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 하겠지만 지금 어려운 친구가 있으시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10대에 부모님을 하늘나라에 떠나보내고 부모님의 사랑을 잃어버린체 30대를 맞이한 저로써는 언제나 받는 사랑에 갈증을 느꼈습니다
1974년4월13일 북한 함경남도 단천시 검덕구 본산동에서 태어난 저는 태어남 그 자체가 불행의 시작 이였고 아픔의 연속 이였습니다
제가 태어난 그곳은 국군포로 수용소 였고 북한에서도 제일 악질적이고 반대파 세력들을 강금하는 너무나 무섭고 사회와 고립된 곳 이였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유년시절은 시작 되였고 나의10대를 억망으로 만들어 버린 기구한 운명이 시작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유치원을 다니던 때에는 저에게 행복 이였지만
인민학교를 1학년 6세 입학하여 다니던 중 9세가 되던 3학년 때에 저의 가계표를 써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고 부터는 전혀 다른 또 다른 고립이 시작되였습니다
그 가계표는 부모님의 태어난 곳 과 저의 식구명단을 적어내는 서류와 같은 것인데 그것을 어머님께 드렸더니 아버지께 직접 드리라 했습니다
저녁에 돌아오신 아빠는 하루 일에 지쳐 피곤해 보이셨지만 그 종이를 말없이 한 동안 바라 보셨습니다
잠에서 깨여 한 밤중에 밖으로 나갔는데 마당에 무수히 많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저를 돌아보신 아버지께서는 저를 꼭 껴안에 주시며 왜 우시는지 묻는 저에게 크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과 다 크면 이야기 해주겠다는 것 이였고 그
때까지는 앞으로 많이 상처 받고 아프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부친께서 우셨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던 저로써는 많은 의문을 머리에 새겼습니다
이튼날 등교시간에 어머님은 가계표를 저의 손에 쥐여 주셨고 하학시간에 되어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부르신다는 전갈이 와서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선생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날까로운 눈빛으로 저를 주시하시던 선생님께서 너의 아빠가 괴로군 08호 냐고 저에게 따졌습니다
머리가 통증이 오면서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귀에는 웅웅 거리는 소리만이 꽉 체워져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군이 왜 나쁜지 “08호” 단어와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몰랐던 저로써는 혼란스럽기만 하였습니다
하학하고 집에 돌아온 저는 엄마에게 괴뢰군이 무엇인가 08호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저에게 그런 말에 신경쓸것이 뭐냐고 공부만 잘하면 되지 않냐고 저를 위안하여 주셨습니다
그 당시 08호는 국군포로들 한테만 특별히 부르는 호칭 이였습니다
그부터 저의 운명은 인간들이 상상하는 인간이 아닌 쓰레기 였습니다
동학들은 저를 멀리하고 피했으며 저와 놀기를 꺼려했고 담임 선생님의 핍박은 가혹 했습니다
함께 뛰여 놀고 즐거워 하며 놀던 친구들은 더는 저의 곁에 없었으며 그림자와 동무 하면서 저의 10대는 시들어 갔습니다
저의 집과 학교는 30리 통학 길 이였으며 아침 이라기 보다는 새벽4시 정도의 시간에 깨여서 보초소를 지나 검문을 마치고 학교까지 가는 길은 어린 저에게는 멀었으나 등교시간은 8시 전에 마쳐야 하였고 그 시간 동안에 오고가는 학교 길에 30분의 시간을 잡아먹는 “긴 동굴” 이 있었습니다
불도 없는 곳을 걸어가다 여기저기 부딪쳐서 어린나이에 많이도 다쳐서 피를 흘리면서 걸어가야 했고 나이를 먹으면서 그 동굴은 불이 없었어도 앞이 잘 보이게 걸을 수 있는 숙련이 되어갔습니다
북한의 겨울은 장난이 아닐 정도로 혹독히 추웠으며 30리 길을 치마를 입고 걸어야 했으며 만일 입지 않고 등교를 하면 온 하루 종일 벌을 서야 했고 복도에서 걸상을 들고 서있는 벌은 과분한 벌 이였습니다
추운겨울날 얇은 치마를 입고 밖의 눈보라 운동장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벌을 서느라고 발이 땅에 얼어붙는 정도의 고문을 당하여야 했고 발이 감각을 잃은 때가 더 많았습니다
이 보다 힘들고 모진 것 은 동학들이 나를 벌레 보듯이 조롱하는 것 이였으며 선생님께서 아픈 마음을 파듯이 말씀을 하실 때 더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고 공부를 남 보다 잘 하여서 대학으로 가는 것으로 이겨 내리라 결심 하였습니다
공부를 잘하여 대학에 가는 것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 이였고 꿈이 였습니다
동학들이 즐겁게 뛰여노는 학교에서도 저는 늘 혼자서 동학들의 책가방을 지켜주고 그곳에서 책을 펼치고 공부하였고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그 먼 30리 길에서도 그 길이 어느새 왔을지도 모를 정도로 책을 보며 걷고 걸었습니다
아이들이 저를 책 벌레 글 돼지 라고 놀렸지만 성적에는 절대로 놀림을 받을수가 없었습니다
어느덧 저의 나이 16세를 맞이하여 국가 정무원 시험을 보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거뜬히 시험문제를 풀고 시험장을 나섰고 점수는 27개 학교에서 5등권에 들 정도로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꿈이 부푼다고 하는 말은 이때야 쓰는 말인가 봅니다
저는 부모님께 시험성적을 알려드렸고 부친께서는 점수성적 만으로는 큰 대학에 갈 수 있지만 우리처지 신분 때문에 지방대학은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단히 기뻐 하셨습니다
저 또한 대학지망을 지방대학으로 하였습니다
그날밤 나는 성공을 믿었고 그 꿈이 이 순간 자고나면 깨여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랬습니다
방과후 대학 추천서를 기다리던 나는 어느날 학교 게시판에 붙은 대학입학자 명단을 보게 되었고 그 속에는 저의 이름도 있을 것이라 몇 번이나 흩어보았지만 저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저 보다 한참적은 점수를 받은 동학들도 대학 그것도 지방대학이 아닌 도시대학에 명단이 있었지만 저는 아무대학도 저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무조건 교장실 문을 노크 하였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들어오라는 말씀도 떨어지기 전에 바쁘게 들어가 왜 대학자 명단에 없는지를 왜 점수를 많이 받고도 갈 명단에 없는 것 인지 따져 물었습니다 한참을 아무 말씀 없으시던 그 분은 저에게 너는 괴뢰군의 딸이 아니냐 북한을 반대하여 총을 메고 전쟁에 나온 국군포로의 딸이기 때문에 대학보류가 된 것이라고 간단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부친이 그렇게 미울 수 가 없었고 그런 딸로 태어난 것이 수치스러웠습니다 학교에서 교실로 그곳에서 얼마를 울었는지 저는 그때 태여나서 저의 눈물이 깡그리 말라서 더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다시는 울려고 해도 더 눈물이 없어서 더 울지 못하게 그렇게 울었습니다
집에도 가지않고 교실에서 온밤을 울고 제가 눈을 떠보니 다음날 12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칠판에 백묵으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학창시절은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체운 이 교단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내 기억 속에 지우리라 ! ... 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이 전과 다르게 내내 너무 힘들었고 여느때와 다르게수십 시간이 지난 것 처럼 멀고 멀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님께서는 너를 기다리다 아버지께서 온 밤을 뜬 눈으로 지내시다 일하러 나가셨다고 전하여 주었습니다
저녁에 아버지는 돌아오셨지만 모습이 측은해 보이기는 마찬 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아버지가 원수보다 더 미웠고 저의 아버지 라는 것이 수치스러웠습니다
왜 하필 “국군 괴뢰군”이냐고 북한에서 부르는 “08호” 는 북한을 반대한 남한괴뢰군 인데 왜 나에게 잔인한 것만 주는 거냐고 절대로 아버지는 내 아버지라는 것을 용서 할 수 없고 그런 딸로 이 세상에 날 낳아 준 것에 대해 수치스럽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란 말씀이 없이 욕을 다 들어주셨고 욕설이 끝날 때까지 듣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것을 가계부에서 이름을 지워 달라고 하였는데 그러자 아버지는 무릎을 끊으시고 그것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너는 꼭 아빠의 소원 꼭 이루어 남한에 가야 한다고 하시며 남한에 형제들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경기도 인천시 부평동 북구 49번지에서 5남매 장남으로 태여나셨으며 1950년 6.25사변 으로 전쟁 중에 1951년12월 19세 나이에 전쟁에 비로소 참가 하게 되었으며 그때 참전하는 군인으로 전쟁에 갔다 오면 가정도 잘살 수 있는 조건을 주신다는 주변의 말이 있어 전쟁에 나온 사람들도 있었으며 보통 그들 중에 그런 강제로 전쟁에 동원된 사람 이였다고 해요 격전의 전투를 벌이던 장소는 북한군이 위치한 높은 곳 “1211고지”이며 아래에는 국군이 “문경고지”라 하였는데 전투에서 한국군이 12명은 포로로 잡혔으며 1953년 1월 겨울 이였다고 합니다
전쟁의 상처는 양측이 다 피해가 심했고 남과 북은 지친 상태였으며 더 전쟁을 지속하기 없었던 양측은 1953년7월27일 개성 판문점에서 정전 조인 협정을 체결 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고향으로 갈수 있다는 희망... 그것 하나만으로 어려운 전쟁 중 동료들이 한사람 한사람 쓰러질 때에 함께 죽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셨고 그들이 죽어가며 전해달라는 고향의 편지를 살아있는 나는 꼭 전해 주어야 한다는 그 인내력 하나만으로 전쟁과 포로생활의 아픔을 참고 이겨냈다고 합니다
고향의 꿈 죽어서도 고향땅에 혈육이 있는 한국 그곳에 묻히고 싶다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1953년 8월 포로교환은 시작 되였으며 아버지 앞에서 운명적으로 포로교환은 끝났다고 합니다 북한 인민군 장교 한사람 당 국군포로 100명씩 아버지 앞이 마지막 이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여 크게 우셨으며 다시는 갈수 없는 고향... 그 기막힌 한 전쟁참가 전에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부친 할아버지 그리고 형님과 오빠를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 ...이제는 다시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 눈 앞이 모두 캄캄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 나이는22세 언젠가 후일에 그때를 회상하시며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의 참혹한 심정 이였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북한군관이 포로교환이 마친 다음 남은 군인들을 5일 동안 북으로 북으로 달리더니 동서남북이 산으로 꽉 막힌 비좁은 골안에 5000여명은 그곳에서 2번째 죽음의 인생이 시작 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검덕으로 연,아연 ,쇠 돌을 캐는 아주 깊은 지하 막장 이였으며 만일달아나려고 한다면 죽음뿐이라는 선포를 했다고 해요
북한에서 죄를 짓거나 나라의 죄인들 중 정치범 옛날지주 국군포로 무겁게 다스리는 무서운 곳 이였다고 합니다 오래 일하시면 페암, 페렴, 페수종, 등 무서운 질병을 일으키며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페병으로 죽게되며 또 다른 남포사고로 하루에도 몇 수십명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었다 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그런 곳 이였고 국군포로는 대한 북한사람들이 특히 저주하고 증오하는 그런 곳 이였습니다
고향에 가려는 꿈을 접지 않으시던 부친은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말로 수차례 고문도 당하셨고 인간의 자유를 박탈당하시며 1995년6월25일에 지하막장에서 발파사고로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은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핍박과 신분의 차이가 극단에 달한 북한정부에 대한 반발심과 자식을 남기고 먼저 가신 부모님이 미워서 더 울수가 없었고 울어야 할 눈물이 다 말라서 더는 울고 싶은 기력도 다 쇠하여 더 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너 만은 꼭 돌아기시전에 아버지 고향에 가라고 말씀하셨고 13년 세월이 흐른 뒤 고난의 길을 걸어서 한국에 왔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겪으셨던 그 슬픔과 아픔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미워했던 아버지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사랑할 수 없었던 운명에 대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아버지는 절대로 다른 사람 앞에서는 울면 안 된다 하셨지만 아버지의 꿈을 이루는 대한민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두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저와 언니는 혹독한 식량난에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북한의 모든 사람이 다 겪는 식량이지만 반동파 세력들은 더 가혹한 배고푼 아픔 이였습니다
보름동안 물도 먹을 수 없었던 시절 그때 이제는 끝 이구나 죽어야 하겠구나 생각한 그때 아버지가 떠 올랐습니다
혜금아 살아야 한다 너 만은 살아서 아버지 고향에 가야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살았던 무서운 악몽을 아버지 형제들에게 만나서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살아서 부친의 소원을 꼭 들어 주어야 겠다 극한의 상황에서 아버지의 유언으로 다시 마음을 강하게 하였습니다
언니와 함께 산에서 나물을 캐고 먹을 수 있는 풀들을 캐서 기여 다니며 구하여 데워 먹으며 그렇게 힘겹게 살고 있던 어느날 모르는 분이 저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저희에게 아빠의 이야기를 하셨고 아버지가 전쟁 당시에 구하여 주셨던 북한 고위 군관 이였다고 합니다
전쟁 중 그 분은 총상을 입었고 아버지는 포로당시에 아버지가 수술해주셨고 그 은공을 갚으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식량과 빵 북한 돈 1000원을 주셨습니다
저는 북한에 살면서 100원을 단 한번 도 가져 본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오늘밤 이곳을 빠져 나가라고 도와주시겠다고 ...그렇게 중국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으며 모진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1998년1월에 무산에 계시는 외삼 춘 집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중국으로 돌어오는 분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 하였습니다
한국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아버지의 형제를 찾으려고 8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형제들과 고모님을 찾는 길은 참으로 길고 길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야했고 중국공안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박해와 감시는 글로 표현하기 어렵고 가혹하며 엽기적인 행위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북에서 온 사람이 누구의 집에 있다는 것만 알게만 하면 즉시 출동하여 젖먹는 아이라도 떼어 놓고 붙들어 갔으며 잡아서 북한에 넘겼습니다
하루하루 이런 상황아래서도 부친의 말씀을 잊을 수 없었고 인천방송국에 KBS 방송국에 국제결혼을 하여 한국에 오는 교포들에게 한국에서 돈벌러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탁하였으며 도움을 청하였으나 한강에 돌 던진 격으로 종 종 무소식 이였습니다
이제는 포기해야 하나 그러던 어느날 2006년 2월 저의 집에 한국에서 오신 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소원이 무엇이냐 어려운 것이 아니면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마지막이다 생각으로 저의 아버지 형제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였으며 이제 그래도 아버지의 형제가 나타나지 않으면 포기하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3개월 지난 어느날 저의 집에 한국에서 보내온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저의 고모님을 찾는 분이 윤혜금씨가 맞느냐는 내용이였는데 편지를 읽던 나의 눈을 의심하며 손이 떨렸습니다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해보니 고모님의 아들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셨던 고향이야기 형제들 고향 주소 등 모든 것이 맞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8년 세월을 보내고 내몽골을 통하여 몽골에서 6개월 다시 무서운 추위와 식량난을 이겨내고 아버지 고향이자 나의 고향인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오는 여정은 피의 피가 눈물의 댓가를 치르지 않고는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쟁취였으며 저는 이제 부친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상처는 형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많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에게는 또 다시 겪고 넘어야하는 장벽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문화의 차이, 언어의차이, 살아가는 삶의 가치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빈부차이,직업의차이, 이것도 제가 넘어야 할 산이고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을 떠나 지금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있어 행복 합니다 저는 제가 겪었던 아픔을 다 치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저는 살아가면서 저 보다도 더 아픔을 겪고 있는 그런 분들을 위해서 생각하며 살소 싶습니다
꿈이 있다면 아직도 죽음의 땅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에 아버지와 같은 처지의 국군포로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들의 이세들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 어느 새터민의 한국에 넘어오게 된 사연을 원본 그대로 사단법인 새터민 정착 협의회 난 "휜 들너 리스트"는 아니지만 통일이 될 때까지 ...
6.25 전쟁중 15만의 국군전사자와 6만의 국군포로가 있었는데 포로교환때 돌아온 국군 포로는 겨우 8천명에 불과합니다. 그분들은 정말 가혹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상당수는 포로수용소에서 돌아가셨고 남은분들은 지금도 북한에서 고생하며 지내고 잇습니다. 정부가 늦게라도 국군포로에 관심을 적극가지고 나서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첫댓글 그래 한민족이 분단된 국가에서 사는 세계 유일 무이의 서글픈 사연 그아픔과 고통 겪어보지 않고는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고립된 동토의 땅에서 억압받고 짓눌리며 신음하는 우리의 동포! 아! 참담하다 가슴이 쩢어지고 눈시울이 진물로 뒤 범벅이 된다 한들 그 한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하루빨리 광명의 그날이 오도록 두손잡아 힘주어 외쳐 보지만 허공에 내벧는 메아리에 불가할 뿐...
북한 선교에 지금도 계획하고 준비중인 송수홍 목사께서 6월6일 한국에 입국 예정이라네! 6월 6일, 또는 6월 7일 서울 쪽에서 소모임을 가지려고 하네, 동참 할 수 있는 친구들은 리플을 달아 주면 참조 할 것이네!
어휴 언제다 읽어
6.25 전쟁중 15만의 국군전사자와 6만의 국군포로가 있었는데 포로교환때 돌아온 국군 포로는 겨우 8천명에 불과합니다. 그분들은 정말 가혹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상당수는 포로수용소에서 돌아가셨고 남은분들은 지금도 북한에서 고생하며 지내고 잇습니다. 정부가 늦게라도 국군포로에 관심을 적극가지고 나서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