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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고등학교총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 고신
시골이 경쟁력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동네 꼬마 친구들끼리 몰려 다니면서 즈그들(자기들)끼리 결정하여 방죽으로 목욕하러 가기도 하고 뱀도 잡고 또 미꾸락지나 붕어를 잡으러도 다니고 하였습니다.
우리 동네는 웃동네 아랫동네로 나뉘어 져서 윗동네는 가시나(우리 한해 선배인 YS누나)가 대장을 했는데 언제나 윗동네 아그들은 이 여자 대장을 앞세우고 다녔고 아랫동네는 시바가 제일 쌈도 잘하고 헤엄도 잘 치고 용감해서 항상 대장을 했습니다. 윗동네 애들하고 빠찌 먹기, 깡통 차기, 꽁차기, 다마치기(구슬치기), 길막기 등을 했던 것 같은데 아랫동네 애기들이 더 셌던 것 같으네요.
애기들인 데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경쟁심으로 두 구역간에 항상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었고 아랫동네 애기들이 윗동네 대장을 가시나 대장이라고 조금이라도 무시하거나 말을 안 들었다가는 가시나 대장한테 디지게 얻어 터지기도 했습니다.
읍의 남동리 앞에 흐르는 작은 개울은 작은 냇갓이라고 했고 조금 더 멀리 흐르는 조금 더 큰 개울은 큰 냇갓이라고 했는데 큰 냇갓이나 작은 냇갓(그때는 그렇게 불려 졌었는데 지금 가서 보면 작은 냇가는 없어져 버렸고 큰 냇가라는 곳이 너무 작은 것에 웃곤 합니다)중에서 고기가 많을 것 같은 데를 골라 앞뒤 양쪽을 흙으로 물막이를 하여 양철 세숫대나 바께쓰로 서로 교대 하면서 물을 퍼 냅니다.
물을 거의 다 품어 낼 쯤 되면 붕어하고 미꾸라지가 헤엄 치고 다니는 것이 보이지요.
그러면 물을 품어 내는 바로 뒤쪽에 조그맣게 뻘로 막고 그 중간에 얼멍치를 받쳐 붕어나 미꾸락지(미꾸라지)가 물을 품어 낼 때 같이 휩쓸려 나가지 않게 합니다.
그렇게 물을 품어 내면 붕어는 뻘 속으로 들어 가지 않으니까 손으로 잡고 그리고 나서는 미꾸라지는 물이 없어질 때 뻘 속으로 파고 들어 갔으니까 앞부분부터 뻘을 뒤져 가면서 잡는 데 이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 미꾸라지라는 놈이 손으로 잡아도 미끌미끌해서 잘 빠져 나가버리고 얼마나 뻘 속으로 잘 숨어 버리는지 잘 못하면 놓치기 십상이지요.
이렇게 한참을 잡고 있으면 약간씩 물이 흐르는 냇가를 막아 놓은 것이라서 뒤에 막아 놓은 물막이 흙이 무너지려고 하는데 잡을 고기가 한 참 남아있다면 한 두어 놈이 터지지 않게 흙을 더 쌓거나 손으로 막다가 그것도 영 안되면 몸으로 드러누워서 터지는 흙을 막아 보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빨리 품어 내고 얼른 안에 있는 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상상이 되시지요?
해 본 사람들은 다 웃음이 나올 것입니다.
옷이고 얼굴이고 할 것 없이 온몸이 뻘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즈그들끼리 난리입니다.
“야! 야! 쩌그 터진다. 빨리빨리 잔 막어야! 아이! 두바여! 그 옆에도 물 샌다. 얼릉 흙 떠다가 풀하고 섞어서 단단하게 잔 막으랑께.” 또 한 놈은 “야! 니바야! 니 앞에 대무꾸락지(큰 미꾸라지) 내삔다(도망간다). 거그 안 움직이냐!” “너는 그것도 얼릉 못 잡냐?” “아이! 그 앞에.., 안 배(보여)?”
서로들 소리도 지르고 허둥대기도 하고.., 재미있지요!
그러나 물을 막고 품으면 미꾸라지하고 붕어가 많을 것 같았는데 허리 아프게 물을 다 품고 나서 보면 거의 공탕을 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 있으면 지나 가는 어른 들이 그러지요.
“아그들아! 어지께 섬밖에 아그들이 거그 품었응께 고기가 없윽 것인데?”
또 이른 봄에는 즈그들끼리 고망메로 삐비를 뽑으러 갑니다. 지금 보면 고망메라는 곳이 욕실앞에 있는 아주 작은 언덕배기 산인데 동네에서 한 1킬로 정도 되는 곳으로 고망메에는 삐비가 참 많이 있었습니다. 삐비를 뽑으면서 먹기도 하고 손으로 한 웅큼 잡힐 만큼 뽑아서 오는데, 오다 보면 한 두 마리의 뱀은 틀림없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한 얘가 “야! 쩌그 뱀 있다!” 그럼 그 애는 뱀 에게 손가락질을 하게 되는데 뱀에게 손가락질을 하게 되면 가리킨 손가락이 썩어 들어간다고 하여 방침(예방)으로 침을 택택 뱉고 가리킨 손가락을 땅 바닥에 짚게 하고 앞 발꿈치로 뭐라고 하면서 몇 번?(나이 만큼) 밟아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은 그리(그 곳으로) 깨구락지도 잡으러 갔는데 정말 개구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를 가는 막대기로 딱 후려치면 죽으면서 부들부들 떠는데 잡은 개구리를 돌 위에 놓고 약간 날카로운 돌로 몸하고 다리하고 반 족으로 쪼개서 다리만 껍질을 벗겨내면 풀 꼬챙이에 끼워서 상당한 숫자를 잡아 오는데 저는 그것을 어디에다 팔았던 것 같습니다. 한참 나중에 보니 저의 아랫동네 폰둘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화로를 바깥에다 내 놓고 숯불을 피우고 소금 발라서 구워 먹더군요. 하나 얻어먹어 보았는데 진짜 맛이 좋았지요.
고망메서 오는 길에 생이(상여)집이 일곱이나 여덟 개쯤 있는데 상여 집을 지나갈 때는 꼭 조그마한 돌을 지붕에 던져서
첫 번째 던진 돌이 굴러 내리지 않아야 된다고 하면서 두 번째 던지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했습니다. (어떤
것 때문에 그렇게 해야 된다고 했었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아주 어렸을 때는 작은 방죽으로 또 3학년 이후에는 큰 방죽으로 한 여름이면 동네 형들이나 우리들끼리 목욕을 하러 다
녔는데 떼 빼는 목욕이 아니라 애들끼리 수영을 하러 다니면서, 가다 보면 방죽에서 물 흘러 내려오는 냇가 옆에 산딸기
도 따 먹고 덜 익은 콩도 따서 불 피워서 구워 먹기도 하고, 어떨 때는 길가 쪽으로 남의 밭에 심어져 있는 참외도 몰래 따
먹고 사탕씨씨도 뽑아먹고..,(그러고 보니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수영을 잘 못합니다.
우리 중학교 친구 중에 원두리에서 사는 놈이 있는데 우리가 왕무덤 재에 있는 방죽을 큰 방죽이라 하면 “야! 이게 무슨 큰 방죽이냐!”고 하면서 자기들은 그 큰 명금 방죽을 헤엄쳐서 왔다 갔다 했다고 겁나게 자랑 해 쌉니다. 그래도 우리 어렸을 때는 엄청나게 깊기도 하고 큰 방죽이지요.
또 어떨 때는 진짜로 무서운 독사나 구렁이를 만나기도 하는데 애기들끼리 안 무서워하고 이 뱀을 잡아다가 상거래(삼 거리: 지금 쌍정리)에 갖고 가면 이 뱀을 사는 데가 있어서 그 받은 돈으로 조그만 고무 공을 사 가지고 같이 차고 놀기도 했지요.
떠올려 보면,
어렸을 때는 이놈 저놈 몇 번 돌아 가면서 싸워서 코피 몇 번 흘리게 되면 그 세상 나름대로의 리더가 만들어지지요. 싸
우고 집에 가면 야단을 맞으니까 코피가 났으면 대부분이 옷 소매로 그냥 대충 쓱 문지르고 나서 또 같이 어울리는데,
어떤 애는 싸우고 나면 꼭 자기 어머니한테 일러서 그네 어머니가 쫓아와서 싸운 친구에게 야단을 치는 경우가 있지요.
그때에도 그런 애들은 다음에 같이 놀게 되면 왕따를 시켰으니 우리 어렸을 때에도 이미 왕따가 있었네요.
또 동네에 담 너머로 감 나무도 많이 있고 호도나무, 무화과나무, 살구나무 할 것 없이 꼬마들에게는 좋은 사냥감이지
요. 한 놈은 망 보고, 두 놈은 담 넘어 나무에 올라가서 따서 담 너머로 던져주면 얼른얼른 주어서 주인한테 들키기 전
에 튈 준비를 해야지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그 동네에서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많지도 않은 사람에 어른들끼리는 이
미 다 아는데도 우리 꼬마들은 안 들키고 거사를 치렀다고 우쭐하기도 했습니다.
또 애기들이지만 자기들이 판단해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서로 말리면서 하지 않게 되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면 자기 주장을 떠들어 대면서 관철시키려고 하다가도 일단 아니다라고 결론이 다르게 나면 그 결정에 따르는데 즉 자연의 이치를 깨우쳐 가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지요. 좀 쉽게 표현하려고 하는데 너무 헷갈리면서 어렵게 써지는 것 같습니다. 진도의 옛날 말에 (찰떡<차조떡> 같이 말하면 모떡<모조떡> 같이 알어 들어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 또한 어렵네요.
무서운 곳도 많이 있었지요. 저의 경우는 외가가 쌍정리 인데 저녁에 외가에 뭘 갖다 주고 오라는 심부름을 집에서 자주 시켰는데 가는 길에 친구 집 뒷담 길이 큰 나무도 많고 좁은 돌 담 길이라서 저녁에는 지나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흔히 예배당길이라고 했는데 돌아가는 구석에 있는 소나무에 누가 목을 매달아서 죽었고, 저녁에는 귀신들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모래를 던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윗길로 갈라치면 윤익이 형 집 구루마 집에서 거지가 자다가 얼어 죽었다던가 해서 그 앞으로도 못 가고 저 위에 나무골로 해서 한참을 돌아서 다니고는 했습니다. 무서웠어도 어쨌든 다닌 것은 다닌 것이지요?
저는 요즘 가끔 주변 사람들과 이런 얘기를 합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꼬마들끼리 방죽으로 목욕을 하러 갔다면 택시 타고 안 쫓아 갈 엄마들이 어디 있겠느냐!
또 방에서 바퀴 벌레 한 마리 나오면 기겁을 하고 소리 지르고 하는 요즘 얘들에 비해서 우리 시골 얘들은 지금 생
각 해도 쉽지 않을 것 같은 뱀을 어렸을 때부터 너끈하게 잡고 웬만한 볼가지(벌레)들은 그냥 맨 손으로 잡아서 밖에다
휙 던져 버렸는데 요즘에 이런 일들이 도시에 사는 애들이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요?
저는 아닙니다마는 우리 시골에서는 꼬마들이 그 큰 소를 끌고 논밭둑길로 풀을 먹이러 안 다녔습니까?
요즘 얘들은 좀 힘들겠지요?
이것뿐이겠습니까? 우리 시골 출신들은 저 보다 한참 더 많은 추억거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주변에 우리 시골 출신들은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잘 견디고 알아서 해결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배양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거의 시골 출신이고 거기에다 두 분의 대통령은 섬 출신이 아닙니까?
시골이 경쟁력입니다. 그리고 섬 애기(놈들)들은 더 큰 경쟁력을 가지고 자라고 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겠지요!
아래 미인들은 정말 예쁘지 않습니까? 몸매도 죽여 주지요. 이 그림은 폴란드의 역사적인 도시 크라코프라는 곳에 있는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2001년도에 찍은 사진입니다. 이 그림은 7 선녀도라고 하는데 당시의 폴란드는 공산국가에서 개방되던 참이라 우리보다는 북한과 훨씬 가까웠습니다. 당시에 저를 안내했던 사람이 이 그림은 얼굴은 동양인이고 몸매는 서양 몸매를 그린 것 같다고 하더군요. 북한에서 아주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고 소개를 받았습니다.
제가 저의 설비를 팔고 설치를 하는데 당시 북한에서 와서 공부를 하던 대학생이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는데 절대 사양을 하더군요.
여기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 입구입니다. 이 곳에는 두개의 가스실이 있었는데 그 중 큰 곳은 전쟁이 끝났을때 독일군이 바로 폭파를 하여 허물어진 상태로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사진을 찍는 것이 무척 송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큰 곳은 숙연하게 지나쳤고 그나마 이곳은 적은 규모로 내부를 보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수용소의 원형이 이곳입니다. 이 중 철조망이 쳐져있는데 도망을 할 수 없도록 고압 전류를 흐르게 했다고 합니다.
크라코프에 있는 예날 왕궁입니다. 이 나라의 수도는 바르샤바인데 역사적으로는 훨씬 많은 유적이 이 도시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조그만 돔형 지붕에서 하나는 금으로 씌워져있는데 2차 대전때에 독일군이 알지 못하도록 다른 색상을 칠 해 놓았었다고 하더군요.
우리에게 용은 대단히 경외스러운 상상속의 동물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길한 동물이죠. 그러나 서양인들의 용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들 용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무서운 동물입니다. 서양의 용인데 입으로 불을 뿜어 낼 수가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체코비체라는 작은 도시입니다. 바람 부는 날인데 말도 통하지 않음에도 열차를 타고 아우슈비츠를 찾아 가 보겠다고 용감하게 나섰습니다.
이 도시에는 아주 멋진 정원을 가진 성이 있었습니다. 이 성 안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커다란 규모의 뮤직 홀이 있어서 음악 감상과 춤을 출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에는 각종 인물화들이 벽에 걸려 있어서 역대 내려오는 성주나 왕비들의 초상화가 잘 보관되어 있었고 각종 무기 그리고 그들이 사냥했던 커다란 사슴머리가 박제로 수백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저의 손님들이 처음 한국에 올때 가져다 준 그림인데 제가 갔을때 직접 그림속의 건물을 위의 사진과 같이 보았습니다. 저희 회사의 벽에 걸려있는데 아주 조그맣고 정이 가는 그림입니다.
이 건물은 Salt miner(소금 광산)을 들어 가는 입구의 건물입니다. 밖의 건물은 그리 크게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 정도 밑으로 내려 가게 되는데. 안쪽은 우리가 보는 개미 집 형태로 다닥다닥 길이 나 있습니다. 안쪽에는 괴장히 큰 홀도 있는데 우리의 장충 체육관 보다 더 넓은 홀들이 있습니다. 소위 바위소금(암염)을 캐고 난 후의 자죽들이지요. 300년 전부터 소금을 캐 왔다고 하니까 대단한 역사입니다. 뚤려진 길의 거리만 22킬로 미터가 된다고 들었는데 제 기억이 확실 했으면 좋겠네요. 제가 설명듣기로는 바위 소금에 물을 부어 녹인 상태로 끌어 올려서 끓인 소금을 만든다고 하던데 하도 지난 일이라 당시에 샀던 아내서를 집에서 한 번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돌아 가신 교황 바오로 2세가 이 지역 출신으로 암염에 그분의 전체 모습과 뒷 교회 배경을 조각 해 놓았습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입니다. 폴란드가 소련의 위성국일 때에 소련에서 지하철을 놓아줄지 뒤에 보이는 정부 건물을 지어 줄지 폴란드 정부에 선택하도록 했는데 폴란드 정부가 저 빌딩을 지어 주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바르샤바는 많은 역사적 유적들이 있었는데 2차 대전 중에 폭격으로 시내 전체가 완벽하게 파괴되었고 현재의 것들은 모두 전쟁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폴란드에서 두번째로 큰 우시라는 도시인데 3년 전쯤에 방문을 하였습니다. 이 친구는 영어를 전혀 못해서 같이 다녔지만 이 곳에 대한 제대로의 설명은 잘 듣지 못하였습니다. 폴란드는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평지로 되어 있어서 남부 독일과의 국경 부분 이외에는 산이 없습니다. 이 도시를 가로 지르는 기다란 길이 있는데 하나도 구부러짐이 없이 그 길의 길이가 20km가 넘는다고 설명을 해 주었는데 실은 확인은 못 했습니다.
여기는 멕시코시티입니다. 여기 기계전시회에 참여했는데 멕시코시티는 해발 2400m 위에 있는 도시로 한 일주일쯤 지나면 머리가 띵 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같이 전시회에 참여했던 이태리 업체와 영국 업체 직원들과 우리 전시 부스앞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멕시코시티 광장일 것 같으네요.
첫댓글 성님은 고케 매깜으로 댕기고도 혐을 못치요? 나는 개혐은 치는데라. 남천교 다루똑 밑이로 막고 뿜우로 댕기든 시절이 엊그저께 같은데 볼씨로 40년도 더 댰소? 그라고 암만해도 <모떡같이로 말해도 찰떡 같이 알어 들어사>가 맞이꺼 같으구만이라.찰떡이 더 끈끈하요? 안? 고때 쌈하믄 코빵애 터진놈이 무조껀 졌어라? 재미지게 잘 봤구만이라.
동생! 맞어! 모떡같이 말하먼 찰떡같이 알어 들어라가 맞구만! 우들은 큰 방죽으로 댕겼어도 사정리나 서외리 애기들은 동생네 집 밑에 송현 방죽으로 목욕하러 댕갰제! 한번은 작은 방죽이로 목욕하러 갔는데 4살이나 많은 동네 성이 방죽 가운데다가 일부러 놔두고 나가 부는 바람에 진짜로 죽을락 했당께! 그래 봐야 한 거리가 7미터나 되었능가 모르겄어. ㅎㅎㅎ
처음 사진보고 많이 본 사람이다 생각 했는데 고신 형이네 형 나 네거리에서 식당하던 (낙원식당) 진원이요 반가워요 형 이런곳이나마 무척 반가워요 병현이는 내 친구고 형 여동생도
우리 동창인데 잘지내지요 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요 안부 전해주세요 형 다음에 인연있으면 한번 뵙겠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안녕히 잘 지내세요.....
진원어! 오랜만이다. 전에 응암동쪽에 산다고 했는데 어떻게 잘 지내냐! 본지 겁나게 오래됐다. 시간 되는 대로 얼굴 한번 보고싶다. 두바형이랑 시바 형은 어떻게 지내는 지 몰라!
얼마 전에 누나 얘기도 어디서 나왔는데 어느 친구가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던데 궁금하다야!
복잡한 세상사중에도 어릴때 추억을 고스란이 담고계셨네요 뻘투성이인 내가 붕어 잡는듯 빠젔었네요 좋은 사진 설명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