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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해군력이라 함은 해상, 수중, 해공을 포함하는 바다에서의 군사력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골시코프 제독에 의하면 "해군력의 범위는 해상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기나 병력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상선, 어선 그리고 해양탐사선을 포함한 한 국가의 해양관과 해양에서의 전통관이 포함된다"고 하듯이 해군력은 전함을 포함한 모든 해군 장비 뿐만 아니라 육지와 해상 내지 대기권 밖으로부터도 해양에 미칠 수 있는 모든 군사력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북한은 일반적으로 국제체제에서 비교적 고립된 국가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국제 정치적. 경제적 관계가 주로 그들과 국경을 같이 하는 중국과 구소련(이하 소련으로 칭함)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앞에서 기술한 이유에서도 기인하겠지만 북한은 그들의 지정학적 위치가 바다의 사용에 제한적이었고, 바다로부터의 침략을 두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은 동서로 양단된 긴 해안을 갖고 있고 한국과 대치중이다. 따라서 북한해군은 인접국 한국에만 주력하는 작전과 군사력을 건설해 왔고, 이로 인하여 연안방어 전략의 소형함 위주의 현대 해군으로 발전해 왔다. 이에 추가하여 북한은 잠수함을 획득해서 한국의 중요한 해상교통로를 파괴하고, 유사시 한국으로 유입되는 병력과 장비의 증원을 방해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해군전략 사상은 대륙국가인 중국과 소련의 전략에서 영향을 입은 것이지만, 이에 김일성의 독자적 전략이 혼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북한해군이 해방과 함께 창설이 되어 중국과 소련의 지원하에 성장해 오면서 김일성이 군사권을 장악해오던 1980년대초에 이미 해군전략 개념은 형성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현재까지 북한해군은 다수 함정보유, 다수 기지보유로 작전의 융통성과 기지의 요새화, 우수한 해안 방어력, 다량의 상륙전 및 특수전용 보유, 잠수함 위주 전략과 한반도 주변 해로 익숙 등의 강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취약점은 동·서해의 양단된 함대보유로 통합 작전 불가능, 함정의 노후화, 소형화, 그리고 자동화와 전자전 미약, 공군과의 합동작전 능력 부족, 동계결빙으로 작전능력 제한, 그리고 훈련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북한해군의 창설과정과 현대까지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서 주요 해군 무기체계의 출현과 전략의 발전을 연계시시키도록 노력했고, 특히 1980년대 이후 해군력 발전에 초점을 두고 양적 변화와 전략의 상관관계를 규명해 보면서, 북한 해군전략의 특징을 도출해 보려는 것이다.
해군력 평가에 관한 많은 연구와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주로 양적 평가에 지나지 않고 있고, 장비의 질, 군수지원, 사기, 훈련정도, 지휘력, 전략·전술, 지리, 기상 등의 요인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본 연구도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에서 매년 발행되는 군사력 균형(The Military Balance)과 영국의 제인년감(Jane's Fighting Ships)을 위주로 양적 비교에 치우치고 있음을 시인한다. 또한 북한해군의 자료부족으로 객관적인 연구가 미흡했고, 연구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되었음을 밝혀 둔다.
Ⅱ. 북한해군의 건설
1. 북한해군의 창설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 북한 각 지방에는 자발적인 민병조직으로 자위대와 치안대가 조직되어, 이들 조직이 혼란해진 사회질서와 각종 사고방지 등 일부 치안업무를 담당해왔다. 그러나 1945년 8월 24일 북한을 점령한 소련에 의하여 소련군 제25군사령부가 평양에 설치되고, 또한 비밀리에 로마넹코정치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이러한 자위조직들의 활동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동년 10월 12일 북한주둔 소련사령관이였던 치스차코프 대장은 북한지역 내에 있는 모든 무장세력의 해산명령을 내리고, 소련군사령부와 협조하에 규정된 인원수의 보안대를 창설할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10월 21일 각종 치안대와 자위대는 해산되고, 그 대신 소련은 김일성에게 무력을 제공하기 위한 조치로서 새로운 조직으로 약 2,000명 규모의 보안대를 편성하였다. 보안대의 병력과 훈련문제로 인하여 1946년 6월 보안대훈련소가 개천에 신설되고, 신의주, 정주, 그리고 강계에 분소를 두어 보안대원과 철도경비대원을 교육시켰다.
한편 김일성은 이 보다 4개월 앞선 1946년 2월초 진남포에 평양학원을 설립하고 보안대 간부를 양성하여 김일성일파의 조직을 정비하고 있었는데, 이 평양학원은 그 후 1949년 1월 만경대로 이동하여 제2군관학교로 개칭되었다. 보안대훈련소가 창설된 직후부터 김일성은 그의 직계인 항일 빨치산출신 30여 명과 평양학원 출신 10여 명을 중심으로 평남 강서군에 보안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간의 교관요원 훈련을 마치고 지방보안대원과 인민위원회의 극렬좌익분자들중 900명을 제1기생으로 선발하여 간부요원으로 훈련시켰다. 다시 이 간부학교는 1948년 12월에 평양으로 이동하여 제1군관학교로 개칭되었다.
북한해군은 1946년 7월에 해안보안을 전담하는 보안대원을 양성할 목적으로 원산에 본부를 둔 수상보안대를 신설하면서, 동해수상보안대를 원산에, 그리고 서해수상보안대를 진남포에 각각 설치하였다. 수상보안대는 동서해안에 각각 1개 대대 병력으로 동해는 속초, 장전, 서호진, 신포, 고저 등지에 7개 지대를 설치하였고, 서해에는 서해안 일대에 각 항구와 도서에 각각 배치되었다.
북한은 1946년 8월 중앙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원산에 두었던 수상보안대사령부를 평양으로 이전하고 해안경비대로 개칭하고, 원산과 진남포의 동·서 수상보안대도 각각 원산·진남포 경비위수사령부로 개칭함과 동시에 청진에 위수사령부를 추가 신설하였다.
해안경비대의 간부요원들도 초기에는 평양학원과 북조선중앙간부학교 출신자를 임용하였으나, 이들이 해상임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기술문제가 대두되어 1947년에는 해군군관학교의 모체부대로서 원산에 해안경비간부학교를 창설하고, 다시 동년 7월 7일 해군군관학교로 개칭하였다. 이 해군군관학교는 1949년 9월에 제1기생 250명, 1950년 5월에 제2기생 750명을 각각 배출하였다.
그때까지 해안경비대는 내무성의 관할에 있었으나 1949년 8월 28일 민족보위성으로 이관됨에 따라 정식으로 인민군 해군으로 발족하게 되었고, 8월 28일을 공식적인 해군절로 기념하고 있다. 초대 해군사령관에는 한무일 중장이, 참모장에는 김원무 총좌가 임명되었으며, 이 해군사령부 예하에는 제1위수사령부(청진), 제2위수사령부(원산), 그리고 제3위수사령부(진남포)와 해군군관학교, 기술훈련소들이 예속되었다.
당시 병력은 총사령부에 약1,000명, 원산에 3,920명, 진남포에 5,000명, 해군군관학교에 500명, 기술훈련소에 200명, 함대에 200명 등 총 15,270명이었으나, 1950년 5월부터 원산과 진남포에 각각 1개 대대 규모의 육전대를 신설함으로써 6 25전 해군의 총 병력은 16,200여 명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당시 함종들은 일본 경비정과 발동선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49년 12월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아 대·소군함 35척(약 5,560톤)의 소형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북한해군은 6 25전쟁중 유엔군에 의하여 거의 격멸되고 1953년 휴전 당시 해군세력은 불과 24척의 발동선 등 소형함정과 약 4,4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2. 북한해군의 발전과정
한 국가의 해군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국가정책의 변화 정도, 최고 정책결정자의 경질과 그들의 행태, 해군전략과 전술의 변화, 그리고 무기체계의 변화 등을 변수로 하여 분석기간을 상정할 수 있으나, 북한의 경우 특이한 점을 발견하기 어렵고, 질적·양적 변화의 가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10년 단위로 분석하려 한다.
(1) 1950년대
6 25전쟁시 북한이 한·만국경선까지 후퇴하고 붕괴직전의 운명에 직면하게 되자 중공군의 불법개입을 초래하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북한은 재반격의 역량을 구축하게 되었다. 북한은 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확대전원회의에서 6 25전쟁에 대한 그동안의 비판과 한반도 실정에 맞는 새로운 전략·전술을 제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북한 군사전략의 근간이 되었다.
김일성은 1951년 이후 연합군부대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해안방어에 중점을 두었다. 같은 해 3월 김일성은 서해안 해안방어부대인 제657부대를, 4월에는 동해안 연안방어부대인 제85부대를 방문하여 "부대의 전투력을 높여 해안방어를 철벽으로 강화하자"는 연설을 하였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6 25전쟁 이후 전쟁패배를 안고 있는 김일성은 정치적 안정에 주력하면서, 군사력 건설보다는 전쟁복구에 주력하였다. 북한은 한반도에서 철군하지 않은 중공군에게 안보를 의지하고, 소련으로부터는 경제적 지원을 받아 경제복구이 힘썼으며, 1950년대 중반까지 해군력 건설에는 거의 관심을 둘 수 없었다.
해군력 건설에 관한 언급은 1954년 7월 해군군관학교 연설에서 해군력 건설 방향을 제시 했는데, "…해군력 건설은 나라의 경제발전 수준에 맞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북한의 해군력 건설은 두 단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데, 첫 단계는 소형함정으로 해안을 경비하면서, 해안포 화력을 증강하는 것이며, 둘째 단계는 영해를 수호할 수 있는 해군무력을 강화하는 단계입니다.(발췌요약)" 라고 하여 연안방어를 강조하면서 점차적으로 영해수호를 위한 강력한 해군력 건설을 주장했다.
1950년대말 북한해군은 6 25전쟁에서 괴멸된 해군을 건설하는데 주력하여 소련으로부터 원조받은 소형 잠수정 2척, 500톤급 소해함 8척, P-4급 어뢰정(25톤) 12척, MO-IV급 연안경비정(56톤) 20척 및 6척의 SO-1급(250톤), 연안경비정 48척, 자체 건조한 이원급 어뢰정(40톤), 신흥급 어뢰정(35톤) 및 K-48급 소형 경비정(110톤) 등 약 70여 척의 함정과 약 7,500여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도표 1] 참조).
[도표 1] 북한해군의 함정 및 병력 증강 현황
출처:Jane's Fighting Ships, 1961-1981년에서 발췌 요약
(2) 1960년대
김일성은 그동안 소홀해 온 군사력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1961년 7 월 6일 모스크바에서 "조·소우호협력 및 호상원조조약"을, 7월 11일에는 북경에서 "조·중 우호협력 및 호상원조조약"을 체결하여 중공군 철수로 인한 군사적 공백을 중·소와의 쌍무적 동맹으로 보완하였다. 이어서 1962년 12월 로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는 외부의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도 남침이 가능하도록 단독 공격능력을 갖자고 하는 "국방에서의 자위" 정책을 결의하고 이의 실천방향으로 "4대 군사로선"을 채택하였다. 4대 군사로선은 1) 전인민의 무장화 2) 전국토의 요새화 3) 전군의 간부화 4) 전군의 현대화를 골자로하고 있다.
북한은 1965년 소련과의 군사협정 이후 대형함 위주로 편성된 한국해군에 대응하여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함대함 유도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65년부터 Styx 유도탄 2기를 장착한 KOMAR 유도탄정을, 이어서 1968년에는 Styx 유도탄 4기를 장착한 OSA급 유도탄정을 도입하였다.
1960년대에 소련으로부터 W급(1,350톤) 4척과 P-6어뢰정(73톤) 수십척을 도입하였고, 중국으로부터는 1967년 이후 상해급 경비정(155톤) 8척을 도입하였고, 1968년에는 산토우급 경비정(80톤) 8척을 도입하였다. 북한은 함정건조 기술도 상당히 발달하여 사리원급 대형 경비정(650톤), 대청급 경비정(400톤), 초도급 경비정(130톤), SO-1급 경비정(250톤), P-6급 어뢰정(75톤) 및 안주급 어뢰정(35톤) 등을 건조하여 작전에 투입하였다.
따라서 1970년도에 북한해군은 잠수함 2척, 유도탄정 12척, 연안경비정 60여 척, 그리고 어뢰정 약 150여 척 등 총 260여 척의 함정과 13,000여 명의 해군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도표 1] 참조).
(3) 1970년대
1970년대초 북한은 김일성에 대한 유일사상 강화로 일인 독재체제를 굳건히 하고, 외부적으로는 평화전술을 구사하여 1972년에는 "7·4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이어서 제3세계 비동맹국가와의 외교력 강화를 통하여 북한의 국제적 입지도 강화했다.
1960년대 말까지 계속해 온 해군력 증강은 남한보다 질적·양적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1972년 말부터 서해 5도를 중심으로 해상도발을 계속하였고, 중·소로부터의 함정도입 계속과 이들 국가로부터의 기술이전으로 개량된 함정을 건조하였다. 특히 소련으로부터는 OSA, KOMAR급의 후속분과 셔션급 어뢰정(175톤) 4척 정도의 도입이었으나, 중국으로부터는 R급(1,800톤) 잠수함을 7척 도입했으며, 하이난급 경비정(392톤) 6척을 도입했다.
1970년대에 북한해군에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함정의 자체 건조 능력을 갖춘 것이다. 북한은 1976년부터 R급 잠수함에 대한 기술이전을 받아 신포와 마양도 조선소에서 3척을 건조하기 시작했고, 이는 1995년까지 매 14개월마다 계속 1척씩을 건조했다. 1970년대 말에는 비정규전에 이용할 Midget 잠수정을 건조했다. 수상함으로는 나진급 프리킷트(1,500톤)을 1973년과 1975년에 건조하여 작전배치했으며, 대청급 경비정(425톤), 차호급 경비정(82톤), 청진급 경비정(80톤) 그리고 남포급 상륙정(82톤) 등을 건조했다. 특히 북한은 고속 기습상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75년부터 소련 P-6어뢰정의 설계를 기초로 남포급 상륙정을 100여 척 건조했다.
종합적으로 북한해군은 1970년대말 잠수함 17척, 나진급 프리킷트 2척, 유도탄정 18척, 경비정 200여 척, 어뢰정 160여 척 그리고 상륙정 90여 척 등 총 500여 척의 함정과 31,000여 명의 병력으로 증강되었다([도표 1] 참조).
(4) 1980년대
1980년대 북한해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함정 소수 병력배치이다. 1982년을 예로 들면 총 병력 33,000명으로 잠수함을 비롯한 각종 함정 534척을 취항하고 있어, 이는 함정 척당 약 60명 정도가 할당되는 셈이다. 이 같은 특징은 중·소의 대륙적 해양사상에서 전수된 것으로 1980년대 초 함정의 총 톤수가 7만톤 정도이므로 함정 534척의 보유는 1척당 131톤에 불과하다. 따라서 북한해군은 소형함 선호와 소수승무원인 반면 다함, 고속, 그리고 화력우선주의를 나타내고 있어, 해군전략·전술의 획기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한 대형함의 건조는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일반고속정의 경우 북한은 매년 대폭적인 증가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고속정은 1970년대말만 하더라도 속도가 느린 일반선박에 준했으나 1980년부터 고속화에 성공하여 고속공격포함과 고속어뢰정의 두 가지를 대부분 자체 건조하고 있다.
북한해군이 지리적으로 양분된 동·서함대로 편성되어 상호지원이 불가능하며, 이것이 커다란 취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북한은 이 같은 사실을 감안하여 외항능력과 내해성을 갖춘 대형전투함의 자체 건조를 서둘러 왔는데 1973년부터 나진급으로 명명된 프리킷트를 보유하게 되었다. 북한은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함정의 대형화를 점진적으로 추구해 오고 있기는 하나 나진급의 해상작전의 운용도는 극히 부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해군의 증강추세로 보아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은 상륙주정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
[도표 2] 북한해군력의 변화 추이(1980, 1990, 2000)
출처:IISS, The Military Balance, 1980-1981,1990-1991,2000-2001에서 발췌·요약
다. 1982년의 경우 북한에서 건조된 남포급 5척이 증가되었으며, 이는 육군에서 준비된 비정규전 특수부대의 은밀침투용일 뿐만 아니라 대부대 강습상륙수단으로 가용하다.
1980년대 북한해군의 함정 증가추세는 1980년에 534척, 1981년에 516척, 1982년에 534척으로 함정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소련이나 중국으로부터 함정을 도입했다기 보다는 대체로 엔진과 전자장비 등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부품을 민수용으로 위장도입함으로서 자체 건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는 북한해군이 어느 함종보다 획득을 원하는 오사와 코마급이 계속 18척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면 1980년대 중반까지 소련으로부터 함정도입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동시에 북한도 기술력 부족으로 자체 생산 역시 불가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북한해군이 해안방어에도 전념하여 samlet 해안 유도탄을 배치하여 2개 기지를 운용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5) 1990년대
1990년대의 북한해군력 분석은 상기 [도표 2]를 중심으로 하여 일반적 해군성분작전별 분석으로, 수상전, 대공전, 대잠전, 기뢰전, 그리고 상륙전 분야에 대한 양적 비교와 특성을 기술하려 한다.
위에서 기술한 북한해군의 양적 변화를 임무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현재 북한의 무기체제를 가지고 해군이 어떤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를, 또 어디에 중점을 두려 하는지를 판단해 보면 [도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해군력은 공격 및 방어 작전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으며, 특히 잠수함을 위주로 하는 해상교통로 파괴 및 주요 항만 봉쇄 작전을 그리고 유도탄정을 위주로 하여 해상공격 작전을 위한 기습상륙, 기뢰전 및 연안방어를 위한 해상감시 및 해안방어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도표 3] 북한해군 함정의 능력
범례 : 임무적합 임무가능
① 수상전 및 대공전
북한의 수상함 세력은 프리킷트 3척, 사리원급 콜벳트 3척, 유도탄정 43척, 어뢰정 103척 그리고 기타 연안경비정 158척을 포함하여 310척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해군은 노후된 함정과 200톤 이하의 소형함정이 약 83%를 차지함으로써, 이들 수상함은 육상기지의 지휘하에 연안방어 작전을 수행하면서 한국의 함대세력에 대하여 hit and run 전술을 구사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해군은 지난 연평해전에서의 교훈처럼 고도의 정밀성이 요구되는 함포제작 기술이 부족하고, 그들이 자체 생산하는 육상포를 개조하여 함정에 탑재함으로써, 대구경화로 사정거리는 증가했다고 볼 수 있으나 정확성에서 문제가 있고 사통장치의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다. 대공전에는 극히 취약한 상태에 있고, 함대공 유도탄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대공전은 함포와 다연장포에 의존하고 있다.
북한이 수상함에 대한 기습공격과 후방지역 기습상륙, 주요 항만 봉쇄 및 해상교통로 파괴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부대편조 변경이나 재배치 없이 공격이동이 가능하도록 16개 전대중 60% 이상의 부대를 전진배치 했으며, 고속함정을 집중 건조함으로써 소형함 위주로 한국 해군 수상함에 주는 위협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북한수상함정의 작전반경은 프리킷트/콜벳트는 300마일로 대한해협까지, 유도탄정/대형경비정은 250마일로 부산·목표 해역까지, 어뢰정은 200마일로 죽변·군산 근해까지 작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소형전투함정(유도탄, 어뢰정, 경비함)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여전하나 척수에서 변화가 없는 OSA 및 KOMAR 급 유도탄정이 작전수행거리와 해상상태에 크게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내해성이 강한 중무장 유도탄의 도입이 예상된다. 또한 북한해군의 동·서해로 양단된 함대의 효율적인 군수지원을 위한 보조함정의 도입도 예측할 수 있다.
② 대잠/잠수함전
북한이 1960년대초 소련제 W급 잠수함을 확보하고, 1970년대초부터는 R급 잠수함을 자체 건조함으로써 현재 수중전력으로는 R급 22척, W급 4척 등 26척의 잠수함과 45척의 Midget 잠수정 그리고 특수전용으로 상어급 21척 등 전체 92척을 보유하고 있다. 다량의 잠수함 보유는 주로 기뢰전, 해상교통로 파괴 작전, 소규모 비정규전, 특수전략부대의 은밀침투, 그리고 항만 봉쇄 등에 이용되어 한국의 해군작전에 큰 위협이 된다.
이에 비하여 북한의 대잠전 능력은 미약하여 3척의 프리킷트와 3척의 사리원 급 함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③ 기 뢰 전
북한은 60년대초 소련으로부터 감응기뢰와 접촉기뢰를 도입하여 약 7,000개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은 이를 항공기, 잠수함 그리고 수상함정으로 한국의 주요항만에 공격기뢰를 부설하고, 북한의 대상륙해역에 방어기뢰를 부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북한은 20척의 소해정으로 대기뢰전 임무를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④ 상 륙 전
북한이 상륙작전 및 대상륙작전에 대한 관심은 6 25전쟁부터이나 대륙지향적 군사전략 수행과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전략적 과업에 치중하다가 상륙전력을 크게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1980년 이후 간접전략을 이용한 비정규전과 정규전의 배합전술과 전후방 동시전장화의 수단으로 상륙전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현재 북한의 상륙작전 수행부대는 1980년에 비하여 264%(102척에서 270척, [도표 2] 참조)의 증가를 가져 왔다. 상륙세력으로는 지상군 특수부대 소속의 2개 상륙여단과 해군 상륙수단으로 LSM 10척, LCM/LCU 30척, LCVP 100척, 그리고 Hovercraft 130 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 이용하여 동·서해에의 측후방에 각각 2-3개 대대급 상륙기습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Ⅲ. 북한해군 전략의 특징
1. 북한해군 전략의 형성
공산국가에서 일인독재의 형태와 개인 숭배열은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그 가운데서도 특히 스탈린,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의 개인 숭배정책은 뛰어난 것이었다. 과거 북한에서 김일성 숭배를 토대로 한 일인 독재체제는 스탈린과 모택동과는 달리 특이한 극렬성을 보였다. 그러한 점에서 김일성 자신의 성격적 특성이 더욱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며, 김일성의 정치행태 양식이 그의 성격형성 과정에서부터 영향을 받아 북한의 군사적 문제와 그의 군사전력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인간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유년기와 소년기에 있어서 가족을 비롯한 일차적 소속집단의 영향은 중대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일성의 유년기와 소년기가 그의 성격형성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할 것이며, 어려서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고 유격대원의 단위부대장으로 무장활동을 하였으나 그 당시 현대적 의미에서 전략이나 그에 관한 기술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즉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의 유적생활과 유격활동이 규모나 활동으로 보아 전략차원에 관련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일성이 전략에 관한 깊은 관심과 의식을 나름대로 갖기 시작한 것은 그의 소련군 복무시절인 1941년부터 입북하기 전까지 5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련이 이 시기에 독일·소련전쟁의 발생, 진행, 그리고 종료기였으므로, 김일성은 그 시기에 전쟁의 전략과 전술문제에 대한 관심이 소련군내에 팽배해 있어 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전후 소련은 스탈린전략을 승리의 주축으로 삼았기 때문에 초급장교인 김일성에게 소련의 전략·전술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소련에 대한 김일성의 추종 증거를 보면 전후 소련군인이면 누구나 차고 다니던 "대일본 참전기장"을 사복에까지 달고 다니면서, 이것이 북한의 은인 스탈린 대원수께서 특별히 주신 것이라고 뽑냈다는 사실은 스탈린 및 소련에 대한 그의 숭배·추종을 잘 보여주며 그러한 사례는 몇 가지 있다. 즉 1952년 12월 "인민군대를 강화하자"라는 연설에서 "인민군의 조직과 행동은 소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을 통한 체험인 가장 선진적인 소련 군사과학과 전쟁과학의 기조하에 있다"라고 한 것과, 19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노획한 작전명령 제1호와 북한군 제4사단 앞으로 보내진 1950년 6월 18일자 정찰명령 제1호는 기습공격을 골자로 하는 러시어로 작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북한의 전략사상은 김일성의 개인적 영향과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소련으로부터 전략·전술을 모방·추수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해군도 소련해군으로부터 전략·전술을 모방했다고 할 수 있어,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북한해군의 특징을 도출하려 한다.
2. 북한해군 전략의 특징
(1) 기뢰전 전략
북한이 가지고 있는 기뢰전의 능력은 6 25전쟁 이전부터 소련으로부터의 기술지원과 기뢰의 인수로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소련은 어떤 다른 해군의 무기체제보다 기뢰부설에 많은 관심을 두고, 그 작전에 성공했다. 1904-1905년의 로일전쟁 그리고 1950년 6 25전쟁시 기뢰부설 작전은 상대국의 공격능력에 제한을 가하고 기뢰전 능력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는 방어적 기뢰전에 이상적인 곳이다. 동해는 일반적으로 수심이 깊고 해안 모래사장이 좁다. 해안선은 적절한 직선형이며 100fathom 선은 해안에 근접되어 있다. 원산이나 흥남은 양호한 항구인데 반하여 기뢰부설에 특별히 효과적인 넓은 천해구역이 있다. 서해의 해안선은 강이 서해로 흘러 내려가고 있는 얕은 벌집모양을 하고 있다. 서해에는 60fathom 이상 되는 곳이 없어 기뢰부설이 가능하다. 북한은 수상함, 잠수함, 그리고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기뢰부설능력을 가지고 있어 모든 적합한 해안 근해에 기뢰를 부설하여 상륙작전이나 기타 공격작전을 방해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2) 잠수함 최우선 전략
소련은 해전 경험에 의하여 가장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해군무기는 잠수함과 항공기라고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러시아 해군의 주분야는 잠수함과 항공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잠수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각종 형태의 수상함과 항공기는 잠수함의 전투 및 전면 보호작전시 신뢰성을 부여하기 의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설계된 것이라고 하였다.
잠수함의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의 해상교통로 파괴작전에서 격파된 수송선 전체의 65%가 잠수함에 의한 것이며, 20%가 항공기, 8%가 기뢰, 그리고 6%가 수상함에 의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은 5,150척의 함정이 격침되었는데, 격침된 총 톤수 중 68%가 잠수함에 의한 것이었고, 미국은 이 전쟁에서 2,143척의 일본 선박을 격침시켰는데 총 톤수의 62.1%가 잠수함에 의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잠수함의 중요성을 인지한 북한이 소형함대의 연안해군으로서 26척의 잠수함과 66척의 잠수정을 보유한 것은 소련의 영향으로 보인다.
북한이 잠수함으로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남한의 주요 항만에 기뢰부설과 해양교통로 봉쇄를 시도할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우리해군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3) 유도탄 고속정에 의한 해상유격작전
소련 수상함의 특징은 소형이고 염가이지만 화력이 강한 다수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장거리 미사일과 어뢰를 병용해서 무장함으로써 전투 효용성을 높이고 있다. 북한도 유도탄 고속정 (오사, 코마, 서주, 서흥 등) 43척을 보유하고 있어 해상에서 hit and run의 해상유격전 능력을 보유하고 전쟁초기에 우리해군을 기습공격 하거나 기습상륙을 지원할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해군은 수세시 혹은 열세시 유도탄 고속정에 의한 신속한 후퇴로 중·러의 항만으로 피난하여 현존함대 전략을 수행할 것이다.
(4) 상륙작전/대상륙작전
지상군을 지원하는 해군의 임무로써 상륙작전의 실시는 러시아 해군의 중요한 역할이다. 북한의 전반적인 군사전략을 검토해 보면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주요 전략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전략은 육·해·공군을 이용한 단기전을 생각할 수 있는데 동·서해 그리고 중부지역에 대한 측면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서울과 부산을 양단시키려는 내용을 구상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은 6 25전쟁을 통하여 인천 강륙작전이 북한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상륙작전 공포증이 있었으며, 상륙작전 및 대상륙작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함정세력은 총 보유 639척중 상륙함정(LSM, LCM, LCU, LCVP, 공기부양정)이 260척이며, 화력지원이 가능한 함정(프리킷트, 코벳트, 유도탄고속정, 연안경비정 )이 77척이 있어 상륙함정의 비율이 40.6%이며, 화력지원함을 포함하면 52.7% 정도가 되며, 상륙군도 동시에 약 12,470명 정도를 해상수송 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위협요인이 된다. 이러한 상륙작전 및 도하작전 실시가능부대의 급격한 증가는 1980년대 초반부터인데, 즉 도하 1개 연대 및 수륙 3개 대대를 1980년도에 창설하였고, 3개 상륙여단을 1981년에 신편했으며 수륙양용의 K-63 APC도 1,000여 대나 장비하여 막강한 상륙 및 도하능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5) 간접전략의 적극이용
핵시대에 경쟁국간에 전면전쟁은 상호 공멸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군사충돌을 회피하면서 각국의 국가목표를 추구하는 대결양상이 1960년대의 데땅트 시대라 할 수 있는데, 소련은 이 시기에 과거의 직접전략 개념으로부터 간접전략 개념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북한은 1960년대에 해군력을 증강하여 1970년대부터 해군력을 이용하여 한편으로는 평화공세 및 군사력을 증진시키면서 간접전략을 줄 곧 사용해 왔다. 특히 이러한 북한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초 간접전략의 일환인 간접침략으로 해상무장공비의 남파는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육상으로 47회, 153명을, 해상으로 72회 275명을 침투시켰다.
북한은 계속적인 간접전략을 수행함으로서 미국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남침전략을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불안정 요인을 대내외에 강조하여 안정적 기반위에 경제성장하는 한국의 장래를 파괴하려는 것이며, 필요시 북한자체의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필요한 대외 긴장 분위기를 지속하기 위하여 간접전략을 시도한다.
(6) 연안방어 전략의 해군
북한해군은 대륙적인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해군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육군작전을 보조하는 '육주해종'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북한해군은 해안경비에 지나지 않는 전력을 보유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특히 6 25전쟁의 교훈으로 강력한 해안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함정들은 소형화하여 대피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는 소련의 연안방어 전략을 채택하여 요새함대(Fortress Fleet) 전략을 채택하거나 현존함대(Fleet in Being) 전략을 취하는 연안방어 전략이다.
(7) 다수함정 및 병력주의
소련 해군이 그들의 전략을 과시하면서 병력수, 군함수, 그리고 항공기 수를 극히 중시하는 것은 혁명 후 유물주의로 전환하면서 숫자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다수주의 전략은 "소련군 야외교령"의 제1장 강령 2항에 "적군에 대한 전투행위는 섬멸전 수행을 원칙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고, 제2항에는 포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다수병력, 다수함정, 다수 항공기만이 적을 섬멸시키고 포위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김일성의 다수 함정 및 병력주의는 소련에서 모방한 것 같다.
전체 군사력을 보면 2001년 현재 남한이 68만(전체 인구의 1.4%)이며, 북한이 108만 (전체 인구의 2%)이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정규군 이외에도 노동적위대 및 붉은청년근위대 350만명 그리고 교도대 19만명 등을 보유하고 있다.
[도표 4] 북한해군의 병력 및 함정 현황
출처:IISS, The Military Balance 1974-2001에서 발췌.
북한해군의 병력 및 함정도 [도표 4]에서 보면 괄목한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러한 병력 및 함정의 절대우위는 상대적국의 전투원 뿐만 아니라 유생역량 말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섬멸전, 대량공격, 포위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전략이다.
Ⅳ. 결 론
북한의 군사력은 기본적으로 대륙적 군사사상에 근거를 두고 소련과 중국의 영향하에서 건설되었다. 따라서 군사력의 중심은 지상군이며, 해군은 지상군을 지원하는 개념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개념에서 해군은 지상군의 전후방 동시 전장화전략과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전을 지원하는 전력으로 상륙기습전력과 이를 성공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해상우세권 확보전력에 주력해 왔다.
북한이 국제정치와 경제적 환경이 육속된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 때문에 바다 사용에 대한 관심이 적었으며, 해양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이 거의 없어 해군력 발전이나 증강에 관심이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현대해군으로 발돋음하면서도 인접한 한국에 대한 연안방어를 중심으로 해군력을 발전시켜 왔고, 특히 잠수함 우선전략으로 한국의 해양교통로 파괴 작전과 유사시 한국의 병력과 장비의 증원을 막는 임무에 주력해 왔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북한해군력 분석상에서 특이한 점을 보면 먼저 병력면에 계속 증강해 오던 군사력이 1992년에 약간 감소했다가 이듬해 5,000명의 증강을 가져 온 것이며, 1996년부터 4,6000여 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잠수함의 경우는 1983년부터 20-26척 수준을 계속 유지하면서, 1986년도에 잠수정이 표면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는 북한의 기습공격과 전후방공격의 전략상의 변화와 간접전략의 극대화로 해석할 수 있다. 대형함의 출현은 미미한 수준으로 머물러 연안방어 전략 고수를 예측할 수 있고, 기술력과 경제력 부족 그리고 소련의 경제력 어려움도 대형함대 건설을 저해하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경비정의 경우 150여척을 유지하던 북한이 1980-1985년경까지 60여 척으로 급격히 감소한 것은 함정 낙후와 함정의 분류상 차이를 나타낸 것 같다. 상륙함정의 경우 1984년에 3척의 Nantze 급 LSM이 등장했고, 85년도에는 6척의 Hantae급 LSM이 등장하면서 상륙작전 능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공기부양정은 1992년도에 60척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130척으로 증가했다. 효율적인 해안방어를 위하여 1993년도에 samlet 미사일이 실크웜 미사일로 전환되었다.
북한 해군전략의 특징은 소련의 군사사상에 영향을 입어 기뢰전 전략, 잠수함 최우선 전략, 유도탄에 의한 해상유격작전 전략, 상륙작전/대상륙작전 전략, 간접전략의 적극 이용, 연안방어 전략의 해군, 다수함정 및 병력주의 전략 등을 위주로 하고 있다.
북한해군력은 해양의 가치 인정과 경제력이 부활되지 않는 한 현재와 같은 연안해군으로서의 임무 수행할 것으로 판단되며, 잠수함, 나진급의 프리킷트, 그리고 유도탄 고속정 등에 관심을 가지고 해군력을 증강시켜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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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재미없네요.
나만 재밌습니당..
너무 길고 눈아파서 서론만 읽었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