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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마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세 가지 공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내 마음의 편견과 사로잡힘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을 행복학교 ‘마음 편’에서 배웁니다. 둘째, 인간관계가 원활해야 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인간관계가 원활해집니다. 이를 배우는 단계가 행복학교 ‘관계 편’입니다. 셋째, 사회에 대한 정의감이 있어야 합니다. 남녀차별, 인종차별, 지역차별, 종교차별 등 모든 차별은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차별은 자연스러움이 아닙니다. 사회 정의를 중요시하는 관점이 있어야 하고, 평화를 중요시하는 관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문제도 힘으로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늘 대화로 풀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 자세가 있어야 우리가 행복시민이 되어 세계에서 가장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한국 문화가 요즘 세계에서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 제도는 늘 서양에서 배워 오려고 합니다. 이제는 다른 나라에서 배워 오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연구해서 앞서 나갈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모든 면에서 이제는 우리가 앞서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따라 배웠지만, 이제는 앞서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행복학교를 수료하고 행복시민이 되는 것은 현재 인류가 지향하는 방향과도 부합합니다. 행복시민이 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법륜 스님의 겉모습이 승려일 뿐이지, 행복학교는 불교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종교와 관계없이 국민들이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곳이 행복학교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조금 더 사회에 기여하는 정의로운 시민이 될 수 있는가?’
이런 관점을 갖고 종교의 틀, 성별의 틀, 지역의 틀을 넘어서서 공부하는 곳이 행복학교입니다. 이런 행복학교의 취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고, 마음 편을 공부하신 분들은 관계 편으로 넘어가서 공부를 더 하시고, 관계 편을 공부하신 분들은 심화 편으로 옮겨가서 행복시민으로 계속 활동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낮 12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부터는 법사 교육을 받고 있는 4기 화엄반 행자님들과 온라인으로 수련을 했습니다. 행자님들은 작년 겨울에 법사 교육을 시작해 백오십 여일이 지났습니다.
“정진 잘하고 있습니까? 한 자리에 모여서 얘기를 해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영상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정진하면서 일어났던 의문을 먼저 듣고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이어서 수행하면서 들었던 의문점이나 고민을 자유롭게 질문했습니다. 첫 번째로 질문한 행자님은 법사가 되기에 부족한 자신에 대해 위축되는 마음을 나누며 수행의 방향을 질문했습니다.
“예비법사교육 입재식에서 스님께서 출가자의 자세를 말씀해주셔서 처음 한 달은 가야금 줄이 팽팽하듯 엄격하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를 돌아보면 계율을 과제하듯이 지키며 행자생활이 끝나는 날을 세고 있을 때가 있어요.
선배 법사님들을 보면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직 스승님과 선배님들을 따라 배우기에 급급해서 법사가 된 이후에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체화한 내용을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을지 걱정도 됩니다. 자각해서 스스로 자제해서 계율을 지키기보다 과제처럼 하다 보니 자책도 하게 됩니다. 이제 행자교육이 삼분의 일 정도 지났는데 어떻게 수행을 해나가야 할까요?”
당장 훌륭해지겠다는 욕심
“지금 질문자가 욕심을 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선배 법사님들은 질문자보다 불교에 입문한 지도 오래되었고, 정토회 활동 기간도 더 길고, 법사 수계도 먼저 받았고, 그 후 대중들을 지도하면서 쌓인 경험치가 더 많습니다. 아직 법사 수계도 받지 않은 질문자가 자신을 법사님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되겠죠.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로 인해 질문자가 위축된다면 이는 질문자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장 선배님들과 같아지려는 욕심을 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훌륭한 모습을 보고 질투를 하면 자신의 부족함만 보입니다. 반면 훌륭한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본받아야겠다’고 마음을 내면 차분히 따라 배우게 됩니다. 아직 수행이나 경험이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비슷해지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겨요. ‘나도 꾸준히 연습을 하면 저분처럼 되거나, 적어도 비슷한 정도가 되지 않겠는가’하고 올바른 관점을 가지면 지금 부족한 모습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도의 길
처음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결심을 하고 열심히 원칙을 지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차츰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안주합니다. 결심을 하면 원칙을 잘 지키게 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원칙에 맞춰 살려고 하다 보면 경직되기 쉬운 게 단점이에요. 이때 ‘경직되지 말라’고 하는 건 원칙을 포기하거나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걸 오해해서 원칙을 지키지 않는 방향으로 가면, 결국 경직되거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양극단을 오가게 됩니다.
명상을 할 때도 ‘자세를 바르게 하라’고 하면 경직되기가 쉽고, ‘자세를 편안히 하라’고 하면 허리를 구부리거나 느슨해지기가 쉽습니다. ‘편안히 호흡을 바라보라’고 하면 마음이 산만해지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라’고 하면 긴장하게 돼요. 이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편안한 가운데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참을 것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려면
바른 길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편안하게 그 길을 가면 되지 왜 결심하고 긴장하는 걸까요? 또, 편안한 상태가 되면 마음이 차분해져야 하는데, 왜 마음이 산만해질까요? 이는 계정혜에서 ‘혜(慧)’가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이고, 육바라밀에서 ‘반야’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직 지혜가 덜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말 바른 길이구나’하는 관점이 잡히면 계율을 참을 것이 없는 경지로 나아갑니다.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때리고 싶지만 억지로 참는 게 아닙니다. 설령 과거의 업식에 의해 때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건 바른 길이 아니다’하고 알아차리면 때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놓아집니다. 또, 설령 그 마음이 바로 놓아지지 않고 악을 썼다 하더라도 그건 나도 모르게 사로잡힘에 의해 생기는 일이기 때문에 ‘아, 내가 또 사로잡혔구나’하고 알아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바른 길은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마땅한 길이지, 이걸 모른 채 그저 억지로 참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억지로 참고 있다면 이는 ‘이 길이 바른 길’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이 관점이 확고하지 않으면 ‘법사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고 잘못 받아들이게 돼요. 그만큼 삶이 경직됩니다.
‘이 행자생활이 언제 끝날까’하고 생각한다는 건 억지로 참고 있다는 뜻입니다. 법사가 되면 행자 때보다 계율을 더 잘 지켜야 합니다. 행자 때는 억지로 참다가 법사가 되면 느슨해져도 된다고 생각을 한다면, 이는 행자 생활을 억지로 참는 극기훈련이나 군대생활처럼 받아들이는 겁니다. 행자 교육은 계율을 마땅히 지키는 연습을 하는 기간입니다. 연습 기간이기 때문에 때론 나도 모르게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법사가 되고 난 다음에는 이미 행자생활을 통해 충분히 연습을 한 다음이기 때문에 편안하게 지키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걸 너무 경직되게 받아들이면 ‘언제까지 견뎌야 하나’, ‘그래도 행자니까 1년은 참아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남은 날짜를 세어보게 되는 거예요.
계율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원칙입니다. 동시에 언제나 100% 지킬 수 없는 것 또한 계율이에요. 가령, 교통법규는 서로를 위해 지키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교통법규를 100% 지킬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매우 중요한 일이 있거나 위독한 환자를 이송해야 할 때는 벌금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가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계율도 지키라고 있는 것이니까 가능하면 지키려고 노력하되, 어쩔 수 없이 지키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계율을 어기고 자각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에 자자를 하는 거예요. 대중에게 지적을 받고 그 지적을 감사히 받아들여 개선해나가면 됩니다. 이렇게 경직되지 않고 가벼운 자세로 계율을 지켜보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때 아닌 때 먹지 않고, 때 아닌 때 잠들지 않는다’는 계율을 일단 경험을 해보고 자신의 경험을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때 아닌 때 먹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때 아닌 때 졸음이 와서 잠깐 조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닌데 불필요하게 엄격한 계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변화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막상 실천을 해보니 처음에는 지키기가 어려웠지만 때 아닌 때 먹지 않으니 위장에도 좋고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된다고 느끼면 그 경험을 나누어도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후배 수행자들이 들어와서 이 계율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면 그때‘나도 처음에는 많이 어려웠는데,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 적응을 하고 나니까 정말 좋은 계율이더라’하고 알려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계율을 직접 지켜보면서 ‘왜 이러한 계율이 만들어졌을까’하고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졸지 말라’는 계율은 방심하거나 게으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계율을 직접 체험하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살펴야 나중에 사람들을 지도할 때 그들의 어려움도 이해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향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계율을 어겼지만 극복한 경험도 좋고, 처음부터 잘 지킨 경험도 좋습니다. 계율을 극복한 경험이 있으면 사람들이 계율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할 때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걸 극복하고 나면 이러이러한 좋은 점이 있습니다’하고 안내해줄 수도 있어요. 그러니 계율을 잘 지킨 경험도 좋은 경험이고, 처음에 지키지 어려웠던 경험도 좋은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나하나 쌓아나가는 것이 곧 공부입니다.
주어진 상황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기
우선 주어진 프로그램대로 정진을 하고 계율을 지켜보세요. 아직 1년의 기간이 남았으니까 남은 1년 동안은 생활을 해보고 그다음에 스스로 판단을 해보면 됩니다. 만약 혼자 꾸준히 수행하고 정진을 하는 건 괜찮은데 대중들 앞에서 법사의 역할을 하기에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법사 교육을 받은 다음에도 ‘저는 1년간 연습을 더 하고 나서 다음 법사 교육팀과 수계를 받겠습니다’하고 말해도 됩니다. 그걸 들은 법사님들이 ‘지금 정도면 법사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니까 우선 법사 수계를 받고,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채워나가면 됩니다’라고 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네, 그럼 부족한 대로 수계를 받겠습니다’하고 부족한 부분은 계속 정진을 해나가면 됩니다. 또, 스스로는 법사 소임을 해낼 수 있다고 느끼지만 법사님들이 보고 ‘그동안 교육받느라 수고했는데 법사가 되려면 이런 부분들이 개선되어야 하니까 아쉽더라도 1년 더 정진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하면 또 그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렇게 수행자는 주어진 상황을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법사 수계는 합격하고 불합격하는 세속적인 시험이 아닙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다 수계를 받았는데 나만 받지 못했을 때, 실망할 일도 아니고, 괘씸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에요. 반대로 다른 법사님들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나는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못합니다’하고 자신을 고집할 일도 아닙니다. 자기 의사를 뚜렷하게 내놓는 자세도 필요하고, 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자신을 살피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나의 부족함을 말하는데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면 위축되지 말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말에 위축되어서 지낼 필요가 없어요. 또, 내가 자유롭게 살면서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사는 데 도움을 주고자 법사 역할을 하려는 거예요. 법사가 된다고 해서 이렇다 할 지위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금전적인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정토회 법사가 된다는 건 오히려 주어지는 일, 해야 하는 일, 맡아야 하는 역할만 더 많아지는 거예요. 나 자신이 자유롭고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부족하지만 법사의 역할을 해보겠다는 자세로 임하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가볍게 정진해보겠습니다.”
솔직한 질문 덕분에 행자 생활의 관점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계속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미래에 바른 불교를 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질문한 분도 있었습니다.
“미래에 올바른 불교를 전하기 위해 개인과 정토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삶 속에서 불법의 위대함을 경험하고 있는가’입니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내가 가는 길이 돈 몇 십억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한가, 높은 지위를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한가, 즐거움이나 쾌락 또는 다시 젊음을 주거나 아름다움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한가’
내가 돈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고, 지위의 유무가 중요하지 않고, 얼굴이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하지 않고, 인기가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는 사람, 즉 이런 세속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돈, 명예, 지위, 권력, 인기를 준다고 해도 동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만큼 이 길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수행자로서의 삶에 지속성이 생깁니다.
정토회 활동 초기에는 확산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여러 가지 제안들이 많았습니다. 법문은 좋은데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까 원통해하는 분도 계셨어요. 그래서 스님한테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를 조금 해서 우선 사람들을 모으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다른 선원을 보면 100명씩 앉아서 법문을 듣는데, 우리는 10명, 20명씩 모여서 법문을 들으니까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웃음) 원하는 만큼 빠르게 확산되지 않는다고 해도 바른 불법을 행하고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법륜스님이 돌아가시면 정토회는 오래 못 갈 거라고 합니다. 밖에서 정토회를 보면 법륜스님 혼자서 활동을 하는 것 같지만, 막상 내부를 보면 법사님들과 활동가들이 다 역할 분담을 해서 원칙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있어요. 정토회는 모든 활동을 최대한 제도화하고, 보편화하고 있어요. 의사 결정 절차도 최대한 민주적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단체가 중심인물이 사라지면 망하거나 남은 사람들이 재산 분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토회는 제가 없다고 해도 지금 하는 활동들이 끊어지지 않고 유지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적 관점에서는 정토회가 유지를 하든 못하든 크게 신경 쓸 바가 아닙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살아남으려면 원칙을 지키는 지속성과 확장성을 겸비해야 해요. 지속성이 없거나 확장성이 없으면 오래 버티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얼마나 지속 가능하고 확장 가능한 요소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이 외에도 오늘날 사문유관은 무엇인지, 자연의 소리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들리는 경지가 무엇인지, 정토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계율을 어겼을 때 어떤 자세로 참회해야 하는지, 중도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사홍서원으로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결사행자 회의를 온라인으로 진행했습니다. 60여 명의 결사행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준비된 안건을 발표하고, 찬반 토론을 한 후 의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방송실을 나오자 해가 산 너머로 지고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원고 교정을 보고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통일특별위원회 통일의병 대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오후에는 3월 말에 개강하는 정토불교대학 입학식과 1강 수업 준비를 위한 리허설을 진행하고, 저녁에는 일요 명상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