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 외 2편
이근일
살구색을 보고 산호를 떠올리다 눈동자가 산홋가지에 걸렸다
산호색과 살구색은 다르듯 산호는 따뜻한 해류가 지나는 바다에 살고 살구는 그보다 더운 바람이 지나는 뭍에서 영근다
우리 사이사이에서 점점 윤기를 잃어 가던 빛, 그 빛으로 어둠을 감춘 얼굴, 그럴수록 선연해지는 허깨비의 춤, 부풀어 오른 구름과 태풍에 밀리고 밀려 우리는 잠시나마 고요한 태풍의 눈에 머무르길 바랐으나
몰랐다 그것이 덫이라는 걸 모진 바람을 피한 대신 새들은 눈에 갇힌 채 수천 킬로미터를 빙빙 돌아야 한다는 걸
산호는 죽으면 골격만 남는다
살구는 죽어도 무르고 무르다
당신 아니면 누가 또 날 기억해 줄까, 이런 생각으로 나는 단단해진 관계의 골격에 살구를 달아 주었다
길 잃은 새 몇 마리가 산호 무덤 위를 선회하는 동안
물보라
너와 가지 않으려는 마음을
기차라 부를까 기차가 밟고 간 철교라 부를까
너를 강물에 빠뜨리고 싶은 마음을
배꼽이라 부를까 배꼽보다 깊은 싱크홀이라 부를까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말
내가 죽어야 네가 산다는 말
사람들의 말과 말 사이
뜨겁거나 차가운 물이 흘러넘쳤고
나는 보았다 물속에서
서로 할퀴는 날카로운 손톱들을
짙푸른 물갈퀴 달고 빠르게 흩어진 사람들을
그런데 나는 왜 아직
여기에 머물러 있을까
왜 자꾸 물보라를 일으키며
혼자 하얗게 부서지는 것일까
침윤
오래도록 침윤된 길바닥을 바라본다
한 줌 빛조차 스미지 못하고 휘어져 나간 그 폐허의 자리
우리는 함께 그 길을 걷다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어 그리고 말없이 각자의 길로 돌아섰으나
어느 날 너와 나 사이엔
예고도 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거기 찢어진 천막 아래 가득 고인 울음은
길고 긴 먹빛 강이 되어 흘러 흘러가고
그날 이후
너로부터 불어온 독설은 모질었고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긴 너무 아리고 차가워
결국 서로에게서 더 멀리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저마다 모란꽃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속에 고통이 스멀거리는 줄 모르고
우리는 깊은 밤 달을 파고 지난 사연을 묻었다, 그것이 온 세상에 누설되는 줄 모르고
그사이 강은 비틀린 운명에 휩싸여 소용돌이치고
이따금 우리의 마음을 쑤시는 찬연한 빛이 쏟아질 때면
강은 아팠다 그리고 강의 아픔이 먹빛을 걷어낼 때마다
속내 모를 알 수 없는 색의 파랑이 일었다, 온종일 너와 내가 울먹이도록
― 이근일 시집, 『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 (시인의일요일 / 2023)
이근일
서울 출생. 200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아무의 그늘』 『침잠하는 사람』이 있다. 현재 독립서점 <기린과 숲> 책방지기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