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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창작과비평》신인시인상 _풀의 유령(외 4편) / 방성인
풀의 유령
풀이 자란다 풀을 뚫으며 들판을 뚫으며 사방으로 끝을 모른다는 듯이 풀이 자란다 자라나는 풀 사이로 벌들이 튀어나온다 풀 냄새를 몸에 묻힌 벌들이 양봉틀로 들어가 양봉틀이 진동한다 진동하는 양봉틀 옆에는 다른 양봉틀 그리고 또다른 양봉틀
이런 화면이 재생되는 스크린 앞에 자동차 하나 다른 자동차 하나 자동차의 도열 자동차 안에서 사람들은 말하고 움직인다 몇대의 자동차는 조금씩 흔들린다
눈이 내린다
풀들이 자라길 멈추고
풀의 영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동차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자동차의 흔들림이 잠잠해진다 웅웅거리는 영상의 음성이 그치자 소리 없이 쌓인 눈이 자동차의 길을 막는다
이런 자동차극장은 없다고
자동차극장은 겨울엔 문을 닫는다고
말하는 사람 옆으로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앉아 있다 그 앞으로는 그들의 대화를 바라보는 사람이 앉아 있다 직사각형 테이블의 자리를 채우며 앉아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를 담는다 입김이 그들 사이를 맴돌고 그들은 떨면서 자동차극장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커튼 친 아파트 한칸에서
눈이 내린다
창문 밖으로 아파트의 불 꺼진 칸과 불 켜진 칸 앞으로 아파트 하나 앞으로 아파트와 다른 아파트 사이로 아파트로 이어지는 대로변 위로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그리고 지금
풀의 유령들이 자리를 옮긴다
노들섬
지하철 속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자 지하철이 같은 방향으로 휘청인다 지하철은 지하를 빠져나와 넓은 강 위를 달리고 강가의 잔디밭에 앉은 사람들 그들의 고개가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돌아간다 그 임의의 선을 따라 지하철이 나아간다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동시에 걸어다닌 궤적을 따라 만들어진 길이 이곳저곳 파여 있다 화살표 하나 없는 길 위에서 사람들은 충돌하지도 않고 걸어다닌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이곳은 명소다 명소 속에서도 사람들이 더 많이 뭉치는 곳에는 햇빛이 내리고 얇은 그늘이 덧씌워진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묻는다 이곳에 온 이유가 뭐냐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대답한다
답답하고
심심해서
사람들이 눈을 깜빡이고 얕은 바람이 불고 윤슬이 반짝인다 하나둘 사람들이 눈을 감고 정지한다 노들섬의 지면에 몸을 밀착시킨다 아무도 그들을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 남은 사람들은 다시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몇대의 지하철이 지나가고 노들섬도 정지한 이들을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 노들섬은 인공섬 산 사람보다 오래된 인공섬 가만히 사람들을 붙들고 몸집을 불린다
꽃의 대기
주택을 가득 뒤덮은 덩굴의
꽃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담벼락이 무너지고 세워지고
주택 앞 꽃집의 유리창에도 꽃이 피고 지고
유리창 너머로 주택을 바라보며 앉아 있던 꽃집 주인 A가 죽고 그 자리에 꽃집 주인 B가 앉고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꽃집 주인의 눈동자 위로 꽃이 피고 지고
꽃이 가리는
주택은 빈 주택이다 혹은
그곳에 들어가본 사람은 없다 혹은 들어가본 사람은 모두 돌아오지 못한다
꽃이 드러내는 돌아오지 않는 꽃
돌아오지 않는 꽃집 주인 A 꽃집 주인 B 꽃집 주인 C
꽃집 주인의 빈 의자 위에서 꽃 무더기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어오르는
꽃의 대기 속에서
흐트러지는 꽃 충돌하는 꽃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환희
꽃의 멜랑콜리 꽃의 비애 꽃의 회한
피고 지는 꽃 옆으로 피고 지는 꽃
보이지 않는다
꽃의 대기가
보이지 않는 꽃의 대기가 진동한다 무엇도 밟지 않고서
거리를 이미 가득 메우고서
피고 지고 있다
sedative
하얀 캡슐 알약 한알 미동 없이 다른 하얀 캡슐 알약들 위에 쌓여 있다
환자 A는 불안하다 A는 불안해서 다리를 떨고 다리를 떨어서 버스 좌석이 흔들린다
하얀 캡슐 알약이 쌓여 있는 하얀 캡슐 알약들은 하얀 플라스틱 원형 통 안에 들어 있다 가만히
환자 A는 버스 좌석이 흔들려서 불안하다 불안할수록 다리의 떨림은 심해지고 버스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버스가 뿜는 열기 A는 본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하얀 플라스틱 원형 통은 하얀 보자기 위에 놓여 있다 하얀 보자기가 놓인 수평의 테이블 테이블을 떠받치는 수직의 기둥 기둥을 떠받치는 수평의 바닥 바닥들은 건물 안에 들어 있다
이것은 A의 건축술
어제 이미 몸속에 건축해둔
버스가 정지한다
건물 주위를 맴도는 버스의 일정한 노선 일정한 노선을 떠받치는 수평의 도로 어제의 A가 건물 안에서 버스를 본다 버스에서 승객들이 내리는 장면을 본다
A는 떠밀려 내려간다 버스의 문을 뚫어낸다 아지랑이를 뚫어낸다 가만히 서서 열기가 그를 삼키는 것을 내버려두면서 건물이 건물의 복도가 그를 삼키는 것을 내버려두면서
온통 하얀 방
어제의 A는 A의 곁에 없고 플라스틱 원형 통이 A의 곁에 놓여 있다 A는 원형 통도 뚫어낸다 캡슐 알약들 사이를 뚫어낸다 떨어지는 알약
그 뒤로 A 뒤로
A가 뚫어낸 구멍 뒤로
A의 주변을 도는 버스가 정지한 사람들 사이를 맴돈다 정지한 사람들의 그림자를 경유하며 노선이 유지되고 있다 버스에서 알약들이 쏟아져 내린다 거리의 맨홀들로 떨어지며 맨홀을 메운다
하얀 캡슐 알약 위로 하얀 캡슐 알약이 쌓이고 그 위로 맨홀이 쌓이고 노선이 건물이 도시가
쌓인다
하얀 캡슐 알약
미동 없이
안과 밖과 앞과 뒤
병원의 벽 병원의 벽에 달린 환풍기가 돌아간다 바깥의 공기를 벽 뒤로 밀어넣는다 돌아가는 환풍기가 밀어넣은 바깥의 공기 아래로 병원 침대 여섯 병원복 차림으로 누워 숨 쉬는 사람 여섯 하늘빛 병원복 하늘빛 이불 여섯 닫힌 창문으로 투과되는 햇빛 아래 여섯
창문으로 작게 지나가는 비행기
보다 더 작은 비행기 엔진 돌아간다 그보다 더 작은 비행기의 창문 창문에 비치는 더 작은 도시 그보다 큰 사람이 좌석에 앉아 창문으로 도시를 내려다본다
구름에 가려지는 도시
병실의 흰색 가림막 하나 쳐지고
사람 하나 지워진다 병실엔 다섯 그리고
투명한 비행기 작게 하나 창문에서 떨어져 병실 안을 비행한다 흰색 가림막 뒤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투명한 비행기 하늘빛 이불 하늘빛 병원복 속을 헤집는 투명한 비행기
구름은 비행기를 밀어내고 비행기는 구름을 몰고 다닌다
투명한 비행기의 투명한 궤적을 따라 투명한 구름이 병실을 서서히 채워나간다 누워 숨 쉬는 사람 다섯 환풍기 하나 희박해지는 바깥 공기 흰색 가림막 하나 다시 쳐진다 그리고 또다른 투명한 비행기 병실 안을 비행한다 그리고 또
아무도 없는 병실에는 흰색 가림막 여섯 그리고
투명한 비행기의 투명한 편대
돌아가는 환풍기가 멈춘다
조도가 변하지 않는 창문의 투과 창문의 작은 비행기가 멈춘다 작은 비행기 속에서 좌석 위로 떨어지는 더 작은 산소마스크 병실의 투명한 비행기들이 아래로 가라앉는다 수많은 창문의 앞과 뒤에서 도시가 투명한 흰 천을 덮어쓰고 숨을 내쉰다 흰 천이 한순간 솟았다
내려앉는다 흰 천이
꺼진다
| 심사평 |
2025 창비신인시인상에는 1,366명의 응모자가 작품을 보내주었다. 예년을 크게 웃도는 응모자의 수에도 놀랐지만, 그에 맞춰 늘어난 좋은 작품의 수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5명의 심사위원이 작품을 나눠 예심을 진행하였고, 각자 3명 내외를 추천하여 총 17명을 대상으로 본심을 진행했다. 예심과정에서 본심에 올리지 못하여 아쉬운 작품이 많았는데, 이는 우리 문학의 저변이 이토록 넓어지고 또한 단단해졌음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토록 많은 작품을 검토하면서도 어떤 경향성이 두드러지지 않음은 의아한 일이었다. 이를 두고 우리 문학이 다채로워졌노라 진단해야 할지, 아니면 저마다 각자의 내면에 몰두하느라 바깥을 잘 보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지 단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상당수의 작품이 긴 수련을 거치며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자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에 기대어 우리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새로운 시인을 찾고자 했다.
본심에서 주되게 논의된 작품은 「꿀 인간」 외 9편, 「여름, 끝」 외 4편,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 외 6편, 「테마파크」 외 4편, 「투포환」 외 6편, 「풀의 유령」 외 4편이었다. 「꿀 인간」 외 9편은 자신의 스타일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꿀’과 ‘벌’ 등의 시어를 주되게 사용하며 모종의 세계를 구성하고자 시도하고, 그로부터 독특한 미감을 이루어낸다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의미가 생성되기 전에 스스로 그것을 차단하려는 듯한 말하기는, 모처럼 만들어낸 세계에 독자가 어떻게 진입하면 좋을지 망설이게 만들었다. ‘나’와 세계의 긴장이 좀더 첨예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여름, 끝」 외 4편은 긴 수련을 통해 잘 다듬어진 이미지와 정서를 다룰 줄 아는 이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시적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그 관계를 정리하고 멀어지는 요령에서 시적 숙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지만, 시적 정서에 도달하기 위해 다소 긴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그 능숙함이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쉬운 점으로 꼽혔다. 「투포환」 외 6편이 보여준 평범해 보이면서도 독특한 질감을 갖춘 세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물을 감각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성실한 태도와 더불어 어딘가 조금씩 낯설고 이상한 뒤틀림을 가진 감각이 큰 미덕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긴장감이 떨어지는 문장이 지적되었다. 「테마파크」 외 4편은 개성적인 장면들을 통해 내적 고백에 도달하는 시적 방법론이 매력적이었다. 이 고백이 단순히 개인적 토로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사유에까지 이른다는 점이 좋았다. 다만 시적 언술이 다소 장황하다는 점, 그리고 익숙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끝까지 심사위원들을 고민하게 한 것은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 외 6편과 「풀의 유령」 외 4편이었다.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 외 6편은 풀어진 시적 구성이 단점으로 지적되었지만, 조금씩 문장을 밟아나가는 과정이 자신만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다듬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세계를 매만지며 정직한 질문을 던지고, 사물들과 조금씩 어긋나고 빗나가면서 새로운 발견을 향해 나아가려는 태도가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풀의 유령」 외 4편은 유려한 문장의 운용을 통해 의미를 잠시 쥐었다가 풀어놓는 개성적인 시적 방법론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현실의 기호들이 시적 배치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도록 하고서는 반복 속에서 그 의미를 망설임 없이 버리고 가는 이 묘한 세계를 오래도록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무한히 자리를 바꾸며 점멸하는 세계를 만드는 이 창백한 방법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긴 논의 끝에 「풀의 유령」 외 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잘 다듬어진 문장들과 개성적인 시적 방법론에서 엿보이는 시에 대한 깊은 고민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앞으로 당선자가 시와 더불어, 그리고 삶과 더불어 우리의 세계를 새롭게 하는 시 쓰기를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보내준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과 더불어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시는 가장 개인적인 말하기이지만 동시에 더 넓은 우리를,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양식이기도 하다. 이번 심사과정은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이토록이나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 믿음을 우리가 잃지 않을 수 있기를,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데 우리의 시 쓰기가 무겁고 깊은 닻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모두의 건투를 빈다.
/ 박세미 박소란 송종원 신용목 황인찬
| 당선소감 |
주변에서 많이들
좋은 꿈을 꿨다고 말했다 이제 보니 그 꿈이 너를 향해 있었다고도
꿈은 말하는 순간부터 효력이 날아간다고 한다 그런 꿈을 내 앞에서 말해주는 사람들 사실 그 꿈들은 처음부터 나를 향해 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나에게 선물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죄송하게도 꿈을 믿지도
꾸지도 못한 나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 학교에서 뵌 선생님들, 학교 밖에서 뵌 선생님들, 동기들, 후배들, 선배들, 가족들, 엄마와 아빠, 형, 할머니와 할아버지, 개 그리고 애인
나와 머무는 모두와
나를 떠나는 모두
저의 시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어쩌면
저까지도
이 말이 비겁하고 한심한 변명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쓰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저의 흐릿한 호명이 이번만큼은 모두에게 선물처럼 가닿을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빌어보겠습니다
▲ 방성인方聖寅
2000년 경기 이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qkdtjddls0125@naver.com
―계간 《창작과비평》 2025 가을호
