜드계 아일랜드로 재즈피아노를 연주하며 즐거워했다. 어머니는 아프리칸으로 네덜란드계 독일 정착민의 후손이었다. 점포를 운영해 가계 수입을 얻었다.
그는 요하네스버그를 처음 찾았을 때 흑인 거주지 소피아타운을 방문했는데 "내 인생을 결정지은 이벤트였다"면서 "사고를 당해 처음 그곳을 갔는데 갑자기 타운십 인생과 맞닥뜨리게 됐다"고 돌아봤다. 소피아타운은 파괴돼 지금은 백인 거주지로 바뀌었다. 이 때의 경험은 그가 글을 쓰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됐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 철학과 졸업을 앞두고 그만 뒀다. “계속 있으면 상아탑에 갇히게 될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는 이유였다.
푸가드의 연극 경험은 1956년까지 학교 연극에서의 연기로 국한돼 있었다. 그 해 그는 배우 셰일라 메이링과 결혼해 극본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와 메이링은 나중에 이혼했다. 그는 2016년 두 번째 아내 폴라 푸리와 결혼했다.
고인은 1958년 요하네스버그 원주민위원회 재판소 서기로 취업한 일이 있다. 그곳에서 인종법을 어긴 흑인들이 "2분에 한 명"꼴로 선고 받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돈이 떨어져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법률 브로커들의 커닝(술수)도 목격했다. "내 인생에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그는 "청구서를 정리하고" 흑인 구금자들의 친구들이 변호사를 구해 올 때까지 절차를 지연시킴으로써 작은 렌치를 넣어 기계가 돌아가지 않게 하는 데 약간의 만족을 얻었다. 인생 후반에 푸가드는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연기와 연출, 극본 집필을 가르쳤다. 그의 1961년 소설을 원작으로 2006년 영화 'Tsotsi'가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등 여러 국제적인 상들을 받았다. 그는 2011년 토니상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더 최근 연극으로는 'The Train Driver'(2010)와 'The Bird Watchers'(2011)가 있는데 두 작품 모두 케이프타우에 있는 그의 이름을 딴 푸가드 극장에서 초연됐다. 배우로서 고인은 영화 '킬링 필드'와 '간디' 등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2014년 그는 코네티컷주 뉴 헤이븐의 롱 와프 극장 무대로 돌아와 자신의 작품 'Shadow of the Hummingbird'에 배우로 나섰다. 15년 만의 일로 고인의 마지막 공적 활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